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161)

37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의 행동이 멈추었다. 싸늘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에 그녀 역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저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베르타스를 남겨둔 채 이실리스는 마법을 시전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어느새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집무실로 돌아온 그녀였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후작.”

필레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곤하여 쉬다 왔네.”

“침소에 계셨습니까?”

“아니.”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버리는 이실리스에게 필레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식이 헝클어졌습니다.”

“잠시 침대에 누웠더니 그리되었네.”

“시녀를 부르겠습니다.”

“되었다. 어차피 다시 침소에 들 것이니.”

“그렇군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에 시선을 두는 필레르를 바라보면서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사이르카 후작.”

“아, 각국의 사신들이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알현?”

“신년제가 끝났고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그동안의 협상을 계속 진행하자는 것 같습니다.”

“협상?”

“마도구를 팔아달라는 협상 말입니다.”

라르헨이 무역 협상에서 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마도구 때문이었다. 마도구를 생산하는 자들은 마법사들. 그리고 그 마법사들은 오직 이실리스의 명에만 움직였다. 페일러스가 황제 대행으로 앉아 있었어도 마법사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황족의 명령에만 움직였고, 이 나라의 유일한 황족은 이실리스였다. 마법사들은 그녀의 가장 큰 우호 세력이자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디지?”

“알현을 요청한 곳은 칼리파 제국과 힐렌튼이 있고 그 외의 국가들은 약소국이라 폐하께 알현을 요청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군.”

필레르가 건네는 서류를 하나씩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떻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황녀 말일세.”

“폐하. 저는 감히 그것을 언급할 수 없습니다.”

“내 자네에게 묻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말해보게.”

이실리스가 사이르카 후작에게 묻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귀족파의 수장이자 그녀와 함께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사이. 아직도 사이르카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실리스는 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부군을 맞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네 생각도 그러한가.”

“시간을 버셔야…… 황녀님을 기다려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사이르카 후작의 말이 맞았다. 그게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 이실리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베르타스를 부군으로 맞이하기도 어려웠고 설령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제국을 버리고 그녀에게 올지도 문제였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 그 나라를 버리고 그녀의 곁에 서라 종용할 수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녀가 생각에 빠져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필레르가 물었다.

“후작. 자네 기억하나?”

“무엇을…….”

“어릴 적, 내가 납치되었을 때 말일세.”

“폐하.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나는 말일세. 아직도 종종 그때의 꿈을 꾼다네.”

그녀가 어릴 적, 지금의 황녀와 마찬가지로 납치를 당했다. 여섯 살이던 그녀에게는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그녀의 마법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터였다. 송두리째 마법이 뽑혀 나가는 그 느낌. 그때의 자신에게 아무런 사실도 말해주지 않은 선황이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황족을 납치하여 제국의 황위를 찬탈하려 한 이들이 벌인 짓이었다. 

“구속구가 채워지는 그 끔찍함. 그리고…….”

“폐하.”

“그대는 그때 몇 살이었지?”

“폐하께서 여섯이었으니 저는 여덟이었습니다.”

“그 무렵이었겠군. 황성에서 다친 그대를 치료해 준 것이.”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일이 있고 나서 납치를 당했으니.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이었다.

“폐하.”

“난 말일세. 가능하면 국혼은 치르고 싶지 않네.”

“왜…… 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나를 노렸던 이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지. 그들이 있는 한 황족을 향한 납치 시도는 계속될 걸세. 황녀에게도 마찬가지지. 난 황녀가 마력을 타고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네. 적어도 그 아이는 나 같은 기억을 갖지 않아도 되지 않나.”

“폐하.”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는 사이르카 후작의 부름에 이실리스가 흐리게 웃었다.

“그래도 후작이 내 곁에 있어 줘서 다행일세.”

“폐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변경백은 잘 있는가?”

“그러합니다.”

“황궁으로 오라고 하게. 이번 국혼을 논의해야 하니.”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제국의 대사를 나 혼자 정할 수는 없는 법. 변경백과 베루스 공작 그리고 밀레르 후작의 의견을 들어야겠네.”

“영명하십니다.”

“공치사는 되었으니 물러가게.”

그녀의 말에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물러서는 사이르카 후작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빛냈다. 믿는 것과 확인은 별개였다. 그녀는 사이르카 후작을 믿었지만, 권력이란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괴물이었다. 확인해야 했다. 저 이를. 제 부군 후보에 오른 사람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도착하면 확실해지겠지. 어느 쪽이 문제인지.”

* * *

베루스 공작은 공작저에서 통신석을 찾고 있었다.

“이게 어디로 사라졌지?”

통신석이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중요한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는 베루스였다. 한참을 뒤지던 그가 책과 책 사이에 있는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일전에 방문한 누군가의 눈을 피하느라 숨겨뒀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였다.

“여기 있군.”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다면서 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보자. 오늘은 폐하께서…….”

자신이 쓴 보고서를 통신석에 내밀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서류였다.

“그분도 참. 걱정되면 직접 오시면 될 것을.”

보고 시간이 지나 계속해서 울리던 통신석이 그제야 잠잠해지는 것을 본 베루스 공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신석을 들여다보던 그가 자신의 서랍에 통신석을 넣고 마법식을 그려 넣었다. 잠긴 서랍을 보면서 그가 속삭였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 * *

올라온 서류를 읽으니 머리가 다 아팠다.

“이건 무슨…….”

관심이 하나도 없던 이들도 다들 나서서 부군을 맞이하라 성화였다. 이번 황녀의 납치사건과 결계가 파훼 될 뻔한 일로 인하여 제국의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내용도 다양했다. 그녀의 조건을 들은 자들이 제각기 다른 사람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중 사이르카 후작을 지지하는 이들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였다.

“이들은 제정신인 건가? 적국의 황태자를 부군으로 맞이하라니!”

이실리스가 소리를 치며 서류를 내던지자 옆에서 듣고 있던 베루스 공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적국의 황태자라 오히려 나을 수도 있습니다. 폐하.”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나?”

“귀족들에게 틈을 내어주진 않겠죠.”

“그가 이 나라에서 무언가를 획책한다면 어찌하겠나.”

“라르헨의 귀족들을 아시면서 그런 소리를 하십니다.”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라르헨의 귀족들은 긍지가 높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제국민이 자신들의 위에 서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사이르카 후작을 미는 것이겠지. 귀족 중에서도 라르헨의 귀족인 그가 그녀의 부군이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줄을 댈 수 있을 것이니. 그러나 우스만은 달랐다. 사막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차별을 받을 것이 분명했고, 무(武)를 숭상하는 칼리파 제국의 특성상 마법사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염려하는 이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나의 부군이 된다면 기사를 양성하려고 하겠군.”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 무력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을 겁니다.”

“그런 것을 신경 쓸 자가 아니야.”

“폐하. 그것은 모를 일입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이 혼자 떨어지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죠.”

“…….”

단언하듯 말하는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문화의 문제였다. 마법사가 별로 없는 사막 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사. 소위 말하는 기사였다. 그중 우스만 칼리파는 제국의 기둥이라 불릴 정도의 무력을 가진 자.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지가 또 줄어드는군.”

“혹여 마음에 둔 영식이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우스만을 부군으로 맞이하기에도 녹록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에겐 힘든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그녀는 부군을 맞이하는 일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베르타스가 아니라면…….’

부군으로 맞이하고 싶은 자도 없었다. 올라온 상소문에는 베르타스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소드마스터라고 알려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

“왜 부르지?”

베루스 공작이 진지해진 눈빛으로 이실리스를 불렀다.

“저는 부군을 맞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신하 된 자로서 어찌 폐하께 강요할 수 있습니까.”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원하지 않으시면 하지 마십시오.”

“여기 그대의 아들도 후보로 올라와 있다만?”

“그 아이는 폐하의 부군이 될 그릇이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는가?”

“그러합니다.”

“후계자를 내게 뺏기게 될까 저어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나다운 것은 무언가?”

베루스 공작의 말에 발끈하여 이실리스가 말하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베루스 공작이 이내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폐하. 여유를 잃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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