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161)

19화.

신년제. 라르헨 제국의 일 년을 시작하는 가장 큰 축제.

“이실리스!”

페일러스가 그녀를 불렀다.

“왜.”

“이번 신년제에는 모습을 드러내야지. 지난번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제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러면 사신단도 받아야겠군.”

“물론. 궁에 외부 인사가 들어오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이제 슬슬 황녀도 소개해야 하니…….”

“오, 마음을 정했나?”

“정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한 황녀를 보호하려면 계속 숨겨둘 수만은 없었다. 제국의 후계가 될 아이였다. 이실리스가 다른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황제가 될 아이.

“자리를 잡게 해 줘야지.”

“마력을 타고 나지 못했다고 불만을 품은 자들이 생길 걸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마법사가 아니어도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의 아이였다. 마력을 타고 나지 못해도 뒤늦게 마력이 발현하는 경우도 있었고 검술에 재능이 있을 수도 있었다. 제국 내의 불온한 자들에 대한 정보도 어느 정도 수집했으니 슬슬 움직이기로 했다.

“하긴. 어찌 됐든 황족이니.”

“황족이 황족이 아닐 수는 없는 법. 다들 무릎을 꿇어야 할 걸세.”

“그렇다면 신년제인가?”

“그렇지.”

신년제에 해야 하는 황제의 업무중 하나는 제국민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자리에 황제가 직접 등장하여 제국민들에게 축사하는 것이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난해 이실리스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불안에 떨었던 제국민들이었다.

“하아. 이제 이 무거운 황관을 내려놓을 수 있겠군.”

“잠시나마 꿈꿔본 황제의 자리는 어땠나?”

한숨을 내쉬는 페일러스에게 웃으며 물었다.

“두 번 다시 앉고 싶지 않은 자리야.”

“최고가 되고 싶다더니?”

“저런 자리는 줘도 싫어.”

“그것 참 다행이로군. 죽여야 할 자가 하나 줄어서.”

장난스럽게 말하는 이실리스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페일러스였다.

“어떻게 처리할 거지?”

“영상석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부족해. 무언가가 더 필요하네.”

“더 기다려야겠군.”

“그렇지.”

일단 꼬리를 잡았으니 발톱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제 황궁을 나갈 건가 페일?”

“여기 남아서 더 할 일이 없으니 나가야지.”

“남아 있어 준다면……”

“싫어.”

단호한 그의 말에 이실리스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냥 해 본 소리라네.”

“넌 너무 외로워. 이리스.”

“황제란 그런 자리지.”

“선황께서는 그래도 부군이 계셔서 덜 했는데…….”

“그만.”

손을 젓는 그녀의 모습에 페일러스는 입을 다물었다.

“베루스 공작과 밀레르 후작을 들이게.”

“전달하지.”

집무실을 벗어나는 페일러스의 뒷모습이 후련해 보였다. 가벼운 그 발걸음이 부러웠다. 황제의 관을 제대로 머리에 얹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힘들어하다니.

“내가 아예 드러누웠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섰겠군.”

그래도 그동안 그가 힘썼기에 한숨 돌릴 수 있었던 그녀였다.

“폐하!”

“폐하!”

“내가 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인 것은 알고 있으니 그만 부르게.”

베루스 공작과 밀레르 후작이 들어서면서 반색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겁니까? 아무 말도 없이 대행이라니오!”

“공작.”

나지막한 그녀의 부름에 찔끔하는 베루스 공작이었다.

“네.”

“황족이 탄생했네.”

“네… 그렇군요. 네?”

화들짝 놀라는 베루스 공작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그…… 폐하께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신 겁니까 지금?”

넋을 놓은 베루스 공작과는 달리 그나마 정신을 차린 밀레르 후작이 되물었다.

“그렇다네.”

“어디 계십니까?”

그녀가 손짓하자 뒤에서 유모가 황녀를 안고 등장했다.

“오!”

가까이 다가가서 황녀의 얼굴을 본 둘 중 베루스 공작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지.”

그가 하려는 말을 받으며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난 이 아이 외에 다른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네. 지금은. 그러니 방법을 찾아오게.”

“네?”

“황녀님을 제위에 올릴 방법 말입니까?”

“그렇다. 황녀를 후계로 지정할 방법을 찾아와라.”

“폐하.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붉은 마력을 지니지 않은 황족이 제위에 오른 적은 없습니다.”

“고리타분한 관습 따위 이제 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

“……. 귀족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밀레르 후작의 말에 눈꼬리를 휘며 웃는 그녀가 차게 말했다.

“그 또한 알고 있네. 지난 1년 반 동안 내가 뭘 했을 것 같나?”

* * *

라르헨 제국의 황성이 열렸다. 황성의 경비병들이 손님을 받기 시작하자, 각국의 사신단이 몰려들어 소란스러웠다. 사신단들을 성문에서 정리하는 관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으로 들어갈 길이 열렸나 봅니다.”

“그런 것 같군.”

늘어선 사람들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헥터에게 말했다.

“신년제가 오늘이라고 했나?”

“네. 오늘 밤에 황궁 연회를 시작으로 신년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입궁해야겠군.”

“그렇습니다.”

“각국의 사신단들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여 외쳤다. 관리인 듯 보이는 자가 안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베르타스 힐렌튼이 아닌가?”

“우스만 칼리파.”

사막 제국인 칼리파 제국의 황태자. 황금을 녹여 만든 듯한 머리카락에 오드아이. 황금색 눈과 푸른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적당하게 볕에 그을린 피부를 가진 얼굴이 베르타스를 향했다.

‘라르헨과 교류가 있을 줄은 몰랐군.’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겨뤄본 자였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인데……’

“여긴 어쩐 일인가?”

“사절단으로 왔군. 자네는?”

전쟁터도 아니기에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베르타스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우스만이 말에서 내렸다.

“…나 또한 라르헨에 변고가 있다기에 왔네만…… 힐렌튼에서 자네를 국경에서 뺐다는 소리가 있었다면 오지 않았을 거야.”

몇 년 전, 그의 제국과 있었던 전쟁에서 베르타스에게 진 우스만이었다. 베르타스의 전술과 우스만의 부재로 인한 승리였다. 그 후 그 땅을 회복하기 위해 베르타스와 몇 번이고 검을 겨뤘으나 쉽지 않았다. 우스만은 제국의 황태자이기도 했고 국경의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기에 잠시 내버려 두었다. 적이지만 서로를 호적수로 인정하는 둘이었다.

“이런 곳에서 보니 색다르군.”

“그렇군.”

친한 척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는 우스만의 팔을 쳐내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나도 자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국경으로 갈 것을 그랬군.”

“여기 있는 것도 황제의 명령 때문인 것을. 그의 말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

침잠된 눈으로 말이 없는 베르타스의 모습을 보면서 우스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하튼 여기서 봐서 반갑군. 다시 말하지만, 우리 제국으로 망명할 생각은 없나?”

“없네.”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면서 희미한 웃음을 짓는 우스만이었다.

“우리 제국의 문은 언제나 자네를 향해서 열려 있으니 생각이 바뀌면 연락 주게.”

훌쩍 말 위로 올라타면서 말하는 그를 보면서 헥터가 이를 갈았다.

“저자가 죽인 우리 군이 몇 명인데 저따위 망발을 하는 겁니까?”

“전에도 같은 말을 하더군.”

“지금이 처음이 아닙니까?”

“당연한 소리를.”

“저걸 가만히 두셨습니까?”

“평범한 자는 아니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헥터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걸음을 옮겼다. 힐렌튼 제국의 차례였다.

“사절단은 모두 다섯 명이 맞습니까?”

“맞네.”

“신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베르타스 힐렌튼. 힐렌튼 제국의 공작이다.”

“공작님 외에 동행자 네 명.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관료가 베르타스에게 5개의 패를 넘겼다.

“이게 뭔가?”

“황성 출입증입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셔야 합니다. 불시에 확인할 수 있으니. 황성의 결계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필요하실 겁니다.”

짧은 설명과 함께 관료는 다음 사람을 향해갔다.

“라르헨은 정말 철저한 곳이군요.”

헥터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베르타스에게 말했다. 그도 놀라는 중이었다. 같은 제국의 이름이 붙었지만 라르헨과 힐렌튼의 위상은 격이 달랐다. 황성에 있는 결계라니. 그렇다면 항상 마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아닌가. 부하들에게 패를 하나씩 나눠주며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행동을 늘 조심하도록.”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누굽니까.”

“그 머저리 같은 황태자가 없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황성 안으로 들어선 그들의 앞에 시종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는 시종을 따라서 일행이 걸었다. 별궁의 한 숙소로 안내받은 그들은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었다.

“연회의 시작은 보름달이 뜨는 시간입니다.”

“알았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이 아름다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서 평화로운 기분을 느꼈다.

“평화롭다고?”

아이러니했다. 다른 제국의 황성에서 평화로움을 느끼는 이들이라니. 풀어 놓은 짐에서 보석함을 꺼내 들었다. 보석으로 장식된 오르골. 베르타스가 라르헨 제국의 황제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제국의 문을 닫아 걸은 것은 황손 때문임이 분명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옆에 있던 헥터가 말하자 베르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황성을 걸어 잠글 이가 아니지.”

“전에 했던 내기는 유효합니까?”

“당연하지 않나.”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내깃돈을 경에게 주고 이 오르골은 버려지겠지.”

“하긴 아이의 자장가가 기록된 오르골을 여제가 가질 리는 없으니까요.”

날카로운 베르타스의 감이 이번에도 맞기를 바라며 헥터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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