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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4/161)

13화.

힐렌튼 제국의 사신단이 라르헨 제국의 수도에 들어왔다. 수도의 성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다니! 우리는 힐렌튼 제국에서 온 사신단이오!”

“힐렌튼 제국의 황제께서 온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분 말고 다른 분이 온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힐렌튼 제국의 사신단이 맞소!”

“그렇다면 황제께서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황태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뒤따르던 베르타스가 비소를 감추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경비병을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황태자의 앞으로 나서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라도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베르타스의 말에 경비병이 안에 소식을 전하러 들어갔다.

“이게 어찌 된 건가 공작!”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르헨 제국에서 어떻게 알았냐는 거냔 말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능청스러운 베르타스의 표정에 발끈한 황태자가 입을 열려는 모습이 보였다.

“타 제국의 수도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가볍게 말했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내용의 말에 황태자가 움찔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면서 베르타스가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더 거칠게 나오는군.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었다는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한 대접에 베르타스는 만족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라르헨 제국에서 황태자가 기를 못 펼 것 아닌가.

‘설마 이렇게 망신을 당했는데 안에 들어가서도 난동을 피우진 않겠지.’

굳게 닫혀있는 성문을 보니 제대로 들여보내 줄지도 의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왔다. 

“힐렌튼 제국의 사신단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분명 방문자 명단에는 힐렌튼 제국의 황제 폐하를 위시한 사람들이 적혀있는데요.”

“사정이 있으셔서 못 오셨네.”

“그런데 연락을 하지 않으셨고.”

말이 짧아졌다. 경비대장의 행태에 분노한 황태자가 소리쳤다.

“감히 성문이나 지키는 주제에 힐렌튼 제국의 황태자인 나를 무시하는가!”

“황태자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상 확인 작업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라르헨 제국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수도의 성문을 지키는 사람에게 말이 심하십니다.”

나지막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경비대장이 의견을 밝혔다. 그의 말에 베르타스가 속으로 감탄했다.

‘제 일에 책임감을 가진 자라니. 역시 역사가 깊은 제국은 다르군.’

주먹구구식으로 일하는 힐렌튼 제국보다 백배는 나아 보였다.

“왜 이렇게 소란스럽나.”

경비대장의 뒤에서 마법사의 로브를 갖춰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로브에 새겨진 라르헨 제국의 문양으로 보아서 제국의 마법사인 듯했다.

“군부대신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잠시 지나가는 일이었네. 무슨 일로 성문이 소란스러운가?”

“힐렌튼 제국에서 사신들이 오셨습니다.”

“그럼 어서 안으로 들이지 않고?”

“그러나 초기에 보내준 사신단의 명단과 다른 자들이 왔습니다.”

“제국 대 제국으로 하는 일에 이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있나. 줘보게.”

명단을 빼앗아 든 군부대신의 행동에 일말의 기대를 하고 쳐다보는 황태자였다. 

“음? 힐렌튼 제국의 황제 폐하는 어디 계신가?”

“안 오셨답니다.”

“뭐야?”

턱짓하는 경비대장의 행동에 군부대신의 시선이 사신단으로 돌아갔다.

“이것 참. 난감하군.”

“들여보내 주게.”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나는 힐렌튼 제국의 황태자일세.”

“일단 황제께서 오시지 않으셨으니 들어오실 수는 없고 이곳에서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라르헨 제국은 힐렌튼 제국에서 황제가 직접 오신다고 했기에 그에 걸맞는 환영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오시지 않으셨으니 제국의 손해가 막심합니다.”

“그래서?”

“손해배상금을 내실 때까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는 황태자를 향해 군부대신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허위로 보낸 문서 때문에 우리 쪽에서 환영 행사를 준비하느라 얼마가 들었는지 아십니까? 힐렌튼 제국의 황제께서 서거하신 것도 아니고 중병에 걸리신 것도 아닌데 황태자를 보냈다니. 라르헨과 전쟁이라도 하겠다고 선전포고하러 온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무슨 그렇게 심한 말을……. 황족이 왔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황제와 황태자가 같습니까?”

“…….”

군부대신의 말에 황태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여기서 같다고 말하면 힐렌튼 제국의 황제에 대한 반역이 되고 다르다고 말하면 저들의 말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 되어버리니 꼼짝없이 배상금을 물어야 할 판이었다. 무역 협상을 하러 왔다가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대체 라르헨에서 어떻게 알고…….’

베르타스가 의심스러웠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안다고 해서 라르헨에 알릴 이유가 없었다. 단지 일이 저질러진 후 수습할 걱정이나 했겠지. 베르타스의 속마음은 꿈에도 모른 채 황태자가 전전긍긍했다.

“그러면 어찌하자는 것인가. 우리도 사정이 있어서……”

“그것은 힐렌튼의 사정이고 라르헨의 사정은 다릅니다.”

씨알도 안 먹히는 군부대신의 말이었다.

“우리는 무역 협상을 하러 온 것이라네. 그러니…….”

“그러면 더더욱 안 되겠습니다. 협상의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자들과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아니 이보게……”

“라르헨에는 라르헨의 법이 있는 법. 이곳에 오셨다면 라르헨의 법을 따르셔야 합니다.”

더 이상의 소요는 용서치 않겠다는 말을 끝으로 군부대신이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군부대신을 잡을 수 없는 황태자였다.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키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컸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전하?”

황태자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입을 열자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었다. 항구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에 지친 자들이었다. 베르타스의 군대처럼 행군에 훈련된 자들도 아니었으니 앓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실상 제국에서 사신단이 온다고 하면 항구에서부터 호위하는 자가 붙기 마련. 아무리 항구에서 수도가 가깝다고 하여도 라르헨 제국에서 아무도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러다가 정말로 협상테이블에도 앉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입방정을!”

힐렌튼 제국의 사신단에 합류한 재무대신이 말하자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황태자가 그의 입을 막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황태자의 입지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황제 대신 자신이 오겠다고 우긴 것도 황태자의 의견이었다. 라르헨이나 힐렌튼이나 같은 제국인데 왜 황제가 직접 움직이냐는 자신의 의견에 부황이 동의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에도 들어가지 못하다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보입니다!”

뒤에서 말을 달려온 힐렌튼 제국의 병사가 서신을 황태자에게 전했다.

“뭐야?”

국경이 공격당하고 있으니 베르타스 힐렌튼을 전장으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서였다.

“아니 이게….”

망연자실한 황태자의 손에서 명령서를 빼앗은 베르타스가 헥터를 향해 말했다.

“헥터 경. 지금 당장 국경에 머무르고 있는 군대에 연락을 넣게. 우리는 바로 전선으로 합류한다.”

“기다리게 베르타스!”

황태자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가 여기서 그냥 가게 되면 나는 누가 지키나!”

“하! 지금 국경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나는 힐렌튼 제국의 황태자야! 그런데 나의 안전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국경으로 가겠다는 것인가!”

“저는 나라의 검입니다. 국경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안 되네!”

단호하게 말하는 황태자의 말에 전령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라르헨 제국에서 마법사 대대가 국경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얼른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보낼 수 없네! 국경이야 나중에 수복하면 될 일 아닌가. 라르헨에서 국경을 공격하는 이때, 내가 이곳에 혼자 남겨지면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러나!”

계속해서 떼를 쓰는 황태자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입을 떡 벌렸다. 저 말은 제국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아닌가. 저런 자를 황태자라고 믿었다니.

불신 어린 신하들의 눈초리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속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전령에게 새로운 명령서를 쓰십시오. 그래야 제가 여기 남을 수 있습니다.”

베르타스의 말에 즉시 새로운 명령서를 쓰고 인장을 찍는 황태자를 한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헥터였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내버리다니. 군인인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령이 허탈하게 서신을 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베르타스도 헛웃음을 삼켰다.

‘이런 자들을 황족이라고…….’

황족의 기본조차 되지 않은 자들에게 무릎 꿇은 자신의 처지가 더더욱 한스러웠다. 자리를 빼앗아 갔다면 제대로 행동을 해야 할 것인데 그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속으로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쩌겠나. 자신은 황위를 포기한 황족. 황족이라고 불리기도 어려운 자였다.

“일단 헥터 경은 전장으로 가서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내 지시를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혹 저쪽에서 대단위 마법을 난사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뒤로 빠져있게.”

“명심하겠습니다.”

베르타스의 뒤로 헥터를 위시한 다른 부하들이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황태자가 그에게 물었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가?”

“제가 이곳에 남았으니 저들이라도 전장으로 가야 할 것 아닙니까.”

“…… 그래야지.”

저들도 남아서 자신을 지키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는지 황태자가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한숨을 내쉰 베르타스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숙소를 잡아야겠습니다.”

‘이미 소문이 다 나서 받아 줄 숙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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