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161)

21화.

열리는 연회장의 문을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비밀스럽던 기나긴 칩거를 끝내는 시종장의 외침이었다.

이실리스는 연회장의 묵직한 문이 열리자 발을 우아하게 떼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석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으며, 머리 위에 얹힌 황관은 오직 그녀만의 것이라는 듯 요요히 빛이 났다. 그녀의 등장에 놀란 귀족들과 타국의 사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높게 위치한 옥좌에 앉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신년제를 시작하겠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베루스 공작을 필두로 사라졌던 귀족들도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아니! 대공이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대공에게 반항하다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연회에 등장하자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공에게 황제 대행을 맡긴 지도 벌써 1년하고도 절반이 지났군.”

그녀의 말에 사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증폭 마법으로 인해 모두의 귀에 꽂히는 그녀의 음성이었다.

“신년제를 기점으로 제국은 변화를 추구할 것이네.”

“어떤 변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돌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린 이실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자는…….’

당돌한 질문을 한 자 옆에는 그녀가 익히 아는 얼굴의 남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자리하고 있었다. 당돌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변화를…… 추구하시려 합니까?”

‘칼리파 제국민이로군.’

사막 제국의 옷을 입고 등장한 남자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칼리파의 황태자라고 하였나.’

칼리파 제국의 황제는 나이가 많아 가장 유력하게 황위를 이을 것이라고 알려진 남자였다. 저 남자의 용모파기를 기억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신하들이 들이민 부군 후보에 저자가 있었다.

‘국혼을 한다면 나라의 제위를 포기하겠다고 했었지…….’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면 저런 말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이실리스가 그를 보면서 입술을 열었다.

“제국의 후계가 탄생했고…….”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시선이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후계를 기점으로 제국은 변화할 것이네.”

그녀의 말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베루스 공작을 위시한 신하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아무 말도 들은 바가 없는 귀족들은 당황감에 입을 열지 못했다.

“후계? 여제께서는 아직 국혼을…….”

의문을 표하는 우스만의 말을 자르면서 이실리스가 다시 말했다. 

“황제의 핏줄은 황족이 직접 증명하는 것. 제국에서 배우자를 맞이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네만.”

단호하게 뱉어진 그 말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것이 보였다.

‘어찌 이곳에…….’

다른 제국의 사신단이라는 소리는 들었는데, 어쨌건 저 칼리파 제국민은 아닌 듯했다.

“이곳에서 나의 후계의 탄생을 공표하는 바이니. 제국민들에게는 일주일간 세금을 면해 주고 전 제국에 이 소식을 알려라.”

그녀의 말에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통신구를 사용했다. 이제 황족의 후계 탄생 소식이 전 제국에 알려질 것이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데 그녀의 마음 한편은 서늘하기만 했다. 남자와 눈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잔을 집어 들었다. 

“제국의 변화를 위해.”

가볍게 잔을 올려 든 그녀를 따라 연회장의 사람들이 잔을 올려 들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이실리스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신단이 하나하나 그녀의 앞에 나와 신년제를 축하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저를 뜨겁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향했다.

“우스만 칼리파입니다.”

얄궂은 표정에 묵직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제 청혼서를 거절하셨더군요. 폐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냉정한 눈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직은 부군을 맞이할 생각은 없네.”

“그러나 아이는 낳으셨죠.”

“라르헨에서 나의 아이를 언급하는 건가?”

마력을 방출하는 그녀의 기세에 황태자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됐습니다. 다음엔 제 아이를 낳아주시면 되니까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그의 말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래서 싫었다. 왜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인가. 원하지 않는 일을.

“목숨이 여럿인가 보군.”

“사막의 사내가 원하는 여인을 얻으려면 이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노골적으로 말하는 우스만을 보며 코웃음을 치는 이실리스였다.

“폐하의 눈동자와 꼭 닮은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군청색의 다이아몬드를 꺼내 놓으면서 그가 말했다.

“다음엔 이 보석이 폐하의 손가락에 걸려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되지도 않는 말에 헛웃음을 친 이실리스가 손짓하자 자리에서 우아하게 물러나는 우스만이었다.

“힐렌튼 제국의 힐렌튼 공작이십니다.”

그 남자. 저를 집요하게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 베르타스 힐렌튼이 그녀의 앞에 나섰다.

“여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은 굳건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남자를 향해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베르타스 힐렌튼입니다.”

이제야 듣게 된 남자의 이름에 이실리스도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수 없었다. 아무 말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 반갑네.”

행여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을까 염려했으나 다행히 제대로 나왔다.

“제국에서 오르골을 가져왔습니다.”

품에서 보석함을 꺼내면서 그가 다시 말했다.

“아이를 위한 자장가가 들어 있는 오르골입니다.”

베르타스의 눈은 이실리스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이 있기에 참는 것 같았다.

“고맙군.”

“여제께서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는 베르타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스만이 자신의 측근에게 말했다.

“여제가 없어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와라.”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난 1년 반.”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눈빛이었다. 여제가 베르타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지. 베르타스가 여제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지.’

자신의 여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이런 쪽으로 탁월한 감을 지니고 있는 우스만이었다. 길고 긴 짝사랑이었다. 저런 반쪽짜리 황족에게 여제를 넘길 수는 없었다. 전의를 불태우는 우스만의 눈이 새파랗게 빛을 발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 * *

베르타스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여제가 입장하는 그 순간부터 베르타스는 몇 번이나 제 눈을 의심했고 밀려드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배신감? 아니었다. 이것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가 날 속인 것은 아니라고 감정을 애써 내리눌렀다.

‘속인 것은 아니지.’

단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함께 가자는 제 말에 그녀는 어렵다고도 했으니. 

잠시였지만 그때, 그는 자신 있었다. 그녀가 저를 따라오게 할 자신이. 하지만, 제가 품었던 여인이, 함께 살고 싶었던 여인이 저 지고한 황좌에서 저를 내려다볼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오르골을 건네는 베르타스는 흔들리는 손과 시선을 바로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아이라고?’

제 아이가 분명했다. 여자의 성격상 저와 한 일을 다른 자와 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겨우 한 달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겼다고? 저에게 말도 없이 그 아이를 낳았다고? 어디선가 내 자식이 자라고 있었다고! 몰아치는 생각 속에서 베르타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럼 나는?’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었나.

‘아이만 원했나? 내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면서 베르타스가 발걸음을 빨리했다. 도저히 연회장 안에 같이 있을 수 없었다. 얼굴을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따져 물을 것 같았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분노를 담은 그의 걸음에 지나가던 시종들이 흠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 후계? 그게 이유였나?’

부하들을 연회장에 버려두고 온 것은 미안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 자신의 손에서 흔들렸던 그 눈동자, 아름다운 기억.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니. 그냥 후계가 필요해서 저를 만난 것이었다니. 생각이 거듭될수록 기어코 찾아오고야 만 배신감에 몸을 떠는 베르타스였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달이 환하게 비추는 정원으로 나갔다. 연회가 시작되고 나서 정원에 간다는 것은 어떤 은밀한 목적을 위해 서성인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라르헨 제국의 황성이 아니고 밖이었다면 아마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밀려드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날 농락한 것이었나?’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 화가 나면 차갑게 가라앉는 정신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 번쯤은 감정대로 움직여도 될 것을. 그동안의 기억들은 이런 순간에도 그가 제 감정을 표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베르타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굳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조금 전까지 들었던 목소리인데.

“이래서 안 된다고 한 걸세.”

“아이가…….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나?”

몸을 돌려 이실리스를 마주한 베르타스가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눈을 피하는 여제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말을 해! 아이가 필요해서 그런 것이었냐고!”

정원 깊은 곳에서 베르타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래.”

그녀의 목소리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계가 그렇게 필요했나? 그게 이유였다고?”

아무 말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다시 외쳤다.

“그럼 나는?”

제국의 황제였다. 여제였다. 그러나 제게는…….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면서 눈을 마주쳤다.

“나는 네게 뭐였지?”

“…….”

끝내 자신의 눈을 피하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소름 끼치는 적막이 둘을 감쌌다. 숨소리마저 긴장감이 감도는 둘 사이를 바람이 가르고 지나갔다. 

달빛이 둘을 비추었으나 차가운 그 빛 아래에서 둘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실리스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결국,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