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161)

31화. 

“뭐라고?”

“여제가 조건을 걸었답니다.”

“조건?”

“황족이거나 소드마스터이거나.”

“아하하하하!”

소식을 들은 우스만이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넘어질 뻔한 그가 자세를 바로 하자 그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보좌관 할리만이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님 이게 웃기십니까?”

“그럼 당연히 웃기지.”

“네?”

“결국, 여제는 내국인과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소리야. 정확히는 이 라르헨 제국의 귀족과는 몸을 섞지 않겠다는 소리지.”

“그게 왜 그렇게 됩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다행입니다. 황태자님께서 생각하셔서.”

“나도 필요할 때에는 생각한다네. 특히 그게 라르헨의 여제에 관한 일이라면.”

“그 길고 긴 짝사랑이 어련하시겠습니까.”

어릴 적 우스만은 부황을 따라서 라르헨 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라르헨 제국의 선황제와 지금의 여제가 함께한 자리였다. 사냥터에서 만난 선황제의 부군과 우스만의 부황은 서로의 위용을 겨루며 친분을 쌓고는 했는데, 우스만의 부황을 라르헨의 행사에 초대한 것이었다. 그때, 처음 본 여제는 예쁘기만 한 어린아이였다. 우스만이 7세 때의 일이었다.

“여기 내 딸일세.”

“이쪽이 내 아들이네.”

“호오. 귀엽게 생겼군.”

“자네 딸도 그렇군.”

그러나 우스만은 심통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원했던 불새의 꼬리 깃털로 만든 화살을 구할 수 없어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힘을 숭상하는 칼리파 제국의 1인자인 자신의 아버지가 하얗고 여리여리한 라르헨 제국의 사람들에게 반 존대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배알이 꼴렸던 차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리는 것이 좋겠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라르헨의 황제가 제안하자 부황이 냉큼 동의했다. 그때만큼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하얗고 빨간 애랑 뭘 하라는 소리야.’

짜증이 났지만, 꾹 참아넘기는 우스만이었다. 저 멀리 어른들이 사라지자 하얗고 빨간 아이가 그에게 말했다.

“이름.”

“뭐?”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이 쬐끄만 게 어디서 반말이야!”

“쬐끄만…… 게?”

“그래! 내가…… 으아아악!”

전격 마법이었다. 마법을 처음 겪어본 우스만이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우스만을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그에게 말했다.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라더니 별것 아니었군.”

“너! 이…….”

“이실리스!”

멀리서 달려온 라르헨 황제의 부군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내 너에게 마법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아버지.”

“내가 너의 아버지는 맞지만 혼나야 할 것은 혼나야 한다!”

“황제가 될 이는 혼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네가 황제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고! 너는 오늘 혼나야겠다! 약자는 항상 보호하라 일렀거늘!”

“약자요?”

“그래! 이 아이 말이다!”

우스만이 처음으로 받아보았던 약자 취급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더냐. 측은지심을 가져야지.”

“일반인에게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겁니까?”

“너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사용해도 된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가 아니냐.”

“이 아이가 제게 쬐끄만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야?”

이실리스의 말에 고개를 ‘휙’ 돌리는 남자의 시선에 움찔한 우스만이었다. 싸늘한 눈으로 우스만을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실리스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저 아이가 뭘 모르고 한 말이다. 무지가 죄는 아니지 않느냐.”

“황태녀의 앞에서 방만한 죄는 큽니다.”

“그 또한 다른 제국의 황태자이니 한 번은 봐주자꾸나.”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착하구나.”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의 손길에 기분 좋아 보이는 아이였다. 처음 당한 약자 취급이었고 처음 당한 마법이었다. 그리고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너 이름이 뭐야?”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여자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실리스 라르헨. 앞으로 라르헨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다.”

“나는 우스만. 우스만 칼리파야. 너 나랑 혼인하자!”

“뭐야?”

옆에서 듣고 있던 남자가 큰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지만 어린 우스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그를 이긴 여자를 만났다. 그가 늘 말했던 그의 이상형과 부합하는 여인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여자. 그런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 후의 일정에서 우스만은 졸졸 이실리스의 뒤를 쫓아다녔다. 보다 못한 부황이 일정을 서둘러 마무리했지만, 칼리파 제국으로 향할 때까지 우스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칼리파 제국에 도착하고 나서도 우스만은 계속해서 이실리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은 여자였지만 그마저도 마음에 들어찼다. 

“내 여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 정도 콧대는 있어야지.”

할리만은 이 모습을 처음부터 옆에서 보아온 부관이었다.

“그래서 여제와 정말로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황태자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폐하께서 아시면 난리 납니다.”

“난리는 무슨. 이미 부황께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허락하셨습니까?”

“라르헨의 선황이 있었다면 다른 누가 아닌 내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이미 부황과 이 제국의 선황은 서로 서신을 주고받은 사이였어.” 

혼인서가 오가던 중이었다. 국혼을 공표하려던 찰나 라르헨 제국에 이변이 생겼다. 황제의 부군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칼리파 제국과의 혼담은 흐지부지되었고 이실리스는 황위에 올랐다. 

“그때 손에 넣었어야 했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혼담이 오갔을 때, 방심했던 것이 실수였다. 다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을 놓았던 그 순간. 그 찰나가 이실리스와 우스만의 운명을 갈랐다.

“그랬는데 감히……. 어떤 쳐죽일 놈이.”

이글거리는 금안을 감추지 않으면서 분노를 토하는 우스만이었다. 어릴 적부터 고이고이 바라만 보았던 여자였다. 시시때때로 선물을 보내고 서신을 보내며 귀애한 여인이었다. 가끔 부황을 따라 이 제국을 방문했을 때, 사사로이 차 한잔을 하는 정도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런 시간조차도 귀하게 여겼다. 손도 대기 아까운 여인이었는데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이를 이 제국의 후계로 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찾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

“질투에 빠진 남자는 추한 법입니다.”

진정하라는 듯 할리만이 나지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스만은 코웃음을 쳤다.

“죽일 거야. 감히 내게서 그녀를 빼앗아 가려고 하다니.”

“네네. 알아서 하십시오.”

“할리만!”

“듣고 있습니다. 황태자님.”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알아서 뭐 하시게요. 하도 들었더니 지겨워죽겠습니다. 맨날 혼자서 중얼중얼. 이러는 동안 저라면 가서 라르헨의 여제라도 만나겠습니다.”

“그래?”

반색하며 돌아보는 우스만을 바라본 할리만이 어이없어 웃었다.

“보세요 황태자님. 여제가 아이를 낳았어도 변하지 않는 그 마음인데 그럼 노력을 해야죠.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황태자님의 말마따나 그 여자가 이 제국의 사람과 국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거라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황태자님이겠죠?”

“그렇지.”

“그러니 부디 제자리로 돌아오셔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뭘?”

“가장 유력한 후보가 당신 말고 누가 있는지.”

“베르타스.”

“빙고.”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어진 베르타스의 이름에 할리만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황태자님. 그놈이 있지요.”

“그래. 맞아. 그놈이 있었다.”

“생긴 것도 멀끔하게 생겼던데요?”

“그렇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쁘진 않았지.”

“거기다 그쪽도 황족 아닙니까.”

“반쪽짜리지.”

“그래서 오히려 여제에겐 더 좋은 조건이 아닐까요?”

할리만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렇군.”

그랬다. 베르타스 힐렌튼. 힐렌튼 제국의 황위를 이을 수 없는 황족. 그렇기에 라르헨의 여제가 부군으로 맞이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 그리고 소드마스터.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할리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소드마스터가 분명했다.

“황태자님.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쥐어야지. 내 손에.”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막제국에서 살아남는 첫 번째 원칙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할리만. 난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

“유독 라르헨 제국의 여제에게 약해지는 당신임을 알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나를 잘못 보았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우스만을 향해 마주 웃는 할리만이었다.

“그겁니다. 전하. 그게 바로 지배자죠.”

* * *

라르헨 제국의 집무실. 이실리스가 의자에 앉아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대충 마력을 사용하여 서류를 넘기는 얼굴이 심드렁해 보였다.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던 사이르카 후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왜 그러나 후작?”

“무료해 보이십니다.”

“그러하군.”

“잠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겠군.”

사이르카 후작이 일어나서 집무실의 창을 열었다. 지켜보던 시종장이 다과를 준비하기 위해 밖에 있는 시종들을 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실리스가 사이르카 후작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후작. 어째서 국혼을 이야기한 것인가?”

“제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폐하께서는 계속 반대에 부딪히셨을 겁니다.”

“그도 그렇지.”

“그리고 폐하. 국혼은 필요합니다.”

“자네도 내가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왜지?”

“폐하께서 마음 둘 곳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둘…… 곳?”

“그러합니다. 폐하.”

보좌관인 후작에게도 그게 보였다니. 이실리스는 외로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지고의 자리란 본래 외로운 법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충분히 그동안 감내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베르타스를 만난 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시시때때로 그가 생각났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약하게 만들었다. 

“지존의 자리는 본래 외로운 법. 그러나 폐하. 한 사람쯤은 폐하의 외로움을 나누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페일러스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대공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랬지. 나보고 남첩을 들이라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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