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의 말에 충격을 느꼈다. 그러했다. 그녀는 라르헨의 황제.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를 달지 않아도 그녀가 황제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잊고 있던 점을 짚어주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권위라는 것은 옷차림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말이 없는 그녀를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너는 항상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는군.”
“지적? 그럴 리가. 감히 라르헨의 황제에게 지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나.”
“알지. 그냥 한번 말해보았어.”
누워있는 이실리스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베르타스였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이마를 따라 내려갔다. 그의 서늘한 손가락 끝이 그녀의 이마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차가운 감촉이 마음에 들어 이실리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군.”
절로 나오는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차가워서 그럴 수도.”
조용하게 속삭이는 그 말에 이실리스의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쉬도록 해.”
자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베르타스의 향기가 휘감으면서 그녀를 꿈의 한자락으로 인도했다.
* * *
“잘 자네.”
피로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고민이 저렇게 많은 것인지. 그래도 제 옆에서 편안히 잠들어있는 이실리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어릴 적 저를 구해준 그녀와 닮은 얼굴. 아마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이만큼 컸겠지. 이실리스를 볼 때마다 그 아이가 생각났다.
“하긴 이제 와 살아있는 것이 무슨 소용인지.”
조용한 베르타스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잠들어있는 이실리스의 얼굴을 베르타스는 오랫동안 지켜보았고 바라보는 내내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봉긋한 이마며 유려히 흐르는 콧날, 풍성한 속눈썹에 하얀 볼과 이지적으로 붉게 다물려진 입술.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어 참던 마음을 살짝만 풀어, 자신의 입술을 내리려 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꺼풀이 나비의 날갯짓이 팔랑이는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금방 깼군.”
“…… 그래도 한결 낫군.”
몸을 일으키는 이실리스의 어깨를 감싸는 베르타스였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눈동자를 깜박거리는 그녀의 눈가에 그가 결국,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무슨…….”
“실례. 너무 예뻐서.”
“…….”
그의 말에 싫지 않은 듯 얼굴을 붉히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속삭였다.
“닮았군.”
“뭐?”
“황녀와 닮았어.”
“내 아이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내 아이야.”
“내 아이이기도 하지.”
정신이 돌아온 듯 또렷해지는 눈동자를 보면서 답했다. 제 아이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소드마스터의 조건을 끼워 넣은 것은 날 염두에 둔 것이지?”
“그렇다면 그럴 수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의뭉스럽게 말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의 눈썹이 움직였다.
“내가 싫은가?”
“그런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왜?”
“…… 넌 너의 나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 건가?”
“다녀오긴 해야겠지.”
이실리스의 말에 망설임 없이 베르타스가 답했다. 그의 답에 순간 어두워지는 그녀의 안색을 제 생각에 빠져 눈치채지 못한 베르타스였다.
“그렇군.”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런 것인가.”
“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실리스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낀 베르타스였지만, 묻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베르타스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어디 안 좋은가?”
“아니. 아니야.”
이내 표정을 바로 하는 그녀의 얼굴에 베르타스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웃어넘겼다.
“그렇다면 언제쯤 돌아갈 건가?”
“아직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는데?”
“협상?”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몸을 바로 했다.
“무슨 소리지?”
“힐렌튼에서 이번에 방문한 이유는 신년제가 아닌 일전의 무역 협상을 마무리 지으러 온 것이지.”
“베르타스. 그대는 기사가 아닌가.”
기사가 대체 왜 무역 협상의 테이블에 앉느냐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이실리스의 물음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그런데 왜…….”
“하라고 하니 하는 것이지.”
“누가?”
“힐렌튼의 황제가.”
“말이 짧군.”
“존중받을 만한 이는 아니라서.”
이실리스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그였다. 어깨를 으쓱하는 그의 행동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래도 힐렌튼을 사랑하나 보군.”
“힐렌튼을? 아…… 제국을 말하는 건가?”
“그래.”
“뭐 그렇다면 그럴 수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냉소적으로 답하는 베르타스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본 이실리스였다.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너에게 중요한가?”
“그래.”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의 시선이 무게감을 더했다.
“왜지?”
“…….”
“날 사랑하나?”
“…….”
“아닌가?”
“황제에게 사사로운 감정이란 사치일 뿐.”
“이실리스.”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마디면 되었다. 옆에 있어 달라는 단 한마디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옆에 있어 줄 것인데 왜 그 말이 어려운 것인가.
“단 한마디면 돼.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그의 말에도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 * *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저렇게 제 나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서 나라를 버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라르헨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도 힐렌튼을 사랑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라를 버리고 제게 오라고.
말이 없는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안 좋나?”
“아니. 아니야.”
내젓는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쥐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단 한마디야. 이실리스. 그러면 난 너에게…….”
“그대.”
그녀의 부름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의 어둑한 눈동자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나는 아무런 확답을 줄 수 없어.”
“답을 달라는 것이 아니지 않나. 나는 네가…….”
“나의 모든 것은 온전히 라르헨을 위한 것. 한 자락은 내어 줄 수 있으나 전부를 내어 줄 수는 없네.”
“라르헨이…… 그렇게 중요한가?”
“당연히.”
“그럼 나는?”
“…….”
“우리의 아이는?”
“황녀는 내 뒤를 이어…….”
“그것은 알고 있어!”
버럭 외치는 베르타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이실리스였다. 분노로 몸을 떠는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럼 나는 뭐냐고 물었어. 이실리스. 너에게 나는 뭐지?”
“그건…….”
“단지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너와 내가 함께 보낸 그 모든 시간은 의미가 없다고? 지금도 궁금하군그래. 나는 대체 너에게 뭐지?”
“베르타스 그건…….”
“아이의 아버지. 그냥 아버지가 끝인가?”
“그것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감정은 어떤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아버지? 그런 단순한 단어로 그를 정의 내릴 수 있었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도 알 수 없는 저의 마음에 대해서 이실리스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머뭇거림을 베르타스가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이는 어쩔 거지?”
“그 아이는 차기 황제야.”
“이미 아이가 시녀들과 시종들에게 얕잡아 보이는 것은 알고 있나?”
“감히 누가…….”
“누구든 그렇게 말하더군. 마력도 없는 반쪽짜리 황족이 황위를 넘보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면서.”
“감히!”
싸늘하게 내뱉어진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설마 몰랐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그런 것은 아니지? 이실리스? 우리 아이가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해서 받는 취급에 대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황족은 그 자체로…….”
“그것은 제대로 마력을 타고났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 사실 너도 알고 있지?”
알고 있었다. 황족의 피가 신성시되고 황족이 그 자체로 인정받는 이유는 마력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적어도 마력이 발현될 때까지는.
그래도 이실리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이의 마력은 분명히 발현될 것이다.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귀족들의 모든 견제를 감당하고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전의 일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전능한 황제였지만 그녀의 아이는 아직 연약한 아기에 불과했다. 아이에게 손을 뻗기는 쉬웠다. 황제인 그녀가 아이의 옆에 붙어서 아이를 보호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집무를 보는 옆에 아이를 둘 순 없는 법이니. 알고 있었지만 베르타스가 저렇게 날 선 어투로 말하니 마음이 아렸다.
“마력의 발현은 나중에도 있을 수 있어.”
“그것은 알지. 그러나 그때까지 후계를 세우지 않고 기다릴 수 있나?”
“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해 보려고 했다. 그녀와 아이를 위해서.
“이실리스.”
한숨을 내쉬면서 베르타스가 말을 이었다.
“국혼을 치르게 되면 아이를 가지라는 성화를 버틸 수 있겠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일.”
“그야 그렇지만 쉽지 않겠지. 황제의 잠자리는 의무이니까.”
그녀가 잊고 있던 점을 짚어주는 베르타스였다. 맞았다. 황제는 의무적으로 정해진 날짜에 잠자리를 가져야 했다. 황후나 부군이 있다면. 후계를 위한 제도였다. 그녀가 싫다고 해도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황제였다. 몸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 라르헨을 위한 것인.
계속해서 말이 없는 그녀를 향해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거지? 내가 아닌 다른 자와 국혼을 치르게 되면 나와 했던 그 모든 행위를 그자와도 할 건가?”
“무엄하다!”
“아니, 난 들어야겠어. 이실리스. 이건 황제인 너에게 묻는 것이 아닌 나의 아이를 낳은 너에게 묻는 것이다. 대답해. 그렇게 할 건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실리스는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내가 너를 너무 봐주었군.”
“대답하지 않는 것은 내 생각이 맞는 건가?”
“아무도 황제에게 그리 물을 수 없다. 이 라르헨에서는 내가 곧 법이다.”
“알고 있다고 했어. 황제에게 묻는 말이 아니라고도 했지.”
“라르헨의 황제인 내게 그런 말을 물으면서 황제에게 묻는 말이 아니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이실리스가 그에게 속삭였다.
“애초부터 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너와의 만남도 없었다. 베르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