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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6/161)

15화.

라르헨 제국에 이변이 일어났다. 제국의 문을 걸어 잠그고 드나드는 모든 이들의 검문검색이 시작되었다.

[여제가 실종되었다.]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소문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공식 석상에 여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도 1년 반이 지났다.

“그.. 대공이 일을 친 것이 분명하네.”

“대공?”

“그 왜 있지 않나…”

“지금 황제 대행을 하는 자 말인가?”

“입조심 하게.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제의 치세에는 없던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말이야 황손이 생긴 줄 알았다네.”

“뭐? 자네도 웃기는군.”

“그렇지 않나. 황궁이 저렇게 문을 걸어 잠글 때는 딱 하나지.”

“하긴…….”

남자의 말에 다른 남자가 공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황제께서 사라지신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걸세. 그렇다면 황족이 지금 황궁에 없다는 말 아닌가.”

“황궁에 황족이 없으면 수도의 결계가 유지될 수가 없지.”

“그렇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다들 가만히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황궁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알려주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걱정 어린 눈으로 굳건하게 서 있는 하얀 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제국민들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하얀 성은 위용을 빛내며 제자리에 있었다.

* * *

“오늘 회의는 이만 파하겠네.”

“회의 시작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네.”

“안 됩니다.”

“내가 파하겠다 하지 않았나?”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귀족들이 눈치를 보았다. 그들의 틈으로 밀레르 후작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대행께서 피곤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까지 꼭 처리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밀레르 후작을 보면서 페일러스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마법사 한 명과 기사가 나와서 밀레르 후작의 양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나는 분명히 말하였다네. 피곤하다고.”

“아무리 대행이어도 이럴 권한은 없으시오! 이러면 제국이…….”

“제국?”

“네 이놈 페일러스! 황제 폐하께 무슨 위해를 가한 것이냐! 네놈이 그분께 위해를 가하고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더냐! 당장 폐하께 자리를 돌려드리고 물러나라!”

“끌고 가.”

밀레르 후작의 외침에도 무표정한 얼굴의 페일러스가 명령하자 질질 끌려나가는 밀레르 후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일러스가 한마디 했다.

“오래 버텼군. 베루스 공작이 끌려갔을 때, 함께 끌려갈 줄 알았는데.”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여제에게 충직했던 신하들이 끌려가 실종되었다. 페일러스의 명령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황궁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말이 암암리에 돌고 있었다. 죽었다는 낭설도 있었다.

“해산하게.”

그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페일러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대공 저자가 미친 것 아닌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몇 년이오!”

“일 년 반이지.”

“이제 어찌할 거요?”

“황제께서 자리에 없는 것이 확실한가?”

“그게 묘하오. 황제께서 없으면 수도 결계가 없어져야 하는데 결계는 그대로 아니오.”

“그렇다면 대공이 무슨 수를 써서 결계는 유지하게 시키고 폐하를 유폐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리라는 폐하의 명령서가 있지 않았소.”

“그거야! 가짜로 꾸며내도 모르는 것 아니오!”

귀족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이미 공작 각하와 후작도 잡혀간 판국에 뭘 더 할 수 있겠소. 그리고 대공이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것은 아니잖소.”

“그렇다고 저치가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것을 그대로 두란 소리요!”

“안 두면 어찌할 거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자라고 하지 않소!”

경쟁적으로 의견을 나누던 귀족들 사이에 눈짓을 교환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둘씩 자리를 옮기는 귀족들의 뒤에 남은 이들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해야 하지 않소?”

“그래야 할 듯하오.”

“황제께서 자리에 없는 것은 확실하고?”

“자리에 계신다면 이런 일이 계속되지 않겠지.”

“그럼 어딘가에 갇혀서 마력을…….”

“그런 것 같소. 그럼 굳이 저 대공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라를 주무를 수도 있지 않소.”

작은 목소리로 심각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들의 모습이 회의실 한켠에 있는 영상석에 고스란히 저장되고 있었다.

* * *

발걸음을 옮기는 페일러스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황궁의 가장 깊은 곳. 정해진 사람만이 그 결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페일러스가 들어갔다.

“왔나?”

서류를 읽어내려가면서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하는 이실리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이리스.”

무표정했던 얼굴이 무너지며 피곤함을 가득 드러내는 페일러스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무렴. 언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지?”

“조금 더 있다가.”

“조금 더?”

“불순분자들을 제대로 가려내야 할 것 아닌가. 이제 슬슬 반기를 들만한 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하긴. 그런 눈치가 보이더군.”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피곤함을 토로하는 페일러스의 모습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황제 하고 싶다더니?”

“내 취향이 아니군.”

“그 자리가 쉬운 자리가 아니지.”

“이런 자리에 앉아서 잘도 버티는군. 이리스.”

“내가 버티지 않으면 이 제국이 무너지네.”

제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이실리스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황녀는 어찌할 건가?”

“그건 왜 묻지?”

“이제 슬슬 공표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야 그렇군.”

* * *

임신이 확실시된 후에 이실리스가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은 페일러스였다.

“이리스.”

“페일.”

“황궁의가 이야기하더군.”

어느 정도 부푼 배로 시선을 두는 페일러스였다.

“몇 개월이지?”

“이제 4개월.”

“아이 아버지는 찾지 않을 건가?”

“이 아이는 황족이야. 아버지라니.”

“알겠군.”

단호한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아이를 낳으려면 어려울 텐데.”

“이미 황궁의와 이야기가 되었네.”

“그렇다면 나는 왜 불렀지?”

“내가 아이를 낳고 추스를 동안 대행자가 필요해.”

“설마…… 나보고 하라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나.”

“이리스!”

페일러스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말했다.

“그동안 황궁 밖에서 놀고먹었다면 이제 일을 해야지.”

“난 대공 자리를 버린 사람이야!”

“그러나 아직 대공위에 이름이 올라있네.”

“버렸다고!”

“아니라니까?”

황실 족보를 던지는 이실리스를 향해 씨근덕대며 페일러스가 족보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살피던 그는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행동을 멈추었다.

“확인했나?”

“이게…… 왜! 내 이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러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원망하려거든 너의 어머니를 원망해라.”

페일러스의 어머니이자 이실리스의 이모인 선대 대공은 아직도 황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일러스가 자신의 뒤를 이어 대공위를 이어받기를 바랐으며 그가 대공위를 버리겠다 선언했을 때, 이실리스의 어머니인 선대 황제에게 빌었다. 이름만 유지하게 해 달라고. 이실리스는 반대했으나 선황의 의지로 남겨진 대공위였다.

‘지금은 다행이지만.’

한숨을 내쉬며 족보를 내려놓는 그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이 뭐지?”

“내 대행.”

“언제까지지?”

“내 목적을 이룰 때까지.”

“아이를 낳고 나서 몸을 추스를 때까지만 하면 되나?”

“아니.”

그녀의 말에 페일러스가 이실리스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반란 분자를 색출해 내는 것.”

“뭐?”

놀라는 페일러스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이실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르헨 제국이 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반란도 없었는 줄 아나?”

“황족이 없으면 나라가 유지되지 않아서 아닌가?”

“아니지. 반대로 황족이 황족이 아니어도 그들의 핏줄만 있다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야.”

“그렇다면……”

“지금까지 황제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불순한 분자들을 색출해 냈네. 나의 치세엔 지금이 기회일세.”

“지금?”

“지금. 선황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지면 과연 귀족들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황족을 찾겠지.”

“아니. 찾는 자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분명히 있을 걸세. 난 지금 내 몸 안에 자리 잡은 나의 아이에게 위험이 있을 단 하나의 요소도 없앨 거야.”

“이리스……..”

“도와주겠나 페일러스?”

“모든 것은 황제의 뜻대로.”

천천히 무릎을 꿇는 페일러스를 흐뭇한 눈으로 보면서 이실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 * *

과거를 회상하던 이실리스는 저를 빤히 바라보던 페일러스의 눈에 정신이 들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 확실하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그렇긴 하더군.”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아이의 아버지에겐 연락을 하지 않을 건가?”

“이 아인 황족이니 아버진 필요 없네.”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했으면서?”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 아닌가.”

“너 정말…….”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는 것이 나아. 미련한 자가 아이의 아버지라면 그치를 휘두르려고 귀족들이 난리를 칠 터이니.”

“그런 자가 아니어도?”

“페일. 저 아이가 태어나서 그 자그마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나?”

뜬금없이 물어오는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의 군청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단 하나. 누구든 나에게서 이 아이를 빼앗아 간다면 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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