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실베스트 후작이 베르타스에게 말했다.
“그럼 황제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간다고 하였나?”
“그렇습니다.”
확실했다. 베르타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생각이었다. 일전에 황태자가 저지른 외교적 결례를 그에게 미룰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벌써 저만큼 멀어지는 실베스트 후작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뭡니까 지금?”
옆에서 말을 듣던 헥터가 베르타스를 보면서 물었다.
“나보고 협상을 마무리 지으라고 하는군.”
“그건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는 겁니까 지금?”
“총 책임자라더군.”
“총 책임자요? 누가요, 공작님이요?”
“내가.”
“하아…. 저 치들이 이제 미쳤나 봅니다.”
“그런 것 같군.”
제가 저들에게 믿음을 주어도 너무 주었다. 대체 뭘 믿고 저에게 이런 일을 맡긴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베르타스였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헥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협상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것을 빌미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생각에 빠진 베르타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헥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르헨 제국과 교류가 끊어진 지 1년 반. 힐렌튼 제국에서는 마법 관련 물품의 부재로 인한 생활의 불편이 일고 있었다. 사소하게 물을 데우는 마력석부터 크게는 나라를 지키는 데 사용되는 마력석까지 부족했다.
제국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하였고 제국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기 전에 귀족들이 난리였다. 베르타스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힐렌튼 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라르헨 제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황제가 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수를 쓴 것이었다. 성과를 낸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고 내지 못한다면 그것대로 트집을 잡아 일을 벌이려고 작정했다. 힐렌튼 제국 내에서 베르타스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에 위기감을 느낀 황제가 궁여지책으로 수를 낸 것이다.
“견제라니……”
“공작님이 무섭긴 한가 봅니다.”
“이렇게 되면 라르헨에 발이 묶이겠군.”
오히려 잘 되었다. 여자를 찾았으나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으니 제국에 머무르는 동안 설득을 해 볼 참이었다.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던 베르타스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군청색이었지.’
눈동자 색깔이 바뀌고 나니 더욱 기시감이 느껴졌다.
“헥터 경.”
“네.”
“라르헨 제국에 또 다른 황족이 있나?”
“또 다른 황족이요?”
“군청색 눈동자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람은…”
“라르헨 황족이죠.”
황실의 숨겨진 핏줄인 건가. 그렇기에 나설 수 없는 것인가. 고민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황실의 숨겨진 황족이라면 그의 마음을 거절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가까이할수록 점점 위험해지겠지. 단호하게 자신을 잘라낸 여자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숨겨진 황족이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요 공작님. 라르헨에 숨겨진 황족은 없습니다.”
“뭐?”
“없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
“현 황제를 제외한 직계 혈통은 없습니다. 단지 방계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헥터의 말에 다시 생각에 빠지는 베르타스였다. 그렇다면 여자는 누구인가. 정답을 근처에 두고 계속해서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
“라르헨의 황족이지요.”
“거기에 마력이 붉은색이면……”
“라르헨의 여제입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라르헨의 여제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마력을 운용하는 것을 보았으나 그것이 붉은색은 아니었으니 아마 아닐 것이다.
“아니겠지.”
“뭐가 말입니까?”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네?”
중얼거리는 베르타스에게 헥터가 물어 왔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제가 대체 왜 그 시기에 항구에 있었단 말인가.
“나도 참……. 헛생각을 다 하는군.”
덮쳐오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느새 라르헨 제국의 황성 앞이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위기를 넘겨야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힐렌튼 제국의 사신단일세.”
어떻게 보아도 무장으로 보이는 베르타스의 등장에 황궁을 지키는 이들이 바짝 긴장했다.
“신분패를 보여주십시오.”
베르타스와 일행의 신분패를 넘기고 그는 저 멀리로 시선을 던졌다. 하얀 궁. 이 앞에서 돌아선 일 년 반 전을 기억하면서 그가 침잠된 눈으로 궁을 살폈다.
“신분은 확인되었지만, 궁 안으로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뭐라고?”
“무슨 일 때문인가.”
발끈하는 헥터를 저지하며 베르타스가 물었다.
“현재 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신단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받을 것 같은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른 제국의 사신들도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실망한 기색을 내보이는 베르타스와 일행들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경비병이었다.
“수도의 여관에 짐을 푸시고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다른 제국의 사신단도 도착하셨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제국?”
“네. 신년제를 보러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신년제?”
“제국의 신년제가 열리는 기간입니다. 각 국에서 사절단이 온 것도 그 이유죠. 힐렌튼 제국의 사절단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맞네.”
물론 그런 이유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베르타스가 답했다. 생각보다 쉽게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
“지금은 여의치 않아 궁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지만 신년제엔 다릅니다. 기다리시면 길이 열릴 것 같습니다.”
친절하게 조언하는 경비병의 말에 베르타스가 주머니를 던졌다. 손안에 들어온 주머니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면서 경비병이 말을 이었다.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할 일은 하였으나 친절을 베푼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마음일세.”
“받을 수 없습니다.”
경직된 표정으로 말하는 경비병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감탄했다. 라르헨 제국의 저력이었다. 황궁을 지키는 수문장이라는 자부심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내가 무례를 범하였군.”
“아셨다니 되었습니다.”
딱딱하게 말하는 경비병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뒤에서 놀란 듯 숨을 들이켜는 헥터의 소리가 들렸지만 베르타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자는 늘 매력적인 법이지.”
“감사합니다.”
경비병조차도 제 할 일을 하는 나라. 라르헨 제국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제국은 제국인가 봅니다.”
“부럽군.”
“뭐가 말입니까?”
“저런 충성심을 지닌 자들이 있어서.”
“에이. 힐렌튼에도 있을 겁니다.”
‘아니. 없었지.’
* * *
신년제. 라르헨 제국의 가장 큰 축제의 장이었다. 올해의 가장 큰 화두는 작년에 불참했던 여제께서 신년제에 참석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였다.
“하실걸세.”
“못 하실걸세.”
“하신다니까!”
“그랬다면 벌써 모습을 드러내셨겠지.”
“아니라고!”
술집 여기저기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제가 실종된 것이 맞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타스 일행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여제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가 확실한가 봅니다.”
“입조심 하게.”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였다. 괜한 시비에 걸릴 수 있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내일이던데요. 신년제가.”
“그렇다면 내일 문이 열리겠군.”
“그럴 것 같습니다.”
헥터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술을 넘겼다.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닙니까?”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휴식을 취할까.”
그의 말에 다들 동조하며 술잔을 들었다.
“하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습니까.”
“맞습니다!”
술잔을 서로 부딪치며 건배하는 이들의 표정이 밝았다.
‘제국에서 인정받아야 할 기사들이 제국 밖으로 나와야 쉴 수 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쓴웃음을 술과 함께 넘겼다. 대접받아야 할 이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베르타스. 그를 따랐기 때문에.
“또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건 아니죠?”
베르타스의 눈치를 살피던 헥터가 입을 열었다. 시선을 던지자 베르타스의 어깨를 두들기는 헥터였다.
“각하 탓이 아닙니다.”
“그러한가.”
“정말 아닙니다. 저는 제국으로 돌아가도 늘 구박만 받는 사람이라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각하!”
“저도요!”
헥터의 말에 동조하는 부하들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웃었다. 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도 존재할 수 있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전우. 여기 모여있는 이들이 그랬다.
“괜한 생각을 하였군.”
“맞습니다. 허튼 생각하지 마시고 그 여자분이나 찾읍시다!”
“찾읍시다!”
술잔을 들어 탁자를 ‘쿵쿵’ 내려치는 부하들의 모습에 그가 술잔을 들었다.
“오늘은 마음껏 마시게. 내가 사겠네.”
“어?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희 돈 없습니다!”
“마시고 죽자!”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술을 넘겼다. 정신없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 되었다. 술에 절어있는 부하들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베르타스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환하군.”
내일 있을 신년제를 기념하는 불빛이 밝혀졌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불빛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상념에 잠겼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라르헨 제국은.
‘그녀가 같은 곳에 있어서 그러한가.’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동안 여자를 찾아다니느라 날카로웠던 분위기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겠지.”
여제는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했다.
“그래. 아닐 거야.”
스스로에게 확답을 하며 베르타스가 걸음을 옮겼다. 밝은 불빛이 어두운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어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