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161)

17화.

이실리스는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내일이면 힐렌튼 제국에서 사절단이 올 예정이었기에 오늘이 자유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페일러스에게 차일피일 일을 맡기기는 했으나 최종 결정권자는 그녀 이실리스였다. 페일러스의 모든 서류는 이실리스를 거치는 서류였고 얼마 전 확보한 영상석으로 인해 제국 내에 존재하고 있던 불순분자들도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아이의 이름을 가장 먼저 지어줘야겠어.’

그리하여 나오게 된 수도의 거리. 이곳에서 가장 흔한 이름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이름을 흔한 것으로 지어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으니.’

이런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 그녀였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달랐다. 더군다나 아이가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아이였기에 더욱더 걱정되었다. 혹여 너무 약하여 병이라도 걸릴까 염려되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하는 황궁의가 있었지만 이실리스는 만의 하나라는 경우도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다 이러한가.’

저를 가졌을 때, 선황도 저와 같았을까. 아버지도 지금의 저와 같았을까. 궁금했다.

“찾았다.”

손목이 잡히면서 몸이 돌려졌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이실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였다. 잊어보려 했으나 잊히지 않은, 지워보려 했으나 지워지지 않은 그. 아이의 아버지.

“누구인데 감히.”

“피차 아는 사이이니 시끄럽게 하지 말지.”

“날 아는가?”

“안다면 알 수도. 모른다면 모를 수도.”

선문답하는 남자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너……. 눈동자 색이…….”

“너라니. 그런 실례되는 말을.”

“정말 내가 아는 그 여인이 아니란 말인가?”

“이 손부터 놓으시게.”

이실리스의 말에 화들짝 놀란 베르타스가 손을 놓았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고개를 숙이는 남자의 모습에 이실리스가 손을 저었다.

“됐군.”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고 해서 바로 모른 척할 줄은 몰랐다.

“아는 이와 닮아서 실례하였습니다.”

“괜찮소.”

“그……. 실례가 안 된다면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안 되겠군.”

“그렇다면 시간을 내어 주시겠습니까?”

“그도 어렵겠군.”

“보리빵은 아직도 드십니까?”

“그건……”

아차 싶었다.

“역시 너였군.”

일단 모른 척하려고 했으나 그 계획이 틀어졌다. 이실리스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면서 발을 옮기려고 했다. 다시금 강하게 쥐어오는 손에 이실리스가 마법을 일으켰다. 강한 스파크가 튀었음에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손에 오라를 두르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잡겠다는 의지에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옮기지.”

“그러다 또 도망가려고?”

“안 갈 테니. 자리를 옮기지.”

닿아오는 시선을 피하면서 그녀가 말하자 남자가 그간의 마음고생이 다 달아난 듯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손을 꼭 잡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 * *

“1년 반이었어.”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남자를 향해서 이실리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널 찾은 시간이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고.”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하고 시작한 관계 아니었나?”

가까운 찻집에서 차를 한 잔 넘기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말했다.

“왜? 우리의 한 달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

“살아온 인생 중 겨우 한 달이야.”

“너는 정말!”

분노에 찬 남자가 외치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날 버리고 가서 좋았나?”

“뭐?”

“날 벗겨 먹고 튀니 좋았냐 이 말이야.”

남자의 말에 주변에서 그녀와 남자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수근거리는 소리가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여자가 남자를 먹고 튀었다고?”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귀족들이라 그런가?”

“아니, 저 남자는 부끄럽지도 않나?”

황제는 부끄러움이 없다. 남자의 말에도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았냐니. 무슨. 정해진 시간이 지났으니 제 자리로 돌아왔을 뿐.”

“그렇다면 다시 만났으니 계획이 바뀌는 건가?”

“그럴 리가.”

그녀의 말에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남자가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내 목걸이는 어디에 두었지?”

“목걸이?”

“내가 너의 로브 안에 넣어놓은 그 목걸이.”

“……. 그건 왜?”

“봤군.”

남자의 말에 다시금 아차 싶었다. 왜 이 남자를 상대할 때면 이렇게 허점을 보이는 것인가.

“봤는데도 그냥 갔나?”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나? 우리가 보낸 그 시간은?”

그의 말에 이실리스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이미 아이를 낳아서 아이가 있다고? 너와 함께한 그 시간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찬란했던 시간이라고? 황제인 나에게 사람임을 느끼게 해 줬던 시간이라고? 아니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너와 함께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이었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자신은 황제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는 황제. 망설이는 그녀를 알기라도 한 듯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에게 와.”

“뭐?”

“나에게 오라고. 뭘 걱정하지?”

“가면? 감당이나 할 수 있나?”

“못할 것은 뭐지? 너 하나 책임지지 못할 내가 아니야.”

자신감 넘치는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가 헛웃음을 쳤다. 제가 누구인지 모르니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넌 날 감당하지 못할 거야.”

“그러는 너는?”

“뭐?”

“너는 내가 누군지 아나?”

“…….”

“피차 서로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 그러니 내게 와.”

“그럴 수는 없어.”

이실리스의 말에 남자가 눈을 감았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까지인 건가.”

“여기까지.”

남자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이실리스는 고집스레 얼굴을 돌렸다. 저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남자를 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이실리스는 찻집을 나섰다. 창문 너머로 남자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아렸다.

‘이게 마음이 아프다는 건가.’

한켠의 허전함을 느끼며 황성으로 돌아온 그녀였다.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제국의 황제였다. 이 제국이 바로 그녀였다. 남자와 떠날 수 없었다.

“벌써 회궁하셨습니까 폐하?”

시종의 말이 들렸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손을 내저으면서 사람을 물린 그녀는 고심했다. 마음이 심란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을 깜박했군.”

아이의 이름을 짓기 위해 평범한 이름을 알아보러 간 것이었는데.

“딸이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 좋아할까.

“말을 해 줄 걸 그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말하지만 절대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시 볼 일은 없겠지.”

* * *

베르타스는 상실감에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이게 끝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가 아는 여자는 저런 식으로 회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라르헨 제국의 수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머무르는 동안 계속해서 다시 찾고 만나고 설득하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나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마.”

처음으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찾았는데 그 사람이 나와 함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잡아야지.”

그래. 잡아야지. 베르타스는 주먹을 꼭 쥔 채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놓아주겠다.

“그러나 다음에 만났을 때는 아니야.”

그의 눈이 결연한 의지를 담고 새파랗게 빛났다. 

* * *

숙소로 돌아가려는 베르타스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헥터였다.

“각하!”

“헥터 경.”

“아니 우리 각하 표정이 왜 이러실까!”

“어디 가나?”

“술 한잔 하러 갑니다. 같이 가시죠!”

잡아끄는 헥터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헥터 경.”

“네?”

“내가 왜 싫을까?”

“갑자기요? 흠, 혹시 그 여자분을…….”

“만났지.”

“싫다고 하십니까?”

“정확히는 내게 오기 어렵다고 했지.”

베르타스의 말에 헥터가 생각에 잠겼다.

‘싫다는 것이 아니라 어렵다.’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정?”

“싫다는 것이 아니라 어렵다면서요.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가…….”

“이곳에서 다시 만나셨다면 당연히 여기 있을 것 같으니 기다려봅시다.”

“…….”

아무 말이 없는 베르타스에게 술을 건네면서 헥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한잔하고!”

그의 말에 따라 술을 넘기자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이 썼다. 다음 날 아침. 베르타스는 힐렌튼 제국의 재무대신을 만나고 있었다.

“공작님.”

“실베스트 후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말 오랜만이로군.”

정확히는 몇십 년 만이었다. 자신이 제국의 황태자 자리를 버리고 저자도 제국의 충신 자리를 버렸으니.

‘부황을 배신했으니……’

지금의 황제에게 아부하여 중책을 맡은 실베스트 후작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런 이에게 외교를 맡기다니 숙부도 한물갔군.’

냉정하게 평가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라르헨의 황성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거 받으시죠.”

“이게 뭔가?”

“무역 협상을 하라는 황명입니다.”

“황명?”

후작이 내민 서한을 받아든 베르타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무역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을 시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분명했다.

‘덫에 걸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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