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리스?”
페일러스가 부른 이실리스의 애칭에 베르타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 어릴 적 애칭이지. 이리스가 알려주지 않던가?”
빙글거리는 페일러스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주먹을 쥔 손을 내리누르는 그를 보면서 페일러스가 협탁 옆 의자에 앉았다.
“베르타스. 이리스는 황제야.”
“나도 알고 있어!”
베르타스가 분노를 담아 외쳤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계속해서 듣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황제이기에 그리고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없는 황족이기에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왜인가.
“나보고 어쩌라는 겐가! 그녀에게 말을 해? 같이 떠나자고?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도 아니라면 물러나나? 난 그렇게는 못 해. 내 아이까지 낳은 여자를 놓으라고? 어디서 감히 그런 소리를. 나도 힐렌튼의 황족. 나는 포기한 황위지만 내 자식은 황제가 될 수 있어! 라르헨이 아니어도 돼. 내 나라에서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분노로 몸을 떨면서 외치는 그를 페일러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
숨을 가다듬은 베르타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사랑한 여자가 황제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이는 아니야. 라르헨에서 내 딸을 후계로 삼지 않는다면 데리고 떠나겠다.”
“어쩌려고 그러나.”
“이실리스. 그녀가 아이를 후계 자리에 앉힌다고 했으니 일단 기다리겠어.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
“이리스가 그렇게 둘 리가 없어. 한 번도 뜻대로 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이야.”
“그러니 지존의 자리에 올랐겠지. 그러나 그렇기에 위험한 거야. 그 자리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거 너도 알지 않나?”
“그렇지.”
“라르헨이 이상한 거야. 다른 제국의 황제들은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네.”
‘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황제의 마력이 절대적인 권력을 나타내는 라르헨 제국은 황제의 뜻이 곧 법이었다. 그러나 후계문제는 달랐다. 황족의 마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 마력이 없는 황족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공표하는 그 순간 소요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베르타스였다.
“이리스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네가 아이를 데려간다면.”
“이곳에 있어서 내 딸이 불행해진다면 나는 딸을 데리고 떠나겠어.”
단호한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는 말을 잃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그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굳게 입을 다문 페일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를 구하고 나서 많은 생각에 빠졌다.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계속해서 이런 위험을 겪어야 하는가. 시녀들의 말은 시발점에 불과했다. 그는 이실리스도 그리고 아이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부디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네.”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베르타스를 빤히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웃었다.
“이제 자네가 삶에 의욕이 좀 생긴 것 같군.”
“뭐……. 그렇지.”
“다행이로군.”
“다행인가?”
“자네의 친우인 나로서는.”
“그렇군.”
“그리고 이실리스도 나아졌네.”
“그런가?”
“이실리스는 원래 황위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이야. 그런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으니 나아진 거지.”
“주변을 살핀다고?”
“그래. 라르헨의 황족은 원래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 쓰는 자들. 그래서 황족의 무료함은 제국의 문제였어.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으니 원. 그러니 매번 색에 빠졌지. 유일하게 그 길을 걷지 않은 자는 선황과 이리스야. 그러나 이리스는 달라졌네. 그녀에게서는 무료함이 보이지 않아.”
“달라졌다니.”
“황제의 자리가 아니라 자네와 아이에게 신경 쓰는 것을 보니 조금 인간미가 보이는군.”
“인간미?”
고개를 끄덕이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이상한 표정을 짓는 베르타스였다. 그가 알고 있는 이실리스와 페일러스가 알고 있는 이실리스는 서로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제가 알고 있는 이실리스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가끔 무너질 듯 가녀린 여인이었다.
‘나에게만 감정을 보여주는 것인가.’
내심 안심이 되었다. 이실리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어서. 그녀가 그래도 조금쯤은 자신에게 마음을 내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귀빈이 되었으니 이제 당당하게 여기 머무르겠군.”
“무역 협상을 위해 왔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시간을 끌어 보려고 해.”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군.”
“나의 바람도 그렇네.”
그의 말에 웃음을 남긴 페일러스는 다시 벽 뒤로 사라졌다.
“대공이라니…….”
너무 대단한 사람을 친우로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실리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제 아이를 낳은 여인은 황제였다. 깊어가는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 베르타스였다.
* * *
“각하!”
아침 일찍부터 어제 있었던 소식을 들은 헥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해가 뜰 때가 되어서 겨우 잠이 든 베르타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짜증을 부렸다.
“무슨 일인가 헥터 경.”
절로 좁혀지는 미간을 애써 폈다. 이미 잠은 깼고 다시 잠들기란 요원해 보였다.
“어제 있었던 일 말입니다. 공작님이 이 나라의 황녀님을 구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랬지.”
“그래서 저희를 아무런 혐의 없이 풀어줬군요.”
“풀어줘?”
“그렇습니다.”
베르타스가 사라진 시기와 황녀가 실종된 시기가 비슷하여 라르헨의 마법사들이 그의 일행을 감금했었다. 그러나 베르타스가 황녀의 구출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그들의 구금을 해제한 마법사들이었다.
“그렇다면 무역 협상에도 성과가 생길 것 같습니까?”
“그럴 것 같군.”
그것과 그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았지만 어쨌건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베르타스의 말에 헥터는 만면 화색을 띠었다.
“다행입니다! 공작님이 성과를 이뤄서 힐렌튼으로 돌아간다면…….”
“아, 헥터 경.”
기뻐하며 말하는 헥터의 말을 자르며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네.”
“지금 힐렌튼을 이끄는 황족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네?”
“지금의 황제와 황태자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네.”
“가진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욕심만 많은 그자들에 대해 물으시는 겁니까?”
“재고의 여지가 없나?”
“제 판단에 재고의 여지는 절대 없습니다.”
단호한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헥터.”
“네.”
“자네는 내 편인가? 아니면 힐렌튼의 편인가?”
베르타스의 물음에 헥터는 생각에 잠겼다. 힐렌튼의 편인 것이 베르타스의 편이 아닌 것인가. 앞서 베르타스의 숙부인 황제에 관해 물음을 들었기에 그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저는……. 힐렌튼의 황제보다는 각하의 편에 서겠습니다.”
“그럼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따라오겠다는 것인가?”
“각하께서 잘못된 일을 하실 리는 없으니까요.”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잘못된 일을 한다면?”
“그래도 뭐……. 제 목숨 구해준 분이니 따끔하게 한소리는 하겠습니다.”
“그래도 잘못된 일을 한다면?”
“따르겠습니다.”
계속해서 물어오는 베르타스의 말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헥터가 냉큼 답했다.
‘이거 왠지 그거 같은데…….’
“헥터.”
“네.”
“나는 결심했다.”
“…….”
결연한 눈동자를 하고 베르타스가 쳐다보자 괜한 긴장감에 헥터가 침을 삼켰다.
“이번 무역 협상이 끝나고 힐렌튼으로 돌아가면 내 자리를 찾아야겠다.”
“각하!”
베르타스가 황족의 권리를 찾겠다는 말에 헥터가 기뻐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드는 그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합니까?”
“내가 한 약속은 황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약속. 그렇다면 황위에 오르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아…….”
맹약의 허점을 눈치챈 헥터가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 손으로 황제를 세울 수는 있다는 거지.”
“그러면…….”
“섭정공이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니겠나?”
“각하!”
베르타스의 말에 안색이 환해지면서 헥터가 그를 불렀다. 바라던 바였다. 그가 결심만 했다면 진작에 힐렌튼은 그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다. 저 덜떨어진 황태자와 황제가 아니라.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베르타스가 황제가 되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이 아니냐 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접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베르타스였기에 헥터는 내심 실망했었다.
그가 결심만 한다면 자신은 그를 보필해서 저 황제와 싸울 의향이 있었다. 이것은 헥터 그뿐만이 아닌 베르타스가 이끄는 군대의 생각이기도 했다. 또한 은밀하게 접촉해 온 힐렌튼 제국의 많은 귀족에게 희소식이기도 했다. 지금의 황제의 멍청한 짓에 질려, 황족답지 않은 모습에 질려, 베르타스에게 읍소한 귀족이 몇이던가. 선황의 풍채를 닮아 훤칠한 이목구비와 약한 자를 돌볼 줄 아는 자애로움. 황제라면 지녀야 할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그의 모습에 빠져든 귀족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샘물.
그 샘물 때문에 그가 황위를 노리지 못하게 되자 실망한 사람들이 몇이었던가. 그 사람들이 베르타스에게 찾아와서 어떻게 해 주십사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본 헥터에게는 그의 말이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영토는 넓어졌지만, 항상 가난에 찌들어 있는 힐렌튼 제국의 제국민들. 너무나도 높은 세율에 허덕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헥터 그 자신도 베르타스를 기다리는 힐렌튼의 귀족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제는 더 이상 엎드리지 않는다. 나 베르타스 힐렌튼이 섭정공이 되어야겠다.”
“그렇다면 누구를 황위에 세우실 생각이십니까?”
“내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