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셋을 물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셋 모두 선황이 아이르를 살리기로 했을 때, 자리에 있었던 자들이었다. 선황의 말에 따라 아이르를 살렸으나 셋 중 누군가 선황을 설득했다. 그것은 이실리스의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처음 사실을 알게 된 선황은 그녀를 껴안고 죽일 것이라는 말만 내뱉었다. 그랬던 선황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그것도 아주 권력자의.”
지금의 황제인 이실리스와는 다르게 선황은 귀족에게 아주 자애로운 황제였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가 있어도 웃어넘겼다. 뒤로는 어찌했을지 모르지만, 귀족들이 적당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한도 끝도 없이 애정을 베풀었던 선황이었다. 그런 선황을 배후로 두고 귀족들이 제국민에게 수탈을 일삼았다. 하여, 이실리스가 황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제국민을 수탈한 귀족들을 베어 넘기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 죽어간 귀족이 스무 명이 넘어갔다. 귀족들은 그녀에게 반항하지 못하였고 지금까지 그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귀족들에게 온건 정책을 베풀었던 선황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실리스였다.
“납작 엎드린 자들이 이제 하나둘씩 정신이 드나 보군. 그동안 내가 너무 풀어주긴 하였지.”
이실리스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듣고 있던 알뤼르가 흠칫했다. 일전 황제가 펼쳤던 공포정치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시려고…….”
“하나씩 호출해서 이야기를 듣는다.”
“변경백은 수도까지 오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마법사를 보내서 바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알뤼르 수석 마법사.”
“네. 폐하.”
“자네가 직접 다녀오게.”
“그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자리를 피하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 중에서도 누군가 있어.’
흑마법을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 정보를 제공했다는 뜻이었다. ‘그’ 이그나르도의 사장된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에 관한 연구를 오랜 시간 한 자가 분명했다. 깊어지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베르타스.”
베르타스 힐렌튼이었다.
* * *
자리를 비킨 베르타스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그의 숙소였다. 이실리스와 같은 층에 주어진. 잠시 방에서 서성이던 그가 헥터를 호출했다.
“왜 부르셨습니까.”
“헥터 경. 본국은 어떻지?”
“힐렌튼이요?”
“그래.”
아까 우스만의 말이 마음에 걸린 베르타스였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요?”
“분명히 뭔가 있어.”
“네?”
“우스만 칼리파. 그자가 무슨 짓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무슨 짓을요?”
“그걸 아직 모르겠네.”
탁자를 ‘톡톡’ 두들기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헥터가 유심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아주 고민이 많지.”
“뭔데요?”
“내 아이를 어떻게 할지. 내 여자를 어떻게 할지. 마지막으로 힐렌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 왜 힐렌튼이 마지막입니까?”
“당연하지 않나. 내 가족이 우선이지.”
“가족이요? 지금 가족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헥터가 고개를 저었다.
“각하.”
“왜.”
“그 여자분이 각하와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지.”
“아이도 내어줄지 모르고요.”
“그랬지.”
“그런데 혼자서 가족 타령하면 누가 들어주기나 한답니까?”
정곡을 찌르는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이실리스는 자신을 아이의 아버지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이실리스의 아니, 이 라르헨 제국 황제의 부군이 될 기회.
“소드마스터라니…….”
“뭐가 말입니까?”
“아닐세.”
“설마 그건 아니겠죠? 여제의 부군?”
“왜 아니지?”
“미치셨습니까!”
다짜고짜 소리 지르는 헥터의 반응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돌렸다. 씩씩거리며 분노를 표하는 그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저렇게 반응하는 것인가.
“왜 그러나.”
“여제의 부군이라니요! 그냥 쳐들어가서 황제하겠다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 라르헨의 부군? 미치셨습니까? 여제의 부군이라니! 그게 무슨……. 새로운 길을 보게 하셨으니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각하가!”
부들부들 떠는 헥터를 진정시키면서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인가.”
“그런 겁니다! 허튼소리 마시고 얼른 얻을 거 얻어서 본국으로 회군합시다.”
“회군?”
“당연한 것 아닙니까! 회군해서 뒤엎어야죠.”
“아직은 아니야.”
“네?”
“명분이 있어야지. 명분 없이 움직이기엔 위험 부담이 커.”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베르타스의 머릿속에서 힐렌튼의 황성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는 생각은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늘 막혔다. 제국민이 과연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의 황가가 제국민에게 큰 지지를 얻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여론을 휘두를 줄 알았다. 그 여론에 휘둘려 베르타스가 맹약의 샘물을 마신 것이었다.
베르타스는 지금 힐렌튼 황가의, 숙부의 철저한 파멸을 원했다.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것도 처절하게 모든 것을 다 잃고 마지막에 죽는 것을 원했다. 후대에도 영원히 그들의 악명이 이어지기를,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원했다.
“어쩌시려고요.”
“상황을 지켜보아야겠지. 일단 본국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넣어.”
“알겠습니다.”
힐렌튼에서 정보를 보내오는 그의 측근에게 연락을 넣으라는 소리에 헥터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우리 각하께서 정신을 차린 것 같다느니 라르헨의 부군이라니 헛소리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정신이 사나웠다.
“안 나가나?”
“…… 갑니다 가!”
좋은 방에서 혼자 있고 싶은 거냐느니 하는 소리를 남기고 헥터는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좋은 방이라. 그렇기는 하지.”
좋은 방이었다. 금으로 장식된 침대, 그리고 화려한 그림이 걸려 있는 벽.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가구에 그 가구 위에 놓인 생화. 베르타스의 숙소에 놓인 생화는 매일 바뀌었다. 시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항상 싱싱한 꽃으로 장식하는 것을 본 그가 물었다.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이 방은 폐하께서 즐겨 찾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즐겨 찾는?”
“가끔 이곳에서 사색을 즐기시지요. 저 그림을 보면서.”
마법사가 기사와 싸우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저 그림은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을 때, 첫 전쟁에서 폐하의 무력에 반한 화가가 바친 것이랍니다. 그림을 잘 보시면 마법사가 폐하십니다.”
그제야 그림이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 로브를 쓴 여인의 얼굴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일부러 흐리게 그린 것 같았다. 황제의 얼굴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니.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의 소일거리가 되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그림이지. 그대도 그러한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기감에 걸리지 않은 것을 보니 이실리스가 마법을 사용하여 그의 방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공간이동마법이지. 이 황궁에서 나 외에 고위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웃으면서 말하는 이실리스의 얼굴이 조금 편해 보였다.
“바쁜 줄 알았는데.”
“바쁘지.”
“그런데 날 만나러 왔군.”
“그러게 왜 그랬을까.”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 싶어 찾아왔다는 뜻이 내포된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도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언젠가 그녀의 옆자리는 베르타스의 것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림을 본 소감은 어떠한가.”
“마법사가 굉장한 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 내 마음을 가져갔고 내 아이도 데려갔지. 소드마스터의 마음과 아이를 가져간 이라면 대단한 이가 아닌가?”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날…… 원망하나?”
“그렇다면 그럴 수도 아니라면 아닐 수도.”
저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이실리스의 행동에 조금은 마음이 풀어지는 베르타스였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이해는 되었다. 황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서운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가 없었네.”
“나도 이해해. 그러니 더는 논하지 않는 것으로 하지.”
“아이를 낳은 것을?”
“아니. 아이를 말도 없이 혼자 키운 것을, 아이에게서 아버지를 앗아간 것을 논하지 않겠어.”
“…….”
제 말에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당겼다.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오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그가 속삭였다.
“그러니 이실리스. 내게 너의 마음을 줘.”
“난…….”
“날 선택해.”
“…….”
부군으로 선택해 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음. 온전한 마음이면 되었다.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다는 확답만 얻을 수 있다면 베르타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마음이면 되었다. 물질적인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이실리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그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그거면 돼. 다른 것은 필요 없어.”
“정말 그것만으로 족하나?”
“지금은. 언젠가 더 큰 것이 욕심나겠지만.”
그를 올려다보던 이실리스가 아름다워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닿아온 온기가 뜨거웠다.
‘잠깐. 뜨겁다고?’
“너……. 열이 있군.”
“열?”
“몰랐나?”
“알 수 있을 리가…….”
“요즘 힘들었나 보군.”
단정 지어 말하는 베르타스였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 베르타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잠시 쉬는 게 어떨까.”
“쉬려고 여기 온 걸세.”
“본의 아니게 너에게 부담을 주었군.”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이실리스를 번쩍 안아 든 베르타스가 그의 침대 위에 그녀를 눕혔다. 화려한 장식들이 짤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다.
“옷이 참…….”
“거추장스러우나 어쩔 수 없는 일. 황제라면 이정도 성장을 해야 한다더군.”
“헛소리를. 권위란 옷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을. 이런 옷을 입지 않아도 너는 라르헨을 이끄는 황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