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누굴까.’
역대 황제들의 기록을 보면 항상 있었다. 황제의 마력을 노리는 귀족들의 반역. 그러나 이번엔 사건이 조금 컸다. 제국민들 모르게 행해져야 했는데 그 불문율을 깬 것이다.
‘감히 황궁에서 황족을 납치하고 죽이려 하다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황녀에게 마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소요를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에 황족 납치라는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베르타스가 그녀의 결계를 건드렸다는 것이 알려지면 마력이 없는 황녀로서는 당연히 후계의 자리에 설 수 없다. 마력은 황족의 존재 이유였다.
“설마 그럴 리가.”
황녀의 존재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한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죽은 유모와 황궁의 그리고 시녀장뿐이었다.
‘아이르가 혼자서 일을 벌였을 리는 없고…….’
당연했다. 그렇게 겁이 많은 자가 혼자서 일을 벌였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파악하지 못한 곳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누굴까…….”
궁금증에 의해 깊어가는 밤이었다. 마음이 심란해진 이실리스는 황녀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옮겼다. 어지러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달이 구름 사이로 가려졌다.
어두워진 황궁 복도의 끝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베르타스였다. 늦은 시간. 황제를 호위하는 사람도 없이 홀로 복도를 걷던 그녀의 앞에 나타난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여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베르타스가 복도 끝에 있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이실리스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은 이 황궁에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복도 창에 걸린 달을 바라보는 그녀의 옆모습이 아련했다.
이윽고 아득하던 그 얼굴에 결심이 섰다. 결연한 표정으로 이실리스가 문을 열어젖히자 그녀 바로 앞에 베르타스가 서 있었다.
“늦었군.”
“생각 좀 하느라.”
“…… 그럼 날 받아들였다고 생각해도 되나?”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너에게 할 말이 있으니.”
“할 말?”
의아한 듯 말하는 베르타스에게 이실리스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픈가?”
검에 베인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야. 흉도 지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다행이로군.”
둘 다 말이 없었다. 어느새 구름은 사라지고 환한 달빛이 둘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를 노린 자는 누구지?”
“아직 조사중이야.”
“하긴. 빠르게 밝혀지긴 어렵겠지.”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
“알고 있어.”
새파랗게 빛나는 이실리스의 눈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알고는 있었다. 그녀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건.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문제였다. 베르타스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이 어두운 밤에 복도를 서성인 것이었다. 그에게 숙소를 내어주고 자리를 정리해준 것까지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황녀께서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면서?”
“붉은 머리가 아니라고 하던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황녀님은 황위를 잇지 못하는 거지!”
“황제께서 후계자로 공표하라고 하셨다던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니?”
“하긴……. 우리 제국에서 마력을 지니지 못한 황제는 없었으니까.”
씻는 도중 침구를 정리하는 시녀들의 말이 들려왔다. 소드마스터가 되면서 남들보다 뛰어난 기감을 가지게 된 베르타스였기에 듣고 싶지 않아도 모든 것을 듣게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던 아이가 마력을 타고 나지 못했다고 저런 취급을 당하다니. 한낱 시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황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일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처음엔 아쉬움이 그다음엔 슬픔, 마지막으로 분노가 솟아올랐다.
‘마도제국인 라르헨에서는 마력을 타고 난 자만이 황제가 된다면 내 딸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베르타스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딸의 운명이 자신과 같아 황위를 이을 수 없다면 그 아이가 겪는 박탈감과 상실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그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기는 하는 것인가. 문득 이실리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설마 그녀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이던 베르타스가 멀리서 걸어오는 이실리스를 발견하고 비어있는 방으로 몸을 숨겼다. 귀빈 대접을 받아 황제와 같은 층을 쓰게 된 것이 천운이었다. 따라 들어온 이실리스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안 되겠지.’
애달픈 마음을 숨기며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황녀?”
“아이는……. 마력을 타고 나지 못했다던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황녀는 황태녀가 될 거야. 내 뒤를 이을 후계가 될 거다.”
“그게 가능한가? 마도제국이라는 곳에서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자가 황위를 잇는 것이?”
“…… 되게 만들어야지.”
잠시 틈을 두고 나온 그녀의 대답에 베르타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가 힘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까지 해서 황위를 물려줘야 하나?”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려는 것이야.”
“황위가 가장 좋은 것인가?”
“그럼?”
물어오는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황위를 포기한 반쪽짜리 황족인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이 이실리스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황제에게 말한단 말인가.
“이실리스.”
“나는 황제.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나도 네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하지만…….”
“황족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부담감이야. 그걸 내려놓으라고 하지는 말아. 그것은 나의 아이도 마찬가지.”
그녀의 말에 베르타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게 직접 ‘너는 황족의 의무를 버렸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아팠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자 망설이는 기색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곧 표정을 바로 한 베르타스가 말했다.
“그렇지. 황족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그렇기에 나는 황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려고 해.”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뜻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수긍하는 베르타스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 무슨 일이 있어도 황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라르헨 제국의 황제라면 더더욱. 다른 약소국가도 아닌 ‘그’ 라르헨이었다. 황족을 중심으로 세워진 제국. 황족의 마력을 먹고 사는 나라. 이 나라에서 유일한 황족인 이실리스. 그녀가 지탱하고 있는 라르헨. 그런 대단한 사람을 베르타스는 가지려고 했던 것이었다.
“어쨌든 황녀를 지켜줘서…….”
“거기까지.”
이실리스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 그것을 가지고 고맙다는 치사를 들을 이유는 없어.”
“…… 그렇군.”
“너의 아이이지만 나의 아이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
“…… 잊지 않고 있어.”
“이실리스.”
낮게 속삭인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을 마주했다. 떨리는 군청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베르타스는 생각했다. 내가 불안한 만큼 너도 불안하구나. 나의 불안은 내가 감당할 만한 것인데 너는 어떠한가. 그렇게 불안해하면서도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나. 나는 너에게 무엇인가. 돌고 돌아 같은 물음으로 돌아온 그였다. 스스로를 애써 다잡으면서 베르타스는 이실리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여기 얹은 짐을 나눌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탄식하듯 터져 나온 그 말에 더욱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군청색의 파도를 일으키면서 잘게 떨리던 그 눈은 이윽고 그의 눈을 피했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원하는 답은 주지 않는 것인가.’
부군으로 맞이한다는 말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확답이면 되었다. 이실리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남자는 나뿐이라는 확답. 그리고 가끔 이런 식으로라도 만나준다는 그 말. 그 말 한마디면 되었는데.
‘기다리겠다.’
아이를 구한 공으로 라르헨 제국의 귀빈이 된 이상 베르타스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실리스의 마음을 얻을 생각이었다. 확고한 믿음. 이토르트 항구에서 얻지 못했던 그 믿음을 얻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곳을 떠날 때쯤 되면 그녀가 스스로 남아 달라고 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황제의 자리는 외로운 법.”
“알고 있어.”
“누군가와 짐을 나누기 시작한다면 그 황제는 약해지기 마련이야.”
“네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말하니 그런 거겠지.”
약한 웃음을 보이는 자신의 말에 그녀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날카로움, 그리고 봄바람이 불듯 따뜻해지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다시 한번 웃었다.
‘귀엽군.’
생각해 보면 알기 쉬웠다. 그녀만큼 감정 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 또한 지고한 자리에 있는 사람의 일이었지만 제가 아는 그녀는 아니었다. 저의 앞에서만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 때문에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잊지 마. 너에겐 내가 있어.”
“헛소리를 하는군.”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늘 생각해줘. 나를.”
“그대를?”
“그러합니다. 황제 폐하.”
장난스럽게 예를 표하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이미 이 몸은 지존의 향기에 취해 노예가 된 몸. 감히 바라옵건대 저를 선택해 주소서.”
“뭐?”
“오늘 밤. 침소에 들려도 되겠습니까?”
이실리스의 손등에 입 맞추면서 그가 물었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그 당혹감을 숨기지 않은 채 이실리스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연극의 한 장면이야. 그대.”
“뭐?”
“재미있는 연극이지. 제국의 황제와 그를 사랑한 기사의 이야기.”
“연극?”
“대사야.”
당황했던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면서 베르타스의 손을 팽개쳤다.
“이!”
“그러나 나는 진심이야. 이실리스.”
내팽개쳐진 손을 꼭 잡으면서 그가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뜨거운 혀가 그녀의 손등을 핥자 이실리스가 몸을 흠칫했다.
“나는 이미 그대가 아니면 안 되는 몸이 되어버린 지 오래. 그러니 나를 선택해 주겠소?”
이것은 본디 기사의 대사였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황제를 향해 절절하게 구애하는 연극의 한 장면.
“그렇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전장으로 나가 그대를 위해 칼을 뽑겠소. 나를 잡아 주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황제에게 말하는 기사의 마지막 대사. 여기에 황제는 어떻게 답했더라.
“나는 그대를 잡을 수 없다.”
그래. 저렇게 답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