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별채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남자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어떻게 벌써…….’
자신의 마법 때문에 아직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소드마스터라 다른 것인가.’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남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를 만류하며 그의 무릎에 봉투를 ‘툭’ 하고 내려놓았다.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마주하며 후드를 벗었다.
“어딜 다녀왔나?”
“이걸 좀 사느라고?”
봉투에서 보리빵을 하나 꺼내 들고 이실리스가 말했다. 보리빵을 입에 무니 고소한 맛이 가득했다.
“이게 뭔데?”
“빵?”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보리빵이야. 이 항구에서만 나는 것이지.”
항구도시이기에 밀보다는 보리가 많이 나는 이곳의 특산품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외유를 나오면 항상 먹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사주셨지.”
“아버지가?”
“그래.”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왜 저 남자에게 이런 말까지……’
알 수 없었다.
“맛있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녀가 아직도 침대 위에 있는 남자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결혼을 하라고 하신 건가?”
“지금은 안 계시는 분이 무슨.”
아버지가 계셨다면 신하들이 국혼을 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선황제가 아직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을 테고 자신은 황녀에 불과했을 테니.
“그럼…….”
“가신들이.”
짧은 그녀의 대답에 남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아버지가 안 계셔.”
“그런가?”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남자의 짙어진 눈을 마주하면서 그녀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힘들었겠군.”
남자의 나이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한두 살 위로 보였는데 그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될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것으로 보아, 얼마나 굴곡진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얼핏 술집에서 본 남자의 검술은 실전에서 사용하는 검술이었으니.
‘살기를 띠고 있었지. 어린 나이에 전쟁터를 전전했나 보군.’
순간, 뒤에서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를 감아오는 손에 그녀의 몸이 흠칫했지만 따뜻한 감각에 온몸이 노곤해졌다.
“사라진 줄 알았어.”
“…….”
자신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면 끝날 관계. 아이가 생기면 끝날 관계였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는 끝내 얻지 못하겠지. 내가 황제인 이상. 자신의 몸에 닿아오는 뜨거움을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눈을 감았다. 남자를 알기에 한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 * *
남자와 시간을 보낸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일이면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도로 돌아가야 했다.
“시간이 빨라졌군.”
거울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군청색으로 변한 자신의 눈동자에 당황했다.
“하긴 거의 일주일 단위로 시약을 먹었으니 당연한가.”
마법 시약은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내성이 생긴다. 아공간에서 시약을 꺼내 삼키는 그녀였다. 이제 하루. 아이가 생겼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생기든 생기지 않았든 이곳을 떠날 시간은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착잡했다. 황제의 책무를 저버리고 만난 이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었다. 한 달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자가 주는 것에 익숙해졌고, 남자의 보호에 익숙해졌다.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실리스는 자신의 비겁함에 몸을 떨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황관을 쓴 이상 그 황관의 무게를 버텨야 한다. 설령 인간의 감정을 포기하라는 것 일지라도 이실리스는 해내야 했다. 그것이 황제인 자신의 의무이자 책임이었다. 황녀로 태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으니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그녀의 제국민들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라르헨 제국을 수호하는 것만이 그녀가 해야 할 역할이다. 모든 것은 다 이 나라를 위해서.
‘뭐 황제인 내가 처음으로 한 일탈이었지만…….’
그 일탈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데려가고 싶었다. 저 남자를.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눈동자 색깔이 물빛으로 돌아왔다. 숙소 밖으로 나가니 남자가 이실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나오는군.”
“어딜 가려고?”
“오늘은 이곳의 축제날이라고 해서.”
얼른 오라는 듯 손짓하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아직도 이름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나?”
“이름?”
남자의 물음에 그녀가 웃었다. 이름이라니. 그런 것을 알려줄 리가.
“싫은가?”
“이름은 묻지 않기로 한 것……. 아니었나?”
“그랬지.”
걸어가면서 말이 없는 남자의 모습에 이실리스도 말이 없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름을 알려주기엔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으니.
‘설마 용병왕은 아니겠지.’
아직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용병왕이 저 남자라면 자신은 큰 실수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이름을 먼저 밝혀도…… 말 해 줄 수 없나?”
“그건 안 돼.”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젓는 그녀를 보면서 남자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마저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우수에 젖은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이실리스가 말을 돌렸다.
“오늘 열리는 축제는 왜 열린다고 하지?”
“아, 황제 폐하의 탄신연 때문이라고 하더군.”
“아 벌써 그렇게……”
벌써 생일이 되었다니. 황제가 되고 나서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그녀였다. 그랬는데 생일이라니.
“그러니 오늘은 제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기꺼이.”
함께 시장에 나온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날이라 그러한가.’
평민들이 쓰는 물건을 신기해하는 이실리스에게 남자가 이것저것을 알려주었다.
“그래?”
“그렇지. 이건 결혼할 때 사용하는 꽃이라고.”
“결혼할 때?”
상인에게 동전 하나를 던지면서 남자가 꽃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리시안셔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뜻하는 꽃이지.”
그녀의 귓가에 리시안셔스를 꽂아주면서 자상하게 남자가 말했다.
“변하지 않는……. 사랑?”
“그래.”
“나를?”
“너를.”
“왜지?”
“그건 나도 모르겠군.”
“……..”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말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왜?”
정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실리스의 뺨을 남자가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걸 설명할 수 있었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않으면?”
“너에게 날 받아달라 애원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열망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이실리스는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신하들의 속내를 파악하거나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숙적들의 속마음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 없이 제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가 어려웠다. 저는 가진 것도 없고 남자의 재력에 비하면 이렇다 할 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데 왜 남자는 제게 이런 말을 하는가.
“생각을 해 보고 알려줬으면 해.”
“기대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넌 결국 나에게 오게 될 테니.”
“대단한 오만이군, 그래.”
“자신감이라고 해줘.”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 남자가 이실리스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병을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거 전의…….”
“그래. 네가 달라고 했던 그 병이야.”
“잘못 알았군. 내가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누가 줬는지를 물었는데.”
“그랬었지.”
“그대는 나에게 알려주겠다고 답을 했고.”
“그랬지.”
“알려줄 생각이 있나?”
“오늘 밤에.”
“오늘 밤에?”
영원히 듣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이실리스에게 말했다.
“너 하나쯤은 책임질 수 있으니 내게 와.”
“하!”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한 제국의 황제를 책임질 수 있다고? 제 정체를 모르기에 저렇게 말하는 것이겠지.
“가지.”
말이 없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남자가 그녀를 재촉했다. 작정이라도 한 듯 이것저것을 안겨주는 남자의 모습에 이실리스는 어이가 없었다. 비싸디비싼 장신구부터 싸구려 실팔찌까지. 시장에 나온 거의 모든 품목을 사려고 하는 남자를 보면서 그녀가 남자의 소매를 잡았다.
“이제 그만하지.”
“왜. 좋은데.”
“정말로 다 살 생각인가?”
“그럼. 네게 주는 것인데.”
“들지도 못해.”
“내가 들어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마.”
점점 말이 짧아지는 남자였지만 이실리스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때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손짓하는 페일이 보였다.
‘한 달이 다 된 지금 왜…….’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서 걸으면서 이실리스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손을 놓았다.
“안 돼!”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이실리스는 인파에 묻히고 말았다. 사람들을 젖히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남자를 향해 웃어 보이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다음에 또 만나지.’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다. 그녀는 바로 공간이동 마법을 펼쳤다.
골목에서 페일과 마주친 이실리스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문제가 생겼어. 이실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