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9/161)

38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숨을 멈추었다. 그러했다. 그녀는 여유가 없었다. 황녀가 태어났으나 그 아이는 마력이 없었고 다시 한번 황녀를 노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아이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유모가 된 이가 그 아이를 잘 돌봐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 보호는 별개였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걸어 놓아도 황녀를 이곳에서 빼돌릴 방법은 아주 많았다. 그녀의 마법이 황녀를 지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대에게 이런 것을 들키다니.”

“황녀께서 마력을 타고나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폐하. 마력 발현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나중에도 가능하니.”

“그때까지 시간을 버십시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네.”

“명분이 필요하십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선황을 찾으십시오.”

“선황을?”

“그분께 잠시 제국을 맡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습니다.”

“공작.”

“폐하. 폐하의 연치는 아직 어리십니다. 선황께서 너무 급하게 황위를 넘기고 떠나셨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네. 그러나…….”

“선황의 부군에 대한 핑계를 대십시오.”

“뭐?”

“폐하의 아버님의 죽음을 캐겠다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선황께서 황궁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귀족들의 공분을 살 걸세.”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베루스 공작. 대체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거 아십니까 폐하?”

“…….”

“폐하의 진명을 신전 깊숙한 곳에 모실 때, 그곳에 충성맹세를 한 자가 둘 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렇지.”

“그중 하나가 접니다.” 

“그대가 나의…….”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의 신하이자 대부니까요.”

잔잔한 미소를 띠는 베루스 공작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숨겨진 그녀의 두 충신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명이 세워지는 곳에는 늘 그 황족을 수호하는 자가 있다. 그중 하나가 베루스 공작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찾고 있던 그 수호자.

“그것을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인가.”

“미리 말했다면 폐하께서 이만큼 성장하시지 못하셨을 겁니다.”

“성장?”

“연치가 어리신 폐하께서 나라를 이 정도까지 이끌어 오신 것은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폐하. 스스로 너무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렇게 보였는가. 그대에게.”

“황녀께 일이 생긴 후, 너무 여유가 없어지셨습니다. 그러니 선황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선황의 행적은 나도 찾고 있네. 그러나 쉽지 않은 것을 어찌할까.”

“마음을 정하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방법이 있는가.”

“묻지 않으신다면 제가 선황을 찾아보겠습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선황을 찾아 그녀가 지고 있는 짐을 나누어 준다면 도움이 될 터였다. 

‘적어도 원하지 않는 자와 국혼을 논하지 않아도 되겠지.’

선황이 돌아온다면 다른 변수가 생길 수 있었다. 

‘설마 우스만을 부군으로 맞이하라 하시진 않겠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으나 이실리스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귀족들의 공세를 피하는 방법으로 최선책은 아니었으나 차선책이라도 필요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황녀에게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국혼 이외의.

“베루스 공작.”

“하명하시옵소서.”

“그대가 선황과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 알고 있네.”

“알고 계셨습니까.”

“공작저에서 그렇게 통신석을 써대는데 모를 리가. 내버려 둔 것은 그대가 나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일세. 그러나 선황은 선황. 이제 그녀의 시대는 갔네.”

“알고 있습니다. 폐하.”

“시간을 버는 것은 잠시뿐. 나는 선황과도 나의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어.”

“선황께서 약간의 시간만을 벌어주실 겁니다.”

“때가 되면 물러나셔야 하네.”

“염려하시는 바를 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가보게.”

가서 선황에게 그녀가 원하는 바를 전하라는 이실리스의 말에 고개를 깊이 숙인 베루스 공작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다짐하듯 낮게 읊조렸다.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어머니의 뜻대로가 아니라.’

* * *

“급보입니다!”

힐렌튼 제국의 황성에 서신을 든 전령이 도착했다. 서신을 받아든 힐렌튼의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가 어째?”

분노로 몸을 떠는 황제의 모습에 귀족들이 몸을 사렸다. 다들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하였지만 먼저 입을 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가장 먼저 입을 여는 자가 저 분노를 다 받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제를 보다 못한 황태자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 황제가 입을 열었다.

“베르타스 힐렌튼이 소드마스터라는군.”

“네…… 예?”

“베르타스 힐렌튼 그 녀석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아!”

냅다 소리를 지르는 황제의 말에 황태자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드익스퍼트에 불과한 수준이었는데…….”

“그 녀석이 우리를 속인 것이 분명하다.”

단정 지어 말하는 황제의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가능하겠지.”

“그런 무력을 가지고 왜 가만히 있는단 말입니까?”

황태자의 물음에 황제가 자리에 앉았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당장 불러들여 당장!”

“폐하. 그렇다면 무역 협상은 어쩌고…….”

황태자의 말에 황제가 들고 있던 서신을 집어 던졌다. 얼굴을 맞은 황태자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굳어졌다. 앞으로 자신이 끌어갈 신하들 앞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으로 보이느냐?”

주변의 신하들을 둘러보던 황제가 냅다 소리쳤다.

“다들 물러가라!”

분노를 담은 황제의 말에 신하들이 서둘러 알현실을 빠져나가자 황제가 황태자를 불러올렸다. 옥좌 가까이 다가간 황태자는 황제에게 뺨을 맞았다. ‘철썩’ 하는 소리가 들리고 시종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생각이 그렇게 없느냐. 베르타스 힐렌튼이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그것을 빌미로 무엇을 할지 모르지 않느냐.”

“무언가를 하려면 벌써 하지 않았겠습니까.”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맞아서 붉게 변한 뺨을 문지르면서 그가 이를 악물고 다시 말했다.

“그자가 소드마스터인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황위에는 오를 수도 없는 자인데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황위에 오를 수만 없을 뿐이지 다른 것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자입니다.”

“왜.”

“베르타스 힐렌튼이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 지 벌써 몇 년입니까.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 소드마스터가 되었다고 달라질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이미 모든 실권은 우리가 쥐고 있는데요.”

“베르타스 힐렌튼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움직일 때의 이야기죠. 접촉하는 자들이 많다는 말을 들어 저도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권력에 눈이 멀면 변할 거다.”

“그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면 벌써 황성으로 치고 들어왔을 겁니다. 아버지.”

황태자의 변한 호칭에 황제가 그에게 시선을 두었다.

“제가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미끼를 던졌었습니다.”

“미끼?”

“그의 아버지,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단서.”

“미쳤느냐?”

“아니요. 저는 확인을 해야 했으니까요.”

희게 웃으면서 힐렌튼의 황태자 케스파인이 말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기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핏줄이 어딜 가겠느냐. 선황이 지독했던 것처럼 그 녀석도 분명 그럴 거야.”

“아버지.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당장 불러들여라.”

“아버지.”

“공적인 자리에서는 폐하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신하들도 없지 않습니까.”

“알현실이니 당연히 폐하라고 부르거라.”

“폐하.”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칭을 고치는 케스파인의 말에 황제가 속삭였다.

“베르타스를 불러들이고 저의를 캐물어야겠다.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

“베르타스가 돌아오면 라르헨과의 무역 협상엔 네가 가거라.”

“제가 말입니까?”

“여제가 부군을 맞이한다니 네가 되어도 좋겠구나.”

“폐하 전 이 나라를 이어야 하는…….”

“안다. 누가 너더러 여제와 국혼을 치르라고 했느냐. 그냥 네 잘난 외모에 여제가 반하게 만들어서 라르헨의 기밀을 빼내란 말이다.”

“…… 알겠습니다.”

황태자가 알현실을 빠져나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베르타스 힐렌튼. 살려두었더니 우환이 되었어. 죽여야겠군.”

* * *

“공작 각하. 힐렌튼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가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내일 있을 무역 협상을 위해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헥터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읽어 보게.”

“알겠습니다.”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헥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또 다른 서류를 읽느라 헥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베르타스가 여전히 서류에 눈을 두고 물었다.

“뭐라는가?”

“각하.”

심각한 헥터의 목소리에 그제야 베르타스의 고개가 돌려졌다. 굳은 그의 표정에 웃으면서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힐렌튼으로 바로 복귀하시랍니다.”

“갑자기 왜?”

“죄를 묻겠다고 하시는군요.”

“무슨 죄?”

“제국의 재산이 될 소드마스터가 된 사실을 숨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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