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
“아이라고 했네.”
“언제……. 설마?”
“그 설마지.”
웃는 그를 빤히 바라보던 헥터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그 여자분을 찾으셨습니까?”
“내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있더군.”
“그러면 모시고 귀국하실 겁니까?”
“쉽지 않을 것 같아.”
베르타스의 말에 헥터가 입을 다물었다.
“쉽지 않다면…….”
“그래. 쉽지 않을 것 같아.”
헥터는 이 기쁜 소식을 알리겠다며 밖으로 나갔고 그런 그를 베르타스도 말리지 않았다. 힐렌튼 제국의 황위 따위를 노린 것은 아니다. 딱히 노릴 필요도 없었고 알아서 자멸할 것이 분명한 황가였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딸이 생겼고 그 딸이 라르헨에서 정상적으로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상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힐렌튼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했다.
“일단 황제부터 끌어내리고.”
입 밖으로 나온 베르타스의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황녀는?”
“잘 놀고 계십니다. 이제 제법 옹알이도 하십니다.”
“그렇군.”
이실리스가 가볍게 웃자 그 모습을 본 메릴이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도 웃어주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무표정하게 제 의견을 말하는 메릴을 보던 이실리스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내미니 힘있게 잡아 오는 아이의 모습에 환하게 웃는 그녀였다.
“보십시오. 황녀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이실리스가 웃자 그 웃음이 아이에게 되돌아가듯 햇살 같은 웃음을 짓는 아이였다.
“너는…… 아이를 키웠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언니는?”
“…… 죽었습니다.”
“괜한 것을 물었군.”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메릴이 입을 다물자 이실리스가 황녀를 안아 들었다. 꺄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이 심란하던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폐하.”
문을 열고 들어온 베루스 공작이 그녀에게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가세.”
황녀를 메릴에게 넘겨주고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이실리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걸어가는 둘에게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귀족들의 반응은?”
“좋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베르타스 힐렌튼이 결계를 건드린 것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결계가 라르헨 제국 안에서 누군가에 의해 건드려진 것은, 귀족들에게 불안감을 심었다. 베르타스가 소드마스터라고 알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더 득달같이 들고 일어날 귀족들이었으니. 아무 일이 없어도 황녀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어렵다. 그로 인해 더 어려워졌다.
“공작.”
“네. 폐하.”
“나는 저 아이 이외의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생각이 없었다. 베르타스를 부군으로 둘 수 없는 지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베르타스와 했던 것을 또 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니 더 명확해졌다. 자신은 그럴 수 없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황제의 의무이나 그녀도 사람이었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괴로워하시다가 황위를 물려주고 훌쩍 떠나버린 선대 황제. 어머니인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방책을 마련해 오게.”
“폐하.”
한탄하듯 저를 부르는 베루스 공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방법을 찾아오게. 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흡족하지 않은 답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황제이나 귀족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후계를 세울 수 있다. 황녀가 마력을 타고났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그녀에게 우호적인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잡아 놓은 마법사는 지금 어쩌고 있지?”
“세뇌 마법이 걸려 있어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입니다. 뭘 물어보기도 어렵습니다.”
“몸수색은 하였나?”
“특이점은 없었습니다만……. 아, 팔에 기이한 문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이한 문신?”
“팔에 문신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닌데 그 문신 모양이 칼이라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칼?”
“자그마한 검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칼이랍니다.”
“뱀이라고 했나 자네?”
“그렇습니다. 폐하.”
베루스 공작의 말에 깜짝 놀란 이실리스였다. 검과 뱀이라니. 황궁서고를 뒤져야 할 일이 생겼다.
“직접 보아야겠네.”
“얼른 가시죠.”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기는 둘의 모습 뒤로 석양이 드리우고 있었다. 마법사가 잡혀있는 곳은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 방이었다.
“상태는?”
“나쁘지 않습니다.”
“마법진을 그린 자다.”
“그에 대한 조사도 마쳤습니다.”
피로 그린 마법진을 남겼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해 이동마법을 펼쳤다. 이 나라에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였다.
“피로 그린 마법진은 300년 전 이그나르도라는 마법사가 고안해 낸 것이었습니다.”
“이그나르도라면 흑마법으로 라르헨을 장악하려 한 자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정확히 320년 전. 라르헨 제국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때였다.
“그렇다면 제국에 위해를 끼치려는 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고 봐도 되는가.”
“폐하. 쉽게 단정 지으실 수는…….”
“지금 상황이 이런데도?”
“아마 저들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당장 정신을 차리게 해라!”
마법으로 인해 마법사가 눈을 뜨자 즉시 환영 마법을 걸었다. 이제 저자는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동료들로 볼 것이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더군.”
같은 자리에 있던 수석 마법사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닙니다! 명령하신 대로 황족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미 보고도 올렸잖습니까!”
“그런데?”
“황가의 결계가 강력하여 황제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그 이후엔…….”
기억에 혼란이 오는 듯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명령하신 대로 황녀를 잡았지만 아이는 마력이 없었습니다! 검은 머리였단 말입니다! 전 임무를 실패한 게 아닙니다! 황녀가 마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죽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명령을 들었으나…….”
“들었으나?”
“으아아악!”
혼란스럽지만, 차분히 실토하던 마법사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가 피를 토했다. 이실리스가 다급하게 수인을 맺었지만, 늦었다. 서서히 피가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더 많은 피를 쏟아내었다.
“이런!”
“독!”
“철저하게 조사한 게 아니었나?”
이실리스의 말에 당황한 알뤼르가 우왕좌왕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재촉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죽은 마법사의 입안을 살펴보던 기사가 부복하고 고했다.
“어금니 하나가 부서질 정도로 깨물었습니다. 그 안에 숨겨진 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뇌 마법에 걸린 자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폐하!”
조사관의 다급한 부름에 이실리스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죽은 마법사의 목덜미에서 희미하지만, 빛을 발하고 있는 문양이 보였다.
“저건…….”
“이그나르도의 마법입니다. 저 술식이 걸린 사람이 일정 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술식을 건 마법사가 목숨을 취할 수 있는 마법인데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이야.”
탄식하듯 내뱉는 조사관의 말에 이실리스가 이마를 짚었다.
“같은 마법사에게 이런 무도한 짓을 하다니. 그것도 내 땅에서!”
치솟는 화가 그녀의 마력과 공명하며 황궁이 울었다. 백색의 궁에서 나오는 소리에 신하들도 궁 밖의 제국민들도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진정하소서.”
베루스 공작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궁에서 납치를 당한 것도 모자라 저런 녀석들에게…….’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 생각을 이어서 한다면 황녀가 너무 불쌍해지지 않을까. 하얀 궁이 울음을 멈추지 않자 서둘러 달려온 귀족들이 보였다.
‘저들 중 배신자가 있다는 것인가.’
누구도 믿지 말라는 선황의 말이 떠올랐다. 황제의 자리는 외로운 법. 그렇기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그 말. 잠시 잊고 있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폐하!”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들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애써 마력을 진정시키자 백색 궁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사이르카 후작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 너무 흥분을 하였다.”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되었네.”
염려를 담은 그 말에 손을 내저으면서 그녀가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귀족들의 수가 늘고 있었다. 알현실에 자리한 그녀가 황좌에 앉자, 늘어선 귀족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번 일은 제국의 존폐가 달린 일이다. 그러니 제국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후계를 세우겠다.”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단호한 그녀의 말에 도전적으로 나선 자가 있었다.
“몬토 백작.”
“누구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까. 제가 알기론 이 나라에 제대로 된 황족이라고는 폐하뿐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자네 지금 뭐라고 하였나.”
그녀가 분노를 담아 말했지만 몬토 백작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입을 열었다.
“황녀께서 태어나셨으나 마력을 타고나지 못하셨으니 그분은 황족이되 후계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을 보자 이실리스는 굳어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서슬 퍼런 그녀의 얼굴이 두렵기라도 했는지 다른 귀족들은 몸을 움츠렸지만, 몬토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니 부군을 맞이하심이 옳은 듯합니다.”
“부군이라 하였나?”
“제대로 된 부군이 계시지 않아 황녀께 문제가 있으신 듯합니다.”
“자네가 감히 황족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였나?”
손에서 일어나는 마력을 참지 않고 바로 쏘아 보냈다. 알현실 한쪽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로 휩싸였다. 밖에서 놀란 근위 기사들이 뛰어 들어왔고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 있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귀족들이 혼비백산하여 바라보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 아이가 왜 후계가 될 수 없는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력을 지니지 못한 황족은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를 지키는 마력 결계는 누가 유지합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입을 조심해야 할 걸세. 이 나라를 지키는 마력 결계는 나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자네 영지만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지 않나?”
협박하듯 내뱉어진 그녀의 말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분노를 참는 몬토 백작이었다.
‘감히 백작 따위가 어디서…….’
“들어라. 황녀에게 지금 마력이 발현되지 않았지만, 제국의 역사를 보면 나이가 든 후에 마력이 발현되는 예도 있는 법. 그러니 황녀를 후계로 삼고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