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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2/161)

11화.

“뭐라고 했지 지금?”

“힐렌튼 제국에서 황태자를 보냈다고 해.”

“하! 땅따먹기 조금 하더니 이젠 라르헨이 우습게 보이나 보군!”

분노한 이실리스의 몸에서 붉은 마력이 넘실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극비에 붙여서 온 모양이더군. 네가 마중 나갔다면 꼴이 우스워질 뻔했어.”

“황태자를 황제인 척 속였다는 건가?”

“그렇다는군.”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전쟁이라도 해 보자는 건가.”

조용히 뇌까리는 그녀의 말에 페일러스도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저쪽 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더군.”

“제정신이라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그나저나 페일. 넌 어떻게 안 거지?”

“제국의 공작이 소식을 전해 왔지.”

“공작?”

“그 왜 있잖나. 선대 황제의 아들.”

“황제의 개라는 그자 말인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페일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힐렌튼 제국의 선황제가 죽은 뒤 벌어진 비사는 라르헨 제국까지 유명했다. 황족의 자존심도 없이 살기 위해 납작 엎드린 황족. 이제는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여 황족이라고 불릴 수도 없는 이름뿐인 황족. 살기 위해서 전쟁터를 전전하는 황족.

“꼴에 나라는 사랑한다 이건가?”

그녀의 말에 페일러스가 묘한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가 턱을 치켜들었지만 페일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나 보군.”

“전쟁을 해도 죽어 나가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일 테니.”

“하긴. 힐렌튼 제국의 선황도 성군이었지.”

지금의 황제가 나라를 말아먹고 있지만.

“그래서 정보를 제공한 대가는?”

“그저 조용히 넘어가 달라는군.”

“더한 것을 요구해도 될 텐데?”

“그런 자가 아니야.”

“그런 자가 아니라고?”

“그래.”

이실리스는 심지가 굳은 자를 사랑한다.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자도 사랑한다. 그 고고한 자존심을 가진 자가 자신을 향해서 충성을 바칠 때 그녀는 희열을 느꼈다. 힐렌튼 제국의 베르타스 힐렌튼은 그녀의 기준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 자였다.

“그렇다면 내가 서둘러서 돌아갈 필요도 없는 문제였군.”

“그렇지만…. 돌아가지 않을 건가?”

“그건 아니지.”

이번 기회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사신단을 탈탈 털겠다고 이실리스는 생각했다. 황태자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방문이 그에게는 시험대에 오른 것일 터.

“감히…….”

생각에 잠긴 그녀를 지켜보던 페일러스가 그녀의 귓가에서 꽃을 빼내었다.

“연애놀음이라도 했나?”

“했지.”

페일러스의 손에서 꽃을 빼앗아 들면서 보존마법을 거는 그녀의 모습에 페일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나쁘지 않더군.”

“어떻게 할 요량이지?”

“아이가 생겼든 생기지 않았든 이제 돌아가야 할 때지. 너무 오래 꿈을 꿨어.”

“꿈?”

“그래 꿈.”

“좋은 꿈이었나?”

“황제인 나도 평범해질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매력적인 꿈이었지.”

“이리스.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던 페일러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별스럽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불렀다며 그녀가 페일을 향해 눈총을 주며 웃었다.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짓는 페일러스였다.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전할 말은 그게 다인가?”

“그래.”

“그럼 두 달 뒤.”

“그래. 두 달 뒤. 황성으로 내가 직접 갈게.”

“기다리지.”

그 말을 끝으로 이실리스는 페일러스의 길드를 나섰다. 내일 돌아가려고 했는데 페일러스의 급보 때문에 조금 일찍 돌아가게 생겼다. 지금에 와서 남자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도 우스웠고. 

이 항구도시를 떠난다. 다음에 그 남자와 마주칠 일은 없겠지. 

‘조금 아쉽군.’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날이 흐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했고,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 * *

“폐하!”

“잘 있었나?”

집무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던 그녀의 보좌관인 사이르카 후작이 놀란 눈으로 이실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서류를 가져오게. 후작.”

“알겠습니다.”

황제가 부재한 기간은 한 달. 그 한 달간 국무회의도 열지 못하고 가까이에 있는 공작에게만 조용히 알렸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그냥 여기저기?”

사이르카 후작이 내려놓은 서류를 읽어내려가며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힐렌튼 제국에서 방문하는 자가 황제가 아니고 황태자라더군.”

“네?”

“의전을 약소화 하게.”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아니라면 내가 지금 이런 일로 장난을 하는 것 같나?”

그녀가 날카롭게 말하자 사이르카 후작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 가서 공작을 불러와.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으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사이르카 후작이 집무실을 나서자 이실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일이라니.”

어쩌겠나. 그것이 황제의 숙명인 것을.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라르헨 제국의 공작인 보르나디 베루스 공작이 들어섰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서 오게 공작.”

“폐하는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아니, 그보다 힐렌튼 제국에서 누구를 보냈다고요? 그자들이 미친 것 아닙니까?”

“베루스 공작.”

흥분하여 떠드는 베루스 공작을 이실리스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흠칫한 공작이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첩보가 입수되었다.”

“그럼 그자들이 우리를 속였다는 겁니까?”

“전쟁을 원하는 것 같더군. 그 나라의 황제와 황태자는.”

“그게 사실입니까?”

“그도 아니라면 객기를 부리는 것이겠지. 이곳이 저들의 죽을 자리가 될 줄도 모르고 말이야.”

차가운 그녀의 기세에 베루스 공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떻게 하나. 황태자에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지.”

“그렇다면……”

“소국의 왕족에게 하는 대우를 해서 보내.”

“네?”

놀라서 되묻는 공작에게 이실리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다시 말했다.

“힐렌튼 제국이 아무리 제국의 이름을 달았다지만 이것은 모두 라르헨에서 용납했기 때문이었다. 라르헨이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제국의 이름을 달만큼 영토를 확장할 수도 없었어.”

“그렇습니다.”

“그러니 처음 인사 오는 자리에 똑바로 해야 했는데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제국의 이름을 빼앗는 수밖에.”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번 무역 협상에서 힐렌튼이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실리스의 말이 떨어지자 베루스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시옵소서.”

“무역 협상은 없던 것으로 한다. 그리고 즉시 힐렌튼 제국과의 국경에 마법사 1개 대대를 파견하여 성을 하나 차지해라.”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나도 곧 가겠다.”

“폐하께서는 황궁을 비우시면 아니 됩니다.”

“왜지?”

“후계가 계시지 않으니 이번에는 다른 이들에게 맡겨 주시죠.”

공작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그녀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후계가 없는데 지금 국경에 가서 눈먼 화살이라도 맞으면 낭패였다.

“그렇다면 마법사 대대를 내가 보내주겠네.”

“뜻을 전하겠습니다.”

“국무회의를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공작이 허리를 조아리며 밖으로 나섰다. 라르헨 제국은 황제의 마법으로 일어선 나라. 그렇기에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황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충신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실리스로서 공작이 자신에게 예를 다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공작이어도 황족에게는 허리를 숙인다. 그것이 라르헨 제국의 저력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황족은 그녀. 이실리스 단 한 명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실종된 지금, 그녀는 이 나라를 수호하는 유일한 황족이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린 이상 대신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라르헨 제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다. 황제의 마력으로 성장한 국가. 그렇기에 황족이 없으면 안 되는 국가.

“한동안 폐하께서 안 계셔서 황궁이 조용했답니다.”

측근 시녀들 중 하나가 말했다.

“폐하 이것은……”

그녀의 로브를 정리하던 시녀가 로브의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가져오거라.”

시녀의 손에서 목걸이를 받아든 이실리스가 사람을 모두 물렸다.

“어디서 보았다 했더니……”

그에게서 느꼈던 익숙함은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다. 

“어릴 때 보았던 그 칠푼이로군.”

거침없이 판단하면서 이실리스는 마법으로 봉인해 놓은 그녀의 개인 서랍을 열었다.

똑같은 목걸이가 서랍 안에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자란 것은 변하지 않았군.”

‘목걸이를 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 목걸이를 설마 내가 하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똑같은 두 개의 목걸이를 번갈아 보던 이실리스가 다시 목걸이를 서랍에 넣었다. 서랍 속에는 두 개의 목걸이와 보존마법이 걸린 꽃 한 송이 그리고 팔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연이라 이건가.”

세 번째 만나게 되면 필연이라고 하였으니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결심하면서 이실리스가 눈을 감았다.

피로했다.

“폐하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지.”

밖에서 부르는 사이르카 후작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였다. 피곤해 보이던 그녀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하고 냉정한 인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임을 상징하는 로브를 입은 이실리스가 침소 밖으로 나섰다.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수많은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보좌관이 보였다.

“일어서게.”

“예. 폐하.”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실리스가 책임져야 할 이 제국의 제국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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