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안 됩니다. 폐하.”
느닷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이르카 후작.”
“이렇게 하시면 제국민의 원성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하십니까. 제국민이 불안해할 겁니다.”
“불안?”
“그렇습니다. 이미 알음알음 나라의 결계가 누군가에 의해 파훼 될 뻔했지만, 폐하의 마력으로 보호받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강건하시니 나라의 복이라고 말하나 마력이 없으신 황녀께서 후계로 자리한다고 하시면 분명 말이 나올 것입니다.”
그 말이 제국민이 아닌 귀족들 사이에서 한 말이라는 것은 잘 알겠다. 베르타스의 오라가 그녀의 결계를 파훼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 소문이 부풀려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러니 이렇게 하시면 어떨는지요?”
“오, 후작께서 명안이 있으신가 보오!”
“얼른 말해 보시오!”
주변에서 재촉하는 귀족들의 모습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녀의 눈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머리 같은 자들. 그녀의 마력에 기대어 살아가는 주제에 말은 많은 자들.
‘다 죽여버려야 하나…….’
그녀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사이르카 후작이 입을 열었다.
“국혼을 하시지요.”
“국혼?”
“그러합니다.”
“그것은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닌가.”
“황녀께서 있으시지만,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하셨으니 제국엔 후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국혼을 하시는 것이 마땅한 듯 보입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말을 이어가는 사이르카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는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이곳에 다른 생각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인가.”
베루스 공작이 눈치를 보면서 나서려고 하자 이실리스가 가만히 있으라 눈짓했다. 베루스 공작과 자신이 서로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아직은 들킬 수 없었다.
“그렇다면 좋네.”
이실리스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국혼을 하겠다. 단, 조건은 내가 정하겠다. 다른 나라의 황족이거나 소드마스터만이 나의 반려가 될 자격이 있다.”
“그 무슨!”
“어쭙잖은 영식들을 들이밀 생각은 하지도 말라. 타국 출신의 제국민이든 다른 나라의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 조건은 저 두 개. 그것이 나의 반려가 될 수 있는 조건이다.”
당황한 듯 웅성거리는 귀족들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저들이 후보로 하는 사람 중에 누군가를 그녀의 부군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이실리스의 묘책이었다.
“명 받듭니다. 폐하.”
그녀의 보좌관인 사이르카가 서둘러서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눈치를 보던 다른 귀족들도 그와 똑같이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저들에게 한 방 먹이니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지금 이실리스가 말한 조건을 만족하는 자는 이 제국에 사이르카 후작. 그뿐이었다.
“마침 다른 제국의 사신단들도 와있으니 그들에게 알려라. 내가 부군을 찾는다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다시 몬토 백작이 나섰다.
“여기 있는 사이르카 후작만으로 후보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슨 헛소리인가. 사이르카 후작이 대단한 집안이기는 하나 칼리파 제국의 황족이자 소드마스터인 자와 같을 수는 없지.”
은근히 부추기는 이실리스의 말에 사이르카 후작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후작?”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언제나 그녀에게 순종적인 후작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귀족들이 그 정도만 되었어도 좋았을 것을.’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만 이런 식으로 꼬장꼬장한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도 피곤했다.
“일단 알리게.”
“알겠습니다.”
흩어지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기분이 꽤 괜찮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말한 후보 중엔 베르타스도 있었다. 그가 가장 그녀가 원하는 후보에 근접했다. 황족이나 다른 나라의 황위를 이을 수 없는 자. 알려지진 않았지만 소드마스터인 자.
“기왕이면…….”
“뭐라 하셨습니까, 폐하.”
잘 듣지 못하였다는 듯 묻는 시종장의 말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한걸음 물러서는 시종장을 뒤로 한 채 걸었다. 아주 흡족했다.
* * *
“들었습니까? 각하?”
“뭘 말인가.”
헥터가 베르타스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제가 국혼을 선언했답니다.”
“국혼?”
“네.”
“누구와?”
“후보는 없답니다. 조건이 있다고 하네요.”
“조건?”
“다른 제국의 황족이거나 소드마스터인 자.”
헥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힌 생각이었다.
‘나를 염두에 두고 그리 말하였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베르타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헥터가 경망스럽게 입을 놀렸다.
“여제도 보통이 아닙니다. 소드마스터라니요. 아예 결혼을 두고 장사를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입!”
베르타스가 소리를 높였다.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헥터가 움찔했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 헥터 경?”
“아…… 그러나 사실 아닙니까. 소드마스터와 황족만이 부군이 될 수 있다니요. 조건에 부합하는 자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보다 많은 자가 있지.”
“네?”
“나, 사이르카 후작, 그리고 칼리파의 황태자인 우스만이 있겠군.”
“각하. 설마 소드마스터인 것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니시지요?”
그렇게 된다면 힐렌튼에서 제재가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베르타스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여태까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 둔 것도 그가 아직 소드마스터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생각하기엔 어떻지?”
“뭘 말입니까?”
“힐렌튼의 섭정공이 나은 것 같나, 라르헨 여제의 부군이 나은 것 같나?”
“당연히 힐렌튼의 섭정공이 낫지요!”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여제의 부군이 되면 여제의 기에 눌려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저라면 힐렌튼의 섭정공을 하겠습니다.”
“왜, 라르헨의 여제가 별로인가?”
“무서운 여자 싫어합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다들 저렇게 생각하겠지. 이실리스의 약한 면을 알지 못하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저에게만 마음을 내보이는 그녀를 알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녀의 그런 면을 안다면 달려들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 지금도 이실리스를 마음에 두는 자가 둘이나 되었다. 우스만과 사이르카 후작. 이 소식을 들은 그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달려들겠지.”
그래. 그럴 것이 분명했다.
“누가 말입니까?”
“알 것 없네.”
“치사합니다!”
‘치사하기는.’
그나마 소식을 알려주어 이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소식을 알려주지 않고 이실리스에 대한 험담을 했다면 두고두고 헥터를 굴렸을 베르타스였다. 그런 베르타스의 속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 헥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뭘?”
“나서실 겁니까?”
혹시라도 베르타스가 앞서서 여제의 부군이 되겠다 할까 두려운 헥터가 물었다.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생각은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왜, 입니까!”
속상해하며 외치는 헥터의 목소리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아마 지난날 그 소식을 들었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원했겠지. 이실리스와 어떻게든 엮여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에겐 다른 목표가 생겼다. 이실리스와 함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딸과 함께하는 미래를 보았다. 그렇기에 베르타스는 웃기만 했다.
그의 요요한 미소를 본 헥터가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헥터의 시선이 어떻든 베르타스는 그저 웃었다. 이실리스가 낸 묘책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그것이 잘못하면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곳에 우스만 칼리파와 필레르 사이르카가 있었으니.
“일단 지켜보지.”
“지켜보기는 뭘 지켜봅니까! 그냥 빠집시다, 공작님.”
“그럴 순 없지.”
“왜, 입니까!”
“헥터 경.”
“…….”
“자네의 기분이 어떤지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그런 것이니…….”
“생각은 알겠습니다만 어제의 그 마음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마음?”
“섭정공이 되시겠다는 그 마음이요!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각하께서 섭정공이 되어 힐렌튼을 지배하는 미래를 꿈꿨단 말입니다.”
“그걸 왜 마음대로 꿈꾸나?”
“아예 기대가 없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미 생겨버린 마음입니다. 사내가 이상을 꿈꾸기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죠.”
“그 끝이 죽음으로 다다르는 길일 수도 있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헥터. 한다면 합니다. 죽어도.”
단호하게 말하는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너무 무모해.”
“각하께서 제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내가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네. 부디 그 목숨을 아끼게.”
“왜, 입니까?”
“나의 아이를 위해서.”
“…… 완전히 결심하신 거로군요.”
눈을 빛내며 말하는 헥터에게 베르타스가 웃었다. 그 웃음이 찬란하여 헥터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보았던 베르타스의 모습 중에 가장 생기가 넘쳤으며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했다. 창문을 타고 넘실거리며 넘어 들어온 햇살이 그의 머리 위를 비췄다. 햇볕에 드러난 베르타스의 얼굴을 확고한 결심으로 빛났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헥터가 무릎을 꿇었다. 다시 태어난 황족에 대한 경의였다.
헥터를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황족이되 황족으로 해야 할 역할에서 벗어났던 자가 제 자리로 돌아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