소설리스트

39화. (40/161)

39화.

“뭐?”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각하.”

헥터의 손에서 서신을 빼앗다시피 하여 읽었다.

“하! 이자들이 드디어 미쳤군! 제국의 재산? 재산? 내가? 내가 언제부터 저들의 재산이었단 말인가!”

“각하.”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저들이 황성에 가만히 앉아서 세치 혀로 정치를 논할 때 나는 최전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랬는데 감히 날 보고 뭐?”

“각하.”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이미 이 세상에 없어!”

“…….”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 화가 나면 눈앞이 하얗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베르타스는 들고 있던 서신을 갈가리 찢었다. 눈앞에서 조각조각 나는 서신을 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저들이 알게 된 이상 대책이 필요했다. 

“어디서 말이 샌 걸까.”

“전 아닙니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베르타스의 시선에 헥터가 황급히 부정했다.

“누가 뭐라고 하였나.”

자신의 수하 중 배신자가 있다면 반드시 죽여야 했다. 이제부터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은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용서가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 발 잘못 내디디면 죽음이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계획을 앞당긴다.”

“그렇다면…….”

“라르헨의 국경에 있는 군대에 연락을 넣어라.”

“드디어!”

베르타스의 결심을 들은 헥터가 즐거워하면서 방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헥터 경.”

“네! 대장님!”

각하에서 바뀐 호칭에 베르타스가 웃으며 그에게 명령했다.

“다른 이들을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서는 헥터의 뒷모습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뇌까렸다.

“후회하게 해 주지.”

소란스럽던 헥터가 나가고 나니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는데 싸늘한 한기가 들었다.

‘그녀에게 말해야겠지.’

지금 이실리스가 처한 상황은 쉽게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를 혼자 두고 힐렌튼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들어가서 황성을 뒤엎지 않으면 외려 그가 당할 수 있었다. 숙이는 듯 들어가 힐렌튼을 차지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그냥 당하고 있진 않겠지만 베르타스는 황태자의 안이함에 기대를 걸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아버지의 복수도 미뤘다. 

황태자가 보낸 자료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그 기록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기에 페일러스에게 의뢰를 했고 거짓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참담함이란. 그 일로 인해 베르타스는 황태자와 황제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목숨이라도 살려주려고 했었던 그의 계획은 그 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틀어졌다. 힐렌튼을 멸망시키면서 그들의 목숨도 취하려고 했다. 아이가 생긴 지금에 와서 계획은 조금 변경되었지만,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방안에 ‘까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실리스에게 목걸이를 받아야겠군.”

그가 이실리스에게 넘긴 목걸이는 보통의 목걸이가 아니었다. 힐렌튼의 황족을 상징하는 목걸이이자 그의 오라를 불어 넣으면 검으로 변하는 마도구였다. 황족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힐렌튼의 국보였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그 목걸이는 하나는 베르타스의 어머니가, 다른 하나는 선황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둘 모두 그의 손에 들어온 까닭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선황은 목걸이를 그에게 주었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그에게 목걸이를 남겼다.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 힐렌튼의 황제와 황태자는 선황의 사후 목걸이를 찾아 헤매었다. 당연히 그의 처소가 제일 먼저 수색의 대상이었으나 베르타스는 이미 하나의 목걸이를 다른 여자아이에게 주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의 목에 걸려 있었다. 마법이 걸린 그 목걸이는 착용자가 보이기를 원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목걸이였다. 빼앗기는 것을 면한 그는 그 후 단 한순간도 그 목걸이를 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여야 하나. 고민이었다. 이실리스에게 준 목걸이를 다시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그게 없으면 그는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아니, 그의 자식이 정통성을 인정받기 어려웠다. 지금의 황제가 정통성으로 고생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으니. 

국보를 지니지 못한 자는 힐렌튼에서 황제로의 인정을, 후계자로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황제는 힘으로 귀족들을 눌렀고 황제의 태도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숙부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한 것도 그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국보가 없어도 인정받을 방법은 있었다. 바로 귀족 회의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받는 것. 하지만, 무기명으로 이루어지는 이 투표에서 숙부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기회. 그 기회를 놓친 그가 숙청하고 내친 귀족들 수만 해도 절반이 넘었다. 그리고 그 귀족들을 품은 베르타스였다. 

나라의 영토를 넓히면서도 베르타스는 그 영토들을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제국의 이름을 가진 힐렌튼의 수도에서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 거친 국경까지 사람이 닿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수도에서 파견한 숙부의 신하가 도착하기 전에 점령한 지역들을 미리 장악했던 사람은 베르타스의 명령을 따른 심복들이었다. 숙부가 모르는 곳에서 밑 작업은 천천히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가 고개를 숙였던 것은 선황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것을 밝힐 증거를 찾기 위함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수도를 오갔다. 발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에서 얻은 자그마한 단서. 선황을 죽인 것이 마나의 움직임을 비트는 어떤 독이라는 것. 그 독을 만든 마법사가 ‘이그나르도’라는 마법사라는 것. 단서는 그뿐이었다. 마법사였던 선황을 죽인 그 독의 정체를 그리고 숙부에게 그 독을 넘긴 이가 누구인지를 밝혀야 했다.

“아버지.”

조용한 방안에 베르타스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헥터와 그의 수하들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대장!”

“각하! 데려왔습니다.”

“사실입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 명의 사내가 한꺼번에 말하니 정신이 없었다. 가라앉았던 감정을 숨긴 채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힐렌튼의 군대가 아니다.”

“네?”

“그러면…….”

시끄러웠던 네 명의 사내가 베르타스의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열리면서 말을 그려냈다.

“나를 위한 군대가 되어라.”

“각하!”

“전하. 드디어 결심을!”

“대장!”

“황태자 전하.”

마지막으로 내뱉어진 헥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랬다. 베르타스는 힐렌튼의 황태자였다. 그것도 적통의. 맹약의 샘물을 마시지만 않았다면 황위를 이을 수 있는 혈통을 가진 자.

“따르겠습니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헥터를 따라 나머지 셋도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서 부복한 이들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 * *

“독대?”

“그렇습니다.”

시종장이 전한 소식에 이실리스의 고개가 들렸다. 어깨가 무거웠다.

“어디에 있는가.”

“접견실에서 독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집무실로 불러올리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베르타스가 독대를 요청했다는 소리에 이실리스는 소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왔을까. 그게 궁금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거두절미하고 말을 꺼냈다.

“독대를 요청한 이유가 무엇인가.”

“폐하. 오늘 전 라르헨의 황제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위를 물려 주시겠습니까.”

베르타스의 말에 그녀의 호위 기사들과 시종들의 시선이 닿았다. 이실리스가 손짓하며 그들에게 물러나라 명하자 다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마법을 걸었다. 

“이제 말해보게.”

“이실리스.”

“왜.”

“내가 너에게 주었던 목걸이. 아직도 가지고 있나?”

“…… 그래.”

“그걸 나에게 잠시 내어줄 수 있나?”

“그걸?”

“그래.”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가 싫어져 목걸이를 돌려달라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대체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것은 힐렌튼의 국보. 지금의 내게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해.”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베르타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준 것을 내어 달라고 하는 것이 몰염치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 그러나…….”

“어린 날의 나에겐 왜 그것을 주었나?”

“뭐?”

이제 더는 감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베르타스와 어릴 적 만난 일에 대해서. 그래서 이실리스는 입을 열었다.

“어린 날의 나에게 준 목걸이.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준 목걸이. 두 개가 한 쌍 아닌가.”

“그렇다면 네가…….”

“나에게 목숨이 구해진 이가 너였지.”

“이실리스.”

놀라 눈을 뜨는 베르타스에게 그녀가 속삭였다.

“어차피 너도 예상했던 것 아닌가? 그만한 마법을 구사하는 자가 드물고 하필이면 그자가 붉은 머리에 군청색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드물지. 나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야말로 반편이로군 베르타스.”

“내가 그 목걸이를 어린 날의 너에게 준 것은 반드시 찾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숨을 고르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표정을 감추었다.

“한 쌍의 목걸이는 서로 공명하지. 그렇기에 너를 찾아 그곳으로 다시 갔지만, 아무도 없더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어. 시신이 없었으니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지. 나를 죽이려 했던 자가 다섯이 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오해를 할 법도 하지.”

“마법을 사용하는 나에게 자객 다섯은 우스워.”

“그때의 난 몰랐으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듯 말이 없는 베르타스에게 그녀가 말했다.

“지금에 와서 그 목걸이가 필요해진 이유는 뭐지?”

“아, 그렇지.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오라에 의해서 검으로 변하는 마도구. 힐렌튼의 국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무기이기도 하지.”

“무기? 무기가 왜 필요한가.”

“힐렌튼으로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말인가?”

“해가 기울고 있으니 내일 출발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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