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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5/161)

24화.

이실리스가 떠난 뒤 별궁의 숙소로 돌아가던 베르타스의 눈에 한 무리가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수상한 자들의 등장에 베르타스는 바짝 긴장했다. 어디선가 가늘게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러다 들키겠어!”

“그럼 어쩌냐고! 애가 우는데!”

‘애?’

황성에 애가 있을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판단을 마친 베르타스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황성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뒤를 밟았다. 황성이 닫히기 직전에 빠져나간 그들은 인근의 숲으로 몸을 감추었다. 

라르헨의 황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자신의 오라를 억누르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해방감을 느낀 베르타스가 빠르게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는 듯한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검으로 베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려는 남자의 품에서 아이를 가뿐히 빼낸 베르타스였다.

“누구냐!”

당황한 남자들이 그의 주변을 옥죄었다. 주변을 둘러싼 그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아이를 살폈다. 순한 눈망울을 지닌 아이는 이실리스의 군청색 눈동자를 꼭 닮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자신의 그것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한 팔로 아이를 안으면서 오라를 방출하는 그의 모습에 남자들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아이는 데려갈 수 없다.”

“그 아이가 누군 줄 알고!”

마법사가 둘에 기사가 둘. 제 검에 유명을 달리한 자는 기사였다.

‘까다롭게 되었군.’

마법사와 기사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면 더더욱. 베르타스는 어깨에 둘려진 예식용 망토에 아이를 급히 묶었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수인을 맺으려는 마법사에게 오라를 날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서.

“악!”

마법사의 팔이 날아갔다.

“아이는 데려갈 수 없다고 말했다.”

단단하게 아이를 묶은 것을 확인한 그가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예식용 검이라 무딘 날이었지만 오라를 두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검이 버텨준다면……’

문제는 시간이었다. 이 정도의 소란이 일었는데 황성에서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오라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십 분. 그 시간만 버틴다면 아이를 지킬 수 있었다.

“서둘러라! 동시에 친다!”

마법사와 기사 둘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베르타스에 의해서 팔이 베인 마법사는 피를 흘린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자신의 피로 마법진을 그리는 그 모습에 베르타스가 서둘러 몸을 날렸다. 난전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고 그에게 난사되는 마법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염구가 날아오자 오라로 쳐내면서 검을 피했다.

“똑바로 날려!”

화염구에 맞을 뻔한 남자가 소리치자 마법사가 다시 외쳤다.

“뒤로 빠져!”

정확하게 베르타스를 향해서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보고 그가 전신에 오라를 일으켰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베르타스의 검이 부서졌다. 파스스 부서지는 검날을 보면서 그가 몸을 날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피로 마법진을 그리던 마법사의 진이 완성되었고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어서!”

마법사의 외침에 그들이 베르타스를 붙잡았다. 그는 오라를 사용해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수도를 휘감고 있는 이실리스의 결계 때문에 불가능했다. 이미 늦었음을 깨달을 새도 없이 그들은 베르타스를 끌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 * *

“흔적은?”

“여기서 멈췄습니다.”

라르헨의 마법사가 아닌 자의 마력을 따라서 추적하던 그녀의 수석 마법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피가 낭자한 바닥에 이실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진이로군.”

“이동 마법을 사용하기엔 마력이 부족하여 마법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이동했다면 피를 흘릴 일은 없었을 터인데?”

“검이 부서진 흔적으로 보아 누군가 추적을 한 것 같습니다.”

“기억 마법을 시전해라.”

희미하게 보이는 영상에서 베르타스의 모습을 확인한 이실리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표정을 바로 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더욱 가라앉은 그녀의 얼굴에 그녀를 보좌하던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어디로 갔는가.”

“추적하는 데 시일이 걸립니다. 마법사의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기에 마력의 흔적이 옅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녀가 직접 움직인다면 더 빠르게 찾을 수도 있었으나 라르헨을 지키는 데 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 마력을 돌려서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환궁한다.”

추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마법사만을 남긴 채 이실리스가 돌아섰다. 

* * *

수도에서 생긴 문제는 생각보다 빠르게 해결되었다. 해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를 잡아보니 해적이 아닌 다른 제국의 사람이었다. 힐렌튼의 국적을 가진 자였다. 

페일러스가 나섰다.

“이실리스.”

그가 나서자 이실리스는 주변의 사람을 물렸다. 모두 사라지자 그가 급박하게 말문을 열었다.

“베르타스는 아니야. 정말 아니야.”

“왜 그렇게 그자를 감싸는가. 그자가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벌인 짓일 수도 있지 않나?”

냉정한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는 표정을 구겼다.

“그는 그렇게 치졸한 자가 아니야!”

“아니면?”

“…….”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제대로 감쌀 수도 없는 그에 대해 속단하다니. 오만하구나. 페일.”

“아니야. 그자는 그럴 자가 아니다.”

“왜 자꾸 그자를 감싸는가?”

“그를 감싸는 것이 아니야!”

“아니면?”

“너는……. 너는 괜찮나?”

소란을 일으킨 자의 국적이 힐렌튼이라는 것으로 밝혀진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페일러스였다.

“속이려고 하지 마.”

“속이다니 그 무슨…….”

“너는 괜찮냐고 물었어.”

친애하는 그리고 존경하는 사촌이 혹여 마음을 다쳤을까 염려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하긴, 페일은 그 사실을 모르는군.’

베르타스가 아이를 구하려다 적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일부 마법사와 그녀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기억을 돌리는 마법을 함께 본 자들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함구하라 명했으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었다. 마법사들에게 그녀는 신과 같았으니.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걱정된 페일러스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모든 판단은 베르타스 힐렌튼이 나타날 때까지 보류한다.”

“보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군.”

페일러스의 부탁으로 그녀의 의견을 바꾼 것이라는 것을 피력하며 이실리스가 전령에게 손짓했다.

“지금 당장 베르타스 힐렌튼을 찾아라.”

아이를 찾으라는 명을 내릴 수 없었으니 그를 찾으라 명했다. 그가 있는 곳에 아이가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

* * *

어둑한 곳에서 정신이 들었다. 분명 마법사들과 아이와 함께 이동한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의 품에는 아이가 없었고 그는 외딴곳에 떨어져 있었다. 이동마법을 시전하기 직전 그를 잡아챈 마법사가 그의 품에서 아이를 빼낸 것이었다.

“여긴 어디…….”

아무것도 없었다. 앞으로 끝없이 이어진 터널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침음을 삼켰다. 여긴 어디인가. 누군가에게 잡혀 온 것이라면 갇혀있어야 하는 것이 맞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사실 베르타스는 알지 못했지만 이동마법을 펼치다 마력이 부족해진 마법사가 그를 다른 곳으로 날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생각보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어두컴컴한 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떨어진 베르타스는 일단 기감을 열었다. 멀리까지 아무도 없었다. 안전하다고 느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손을 댄 채로 천천히 걸었다. 거친 표면의 바위가 느껴졌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벽에 손을 대고 쭉 걸어가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 그가 어릴 적, 숙부를 피해 도망칠 때 사용한 방법이었다. 

어두운 길을 걸으면서 베르타스는 생각했다. 누구일까. 누가 그의 아이를 데리고 간 것일까. 그의 숙부인가. 아닐 것이다. 그는 아는 바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누구인가. 이실리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며칠째지…….”

끝이 없는 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날짜 감각이 없었다. 소드마스터이기에 한동안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런 일을 또 당할 줄은 몰랐군.”

어릴 적 겪었던 일을 또 겪을 줄은 몰랐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의 아이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닌가. 두려워졌다.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갑자기 든 생각에 베르타스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라르헨의 황손이니 납치한 자들도 함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베르타스 힐렌튼이 없어진 지 이틀이 지났다. 이실리스도 그리고 그녀의 마법사들도 백방으로 황손을 찾고 있었으나 찾지 못했다.

“아직 어리신 분인데…….”

“이틀이나 지났는데 제대로 드셨을까.”

눈시울을 붉히는 시녀들 사이에서 이실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수석 시녀가 시녀들에게 눈총을 주었고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이틀간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그녀였다.

“폐하. 조금은 주무시는 것이…….”

“내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편히 쉬란 소린가?”

버럭 역정을 내는 이실리스의 목소리에 그녀가 움찔하였으나 굽히지 않았다.

“쉬셔야 합니다. 폐하. 그래야 황녀님을 찾았을 때 더 잘 돌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

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황녀를 위해서라는 말에 한풀 꺾인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저었다. 스트레스가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신경줄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 선이 끊어지는 순간 그녀가 어떤 식으로 돌변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진정하려고 노력했으나 진정이 되지 않았다. 벌써 이틀이었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이실리스의 귀에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장의 외침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수석 마법사인 알뤼르가 들어왔다.

“폐하!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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