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실리스는 우스만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놓고 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가 또 있을 줄이야. 베르타스와 같이 감정을 내보이는 남자의 말에 당황하는 그녀였다.
“선대의 약속은 선대의 약속. 상황이 달라졌으니 약속도 변하는 법이지.”
“서류가 오갔으니 우리의 국혼은 여제께서 승낙만 하시면 됩니다.”
“그게 될 법한 일인가?”
“안 될 것은 뭐가 있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도전적으로 맞받아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될 것은 뭡니까? 어릴 적의 인연도 있었고 국혼이 오가던 사이이기도 합니다.”
이실리스의 입이 다물렸다.
“……. 설마, 그놈 때문입니까?”
“그놈?”
“아이의 아버지? 설마 그놈에게 마음을 줬습니까?”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그의 눈빛에 외려 그녀가 당황했다.
“그냥 지나간, 아이가 필요해서 만난 남자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무례하다. 그 일은…….”
말을 이어가던 이실리스의 입이 다물렸다. 우스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우스만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네. 아이의 아버지라니. 내 아이는 황족.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습니까?”
“그렇네.”
“그렇다면 더더욱 저는 국혼을 논해야겠군요.”
“자네……. 나는 국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비밀리에 아이를 낳은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제께는 보호막이 필요합니다.”
“보호막?”
“저 아이를 황위에 올리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
그녀의 생각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우스만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군을 맞이하셔야죠. 아이가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시간이라도 벌어야 할 것 아닙니까.”
“시간을 벌어?”
“그렇습니다. 라르헨의 역사를 보면 마력 발현이 늦었던 황족도 있으니 지금의 황족이 마력을 발현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줘야 할 텐데요. 그게 아니라면 부군도 없이 귀족들의 공세를 어떻게 이겨내실 생각입니까?”
“나는 부군은 필요 없네.”
“곧 필요하게 될 겁니다.”
단언하는 우스만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그녀였다. 알고 있었지만 싫었다. 정치적으로 그녀가 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부군을 맞이하고 그와 함께 정치적으로 협력하여 시간을 버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 판단하기엔 제 앞에 있는 우스만 칼리파는 좋은 부군 후보였다. 황태자이나 그 자리를 버릴 수 있다고 했고, 외국인이니 이 제국에 기반을 마련하기도 마뜩잖을 것이 분명했다. 라르헨과 적대적인 관계였으니.
국경 다툼을 몇 번 했던 적이 있기에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고 귀족들이 쉽게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베르타스도 같은 조건이었다. 오히려 그가 나았다. 그를 염두에 두고 내건 조건이었으나 선뜻 그에게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네가 반쪽짜리 황족이라 나의 부군이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
“알고 있지요. 그러나 이실리스.”
“무례하다고 하지 않았나?”
“어릴 적에 그대와 나는 이렇게 이름을 부르곤 했지. 그대가 황제가 되었다고 해서 내가 그리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야. 어차피 진명도 아니지 않나?”
“…….”
“베르타스 힐렌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면 마음을 접는 것이 낫겠다고 알려주고 싶군.”
“뭐?”
“나보다 그쪽이 좀 매력적이긴 하겠지만 그는 곧 이 나라를 떠나게 될 거야.”
“무슨 짓을 하였나.”
서늘해지는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얼굴을 살피는 우스만의 행동에 그녀는 표정을 바로 잡았다. 저자에게 빌미를 줄 수 없었다. 재빠르게 변한 이실리스의 안색을 확인한 우스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적어도 휘둘릴 일은 없겠지.”
“누가. 그대가?”
“내가 되었든 아니면 나의 부군이 되었든.”
“베르타스는 제 나라를 버리지 못해. 그러니 그 꼴을 하고도 그 나라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겠나.”
이실리스를 타이르듯 말하는 우스만의 말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그가 나와 아이를 두고 제 나라를 선택한다고?’
그럴 수도 있었다. 이름뿐인 황족이어도 황족은 황족. 그러니 베르타스도 부당한 대우를 참아가면서 나라의 국경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겠지. 나라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베르타스에 대한 이실리스의 오해는 깊어만 갔다. 점점 심각해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우스만은 내심 웃음을 감추었다.
‘이런 식으로 경쟁자가 하나 사라지겠군.’
베르타스는 아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제와 독대할 기회를 걷어차 버린 이 순간을. 그리고 또 후회하겠지. 우스만이 이실리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내버려 둔 것을.
“할 말은 이게 다인가.”
“아직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은 제게 시간을 내어주시죠.”
“시간?”
“서로 알아갈 시간을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아직 어떠한 언질도 그대에게 한 적이 없네만.”
“곧 하게 되실 겁니다.”
“헛수작을 부리는군. 알아들었으니 이만 나가보게.”
“내일 또 오겠습니다.”
“내일은 만날 일이 없을 걸세.”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 아닐까요.”
웃으며 이실리스의 손에 입 맞추고 물러나는 우스만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생각에 잠겼다.
* * *
“어떠셨습니까.”
우스만이 밖으로 나오자 그의 부관인 할리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괜찮았지.”
“그렇습니까?”
“적어도 베르타스 힐렌튼은 오늘을 후회하게 될 거야.”
“왜입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의뭉스럽게 웃는 우스만을 보면서 할리만이 대꾸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황태자 전하.”
“그대가 알 필요 없는 짓을 하였지.”
“수습만 하게 해 주십시오.”
“수습할 필요도 없네. 아주 약간의 의심을 던졌을 뿐이니.”
“의심이요?”
“그래, 의심. 나중엔 확실한 굴레가 될 의심.”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우스만의 말에 할리만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는 모시기 쉬운 주군이었으나 어려운 주군이기도 했다. 까탈스럽지 않은 취향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태도는 그를 쉽게 보게 했다. 황족치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소탈한 행동에 속아 함부로 대했다가 목숨을 잃은 자가 몇이던가.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것 치고 사람의 목숨을 너무 가벼이 여겼다. 눈 밖에 나면 끝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모시기 쉬운 주군이었다. 심기를 거스르는 짓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기를 거스른다는 의미는 단 하나. 얕잡아 보지만 않으면 되었다. 태생을 지배자로 타고난 그는 다른 이에게 낮춰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지금까지 사라진 자들은 모두 그를 무시하거나 그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자들. 생각에 빠져 고심하는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 할리만이 조심스럽게 걸었다.
“할리만.”
“네?”
“여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제가 판단할 분이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자네가 판단할 사람이 아니지.”
할리만의 대답에 우스만이 만족스러워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베르타스는 달랐단 말이지…….’
여제를 잘 아는 듯한 그의 말투, 주제넘은 그의 행동을 보면서 우스만은 느꼈다. 분명 뭔가 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지난번에 명령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우스만의 말에 서류를 넘기는 할리만이었다.
“딱히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베르타스 힐렌튼의 흔적을 따라가니 나오더군요.”
“베르타스?”
여기서 그자가 왜 나온단 말인가. 우스만은 의아함에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할리만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을 마주한 할리만이 당황하며 몸을 움찔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여기서 베르타스 힐렌튼이 거론된 이유는 뭐지?”
“그…… 말입니다.”
주위를 살피던 할리만이 영상구를 발견하고 고개를 저었다.
“가지.”
* * *
라르헨의 황궁을 나선 우스만이 그에게 재촉했다.
“뭐지?”
“여제가 휴가를 떠났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상하여 행적을 뒤지다가 여제의 친척인 대공이 있는 이토르트 항구를 뒤졌습니다.”
“거길 뒤진 이유는?”
“마법사라면 절대 가지 않을 곳이라서요.”
할리만의 말에 우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여제라면 그곳으로 갔겠지. 신하들이 찾지 못할 곳으로.”
“네. 그래서 그곳을 뒤졌는데, 같은 시기에 힐렌튼의 군인들이 머물렀답니다.”
“뭐?”
“베르타스 힐렌튼이 이끄는 군사들이 이토르트 항구에서 머물다 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런데…… 황녀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로군. 공교롭게도.”
“전혀 공교로운 것 같지 않습니다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여제 정도 되는 여인이라면 베르타스 힐렌튼이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분노로 불타오르는 시선을 감출 수 없는 우스만이었다.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할리만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결국, 그거 아닌가. 반쪽짜리 황족이 운 좋게 얻어걸려서 내가 애지중지하던 여인을 빼앗아 갔다는 거.”
“황태자 전하.”
“그거였어?”
“전하 진정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우스만의 몸에서 오라가 폭사 되었다. 아무도 없는 공터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칼리파 제국의 황족 최초로 다른 제국의 감옥에 갇힐 뻔했다.
“전하.”
“그 새끼가 감히…… 나는 아까워서 손목도 못 잡아본 여자를!”
“전하. 시선이 몰립니다.”
낮아진 할리만의 말에 우스만이 시선을 돌렸다. 라르헨 제국의 경비대원들이 우스만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닐세.”
날카로워지는 우스만의 기세에 할리만이 다급하게 말했다.
“라르헨의 수도에서 오라를 일으키는 것은 불법입니다.”
“알고 있네. 잠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소드마스터가 자기 기운을 갈무리할 수 없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어 그렇다는 말에 경비대원들이 망설였다. 정석대로라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게 맞지만, 상대가 외국의 귀빈이고 소드마스터였다. 마법사가 없는 지금 강제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무런 말이 없는 우스만을 보다 물러서는 경비대원들이었다. 아직도 분노로 몸을 떨고 있는 그를 향해서 할리만이 입을 열었다.
“전하.”
“…….”
“사람의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상황은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방법이 있나?”
그의 말에 반색하며 우스만이 얼굴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