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이의 탄생은 경이로웠다. 물론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죽을 뻔한 적도 허다했으니.
아이를 낳고 나서 바로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몸이 약해져 제 몸을 추스르는 데 많은 시간이 흘렀고 걸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아이를 데려온 황궁의였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손목.”
손으로 수인을 그리는 마법사들에게 손목은 가장 중요한 부위였다. 그것을 아는 황궁의가 아이를 보겠다는 이실리스에게 아이를 정말 보여주기만 하고 안아보지는 못하게 했다. 아이는 황가의 붉은 머리를 타고나지 못했다. 남자의 검은 머리를 닮은 아이의 모습에서 이실리스는 다시금 남자를 생각했다.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아이.
붉은 마력을 타고나지 못한 이 아이에게 어떻게든 길을 열어줘야 했다.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으면서도 이실리스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흐르고 아이 앞에 선 이실리스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안아보셔도 됩니다. 폐하.”
“너무 작군.”
눈을 말똥히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서 이실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짓자 그녀의 손가락을 움켜쥐는 아이였다. 자그마한 손이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을 꽉 쥐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안아주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황녀께서도 폐하를 알아보나 봅니다.”
흐뭇한 얼굴로 말하는 황궁의의 말이 들려왔지만 이실리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결심했다. 이 작은 손을 지켜주리라.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그게 그녀의 첫 결심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에 와서는 아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절절함으로 바뀌었다.
“이리스. 너 너무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페일러스가 말했지만,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널 누가 이기냐.”
“아는 자인가. 페일?”
느닷없이 물어오는 말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리지 말게.”
“알리려 했다면 벌써 알렸겠지.”
아이를 낳고 이실리스가 정신을 잃었던 시간이 있었다. 5일. 그 시간 동안 계속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나 결론은 단 하나. 이실리스가 원하지 않는데 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었나? 난 널 가장 신뢰한다고.”
“웃기는 소리!”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코웃음을 치며 턱을 들어 올렸다.
“넌 아무도 믿지 않아. 이리스. 널 보면 내가 황제가 아니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제대로 보았군. 그래도 내가 널 믿는다는 것은 사실이야.”
“황제란 자리가 그런 자리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네가 견뎌내지 못할 거야.”
“황제란 그런 것이지.”
“이리스. 기댈 수 있는 자를 찾아. 그게 황녀의 생부가 되었든 아니면 네가 원하는 남첩이 되었든 말이야.”
“역사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어때. 내가 아는 너는 그렇게까지 빠지지도 못할 거야.”
페일러스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하는 이실리스를 보면서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무서워서.”
* * *
“여길 다시 오다니.”
라르헨 제국의 수도에 들어선 베르타스가 고개를 저었다. 라르헨에 배상금을 물고 쫓겨나듯 떠나온 곳이었다.
힐렌튼 제국으로 돌아간 황태자는 황제에게 역정을 들었지만 그뿐. 힐렌튼엔 황족이 황태자 한 명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베르타스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전쟁터로 내몰렸다. 그가 국경으로 갔을 때, 성 한 채는 이미 라르헨 제국의 마법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의 부관인 헥터 경이 그에게 보고했을 땐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벌써 수성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넘어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역시…… 대단하군.”
“어쩌시겠습니까?”
“그냥 돌아가자.”
“그랬다가는 황실에서 어떻게 나올지……”
“다른 곳을 점령하면 돼.”
아무렇지 않게 점령을 논하는 베르타스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막사 밖으로 나가는 헥터였다.
“라르헨이라……”
여제가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제국은 제국이라는 건가.”
자존심에 상처를 크게 입었다는 반증 같아 오히려 반가웠다. 라르헨에서 이렇게 나와줘야 힐렌튼이 계속 흔들릴 테니.
“그나저나…… 어디서 찾아야 하나.”
라르헨 제국에서 없어졌고, 페일러스의 말에 의하면 라르헨 제국의 사람이 확실하니 라르헨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라르헨에서 그들을 들여보내 줄 리가 없었다.
“길어지겠군.”
그녀를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페일러스를 통해 사소한 단서라도 알아보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시간이 더 지나가자 이제 페일러스와 연락도 닿지 않았다. 그 후, 라르헨에서 여제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럴 리가 있나.”
“정말입니다. 지금 황제 대행이라는 대공이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답니다.”
“그래도 나라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 것 아닌가.”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혹시 라르헨에 황족이 늘어나는 것 아닌가?”
“아직 국혼도 하시지 않은 미혼의 황제가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
베르타스의 말에 헥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황족이라는 자들이 자존심이 얼마나 센데 국혼도 하지 않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내기하겠나?”
“좋습니다!”
100페소. 대략 주점에서 술을 열 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내깃돈으로 거는 둘이었다.
“급보입니다!”
힐렌튼 제국의 황제에게서 온 서한이었다.
[라르헨과의 국경 다툼은 그만두고 회군하라.]
황제의 명령에 베르타스는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힐렌튼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기도 전에 다른 전령이 그의 군대에 찾아왔고 다시금 국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힐렌튼의 국경에 인접한 소국의 성 4개를 차지하라는 명령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 4개라니! 황제가 미쳤나 봅니다.”
“입조심 하게. 헥터 경.”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은 단지 위에서 하달되는 명령을 따를 뿐.”
“아니!”
답답해하면서 가슴을 치는 헥터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같이 갑시다!”
불만을 토로하며 그 뒤를 따라가는 헥터와 병사들이었다. 4개의 성을 차지하다 보니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국경을 전전한 지 일 년 반. 그에게 또 다른 명령이 내려왔다.
[라르헨 제국으로 가서 재무대신을 호위하라.]
“아니! 보자 보자 하니까 황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
전쟁터를 전전하는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더욱 거칠어진 헥터의 말본새에 베르타스가 인상을 썼다.
“헥터.”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공작님이 지금 여기서 뭘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제야 말한 대로 성 4개를 차지하고 제국으로 돌아가 쉬려고 하니 뭐라고요? 다시 라르헨으로 가라고요? 정말 미친놈들 아닙니까?”
분노를 토로하는 그의 말에 베르타스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자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페일러스에게 연락도 닿지 않아, 라르헨 제국의 또 다른 정보길드에 의뢰를 넣었지만 알 수 없다는 소식만을 전해왔다. 공작령에 있는 제 수하들을 움직여 볼까 생각도 하였지만 그랬다가 황제에게 소식이 들어갈까 저어되어 아예 마음을 접었다.
“공작님은 좋으시겠습니다!”
“뭐가 말인가.”
“그 여자분을 찾으러 가실 수 있잖습니까!”
확실히 명분이 섰다. 라르헨 제국에 들어갈 명분이. 검문검색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라르헨 제국에 그가 들어가게 된다면 커다란 소란이 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지난번 항구도시에 갔을 때도 그는 염색약으로 머리 색을 바꾸었다. 이실리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다른 이들의 눈에 그의 머리 색은 초록색이었다.
“이번엔 번거롭게 머리 색을 바꿀 필요도 없겠군.”
“그렇게 좋으십니까.”
“좋다기보다…… 이제는 찾을 수 있겠지.”
벌써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그 여인이 결혼하지 않고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베르타스는 찾기로 했다. 다른 이의 아내가 되어있다면 그이를 죽여서라도 데려오겠다고 결심한 그였다. 이토록 절실하게 무언가를 원해 본 적이 있던가.
‘어릴 적 그 아이와 닮아서겠지.’
눈동자 색이 달랐지만, 너무 닮았었다. 특히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제국에서 만나 줄지가 염려됩니다.”
“적어도 수도에 입성은 할 수 있을 걸세.”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라르헨에서 요구했던 배상금도 모두 치렀고 그 일로 인하여 성도 하나 빼앗겼다. 그쪽에서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으니 기회는 줄 게 분명했다. 베르타스는 바로 그 점을 노리기로 했다. 수도에 입성하여 가장 큰 정보길드를 찾아가겠다. 찾아가서 그 여자를 찾으리라. 몇 날 며칠 말을 달려온 라르헨 제국의 수도. 타국의 수도가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오늘은 하루 쉬고 내일부터 움직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그의 모든 병력이 수도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힐렌튼 제국의 제 영지에 군대를 남겨두고 네 명의 부하들과 함께 라르헨으로 넘어왔다. 만나기로 했던 재무대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하루라는 시간의 여유가 생긴 베르타스는 라르헨에서 가장 크다는 정보길드로 향했다.
사람을 찾아 달라는 제 말에 정보길드장은 꽤 큰돈을 요구했다. 제대로 찾아준다면 그 돈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제대로만 찾아준다면 말이다.
의뢰하고 나서, 베르타스는 맥없이 길을 걸었다. 여태 찾지 못했는데,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어두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노라며 주먹을 불끈 쥘 무렵, 눈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서둘러 달려가 그 사람의 손목을 잡은 베르타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