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러나…… 여지는 둘 수 있지. 아직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니.”
무너져 내리던 베르타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아스라이 미소 지었다.
“나는 황제이니 그대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자락에 그대의 자리는 마련해두지.”
“정말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해 주는 건가? 이실리스?”
“연극이 아닌가.”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의뭉스러운 말에 베르타스가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이거 재밌군.’
순간순간 변하는 그의 표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으나,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이실리스 그녀도 놀랐다.
‘마음 한 자락이라니.’
황제의 마음은 온전히 제국을 위한 것. 그렇게 알고 있던 제 입에서 마음 한 자락이란 말이 나오다니. 그때였다. 방문 밖에서 들리는 희미한 인기척에 베르타스가 이실리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재빨리 몸을 숨겼다.
“여기 계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사이르카 후작.”
“이 밤에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방에 계시지 않아 찾았더니…, 여기에 홀로 계셨습니까?”
총명한 눈매로 짐짓 주변을 살피고는 이실리스 외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사이르카 후작은 짐짓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아슬아슬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이 어수선하여 이곳저곳 다니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지. 이방은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방이기도 하고.”
“손님도 와계신데, 좋지 않으신 생각입니다.”
“그도 그렇지.”
같은 층에 베르타스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 있었으니 침소로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녀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보았나?”
“귀여우신 분이셨습니다.”
“그것 말고.”
“검은 머리카락을 지니셨더군요.”
“어찌 생각하나.”
보좌관인 사이르카 후작의 의견을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황족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대도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잠시 이실리스의 표정을 살피던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저는 언제나 폐하의 편입니다.”
몸을 숙이며 말하는 사이르카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베르타스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으로 잠시 시선을 던진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사이르카 후작도 걸음을 옮겼다.
둘의 대화를 숨어서 듣던 베르타스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변경백의 아들이로군.”
사이르카. 라르헨 제국의 국경을 지키는 집안이었다. 후작이지만 변경백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공작가와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는 집안. 라르헨 제국의 국경을 직접 공격한 적은 없는 베르타스였지만 그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른 제국 특히 칼리파 제국에서 공격했다가 엎치락뒤치락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대단한 집안인 것은 알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실리스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집안이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일반적인 귀족과 다른. 황제를 보는 눈빛이 아닌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 이실리스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베르타스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여인을 노리는 수컷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친해 보이던데…….”
어떤 관계일까. 바로 문을 열고 나가기에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있었으니 베르타스는 기다리기로 했다.
“베르타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긴 했지만, 페일러스의 목소리임을 알아챈 그가 돌아보았다.
“음? 자네가 여긴 어떻게…….”
“가세.”
벽을 열고 들어온 페일러스를 따라 베르타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한 통로, 구불구불한 미로를 지나 다시 어느 한 부분을 누르니 벽이 열리고 그가 머무르던 숙소가 나왔다.
“여긴…….”
“비밀 통로일세.”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날카롭게 물어오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페일러스가 크게 웃었다.
“자네 설마 이실리스와 내가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건 아니지?”
“이실리스? 황제의 이름을 사사로이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물론!”
“넌 누구지?”
빙글거리는 페일러스를 향해 기감을 세우며 싸늘하게 물었다.
“재밌지만 그만하겠네. 다시 인사하지. 나는 이실리스와 친척일세.”
“뭐?”
“라르헨 제국의 대공이 나란 말일세.”
* * *
페일러스와 베르타스는 전쟁터에서 만났다. 힐렌튼 제국과 칼리파 제국의 국지전이 있던 날이었다. 지지부진한 상태로 전쟁이 이어지던 중 우연히 그의 눈에 들어온 장면이 있었다. 칼리파 제국의 병사들이 라르헨의 인물로 보이는 자를 잡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급습한 군영에서 발견한 것이었기에 베르타스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거기서라!”
말을 달리면서 검을 겨눴다. 호선을 그리면서 내려쳐진 검은 한 병사의 목숨을 앗아갔고 당황한 칼리파 제국의 남은 병사들은 줄행랑을 쳤다.
“괜찮은가?”
묻는 베르타스의 말에 아무런 답이 없는 남자였다. 눈동자가 흐릿했다. 멀리서 칼리파 제국의 병사들이 지원병을 이끌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잡아라!”
베르타스가 남자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말에 태웠다. 정신이 없는 듯 아무런 말을 못 하는 남자를 데리고 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갔다.
“음?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신나게 칼을 휘두르던 헥터가 그를 향해 물었다.
“칼리파 병사들이 데려가길래 구해왔다.”
“누구길래요?”
“알아봐야지.”
남자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온 베르타스는 군의관을 불렀다.
“이분 마법사네요.”
“마법사?”
“여기 손목 보이십니까? 사막제국에서 쓰는 구속구입니다.”
“그럼 구속구 때문에 이 모양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걸 해제하면 될 거 아닌가.”
“이게 그냥 떨어지면 마법무구가 아닌…… 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을 휘두른 베르타스로 인해 놀란 군의관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의 칼이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구속구를 내려쳤다. 밝은 빛이 터지면서 구속구가 말끔히 잘려나갔다.
“괴물…….”
질린 눈으로 베르타스를 바라보는 헥터의 시선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각하, 진짜 괴물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헥터 경.”
남자의 시선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또렷해진 눈동자에 베르타스가 물었다.
“어쩌다 칼리파 제국의 병사들에게 잡혔나?”
“돌아다니는 떠돌이 마법사였는데 제의를 거절했더니 구속구를 채우더군.”
냉소적인 남자의 말에 베르타스가 웃었다.
“베르타스 힐렌튼일세.”
“페일러스.”
“성은 없나?”
“알아서 뭐 하게?”
잘라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손을 내밀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는 해줘야지.”
“싫어.”
“그렇다면 관두게.”
“…… 베르타스 힐렌튼이라고?”
“공작님께 예를 갖춰라!”
헥터가 외치는 소리에 베르타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가 보기엔 남자는 귀족이었다. 남들에게 지지 않는 당당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날 때부터 귀족으로 태어난 자는 태가 다르다. 괜히 헥터가 피해를 볼 수도 있었기에 베르타스는 그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공작님? 아 그…….”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페일러스의 시선에 베르타스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어디서 내 소문을 들었나 보군.”
“그랬지.”
“그렇다면 이제 가보게.”
“뭐?”
“구해 줬으니 이제 가도 되는 것 아닌가?”
“그냥 보내준다고?”
“그럼?”
마법사를 구해줬다. 그 마법사는 무려 라르헨 제국의 마법사였다. 제국법에 의하면 라르헨 제국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를 구명한 자는 라르헨 제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말 그냥 보내준다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렇게 말했네만.”
“…… 혹시 날 만나고 싶다면 이토르트 항구의 붉은 달빛 선술집으로 오게.”
“만날 일이 있을까?”
“인연이 닿는다면 있을 수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사라진 남자. 그게 페일러스와의 첫 기억이었다.
* * *
“대공이라고? 그녀의 사촌?”
“그렇지.”
“그럼 넌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
“그래서 말할 수 없다고 한 거였군.”
“그래.”
말이 없는 베르타스를 빤히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 텐가?”
“뭘?”
“황녀는 마력을 타고 나지 못했고 이번 일로 인해서 그 입지가 흔들릴 걸세.”
“입지가 흔들려?”
“직접 목격했으니 알 것 아닌가. 라르헨의 결계를 자네가 건드렸고 그것을 제지한 것은 황제. 수도와 연결된 각 도시의 결계를 유지하는 것도 황제. 그런데 차기 황제가 마력이 없다고? 말이 되질 않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제국민들과 귀족들의 생각이 그러할 걸세.”
“…….”
“그리고 지금은 어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황녀는 자네를 꽤 닮았어.”
“그리 보이나?”
“보지 못하였나?”
“스치듯 보느라 몰랐네.”
“하아. 이실리스가 그리하였군.”
“그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닐세.”
“자네 성정에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아네만……. 어려운 일이로군.”
한숨을 내쉬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친우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간지러웠다.
‘친우라니…….’
말로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친우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목숨을 구해 줬지만, 그 후로 만나서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고 술이나 몇 잔 한 것이 다였는데 이렇게 친우로 대할 줄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의 인생에서 딸과 친우가 생긴 순간이었다.
“왜 그러나?”
페일러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이상함을 느낀 그가 물었다. 그에게 환하게 웃어주면서 베르타스가 입술을 열었다.
“좋아서.”
“자네, 미쳤나?”
“진지할 틈을 안 주는군.”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나처럼 말할걸세.”
“고맙군.”
“갑자기?”
“그냥 고마워서 말이야.”
“그 고마움은 잠시 넣어두고 이제 어쩔 건가?”
“뭘?”
“황녀 말일세. 자네 딸!”
“모든 결정은 이실리스가 하는 거지.”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가겠다는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답답해했다.
“황제니 그건 당연하지.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일인데 쉬울 리가.”
“그녀가 힘들면 말하겠지.”
“이리스가?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