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연회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옷들로 뽐낸 사람들의 머리 위에 화려한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상들리에가 있었다. 마법으로 떠 있는 상들리에와 마력석들을 보면서 다들 감탄했다.
“역시 라르헨은 다르군.”
“대단할세. 저걸 유지하는 마력만 해도 얼마인가.”
“마도제국이라 당연한 것인가.”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장식이었다. 베르타스의 일행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기 떠 있는 거…… 설마 영상석입니까?”
연회장 곳곳에 설치된 영상석을 보면서 헥터가 혀를 내둘렀다.
“저 비싼 것을…….”
“엄밀히 말하면 라르헨에서 만든 것이니.”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국이라 불릴 수도 없는 변방에서 온 치들이라 이런 것은 처음 보나?”
우스만이었다. 유려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는 그를 향해 베르타스가 시선을 던졌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긴장감을 자아냈다. 사막 제국의 의복을 입은 우스만은 상체를 거의 드러내고 있었다. 가볍게 둘러진 천은 그의 단단한 근육을 가리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거의 벗고 나왔군.”
“아, 이정도야 뭐.”
턱짓하는 베르타스에게 우스만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스스로의 몸을 훑던 그의 오드아이가 영롱하게 빛나며 베르타스를 향했다.
“별것 아니지 않나. 그리고 남자라면 이정도는 있어야지.”
“머릿속까지 근육으로 가득한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보게.”
“자네가 할 소린 아니군.”
베르타스의 의복에 시선을 던지면서 우스만이 비웃었다.
“옷차림이 그게 뭔가? 우리 제국 옷을 빌려주겠네.”
“되었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까만색이라니. 자네는 아름다움을 모르는군.”
“헐벗은 자보다는 낫겠지.”
비난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베르타스는 시선을 바로 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지 않나?”
갑자기 귓가에 속삭여지는 말에 베르타스가 흠칫하여 우스만을 돌아보았다.
“여제가 국혼을 할 거라는 소리가 있네.”
“국혼?”
이건 좀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국혼이라니.
“그래서 이 신년제를 통해 부군이 될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지.”
“여제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우선이었는데 아니었나?”
“자네는 그것을 믿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베르타스를 향해 우스만이 잔을 들어 올렸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믿지 않을 걸세. 여제가 사라졌다면 이곳의 결계들이 모두 힘을 잃을 테니.”
라르헨 제국의 황성은 황족의 마력으로 보호받는 곳. 주기적으로 황족의 마력을 주입받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결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황족이 살아있다는 의미였다.
“유폐되었을지도 모르지 않나.”
“‘그’ 여제가? 그럴 리 없지.”
“잘 아는군.”
“내가 본 여자 중에 최고였지.”
“최고?”
“그렇게 아름다운 이는 본 적이 없지. 태양을 닮아 타오르는 머리카락에 별밤을 닮아 빛나는 눈동자라니.”
어딘가 몽환적으로 보이는 우스만의 모습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차게 말했다.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군.”
“하! 그녀를 보면 자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걸세.”
“좀 떨어지게. 언제 봤다고 자꾸 자네 자네 거리는가?”
“이제 곧 우리 제국으로 망명할 사이 아닌가.”
“아니야.”
“튕기는 것도 작작하게. 어차피 힐렌튼에 자네의 자리는 없지 않나? 그 무력을 썩히지 말고 우리 쪽으로 망명하라니까?”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은 우스만의 말에 베르타스의 부하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베르타스는 가진 능력에 비해서 너무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능력이 뛰어나기에 더욱 제국 내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능력이 조금 덜 했다면 달라졌을까.
‘이런 사람이 제국의 황족이었다면 나라가 더 좋아졌을 것을.’
아쉬워하는 헥터였다. 그러나 제국의 황족 위를 포기하면서 베르타스는 서약의 샘물을 마셨다. 샘물이 가지는 구속력에 따라 베르타스는 힐렌튼의 황위를 넘볼 수 없었다. 서약의 샘물은 신의 땅에 가야 얻을 수 있는 귀한 성수였다. 제국과 제국 간에 이루어지는 혼약이나 뛰어난 자를 수하로 삼을 경우에 서로에 대한 약속으로 삼키는 것이었다. 샘물을 마신 자가 서약의 내용을 어길 경우 즉사. 목숨으로 구속받는 것이었다. 베르타스를 마지막으로 서약의 샘물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힐렌튼 제국의 황족이나 황위를 넘볼 수 없는 자. 그것이 베르타스 힐렌튼이었다. 자신을 모욕하는 우스만의 말에 베르타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위만 넘볼 수 없는 것이지.’
자신이 황제가 되지 않는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베르타스는 힐렌튼 제국의 멸망을 꿈꿨다. 어차피 멸망할 곳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그를 모욕하는 소리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힐렌튼의 성을 떼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닐세.”
단호하게 나온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부하들이었다. 우스만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베르타스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시종장의 말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황제폐하 드십니다!”
* * *
이실리스는 신년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귀찮구나.”
그녀의 말에 시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정말 귀찮았다. 여러 장식이 달린 머리는 무거웠고 화장한 얼굴은 간지러웠다. 옷도 거추장스럽고 무거웠으며 마지막으로 여태 치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참으셔야 합니다. 폐하.”
시녀장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이게 다 그 남자 때문이었다. 어제 남자를 만난 이후로 남자가 한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도는 그녀였다. 아이를 보아도 남자와 비슷한 머리카락에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아…….”
“피곤하십니까?”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황궁의가 다가왔다.
“아닐세.”
“지금까지 정확하게 열네 번입니다.”
“이제 그만하겠네.”
황궁의에게 시선을 던지면서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안 되다니.”
“곧 달이 뜬단 말입니다.”
다시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자세를 바로 하는 그녀에게 시녀장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이시니 예쁘게 하셔야죠.”
“여제가 예쁜 것은 소용이 없다.”
“황녀일 적에도 그 소리를 하시더니.”
“듣기 싫네.”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시녀장의 말을 잘라버렸다. 이실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시녀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는 어엿한 부모가 되셨으니 더 굳건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네.”
입을 다무는 그녀를 바라보고 묘한 미소를 짓는 시녀장이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군.’
일전의 모습과 달랐다. 시녀장이 자신을 향해 이렇게 길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귀족들은 어느 정도 걸렀지만, 황궁 내의 불순분자들을 제대로 색출하지 못했기에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설마 시녀장이…….’
자신의 정보가 지속해서 다른 자들에게 새어 나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제가 자리를 비운 그 한 달간 난리가 났었겠는가. 다행히 베루스 공작이 중심을 잘 잡아주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베루스 공작에게 귀족의 편에 서서 행동하라고 명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궁은 귀족들에게 점령당했을 수도 있었겠지.
“마력만 뽑혔을 수도 있겠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중얼거린 그녀의 말에 황궁의가 묻자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궁 안에 자리한 간자들을 처리해야 했다. 신년제를 기점으로 황녀를 선보이기로 했으니 그 아이에게 위해를 가할 자들은 모조리 없애야 했다. 결심으로 새파랗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본 황궁의가 고개를 숙였다.
‘황궁에 피바람이 불겠군.’
여제의 후계 혹은 황제의 후계가 등장하면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근 1년 반 동안 황제께서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으셨을 터. 페일러스를 앞세우고 뒤에서 획책한 모든 일에 소름이 돋는 황궁의였다. 옆에 있는 시녀장도 황제의 행방을 몰랐다가 한 달 전에야 알지 않았는가. 그만큼 철저하게 숨겼다. 황족의 탄생과 황제의 공백을.
여제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들이 준비한 모든 일이 궁금해졌다. 일찌감치 황제의 잔혹성을 목격한 황궁의는 그녀에게 납작 엎드렸다. 황제가 황녀일 적, 제 위치를 다른 귀족에게 넘긴 시녀를 처벌하는 곳에 함께 했었다. 황족의 동선은 기밀. 그 기밀을 넘긴 시녀에게 자비란 없었다. 시녀의 가족 그리고 일가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다행인 것은 시녀가 그 자리에서 황녀에 의해 즉사했다는 것. 그리고 그 시녀의 시신을 산에 던져두는 것을 모두 목격한 그였다.
‘한동안 그것 때문에 악몽을 꿨으니 말 다 했지.’
황제의 손속은 가차 없었다. 시녀를 향해서 건 그녀의 마법을 목격한 황궁의는 그날 이후로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아직 그 손속을 보지 못한 자들이나 배신입네 어쩌네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자존심도 없냐는 다른 귀족들의 말이 있었지만, 의술을 행하는 자신에게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일에 대해 딴지를 걸었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선황제의 명에 따라서 오늘도 황제를 보좌하는 그는 황궁 깊은 곳에서 약제를 연구했다. 다른 사람의 마력과 충돌하는 황제의 특이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국가 기밀을 홀로 연구하고 있었다.
“자네는 어찌할 셈인가.”
“저는 황녀님을 모셔야지요.”
“그렇다면 자네가 황녀를 데려오나?”
“그렇습니다.”
“언제?”
“연회가 시작되고 반 시간 후에 가겠습니다.”
“알았네.”
연회장 문 앞에서 간단한 대화를 나눈 황궁의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그녀가 시종장에게 손짓하자 그가 외쳤다.
“황제폐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