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161)

23화.

“황녀께서 사라지셨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당황한 페일러스가 외쳤다. 이실리스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면서 시선을 바로 했다. 

“황녀에게 걸어놓은 위치추적 마법은?”

“마도구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황녀의 방에 찾아간 황궁의는 어찌 되었나?”

“그게……”

망설이며 말하지 못하는 신입 마법사에게 페일러스가 재촉했다.

“똑바로 말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어?”

당혹감이 묻어나는 이실리스의 말에 마법사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황궁의께서 들어가시고 나오지 않으셔서 들어갔는데 황녀께서는 사라지시고 황궁의와 유모 그리고 시녀장님이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 계셨습니다.”

“영상석을 뒤져라.”

“이미 시작했습니다.”

“황성의 비밀 통로가 뚫렸다. 지금 즉시 황성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신분패를 확인한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와라.”

“네!”

이실리스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리스.”

“페일러스. 너의 길드를 움직여야겠어. 이정도 사건인데 아무런 소문도 없이 움직였을 리가 없다.”

“알았어.”

“가서 찾아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페일러스가 허리를 숙이고는 바삐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실리스도 서둘러 황녀가 사라진 곳을 향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그녀를 보더니 허리를 숙였다.

“어찌 된 일인가?”

“황궁의가 들어가고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들어왔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피가 낭자한 현장을 이실리스는 꼼꼼하게 살폈다.

“영상구는?”

“이미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황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였군.”

“그런 듯합니다.”

“기억 마법을 시전해라.”

마법사들 대여섯 명이 모여서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억 마법에 의해 영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은 네 명의 사람들이 벽에서 튀어나오더니, 그들은 차례로 황궁의와 유모, 시녀장을 죽이고 유유히 황녀를 안아 들고 사라졌다.

기억 마법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말했다.

“멈춰라.”

기억 마법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게 무엇인가.”

그곳에서는 시녀장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 이상한 모습에 마법사들이 시녀장의 시신을 들췄다.

“여기 있습니다!”

시녀장의 옷 위에 쓰인 글이 있었다.

“아이르?”

“아이르라고 했나?”

이름을 들은 이실리스가 놀랐다.

“그렇습니다. 아이르라고 쓰여있습니다.”

“그자가 감히…….”

아이르. 라르헨 제국의 치부이자 수치. 우연히 황성에 방을 갖게 된 그 자에겐 많은 사연이 있었다. 본디 황족은 피를 이은 사람만이 황족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아이르는 달랐다. 라르헨 황가의 피를 잇지는 않았지만 라르헨의 황성에서 살게 된 자. 이실리스의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낳아온 배다른 자식이었다. 황가의 비사였다.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황가의 치부. 선황은 아버지를 용서했지만 이실리스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분노로 몸을 떨던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황궁의 결계와 공명했고 마침내 황궁 전체가 붉은 기운에 휩싸이면서 결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 * *

비밀리에 음습하게 꾹꾹 닫혀 있던 문, 그 황궁의 숨겨진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이실리스가 포박 마법을 난사했다.

“놀랐잖아.”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황녀는 어디 있지?”

“황녀?”

“그래.”

“너의 아이를 왜 나에게 묻나. 물어도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넌 여기서 죽는다.”

“내가 죽으면 아이는 찾을 수 없다.”

마력으로 아이르의 목을 움켜쥐면서 이실리스가 차게 웃었다.

“내가 너를 살려둔 이유가 뭔지 아나?”

“살려둬?”

“그건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야. 버러지만도 못한 자이기 때문이지.”

그녀의 말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아이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버러지에게 물려본 기분이 어떠한가?”

“내가 왜 아이를 찾지 않고 여기로 온 줄 아나?”

“글쎄?”

“무슨 일을 꾸미더라도 넌 날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력으로 아이르를 짓누르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황녀는 마력을 타고 나지 못했어. 너의 추종자들이 그 정보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나?”

“뭐라고?”

‘그럼 그렇지. 황녀를 데려가서 마력을 갈취할 심산이었군.’

라르헨의 황족은 귀족들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황족이 마력을 발현하여 나라를 보호하는 것은 맞지만 황족의 마력에 짓눌려서 기를 펴지 못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황족의 후계가 생기면 납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납치된 황족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의 마력을 중심으로 유지되는 이상한 국가. 반대로 말하자면 황족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는 곳이 라르헨 제국이었다.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상황에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미 늦었다! 황녀는 우리 손아귀에 있어.”

“과연 그럴까?”

황녀가 사라진 시각은 벌써 30여 분. 그렇다면 이미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왔어야 했다. 황녀를 빌미로 무언가를 얻으려는 연락이. 아직도 소식이 없다는 것은 저쪽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였다. 

“선황의 가장 큰 잘못은 너를 살려둔 것이지.”

“평화롭게 살고 있던 나를 이곳에 가둔 것은 너희들이야!”

“감히! 선황의 부군에게 미약을 먹이고 그를 차지하려 한 죄는 크다. 아이는 죄가 없다며 너를 살려둔 선황의 잘못도 크지.”

“나도 이 나라의 황족이야!”

“너는 황족이 아니다.”

발악하는 아이르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라르헨의 황족은 황가의 피를 이은 자. 엄밀히 말하면 선황의 부군은 황족이 아니니 너는 황족이 될 수 없다.”

“아니야! 나도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손톱만큼의 마력도 없는 네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이실리스가 가볍게 손짓했다. 피를 토하는 아이르의 모습에도 차게 웃으면서 그녀가 다시 말했다.

“너 하나쯤 죽이는 것은 나에게 일도 아니다. 지금까지 너를 살려둔 이유는 너의 뒤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했기 때문이야.”

“말하지 않겠다!”

“물론 너는 그렇겠지. 끌고 가라.”

그녀의 명령을 들은 마법사들이 아이르를 잡았다.

“세뇌 마법을 걸고 배후를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황족에 대한 모독.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지금부터 계엄령을 선포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이르에게 세뇌 마법을 건 마법사들이 그를 끌고 나가자마자 페일러스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인가.”

“황성 밖에서……!”

* * *

황성 밖에서 소요가 일고 있다는 소리였다.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데 하필이면 인질이 베루스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평민들도 다수 잡혀있다는 소리에 이실리스는 페일러스를 재촉했다.

“누구라고 하였나.”

“바다 제국의 해적입니다.”

“그 치들이 여길 왜 와! 수도의 결계는!”

“마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오라를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수도의 결계를 건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검을 들고 움직이는 자들이라 마법사들이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습니다.”

“방어 마법으로도 해결이 어려운가?”

“일전의 복수를 하겠다는 것을 보아하니…….”

“나를 원하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바다 제국의 해적들에게 마법을 난사한 것이 문제였다. 해적들이 집요한 자들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죽어가는 그녀의 병사들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그게 더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뭐라 하던가.”

“황제가 직접 오면 풀어준답니다.”

“미쳤군.”

저들이 원하는 대로 이실리스가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황녀도 실종된 마당에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발걸음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폐하. 잠시 독대를.”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주위를 물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해적들의 억양이 아니야.”

여러 곳을 여행 다닌 페일러스다운 판단이었다.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이 너무 공교롭게 일어나긴 하였지.”

“동시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그녀의 아이를 데려간 것도 모자라 이젠 같은 귀족 자제를 데리고 쇼를 하다니.

“그렇다면 베루스 공작도 한패인가?”

“그건 아닐걸세.”

페일러스의 혼잣말에 이실리스가 답했다.

“그를 너무 믿는 것 아니야?”

“그는 그럴 자가 아니야. 아마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이 사건에 휘말린 것 같군.”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아이가 사라진 것을 감추기 위해 벌인 사건이 틀림없었다. 다른 사건을 일으켜 숲에 나무를 가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틀렸다. 그녀에겐 황녀가 더 중요했다.

“페일러스. 외형 변형 마법을 아나?”

“알지.”

“그럼 이렇게 하지.”

그녀의 속삭임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나머지 마법사들을 불러모아서 수색을 계속한다. 너에겐 이걸 주지.”

이실리스가 제 손에 끼워져 있던 황제의 인장을 그의 손에 넘기면서 말했다. 그 인장에는 숨겨진 마법이 있었다. 그녀의 마력과 유사한 색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대단위 화염마법이었다.

“단 한 번. 내 마력이 소진되기 전,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페일러스가 그녀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자 그것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수고하게.”

이제 아이를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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