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사이르카 후작의 기세가 변했다.
“남첩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말했네.”
“대공께서요?”
“그래.”
후작의 변한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실리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이도 나에게 그랬지. 내가 너무 외로워 보인다고. 마음을 둘 곳이 없다고 염려했지. 후작과 비슷한 소리를 하더군.”
“폐하께서도 그 말에 동의하시는 겁니까?”
“뭘 말인가?”
“남첩 말입니다.”
“아, 그거.”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가는 이실리스의 표정을 살피는 사이르카 후작이었다.
“필레르.”
“네?”
이실리스가 사사로이 이름을 부른 것이 처음이었기에 후작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제국의 황제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럼 황제들이 첩에 빠져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역사 또한 아는가.”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네.”
“폐하.”
“부군의 일도 마찬가지일세. 내가 한 사람에게 매여버린다면 이 제국은 어찌하는가. 선황처럼, 나의 아버지를 잃은 선황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면 이 제국에 남아있는 황족이라고는 저 아이 하나뿐일세. 나는 선황과 같은 짐을 나의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네.”
“…….”
“그렇기에 부군을 맞이하는 일에 회의적일세. 보게나. 굳건했던 선황도 아버지를 잃자 무너지셨네. 나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어.”
이실리스의 말에 필레르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필요했다. 저 황제의 옆자리가. 그것은 그의 숙원이기도 했다.
“폐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자네도 내가 건 조건은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자네는 예외일세.”
“폐하.”
“알지 않나. 나는 이 제국의 누군가를 부군으로 맞이하지 않겠네.”
‘나는 싫다는 겁니까?’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말을 삼키는 필레르였다.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좋아하는 여인에게서, 면전에서, 부정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단 자네뿐이 아닐세. 이 제국의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일세.”
“어째서입니까?”
“제국민은 내가 보살펴야 하는 자들일세.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자에게 어찌 마음을 나눌 수 있겠나.”
한탄하듯 뱉어지는 황제의 말에도 마음의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저 고고한 여자를 갖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가 함부로 몸을 열었나?’
차가워지는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휴가 기간에 아이를 가져서 그 아이를 낳았는데 상대는 누구인가. 누구기에 그렇게 쉽게 마음을 주고 몸을 주었나. 속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열을 감추기 어려운 필레르였다.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애써 고개를 숙이는 그를 향해 황제의 말이 떨어졌다.
“그러니 마음을 접게.”
청천 벽력같은 말이었다.
“알고…… 알고 계셨습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데 내 모를 리가.”
“그런데도 왜 한마디를…….”
“말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동안 나를 농락한 거였어?’
전혀 마음이 없다는 이실리스의 말에 필레르가 속으로 울분을 삭였다.
‘그런 거였어?’
계속되는 그의 물음에 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만 물러가게.”
“……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집무실을 벗어나자마자 입술을 짓씹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저의 마음을 짓밟은 황제를. 아니 저 여자를.
“감히 날 가지고 놀아?”
저가 누구인가. 변경백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였다. 젊은 시절, 황제에게 빠져 그녀의 보좌관이 되겠다고 했던 그였다. 그를 말리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국경도 버리고 여기 왔는데 남은 것은 배신감.
‘나를 이 나를……!’
싸늘한 안광을 뿌리면서 필레르가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오라가 피어오르려고 하자 황궁을 감싸는 마력이 그를 짓누르려는 기색이 보였다. 애써 마음을 추스른 그가 결심했다.
“내 앞에서 비는 꼴을 보겠어.”
넓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 여자가 되는, 나에게 몸을 여는 그 순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두고 보자.”
그가 지나간 자리에 차가운 바람이 흘렀다.
* * *
“뭐라고 하였나. 시종장?”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가 독대를 청하였나이다.”
“독대?”
“그러합니다. 폐하.”
“그가 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께서 말씀하신 국혼의 조건에 대하여 들은 것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아…… 그렇군.”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이실리스가 입을 열려던 때였다. 시종장이 다시 말했다.
“베르타스 힐렌튼도 독대를 청했습니다.”
“그도?”
“그러합니다. 폐하.”
“그 둘은 지금 어디에 있지?”
“접견실에 있습니다.”
“둘 다?”
“그러합니다.”
* * *
“행동 참 빠르군 베르타스.”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께서도 그렇군요.”
접견실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시녀들이 내려놓은 차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지만 둘 다 차에 손대지 않았다.
“설마 여제의 부군 자리라도 노리는 건가? 자네?”
“그러는 황태자께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만.”
“내가 그녀의 옆자리를 노리는 것은 유명하지. 나의 일화를 모르나?”
“모릅니다.”
“정말 들어본 적이 없나?”
“전쟁터를 전전하느라 소문에 어두운 접니다. 알지도 못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군요.”
“여제에 대한 나의 사랑을 모르는군.”
“사랑이라니. 일방적인 것도 사랑입니까?”
베르타스가 비웃으며 우스만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움찔한 우스만이었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라르헨의 선황이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그녀의 옆자리는 내 것이었다.”
“그렇군요.”
우스만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그의 웃음에 기분이 나빠진 우스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헛된 꿈은 꾸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누가 할 소릴.”
설전이 오가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접견을 알리러 갔던 시종장이 돌아오자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제께선 뭐라고 하셨는가?”
“폐하께서…… 두 분 모두 만나지 않으시겠답니다.”
“뭐야?”
우스만이 외쳤다. 베르타스도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집무를 보느라 바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언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다고 하는가?”
베르타스의 말에 시종장이 그를 돌아보았다.
“적어도 오늘은 아닐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시종장의 말에 우스만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 쉽지 않을 줄 알았어. 쉽다면 그녀가 아니겠지.”
우스만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바라보나?”
“그녀를 잘 아는 것처럼 보이는군.”
“나만큼 그녀를 잘 아는 사람도 없겠지. 어릴 적에 많이 보았으니까.”
“어릴 적?”
“그래. 어릴 적.”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빛이 변하는 우스만의 모습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질투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녀를 아는 그가 부러웠다.
“꽤 귀여웠지.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해.”
부드럽게 웃는 우스만의 얼굴에서 이실리스에 대한 애정이 피어났다.
‘저 남자도 사랑이라는 걸 하는군.’
그의 얼굴에서 진심이 엿보였다.
“흠, 우리 여제께서 만나주시지 않는다니 기다려야겠군?”
“예?”
우스만의 말에 당황한 시종장이 반문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린다고 가서 고하게.”
“알겠습니다.”
제국의 시종장답게 빠르게 표정을 정리한 그가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시종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난 자네처럼 한가하지 않네.”
베르타스의 말에도 우스만은 꼼짝하지 않았다. 아예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는 그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잘 가게. 우리나라로의 망명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곧 생각하게 될 걸세.”
‘무슨 짓을 꾸미려고…….’
우스만에게 잠시 시선을 던진 베르타스가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우스만이 보좌관인 할리만에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빠르게 다가온 할리만의 귓가에 우스만이 속삭였다.
“힐렌튼에 정보를 흘려. 베르타스가 소드마스터라고.”
“지금 당장 말입니까?”
“지금 당장.”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는 할리만을 보면서 우스만은 생각했다.
‘지금 힐렌튼에 알려야 베르타스를 불러들일 테니…….’
치사한 방법이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를 눈앞에서 치우는 방법이었다. 베르타스가 사라져줘야 편하게 여제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남자가 둘이면 부담스러울 테니 치워야 했다.
‘그러고 보니……. 그자도 있었군. 변경백의 자제.’
우스만은 사이르카 후작과 검을 겨뤄본 적이 있었다.
‘제법 날카로운 자였지.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었어.’
검을 겨뤄보면 보이는 것이 성격이었다. 사이르카 후작은 남에게 고개를 숙일만한 자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베르타스보다 더 위험한 성격을 지닌 자였다.
‘베르타스의 검은 정직하기라도 하지.’
권모술수를 쓰지 않는 자. 적어도 우스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둘 중 더 위험한 자라면 베르타스지만, 사이르카 후작은 궤를 달리하는 위험함이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고개를 들어보니 이실리스가 눈앞에 있었다.
“계속 불러도 듣지 못하더군.”
“언제 왔습니까?”
“방금.”
“실례했군요.”
자세를 바로 하는 우스만이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시종들이 내어놓은 의자에 앉는 이실리스였다.
“접견을 요청한 까닭이 무엇인가.”
“여제께서 거신 조건을 들었습니다.”
“국혼의 조건 말인가?”
“잊고 계신 듯 하지만 선대에 혼담이 오가던 사이가 아닙니까. 우리는.”
“…… 그랬었지.”
정말 잊었다는 듯 말하는 이실리스를 보며 쓴웃음을 짓는 우스만이었다.
“그럼 그동안 제가 보낸 서신은 읽어 보셨습니까?”
“읽어 보았으나 답신은 하지 않았네.”
“읽어 보셨다니 다행이군요.”
“일상 보고서 같은 서신을 왜 자꾸 보내는 것인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묻는 이실리스에게 우스만이 웃으며 답했다.
“나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으니까요. 그대에게.”
“나에게?”
“그렇지요. 어릴 적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내 생에 처음 본 남자아이였지.”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저에게 약하다고 하는 여자아이를 본 것이요.”
“그랬나?”
“그랬습니다. 아마 그때였을 것 같군요. 여제에게 반한 그 순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이실리스가 귀여운 우스만이었다.
“제가 국혼을 넣어달라고 했고, 라르헨의 선황이 허가하셨죠. 아마 선황의 부군께서 비명에 가지 않으셨다면 여제의 옆자리엔 제가 있었을 겁니다.”
“…….”
아무 말이 없는 이실리스를 정염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군청색 눈에 담긴 자신의 얼굴이 꽤 흡족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