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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1/161)

10화.

베르타스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제 여자와 만난 지 한 달. 그는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힐렌튼 제국으로 돌아가면 황제의 견제와 황태자의 앙갚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한 달간 지켜본 여인의 성격은 베르타스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물욕도 없었고 허영도 그리고 질투도 없었다. 무심한 성격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정도면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안 알려준 여자에게 무슨.”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 * *

여자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부하들이 무슨 일이 있냐며 난리를 쳤지만, 비밀로 했다. 눈치를 챈 헥터 경이 그에게 언제쯤 공작가로 데려갈 것이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

“공작님께서 그렇다면 그러겠지만 그 정도로 마음에 드는 분이라면 그냥 곁에 두시죠.”

“나야 그러고 싶지만……”

“여자분이 싫다고 하십니까?”

“아직 물어보지 않았네.”

“그럼 물어보십시오. 아마 좋다고 하실 겁니다.”

부관인 헥터는 그녀가 당연히 좋다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려 힐렌튼 제국의 공작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황족의 부인 자리인데 싫다고 할 리가.’

헥터 경의 말에 베르타스는 결심했다. 오늘은 그녀에게 저의 신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허락을 구하기로. 만난 지 딱 한 달째 되는 오늘, 그녀에게 청혼하고 싶었다. 내일이면 베르타스도 라르헨 제국의 수도로 가야 했다. 곧 있으면 열릴 무역 협정을 위해 힐렌튼 제국의 황태자가 황제를 대신하여 이곳 이토르트 항구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의 임무는 황태자가 안전하게 협상을 마치고 귀국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휴가 중 갑작스럽게 내려온 임무에 불만을 토로하는 부관들이었지만 베르타스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뻔하지. 그동안 쉬었으니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보겠다는 거겠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 뭐 하나.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하고 다른 전쟁터로 나가기 일쑤. 중간에 새지 않았으면 이번에도 또 다른 전쟁터에 끌려갔을 터였다. 국지전으로 인해 힐렌튼 제국의 영토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라르헨 제국에서 경고의 서한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한이 열 통쯤 쌓였을 때, 황태자가 움직인 것이었다. 

“아마 수도로 가시면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겁니다. 공작님. 원래 황제 폐하께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었는데 황태자 전하를 대신 보내는 상황이니까요.”

“알고 있네.”

“조심하셔야 합니다.”

헥터 경의 저 말이 베르타스 본인이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이 자리의 부관들 모두 알고 있었다. 망나니 같은 황태자가 라르헨 제국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이게 된다면 그때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라르헨 제국은 마도제국. 마법과 공학으로는 어느 국가도 따라갈 수 없는 저력을 가진 나라였다. 황가의 혈통이 굳건하고 그 혈통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나라였기에 역사상 반역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나라. 협상을 하러 가는 입장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라르헨 제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라르헨 제국은 명실상부 강대국이었다. 이제야 제국의 이름을 단 힐렌튼이 강대국인 라르헨 제국을 이길 리가 만무했다. 

‘무슨 만용인지 모르겠지만…….’

황제가 찾아가야 할 자리에 황태자가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여제가 협상테이블에 나온다면 저 라르헨 제국에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여제와 황태자가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르헨 제국의 위상을 보았을 때.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제 숙부는 힐렌튼이 라르헨보다 위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 황태자를 보낸 것이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외교의 기본은 예의.

제대로 된 예의도 갖추지 않은 사절단인데 황궁 안으로 들어가기나 하면 다행이었다. 황제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협상테이블에 앉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돌아가면 날 문책하겠지.’

당연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공작님.”

“유념하겠네.”

황태자가 도착하는 것은 내일. 호색한인 황태자의 눈에 여자가 띄지 않게 해야 했고 라르헨 제국에도 연락을 넣어야 했다. 자신이 라르헨 제국에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았지만, 부하들을 개죽음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베르타스는 이곳의 정보길드장에게 편지를 썼다.

“절대로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네. 꼭 그 길드장에게 주어야 하네.”

“알겠습니다.”

그의 친필 서한을 받아든 헥터 경에게 신신당부했다.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거나 길드장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편지였다. 이곳의 길드장이 라르헨 제국의 주요인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그가 낸 최후의 방책이었다. 라르헨 제국에서 알아듣고 황태자에 걸맞게 대접을 한다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는 것이었다. 

‘마법사와 하는 전쟁이 가장 까다롭지.’

소드마스터의 자리에 올랐지만 제일 싫은 것이 광역마법을 난사하는 마법사가 있는 전쟁터였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수많은 병사들과 부하들이 죽어 나간다. 라르헨 제국과 척을 져서 그런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은 그의 마음을 이해라도 한 듯 헥터 경이 결연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나섰다.

“그럼 오늘은 뭐합니까?”

또 다른 부관이 묻자 베르타스가 말했다.

“오늘까지 쉬어야지. 내일은 황태자가 올 테니까. 다들 나가서 술이라도 한 잔씩 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신이 나서 달려나가는 부하들을 보면서 베르타스가 가만히 미소지었다.

* * *

오전 회의를 마친 베르타스는 여자가 있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곳에서는 여제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전야제가 열리고 있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축제가 열리는 날인지라 들뜬 사람들이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베르타스도 여자와 함께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름을 알려달라고 해도, 제 이름을 알려준다고 해도 싫다는 여자에게 베르타스는 물건을 사다 안겼다. 다 들지 못한다는 그녀에게 제가 들겠다는 말을 하면서 가판대에 있는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이건 어떻지? 네 머리카락과 잘 어울릴 것 같군.”

“조잡해.”

뭘 보여줘도 여자의 높은 심미안을 만족하게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딱 잘라서 말하는 여자의 말에 기분이 상할 법도 했지만 베르타스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오늘 밤에 여자가 요청한 대로 회복포션을 준 사람에 대해서 말하리라. 그리고 청혼하겠다. 말이 없는 여자의 시선이 닿은 곳엔 마법 무구가 있었다.

‘저런 것을 좋아하는 건가.’

마법사는 어쩔 수 없는 마법사라면서 베르타스는 가격을 물었다.

“사주려고 그러는 건가?”

“원하는 것 아니었나?”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그를 여자가 말간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나.”

“이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나에겐 의미가 크지.”

이름을 안다면 찾지 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여자가 이 자리에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베르타스는 자신이 있었다. 어디서든 찾아낼 자신이. 떠돌아다니며 전쟁터를 전전하는 그였지만 아는 용병들도 많았고 정보 길드의 길드장도 꽤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그에게 찾아가야 했는데.’

오랜만에 찾아와서 인사하러 간다는 것을 깜박했다. 그래놓고 그에게 부탁만 하다니. 나름 친우라면 친우라고 할 수 있는 길드장을 생각하면서 베르타스가 미소지었다. 계산된 마법 무구는 팔찌였다. 붉은 홍염이 넘실거리는 마법석을 품은 팔찌가 그녀의 손목에 안착하자 제법 마음에 들었다. 

“팔찌의 의미를 아나?”

“액세서리 따위에 의미는 무슨.”

“그대는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라오.”

“뭐?”

“팔찌의 의미라고. 그게.”

다시금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 여자의 모습에 베르타스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여자는 아직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큼 저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쉽지 않겠군.’

하긴. 제 인생이 쉬운 일은 없었다. 모두 발로 뛰어서 얻은 것. 인생에 있어서 그가 얻은 것은 모두 노력으로 얻은 것이었다.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사령관이 되기 위해서 무수한 적들을 베어 넘겼다. 군단장이 되기 위해서 적진으로 건너가 적의 군단장을 베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검을 들었다. 그게 그의 인생. 검 한 자루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의 인생이었다. 

어릴 적엔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무언가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책도 버렸다. 그에겐 오직 남들이 범접할 수 없을 만한 무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무력은 그를 지켜주는 힘이자 권력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숙부인 황제가 저를 죽이려고 한다고 해도 국경에 벌려놓은 일이 많아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다.

쉬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인생. 여자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도 좋았다. 어려울수록 가치 있는 것이니까. 

너무 많은 것을 사서 한 손에 든 짐이 묵직했다. 무거운 짐에 그리고 사소한 생각에 정신이 쏠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대편 손이 허전하였다.

“안 돼!”

여자를 향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멀어지는 여자를 잡을 수 없었다.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그녀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인파에 쓸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 손을 놓은 것이었는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베르타스의 머릿속엔 갖가지 생각이 난무했다.

‘대체 왜…….’

왜 자신을 떠났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없었는데. 귀족이 아니었어도 상관없었다. 평민이 귀족인 척했어도 그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냥 그녀 자체로 좋았는데 대체 왜.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물음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찾겠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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