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161)

14화.

이실리스는 군부대신의 보고를 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성문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쪽에서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 텐데?”

“힐렌튼 공작이 아직 그쪽에 있는 것을 보아서는 사실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힐렌튼 공작?”

“그 문제의 황족 말입니다.”

“아, 그자.”

“국경을 수호하는 자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자에 대한 첩보가 부족한 것인가?”

“얼마 전 국경에서 존재를 감추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여기에 황태자를 호위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실책이군.”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군부대신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일개 기사가 혼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수도를 보호하고 있는 마력 결계는 기사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기사들이 오라를 움직이려고 하면 수도의 결계에 걸려들어 내부가 진탕되는 곳이 라르헨 제국의 수도였다. 마법사가 아닌 자들이 와서 함부로 난동을 부릴 수 없는 곳. 설령 마법사가 왔다고 하더라도 난동을 피우는 즉시 마력이 파훼되는 곳. 그곳이 바로 라르헨 제국의 수도였다.

“재무대신은 준비가 되었나?”

“네. 배상금 청구서를 면전에 던져주겠다고 합니다.”

“액수가 크면 클수록 좋겠군.”

“기왕 청구하는 것 예산 부족분을 다 써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그 돈을 내놓지 않으면 저들은 이 수도에서 나갈 수 없네.”

“알겠습니다.”

제국을 우습게 본 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실리스가 손짓했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군부대신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마음이 불안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도 하여 화로를 준비하라 명한 그녀의 말에 황궁의를 호출한 시종장이었다.

“황의가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게.”

피로한 기색으로 앉아 있던 이실리스가 몸을 바로 했다. 그 모습을 본 황궁의가 바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폐하.”

“최근 신경 쓸 일이 많아 그렇다네.”

“외유까지 다녀오신 분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내가 자리에 없었다고 타박하는 건가?”

“불순분자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폐하를 노릴지 몰라서 드리는 말입니다.”

“잔소리 그만하게.”

피곤한 기색으로 손을 내미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는 황궁의였다.

“그런데 폐하.”

“음?”

“외유 나가서 일 치셨습니까?”

“일?”

“그……. 뭡니까?”

“뭐가 말인가.”

“아니,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알겠지만…….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뭐가.”

“아이 말입니다.”

“아이?”

“한 이 주정도 더 지나면 확실하게 나올 것 같습니다만……”

제 눈치를 살피는 황궁의의 시선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황급히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황궁의와 시종들 그리고 시녀들이었다.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되었네. 다들 일어서게.”

그녀의 말에 몸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궁의.”

“네. 폐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시기가 언제인가.”

그녀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황궁의에게 물었다. 황궁의는 선황, 그리고 그 위의 선선황제부터 황가를 모셔온 충직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선황이 사라진 후 이실리스의 마음을 다독여준 사람 중 하나였다. 또한 그녀가 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2주 후면 확실할 것 같습니다.”

“자네의 말을 따르길 잘했군.”

“정말로 실행에 옮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외유를 떠나기 전, 이실리스는 몰래 그를 불러 임신이 잘 되는 날짜와 시기를 물어보았다. 황궁의가 말한 날짜가 되자마자 바로 항구로 건너간 그녀였고 그 남자를 만났다.

“하긴 그렇게 해대었으니……”

“늙은이 앞에서 하실 소리는 아니십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황제는 부끄러움이 없다. 제왕학 가장 첫 문장에 나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누굽니까? 누가 감히 우리 폐하를……!”

분노에 가득 차서 몸을 부들부들 떠는 황궁의를 보면서 이실리스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좋은 분이십니까?”

“내가 보기엔.”

“뭐 하는 사람입니까?”

“모르겠군.”

“귀족입니까?”

“적어도 소드마스터는 되었으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황제가 회임한 순간부터 뱃속에 있는 아이는 황가의 자손이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어떻든 어머니가 어떻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심지어 황제의 첫 자손이었다. 그 아이가 붉은 머리에 붉은 마력을 타고 난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다. 황실의 핏줄을 이은 아이 중, 붉은 마력을 타고 나지 않은 아이는 손에 꼽았다.

“그렇다면 폐하의 후계가 생기는 것이군요.”

“그렇지.”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연한 소릴.”

“힐렌튼 제국의 자들은 어찌하실 겁니까.”

“황궁에 중요한 일이 터졌으니 돌려보내야지. 외부인을 궁 안에 들일 수는 없지 않나.”

이실리스가 임신하기 전이었다면 사정을 봐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후계를 회임한 여제가 있는 곳에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었다. 그것이 라르헨 제국에서 황족을 보호하는 방법.

“황궁을 폐쇄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쇄하기 전에 페일러스를 불러들여라.”

“폐하. 그는…….”

“불러들이게.”

“알겠습니다.”

옆에서 시종장이 명을 받들고 밖으로 나가자 어의가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무리하셔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앞으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또……”

“그만하게.”

“폐하. 뭐든지 처음이 중한 법입니다.”

“알고 있으니 그만하게. 식사는 알아서 준비하고.”

“그렇다면 올리는 대로 다 드셔야 합니다.”

입이 짧은 이실리스의 식사량에 늘 불만을 품고 있던 황궁의가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젓는 그녀의 행동에 황궁의가 인사하고 물러났다.

“아이라……”

정말로 그 한 달 만에 아이를 가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정말인 것인가.”

황궁의도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으니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실리스는 괜히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반반 들었다.

“선황이 계셨다면……”

더 좋았을 것을. 어머니가 계셨다면 아마 더 좋은 말들을 많이 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곤하니 일찍 침소에 들겠다.”

그녀의 말에 시종과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후계를 외치던 귀족들에게 한 방 먹일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침소에서 봉인 마법을 풀면서 서랍을 연 이실리스가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두 개의 목걸이가 같은 모양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운데에 박힌 보석만 다른 목걸이는 아마도 남자에게 중요한 물건인 듯했다.

“그… 울보였다니.”

* * *

이실리스가 선황을 따라서 처음 전쟁터에 나섰을 때였다. 처음 살인을 저지르고 마음이 심란했던 그때 만났던 울보.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울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 다친 것 같아 치료를 해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는 좋았다. 검은 의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쫓겨 도망칠 때, 아이는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었다. 한참을 뛰던 그녀가 힘이 들어 아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도망쳐야 해!”

‘그건 네 사정이고.’

도망이고 뭐고 힘들어서 뛸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 보호 마법을 걸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여기서 나오지 않으면 안전할 거야.”

“넌? 얼른 이거 열어!”

“여기서 기다려.”

결계를 만든 이실리스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을 향해 걸었다. 서서히 아이에게서 멀어지면서 슬립 마법을 건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날렸다. 

“감히 라르헨의 황족에게 살기를 날려?”

양손에 마력을 일으키면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마법을 난사한 그녀였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오히려 지척에서 목숨을 위협받게 되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모두 죽였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제야 어머니인 선황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적을 살려두면 언젠가 문제가 생긴다. 반드시 죽여야 했다. 제위를 노리는 자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도. 

‘다 죽이겠다.’

황족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태도를 확고하게 결정한 날이었다.

* * *

“하긴. 그 덕분이기도 했군.”

목걸이를 불빛에 비추어 보던 그녀가 ‘탁’ 하고 목걸이를 서랍에 던져 넣었다. 

“다시 본다면…….”

그때 생각하겠다. 곁에 둘 것인지 아니면 말 것인지.

* * *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힐렌튼 제국에서 무역 협상을 위해 방문했던 사신단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배상금 일부를 지불하고 힐렌튼으로 돌아갔다. 그 즉시 황궁을 닫아걸었다. 당황한 신하들이 입궁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오늘부터 황제 대행입니다.”

서류를 꺼내 보이면서 웃고 있는 페일러스를 발견하고 당황하는 공작 이하의 귀족들이었다.

“아니 폐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폐하는 건강이 좋지 않으십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혹시 대공께서 황제 폐하를 구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의문을 표하는 베루스 공작을 향해 페일러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공작이 어찌할 것이오?”

“폐하를 뵙게 해 주시오!”

“그럴 수는 없지.”

페일러스의 뒤에서 황실 근위대와 황실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부터 페일러스에게 황제 대행의 권한을 내린다는 황명이 내려왔으니 다들 무릎을 꿇으시게.”

“나는 그럴 수 없소!”

“그렇다면 끌고 가.”

저항하던 베루스 공작이 황실 마법사에 의해 끌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귀족들이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자, 다음 사람?”

페일러스의 말에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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