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황태자가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술을 찾는 그 모습에 한숨을 금치 못하는 베르타스의 수하들이었다.
“저런 걸 황태자라고 모셔야 합니까?”
“불경함이 도를 넘었군. 헥터 경.”
“공작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생각만 한 자와 말을 한 자는 다르지.”
“뭐가 다릅니까?”
“반역을 생각만 한 자와 실행으로 옮긴 자가 같나?”
“실언했습니다.”
바로 꼬리를 내리는 헥터 경이었다. 그러나 헥터 말고 베르타스의 다른 수하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족의 대우를 받기엔 너무 황족 같지 않은 자들이 황위에 오르고 황태자가 되었다.
“정말 이젠 어쩔 수 없는 겁니까?”
“나는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너도 알지 않나.”
과거의 유명한 일화를 다시 꺼내면서 베르타스가 말했다. 씁쓸함이 녹아있는 그의 말투에 헥터도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차라리 화제를 돌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같이 갑니까?”
“사라졌다.”
“네?”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커진 헥터였다.
그를 바라보는 황태자 쪽 사람들의 시선에 헥터가 몸을 움츠리면서 베르타스를 향해 속삭였다.
“사라지셨다고요?”
“그래.”
“아니 왜요?”
“나도 모르겠군.”
정말 모르겠다. 계속해서 곱씹었지만 베르타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을 알려달라는 것 때문이었나…….”
그의 중얼거림에 헥터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름이요?”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거절하였다.”
“아니 뭐, 반역자의 딸이라도 된답니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라르헨 제국에서 만났으니 반역자의 딸일 수는 없었다. 항구도시인 이토르트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지만 범죄자들은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철저한 검문을 거쳐 확인된 사람들만 입국할 수 있는 곳이 라르헨 제국이었다. 이를 어기고 범법자가 숨어들었을 경우, 즉결처형. 발견과 동시에 사형이었다.
“범죄자는 아닐 거야.”
“압니다. 그러니 더 이상한 거죠. 범죄자도 아닌데 왜 도망을 칩니까?”
“그러게. 왜일까.”
처연한 그의 읊조림에 한숨을 내쉰 헥터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뭐지?”
“밤일을 못 하신 건….”
“헛소리를!”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베르타스의 말에 헥터가 헤실거렸다.
“사라지신 분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찾아야지.”
“네. 그러니까 포기하시고… 네?”
“찾아야겠다.”
“미치셨어요? 각하? 지금 라르헨 제국 수도로 가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저 머저리 같은 황태자를 데리고 말입니다.”
“부탁을 해야겠어.”
“어디 가십니까! 각하!”
헥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베르타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 * *
“여긴 어쩐 일이지?”
“부탁이 있어서 왔어. 페일러스.”
“부탁?”
“사람을 찾아줘.”
“사람?”
페일러스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지만 베르타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
“여자?”
“그녀를 찾아주게. 페일러스.”
“자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 어떤 여자이길래 그러나?”
그의 말에 베르타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여자일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아는 것이라고는 귀족이라는 것과 붉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 물빛 눈동자라는 것. 궁중 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소국의 왕족일 수 있다는 것. 그 외에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베르타스를 침잠된 눈으로 바라보는 페일러스였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베르타스는 그런 페일러스의 시선을 느끼고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그 여자가 더 이상 너를 보고 싶지 않아서 자취를 감춘 것이라면 어쩔 텐가?”
“그래도 찾고 싶네.”
“왜?”
“그건 나도 모르겠군.”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지.”
“그도 알고 있네.”
“그런데도 찾으려고 하나?”
“응.”
“그게 설령 너의 마음이 힘들어지는 길이어도?”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그를 직시했다.
“뭔가 알고 있군.”
“이 항구도시에서 내가 모르는 것은 없지.”
“그럼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알지만 답해 줄 수 없네.”
“답해 줄 수 없다고?”
“그렇네.”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의아해했다. 정보길드의 길드장이 정보를 판매하지 않는 것은 단둘. 이 나라의 황족에 대한 정보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일 때. 물빛 눈동자를 보았을 때, 그녀가 이 나라의 황족일 리는 없으니 그렇다면 대단한 신분을 지녔다는 것인가.
“그녀가 대체 누구기에?”
“글쎄.”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페일러스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다시 물었다.
“라르헨 제국의 사람인가?”
“맞네.”
“그렇다면……”
“나는 여기까지만 말해줄 수 있네. 그 이상 말하는 것은 안 될 일이어서.”
“아니 그런…….”
그녀는 누구인가.
이름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여인이었어도 베르타스는 자신이 있었다. 그 여자를 찾을 자신이. 그렇기에 사라진 그날 찾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 믿었다. 페일러스라면 당연히 정체를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말해주지 않는 경우의 수는 생각지도 못했다.
“너만 믿었는데…….”
“그래도 안 되네.”
“알겠네.”
실망한 베르타스의 앞에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려놓으면서 페일러스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만나서 사람이나 찾아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어제는 부하를 시켜서 서신이나 한 장 보내놓고.”
“아 그건 미안하군. 급해서.”
“하긴. 급하긴 했더군.”
“어쩔 수가 없었네.”
고개를 젓는 베르타스의 행동에 페일러스가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더니 물었다.
“황위에 오를 생각은 없나 베르타스?”
“내가?”
“네가.”
“없네.”
즉답하는 그에게 페일러스가 다시 물었다.
“왜?”
“나에겐 의미가 없는 자리일세.”
“의미가 없는 자리?”
“내가 열 살에 전쟁터로 쫓겨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나?”
“나야 모르지.”
“두 번 다시 이 나라로 돌아오지 않겠다.”
“힐렌튼 제국의 검이 그런 생각을 했다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공격적으로 제국의 몸집을 불려준 것 아닌가.”
“그래야 망할 테니까.”
“뭐?”
“그래야 망할 거라고 했네.”
베르타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자네 그럼 정말로…….”
“제국에 정 따윈 남아있지 않아.”
“자네가 이러는 것. 수하들도 알고 있나?”
“아니.”
“그럼 그자들은 무슨….”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는걸세.”
“그러다 죽어!”
페일러스가 베르타스를 향해 소리쳤다.
큰 목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베르타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죽어도 상관없네. 이미 난 열 살에 죽었으니.”
“복수라도 꿈꾸지 그러나! 삶을 그렇게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군.”
“아니 알지.”
“아니. 자넨 몰라.”
열 살에 계승권을 포기했다.
황태자로 자라온 자신이 그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의 결심이란 단 하나. 이 나라를 버리겠다. 지금이야 제국을 수호하는 검이다 뭐다 칭송하지만,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제국민들이 그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베르타스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열 살, 그 나이에 버려야 했던 자신의 자존심. 그리고 제국에 대한 사랑. 보호해 주는 이 하나 없이 전쟁터로 떨어졌을 때의 상실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하 중 누구도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내가 받았던 유일한 도움은 그 아이였지.’
작은 여자아이. 그 아이가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생사마저 불분명한 지금, 베르타스에게 남아있는 것은 복수심. 그것 하나뿐이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자신을 버린 제국과 제국민들 그리고 신하들. 그 모두에게 복수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하나. 제국의 멸망이 필요했다. 그래서 베르타스는 계속해서 영토를 넓히는 정복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넓어진 영토를 관리하느라 힐렌튼 제국은 과부하 상태였다. 황제의 눈이 닿지 않는 곳곳에서 부정부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베르타스도 눈을 감았다. 결론은 하나. 망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번 무역 협상에서 얻어가는 것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힐렌튼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황제가 황태자를 대신 보낸 것은 의외였지만…….’
권력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이번에 한 실수는 꽤 클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진정시킬 것인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라르헨 제국에서 쳐들어 왔으면 좋겠군.’
그런다면 기꺼이 져 줄 것이다. 소소한 국지전을 이어가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베르타스였다. 죽어 나갈 병사들을 탈영시켜 주고 라르헨으로 도망가고자 하는 기사는 라르헨으로 보내주겠다. 그러고 나서 자신도 투항하겠다. 자신의 공작령은 라르헨 제국과 인접한 국경에 있으니 공작령의 영지민들을 데리고 라르헨 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밑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뜻대로만 되어준다면.’
그렇다면 그의 복수도 무사히 끝날 것인데.
“자네 무서운 자였군.”
페일러스의 말에 베르타스가 희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로군 페일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