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데리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어디 있나.”
“아직 여기까지 오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방해자가 있어서…….”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이 날아들었다.
“비밀 통로까지 열어줬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죄송합니다.”
남자의 말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몸을 숙였다.
“아이는……. 어땠나?”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는 듯 남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아이인데 그렇게 싸고돌았다는 소린가…….”
“아마 후계로 삼으려 한다는 소리가…….”
“헛소리를! 마도 제국에서 마력이 없는 자가 황제라니!”
남자의 일갈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여행을 떠나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오랜 세월을 바라만 보던 여자가 밖에 나가더니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낳는 것도 비밀에 숨겨져 어디서 아이를 낳은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 와 보니 그 아이가 마력도 타고나지 못한 반편이라니.
“페일러스……. 그 자식만 아니었어도.”
이실리스의 대행으로 앉은 페일러스가 펼친 공포정치 때문에 귀족들이 한동안 몸을 사렸다. 황제가 자리에 있었을 때도 삼엄한 감시에 일을 획책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대행 때도 그렇다니. 그리하여 귀족들의 움직임이 제한되었고 그들은 일을 획책하기가 어려웠다. 겨우겨우 신년제를 틈타 일을 저질렀는데 방해자라니.
“베르타스 힐렌튼이라니.”
책상을 톡톡 두들기면서 말하는 남자의 말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니 됐다. 이미 저질러진 일.”
이번 일로 호위가 강화되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황녀는 마력이 없는 이상 의미가 없어.”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황족은 황위를 이을 수 없는 법. 그러니 지금의 황제를 차지해야 했다.
“정석대로 간다.”
“정석이라고 하시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황제의 부군 자리를 채운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귀족들을 소집해라.”
“알겠습니다. 아, 그럼 황녀는…….”
“죽여.”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방을 나서자 명령을 내린 남자, 사이르카 후작이 눈을 빛냈다.
“이실리스.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
책상을 두들기는 그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 * *
천천히 걷던 베르타스는 멀리서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이라고?”
“그러라고 하셨다고.”
“아니, 황족을 어떻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베르타스는 뛰었다. 지쳐서 움직이던 그가 몸에 오라를 둘렀다. 라르헨의 수도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었는지 오라의 운용이 자유로웠다. 어두운 곳에만 있다가 환한 밖으로 나오자 눈이 시렸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그를 발견한 마법사 중 하나가 마법을 수인을 맺는 것이 보여 재빠르게 움직였다.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마법사의 손을 잡아챈 그가 반대편에 있는 마법사의 품에서 아이를 빼냈다. 재빠른 그 움직임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구한 그가 달렸다. 그의 뒤를 쫓아오는 마법사들의 마력과 기사들의 날랜 움직임이 느껴졌다. 대항하기엔 오라가 부족했다. 끝도 없이 걸었더니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이를 안고 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마법사들에게 따라잡혔다.
“어딜!”
마법으로 그의 몸을 잡아채는 마법사에게 오라를 일으키면서 저항했다. 기사들의 칼이 날아드는 것을 가까스로 피했다. 오라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에게 한가지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라르헨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였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실리스의 마력을 내려쳤다.
“내 땅에서 나의 아이를…….”
이실리스였다.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낸 그녀가 서서히 땅 위로 내려왔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태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만신창이가 된 베르타스의 모습이 눈에 담기자 그녀의 군청색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히 버러지 같은 것들이……!”
이실리스의 손안에서 불이 일기 시작했다. 베르타스에게 검을 날리던 기사들은 대비할 새도 없이 마법으로 일으켜진 불에 휩싸여 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폐하! 진정을……!”
뒤늦게 따라온 수석 마법사가 이실리스를 말리려 했다. 이미 기사들은 마법에 의해 불타올랐고 이동 마법진을 그리던 마법사만이 벌벌 떨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홀드 마법을 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도제국인 라르헨에서 황족을 납치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마법사로군.”
라르헨은 이실리스의 결계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제국이었다. 그 결계를 관리하는 것은 황제. 그렇기에 황제는 반드시 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는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애달픈데 그런 아이를, 황족을 납치하다니.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덜덜 떨고 있는 마법사였다. 그녀가 간단하게 손짓하자 마법사가 울컥 피를 토했다.
“가둬라. 자결하지 못하게 구속구를 채워.”
이실리스의 명령에 알뤼르가 움직였다.
“라르헨이 그대에게 빚을 졌군.”
무릎을 꿇고 아이를 품에 안은 베르타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애써 웃었다. 그 웃음에서 희미한 걱정이 엿보여 베르타스는 안심했다.
‘그래도…….’
저를 생각하는 이실리스의 마음이 보여 베르타스는 그저 미소지었다.
“아닙니다.”
“그대는 제국의 은인일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을 애써 삼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은인을 모셔라!”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한 베르타스가 아이를 소중히 안아 이실리스에게 넘겼다. 아이를 내미는 베르타스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비의 품이 좋았던 것인지 잠들어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저 이가 타국의 기사가 아니고 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까.’
잠시 드는 생각에 이내 고개를 젓는 그녀였다. 자신이 황제가 아니었다면 베르타스와 만날 수도 없었다. 베르타스가 타국의 기사가 아니었다면 항구도시로 휴가를 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녀와 그가 만나려면…….
‘아니.’
뻗어 나가는 생각을 멈추면서 이실리스가 치료를 받고 있는 베르타스를 바라보았다. 치료 마법을 걸고 있는 마법사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황궁으로 정중히 모시고 가장 좋은 방을 내어드려라.”
“알겠습니다.”
베르타스와 함께 사라지는 마법사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픈 기억의 조각처럼 엉망이 된 베르타스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눈에 선했다. 회궁 할 때였다.
“폐하.”
뒤늦게 달려온 베루스 공작이 그녀를 불렀다.
“늦었군.”
“결계가 발동되자마자 마법으로 사라지신 분이…….”
“황녀를 데리고 도주한 자들이야. 궁 안에 배신자가 있다. 찾아내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황녀를 찾았지만, 아이를 찾은 이상 조용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모두 잡아넣어야 했다. 그녀의 말에 베루스 공작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샅샅이 뒤져서 찾아와. 찾아서 내 앞에다 무릎을 꿇려라.”
“명 받들겠습니다.”
“제국민들에게도 이 사실을 널리 알려라. 황가에 후계자가 생겼고 그 후계자를 납치하려 한 자들이 생겼다고.”
“알겠습니다.”
“통신석으로 온 제국에 알려라.”
“폐하. 제국의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아직 조금 이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베루스 공작.”
“네. 뜻대로 하겠습니다.”
이실리스가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며 베루스 공작을 부르자 바로 수긍했다.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황녀가 마력 발현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 일을 기점으로 알려질 것이다.
‘어찌해야 하나.’
“붉은 머리였으면 좋았을 것을…….”
“뭐라고 하셨습니까?”
현장을 정리하던 그녀의 호위기사가 묻자 이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붉은 머리가 아니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 아이가 자라서 무엇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이실리스는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국에서 황위에 오르려면 마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과연…….’
나의 아이는 어찌 될 것인가.
아이를 안아 든 이실리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 * *
“황녀의 건강은 어떠한가?”
“강건하십니다.”
아직 아기인데 강건할 리가 있나. 이실리스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황궁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리지만 침착하시고…….”
“됐네.”
저런 말을 듣자고 황궁의를 부른 것이 아니었다. 죽은 황궁의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겉보기엔 이상이 없었다.
“아마 자다가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옆에 있던 시녀가 말을 거들었다.
“놀라?”
“그렇습니다.”
“너는 그런 것을 어떻게 알지?”
“집안에 아이가 있습니다.”
“너의 아이인가?”
“…… 언니의 아이입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시녀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너의 이름은?”
“메릴이라 합니다. 폐하.”
“이제부터 네가 황녀를 돌보아라.”
“네?”
아무것도 없는 시녀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이실리스의 인사는 파격적이었다. 주변의 시녀들이 모두 놀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부터 궁에서 일했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겠다.”
이실리스가 신년제 전에 살핀 영상구 속에서 유일하게 황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던 시녀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시녀는 황녀에게 한 번쯤 관심을 가졌다. 귀여워서 바라보았든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았든 관심은 관심. 그것이 달갑지 않은 이실리스였다. 황녀가 있었던 곳에서 세 사람이 죽었다. 장소가 노출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항상 황녀의 신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네가 이제부터 황녀의 유모다.”
“명을 받듭니다.”
시녀가 공손하게 무릎을 꿇자 이실리스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이것으로 시녀 메릴의 위치는 황궁에서 시녀장 다음으로 높은 직위가 되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직위 상승에 다른 시녀들이 시기 어린 눈으로 메릴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도 능력.’
다른 시녀들의 질투에서 살아남아 황녀를 지킨다면 그것대로 보상해 줄 참이었다. 이실리스는 황녀를 안아 드는 메릴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