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161)

34화.

“우리 전하께서 너무 마음이 약하셔서 사용하지 못하시나 봅니다만, 우리나라는 라르헨과 오랜 교류를 맺고 있는 나라. 선대끼리의 국혼도 오가던 사이가 아닙니까. 이런 때, 힐렌튼에서 라르헨과 전쟁이라도 벌이게 한다면…….”

“한다면?”

“베르타스 힐렌튼은 당연히 자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 나라를 위해 검을 잡는다면 라르헨과 적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맞는 말이야.”

“자고로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우스만을 보면서 할리만이 웃었다.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강제로라도 가져야지. 손에 쥐고 놓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칼리파 제국민들의 특징. 어린 시절 라르헨으로 유학을 하였던 황태자이기에 칼리파 제국민의 방법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우스만의 처사에 할리만이 웃었다.

“전하. 칼리파 제국민은…….”

“원하는 것은 갖는다.”

“힘으로.”

“힘으로.”

“남을 줄 바에는…….”

“부순다.”

“알고 계시니 되었습니다.”

빙그레 웃는 할리만을 따라 우스만도 웃었다.

“그렇다면 우리 전하의 명을 따라 힐렌튼의 황태자에게 연락을 넣어볼까요?”

“되도록 빨리.”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 * *

이실리스는 황족을 납치하려 했던 배후를 밝히는 일에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에게 물었다.

“아이르의 기억을 뒤져도 별것 없나?”

“없습니다. 서신으로만 주고받은 것 같은데 기억 속에 서신을 전달하던 시녀도 사라졌습니다.”

“죽었을 가능성이 크겠군.”

“그렇습니다.”

“서신의 내용은?”

“내용 자체는 암호문으로 적혀있어 해독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일이 생기다니.”

요즘 들어 한숨 쉬는 일이 잦다고 생각했지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이실리스는 아이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아이르의 존재가 밝혀진 것은 그녀가 7세 때. 선황이 처음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분노를 표했던 날이었다. 아버지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니, 잘못이라고 해야 하나. 아버지에게 미약을 먹인 여인이, 그때 맺었던 단 한 번의 관계로 아이르를 잉태했다. 여인의 등장과 아이의 등장으로 인해 귀족들은 아버지의 폐위를 요청했으나 선황의 고집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진 전쟁터를 전전했고 그곳에서 생을 다했다.

“그도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닐세.”

옆에서 듣고 있던 시종장이 그녀에게 하는 말이 들렸지만 이실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에 의심이 있는 그녀였다.

‘순순히 미약을 먹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돼’

소드마스터였다. 거기에다 마검사. 그렇다면 보통 약으로는 되지 않았을 터. 분명 뭔가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원망했던 적도 있지만 선황은 그 모든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아버지를 부군으로서 곁에 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눈먼 화살을 맞았다고 하기엔 아버지의 실력이 너무 월등했다.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던 것인가.”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황가를 노린 자들이 있었다는 것인가.’

원하는 것은 황가인가 아니면 황가의 핏줄인가. 라르헨은 황족이 아니면 유지할 수 없는 나라. 반역을 일으키고 싶어도 불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라를 지킬 수가 없어서. 반역으로 국가 전복을 꿈꾸었어도 성공한 후가 문제였다. 지금은 아군이지만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칼리파 제국, 그리고 바다 너머의 해적국가인 살라스 제국, 마지막으로 이제 막 제국으로 급부상한 힐렌튼까지. 그 모든 국가가 라르헨을 노릴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황족의 마력이 막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황족을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황녀가 마력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력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납치의 위협에 시달렸을 것이니.

“아이르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폐하?”

“죽여야 하지 않겠나.”

알뤼르의 물음에 이실리스가 답했다.

“당연한 것을 물었습니다.”

“선황께서 살리라고 하셨기에 살렸을 뿐. 아이는 죄가 없다고 하셨으나 이제는 그가 죄인이니. 선황 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그렇다면 공개처형을 하실 생각입니까?”

“물론 아닐세. 지금은 제국의 손님들이 수도 곳곳에 있으니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지. 그러니 조용히 죽여야겠네.”

“언제 시행하실 겁니까?”

“지금 가지.”

“모시겠습니다.”

황족은 아니나 귀족에 준하는 핏줄을 가진 자이기에 이실리스가 직접 처형을 보아야만 했다. 고요한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를 향해서 알뤼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왜 그러나.”

“황녀님을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마력 발현이 나중에 될 수도 있으니.”

“그러합니까.”

“무슨 방책이 있나?”

“조금 성장하시면 마력 수련을 하게끔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타고난 마력이 없는데 가능하겠나?”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마법사 집단다웠다.

“자네는 마력이 없는 황녀가 황위를 이어도 되나?”

“안 될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 대에서 마력이 없으셔도 다음 대에서 발현이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것이 라르헨의 저력. 마도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황족을 위한 길이라면 우리들은 언제라도 마력을 바칠 의향이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자네와 같으면 좋으련만.”

허리를 숙이는 알뤼르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이실리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마법사들의 충성심은 하늘을 찌르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라르헨에서 기사를 중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라르헨은 마법으로 세워진 나라. 당연하게 차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은 어떻지?”

“사이르카 후작이 알아서 잘하고 있습니다마는…….”

“마는?”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했나?”

이실리스가 의문을 표하자 알뤼르가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요즘 기사들과 모임이 잦습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하는 것 아니었는가.”

“그와 다릅니다. 시간은 중구난방입니다만 모이는 인원이 항상 같습니다.”

“모이는 인원이 같아?”

“인원이 다르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항상 같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려고 시간도 달리 잡고 만나는 장소도 다르지만, 매번 같은 사람들이라면 뭔가 있지 않겠습니까?”

“…….”

“이상합니다, 폐하.”

“자네가 보기에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이르카 후작의 뒤를 파게. 비밀리에. 그리고 모이는 사람들의 명단을 파악해 오게.”

“명단은 이미 작성되어 있습니다.”

“역시.”

“마법사들의 나라에서 마법사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하는 알뤼르의 말에 이실리스가 감탄했다. 이 제국이 탄생했을 때부터 마법사들이 황가에 보이는 충성심은 맹목적이었다.

“다행이로군. 자네들이 있어서.”

“저희야말로 폐하께서 강건하셔서 다행입니다.”

“…….”

“라르헨에서 황족의 존재 여부는 마법사들의 존재 여부와 같습니다. 폐하께서 안 계신다면 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법.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허리를 숙이면서 충언하는 알뤼르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생각했다.

‘이런 이들을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베르타스를 따라서 어디론가 잠적하여 아이를 키우는 미래를.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 그녀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전부 그녀의 의무이자 여태까지 누렸던 것들에 대한 책임이었다. 

“내 그리하겠네.”

“따르겠습니다.”

알뤼르의 말이 이실리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알뤼르와 도착한 곳에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르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을 마법사들이 막아내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알뤼르가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폭주했습니다.”

“제대로 했어야지!”

이미 늦었다. 이실리스가 판단하기에 아이르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은 것이 분명했다. 눈동자가 까맣게 변하면서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흑마법…….”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속삭였다. 

‘대체 어떤 집단이기에…….’

그래도 황가의 일원이라는 아이르조차도 쓸모없는, 그저 버리는 패로 사용한단 말인가. 잠시 깊은 숨을 들이켠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아이르가 제압되었다.

“역시……!”

옆에서 다른 마법사들의 감탄사가 들렸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르. 대답해라.”

“…….”

“네가 그 안에서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답을 할 수 없다면 두 번 눈을 깜박이거라. 이대로 죽고 싶나?”

빠르게 눈을 깜박이는 아이르의 행동에 아직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이실리스는 느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너에게 흑마법을 사용한 자가.”

대답할 수 없는 아이르를 향해 이실리스가 속삭였다.

“누구인가. 베루스 공작? 밀레르 후작? 그도 아니면 변경백인가?”

아이르의 반응을 살피던 이실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혀를 빼물고 죽어버리는 아이르의 모습에 그녀는 맥이 풀렸다.

“알뤼르.”

“네. 폐하.”

“셋 중 하나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실리스의 표정이 굳었다. 믿음을 주었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배신자라니. 

“누굴까.”

“폐하. 한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맹점?”

“세 사람 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흑마법을 쓸 수 없는 것은 아닐세.”

“네?”

흑마법은 본디 조건만 갖춘다면 사용할 수 있는 것. 마법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마법진을 그린다거나 흑마법을 이용할 수 있는 매개체만 있다면 그리고 제물이 존재한다면 가능했다. 일전의 피로 마법진을 그린 마법사는 본인의 피와 마력을 제물로 사용한 것.

“그러니 셋 중 누구라도 배후가 될 수 있지.”

“그렇다면……. 범위가 더 넓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얼른 찾아야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군. 느긋하게 있을 시간이 없어.”

라르헨 제국의 어딘가에 흑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심기를 거슬렸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 이실리스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폐하. 저 사람은 어떻게…….”

차갑게 굳어 있는 아이르를 두고 말하는 마법사들을 향해 그녀가 명령했다.

“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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