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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3/161)

22화.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멀어지는 베르타스의 뒷모습을 잡을 수 없었다. 떠나가는 그를 보면서 이실리스는 손을 뻗었다. 처참해진 얼굴에 그녀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뻗어진 손가락은 허공을 움켜쥔 채 멀어지는 베르타스를 향했다.

“아니야.”

베르타스의 모습은 어느새 정원 풀숲 사이로 사라졌다.

“돌아와.”

이미 멀어진 그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실리스는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러나 자신은 제국의 황제. 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잡힐 수도 없었다. 감정놀음에 놀아날 수도 없는 그녀는 황제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단 한 번은 제 욕심대로 움직여도 되지 않을까.

“바보 같은 짓을.”

허탈감을 담은 그녀의 말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이실리스는 어깨를 축 늘인 채, 몸을 뒤로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채 몇 발짝도 떼지 못한 순간 누군가에게 세차게 끌어안기고야 말았다. 허리를 강하게 잡아 오는 굵직한 손길에 진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향취.

“한 번쯤은 해. 바보 같은 짓.”

귓가에 속삭여지는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제국의 황제…….”

“알고 있어.”

“너는 내 옆에 설 수 없어.”

“그 또한 알고 있어.”

“너를 곁에 둘 수 없어.”

“그 사실도 알아.”

“너는 실망하고 나를 떠나겠지.”

“…….”

더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참담했다. 감정에 휩쓸린 결과가 이것인가. 

“어쩌면 이대로 나를 놓는 것이 너에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야.”

으르렁거리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짙은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몸이 돌려지고 베르타스에게 끌어안긴 이실리스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강한 힘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사실은 무서웠다고. 

아이를 낳는 것이 무서웠고 머리 위에 있는 황관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으며, 마력을 타고 나지 않은 아이를 지키는 것이 더욱 힘에 겹다고 말하고 싶었다. 베르타스의 가슴팍에 기대어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혼란으로 요동쳤다.

“난 베르타스 힐렌튼입니다. 영애는?”

머리 위를 부드럽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실리스 라르헨.”

“라르헨 제국의 영애셨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저와 얼굴을 마주하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그 미소에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도 잘 부탁하네.”

그녀의 말에 허리를 감는 남자의 손길을 느꼈다. 강하게 이실리스를 끌어당긴 그가 그녀의 입술을 찾았으나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이실리스.”

“놓게.”

“왜…….”

“나는 제국의 황제이기에.”

허리를 잡은 손을 풀지 않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어려있어 이실리스는 잠자코 기다렸다.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중얼거렸다.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이리스.”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희미한 마법 결계가 발동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감춰주었다.

* * *

정원의 구석진 곳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그들은 탁자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베르타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분이 괜찮아 보이는군.”

“그래 보였나?”

“…… 그래.”

“그런 것 같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는 그녀의 얼굴을 베르타스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어릴 적 그 아이를 꼭 닮았군.’

자신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준 아이였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자신은 그 전쟁터에서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이실리스 라르헨이라니. 난 정말 대단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군.”

한참을 찾아 헤매었다. 그랬는데 여제라니. 여제여도 포기를 할 수 없다니. 베르타스는 밤의 한 자락을 베어놓은 눈동자에 빠져들어 갔다. 불안함이 요동치는 저 눈을 보고 어떻게 돌아설 수 있을까. 황제의 자리는 외로운 자리.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이제는 그녀가 그러했다. 그랬기에 자신을 향해 냉정한 말을 던지는 이실리스를 두고 돌아설 수 없었다. 걸어가는 자신을 향해 돌아오라는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아이는?”

“오늘 정식으로 소개할 예정이었는데……. 내가 여기 나와버렸으니 기다리고 있겠군.”

“날…… 닮았나?”

“적어도 날 닮지는 않았더군.”

“아들인가, 딸인가?”

“딸.”

손이 떨렸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이실리스와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함께했고 그녀가 어딘가에서 자신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혼인을 시키려는 집안의 의지에 반해서,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를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했다. 그랬는데 사실이었다니. 내 아이라니.

“내 아이야.”

단호한 이실리스의 말에 베르타스는 고개를 들었다.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 아름다운 그림 같은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래. 네 아이지.”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제 말에 동의하는 그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크게 안도했다. 괜히 걱정했군. 한껏 굳은 표정을 풀려는 순간.

“하지만 그 아인 내 아이이기도 하지.”

이실리스를 담은 베르타스의 눈이 소유욕으로 번들거렸다.

“…….”

부정하지 않았으나 긍정도 하지 않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튀어나오려는 침음을 삼켰다. 제가 사절단이 아니어서 그 자리에 없었다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끝까지 알리지 않으려 했나?”

“당연한 것을.”

“이제는 어떻게 할 텐가?”

“…… 너는 나의 부군이 될 수 없다.”

알고 있었다. 무려 라르헨 제국의 여제였다. 여제의 반려 자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황족 위를 포기한 자신과 같은 자에게 주어질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뱉어진 말이 비수처럼 제 가슴을 찌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일그러진 자신의 표정을 본 이실리스가 쓴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지만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미안하군.”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그녀는 제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위치에서 그녀의 부군이 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있는 자리까지 자신이 올라서면 되었다. 순식간에 베르타스는 계산을 마쳤다. 힐렌튼 제국의 멸망 이외에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실리스 라르헨.”

“……?”

의문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이실리스의 앞에 베르타스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신의 기사가 되겠소. 나의 하나뿐인 레이디가 되어주겠나?”

“뭐?”

“나의 하나뿐인 레이디가 되어줘.”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단 한 번뿐인 기사서약을 하는 남자의 몸에서 오라가 넘실거렸다. 라르헨의 결계에 의해 오라가 제한되는 것이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보호 마법을 시행하는 것도 잊을 만큼 놀랐다.

“베르타스!”

자신의 오라가 이실리스를 감싸는 것을 느끼면서 베르타스는 다시 말했다.

“나의…… 레이디가 되어주겠나?”

“이렇게 쉽게 결정할 것이 아니야! 이것은…….”

“내가 너와 아이를 지켜주겠다.”

그의 말에 이실리스의 당황했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베르타스가 속삭였다.

“내가 너와 아이를 지켜주겠어.”

“너는…… 힐렌튼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금방 다녀올게.”

“너는 여기 남아있을 수 없어.”

“멀리서라도 너와 아이를 지키겠어.”

“너는…….”

“그냥 받아들이겠다고 해.”

기사의 존재 맹세는 이미 수백 년 전 사라진 맹세였다. 소드마스터인 기사가 자신의 오라를 걸고 하는 맹세.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는 알음알음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이었다.

“그냥…… 전설인 줄로만 알았는데.”

“마도 제국의 황제인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우습군.”

그녀의 손등에 다시 한번 입술을 가져다 대며 베르타스가 말했다.

“이실리스. 나의 레이디. 내 맹세를 받아줘.”

“아니. 그럴 수 없어.”

베르타스의 손을 밀어내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너무 섣부른 결정이야.”

“아니라면?”

“난 받아들일 수 없네.”

잘라 말하며 일어서는 이실리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 받아들일 수 없어.”

“대체 왜…….”

“기회가 된다면 또 보도록 하지.”

흘끗 시선을 던진 그녀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멀어지는 이실리스를 베르타스는 잡을 수 없었다. 이것이 그와 그녀의 관계였다. 그녀는 그를 잡을 수 있지만, 그는 그녀를 잡을 수 없다.

“오늘만 날이 아니야.”

황성에 머무르는 기간은 길었다. 힐렌튼 제국과 무역 협상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겠다.”

베르타스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 * *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실리스는 베르타스가 있는 정원을 벗어났다.

“이리스.”

페일러스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너는 알고 있었나?”

“아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렇지 너는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내게 그리 말한 것이었나?”

“…… 그래.”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의 뒤에 따라붙은 페일러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리스. 베르타스는…….”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왠지 날카롭게 들리는 그 말에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너…… 내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싸늘하게 말하는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절로 깨물려졌다. 알고 있다. 페일러스가 이런 일을 저지를 만큼 음험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하기엔 말이 안 되지만 우연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넌 두려운 거야.”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정곡을 찌르는 페일러스의 말에 흠칫했다.

“너에게 저렇게 직접 감정을 표현한 자가 여태 없었지. 그래서 두려운 거야. 베르타스의 저 마음이.”

“이해가 되질 않는군.”

“이리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흔드는 그녀를 보면서 페일러스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뿐이야.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잖아.”

“사랑?”

“그래 사랑.”

페일러스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황제인 자신이 싸구려 감정에 놀아나다니.

“아니야.”

가늘게 부정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페일러스가 말했다.

“사랑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야.”

“나는 제국을 우선해야 해.”

“이미 늦었어. 이리스.”

“페일러스!”

“나는 네가 베르타스의 마음을 받아주길 바라지만 그도 여의치 않겠군.”

“뭐?”

“아직도 그의 마음을 재단하고 있는 너를 보니 내 친우가 아까워.”

단호한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의 얼굴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재단한 것이 아니다. 이대로 그가 나에게 기사의 맹세를 했다면 그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해.”

“기회라니. 이미 너에게 모든 것을 다 내던진 사내에게 다른 기회를 주자고?”

페일러스는 느낄 수 있었다. 베르타스는 마지막인 것처럼 이실리스에게 감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절제하던 남자가 저렇게 돌변한 모습에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드는 페일러스였다. 그의 친우는 늘 겉으로 절제하며 살았다. 그의 모습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본심을 내보이지 않다가 내심에 숨기고 있었던 계획을 이루면 어디론가 훌쩍 떠날 사람인 것처럼 살았다. 그 모습이 늘 안타까웠는데 그래서 생에 미련을 갖길 바랐는데 이런 식이라니. 마지막인 것처럼 행동마저 저질러버리다니.

페일러스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려 하지 마. 이실리스.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인한 남자야.”

제 말에 생각에 빠지는 사촌의 얼굴이 보였다. 왠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방해꾼이 등장했다.

“폐하! 황녀께서 사라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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