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61)

8화.

“아니……. 그게…….”

우물쭈물하던 여자가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그대는?”

“그대?”

“불편한 것인가?”

여자의 말투가 예스러웠다. 궁중 예법의 말투를 사용하는 여자를 보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뭐가 눈에 쓰인 거라고 하는 것인가.’

“괜찮군.”

“뭐?”

“듣기 좋다고. 네 말투.”

“너도 귀족인가?”

여자의 말에 베르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한 눈으로 생각에 빠진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웃으며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따뜻하게 닿아오는 온기가 마음에 들었다.

“왜 그러지?”

“좋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그녀의 귓가에 입바람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일단 더 자고.”

“놔 달라고 하였다.”

“더 자고.”

눈이 절로 감겼다. 

* * *

이실리스는 몸을 빼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마법사가 기사로 보이는 남자를 어떻게 힘으로 이길 수 있을까. 마법을 써서 빠져나올까 생각도 했지만, 그녀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체온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고. 어젯밤엔 시녀가 말했던 하늘을 둥둥 뜨는 기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녀였다.

‘이걸 계속해야 아이가 생긴다는 거지.’

수십 번도 더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실리스는 결심했다. 아이가 생길 때까지 이 남자와 하겠다. 어젯밤. 마지막에 남자가 무어라 속삭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해댔는데 기억이 나면 이상한 거지.’

애써 자기 위안을 하는 그녀였다. 편안했다. 집무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은 것도. 끌어안고 잠을 청한 것도. 더 자자고 말한 것도. 모든 것이 처음. 남자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처음이었다. 

그의 품에서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자신을 강하게 끌어안는 남자의 손이 느껴졌다. 이실리스는 남자의 체온을 느끼면서 생각에 빠졌다. 아이를 갖기 위한 시간은 한 달. 그 한 달 안에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남자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이실리스는 옷을 갖춰 입었다. 슬립 마법을 다시 한번 걸었으니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거였다. 로브를 두른 그녀가 공간이동마법을 펼쳤다.

* * *

“누구냐!”

갑자기 나타난 이실리스를 향해 남자가 소리치자 이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과일주를 줘.”

놀란 눈을 한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건 일반 주점에 가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달이 뜨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무슨 색의 달이 뜹니까?”

“푸른색.”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가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의 뒤를 따라 비밀의 문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집무실이 나왔다.

“뭐지?”

“손님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사촌. 페일러스였다.

“페일.”

“이리스.”

후드를 벗자마자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는 그였다.

“휴가를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여기 와서 날 찾을 줄이야.”

“볼일이 있어서 왔어.”

“그럴 것 같았지. 앉아.”

여전했다. 자신에게 반말을 찍찍 날리는 것도.

“만족하나?”

뜬금없는 이실리스의 말에 페일러스가 웃었다.

“그럼. 여기서는 내가 왕인데.”

“황궁에서 나가지 않았다면 반역이라도 저질렀을 것 같군.”

“당연한 소릴. 난 남의 밑에서는 못 살아.”

페일러스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이 어렸다.

“그래도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어.”

“이 나라를 이끄는 여제가 약한 소리를 하는군.”

진지한 눈을 하고 쳐다보는 페일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런 약한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늘 말하지만, 그 자리 나 주면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

“내 욕심을 아는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웃기는군.”

코웃음을 치며 말하는 이실리스의 모습에 페일이 웃었다.

“그래야 너답지.”

자신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은 페일은 어릴 적부터 그녀에게 높임말을 하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은 그런 페일을 혼내고 달래도 보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이모님의 아들인 페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대공의 자리를 걷어찬 뒤, 사라졌고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여긴 왜 왔지? 이 나라의 군주께서?”

“자료가 필요해.”

“자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자료. 너라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자신의 말에 대번 얼굴을 굳히는 페일을 보면서 이실리스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부고를 들었던 그 순간부터 생각했던 그녀였다. 검술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버지가 누군가의 칼을 피하지 못해 죽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의 강력한 보호 마법을 두른 마법 무구도 있었다. 그랬는데 전쟁터에서 눈먼 칼에 맞았다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이실리스의 눈을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조사는 했지만 자료가 별로 없어. 오히려 뒤지면 뒤질수록 더 없더군. 이상한 자료만 잔뜩 나와서.”

“이상한 자료?”

“뭐 그런 거지. 비리?”

“그것도 다 내놔.”

“내어주면? 넌 나에게 뭘 줄 거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으로 하지.”

“뭐?”

“원래 황제에게 와야 할 정보를 가져오지 않는 것은 중죄. 그러니 다 쓸어버려야 하는데 봐 주지.”

“뭐라고?”

“억울하면 네가 황제 하던가.”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페일러스였지만 이실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자신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충동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황제인 자신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휴가라고 일을 던져두고 나온 것도 황궁 안에 존재하는 불순분자들을 모두 쳐내기 위한 술수였다. 자신이 없는 동안 궁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다 영상기록구에 저장되고 있었다.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설치하느라 몇 날 며칠을 예민하게 굴었다. 그러나 방법은 이것뿐.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조차도. 어릴 적부터 자신을 키워준 시녀장도. 자신을 보좌하는 보좌관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급한 거 같으니 이번만 봐주지.”

페일러스의 말에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번은 봐주겠어.” 

“넌 정말 타고났어.”

“칭찬으로 듣지.”

타고나길 여제로 타고났다는 그의 말에 그녀가 웃었다. 하나 해결되었다.

“자료는 석 달 후, 자정 무렵. 황궁으로 내가 직접 가져가지.”

“기다리지.”

제 할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실리스를 바라보던 페일러스가 말했다.

“점심이나 먹고 가지?”

“미안하지만 바빠서.”

“아, 그 남자 만나느라?”

“너……. 알고 있었나?”

“그만한 마력 파동이 있었는데 모를 리가. 그것보다 네가 찾아온 것이 의외였지. 너 그 남자가 누군 줄은 알고…….”

“거기까지.”

“설마 너 정말로 아이를…….”

“그만.”

단호한 이실리스의 대답에 페일러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거 참. 진짜였군. 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난 부군은 필요 없다. 아이만 필요할 뿐.”

“그 남자가 누군 줄 알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변하는 건 없어. 아이를 가지고 여기를 뜬다.”

“역시 넌……. 그 자리가 잘 어울려. 이실리스.”

“칭찬으로 듣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간이동마법이 펼쳐졌다.

* * *

베르타스는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열 살의 기억. 첫 살인의 두려움으로 몸서리치던 그때, 병영막사에서 몰래 빠져나가 숲속의 나무 밑에서 울고 있을 때였다. 

“너 울어?”

“…….”

두 다리를 포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니.”

발개진 눈을 한 채로 베르타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향해 새하얀 얼굴의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에 베르타스는 당황하여 몸을 뒤로 뺐다.

“흐음…… 너 제법 잘 생겼구나.”

“뭐?”

“울지 마. 잘생겼는데 울면 얼굴이 미워지잖아.”

“안 울었다!”

“운 거 맞는데 뭐.”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여자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옆에 앉아서 무릎을 모아 턱을 댄 여자아이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슬픈 일이 있어도 울면 안 돼. 그러면 얕보이는 거라고 했어.”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그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거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바로 옆에 얼굴을 돌리면서 말하는 아이였다.

“나도 울지 않을 테니까. 너도 울지 마.”

“너도 슬픈 일이 있었어?”

“그럼. 나도 있었지만 안 울잖아.”

“대단하네.”

입술을 꼭 깨물면서 베르타스가 말하자 여자아이가 빙그레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짙은 군청색의 눈동자. 동그란 눈을 보면서 베르타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예쁘네. 너.”

“너도 잘생겼어.”

자신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여자아이를 보면서 베르타스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밤의 숲은 고요하여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다쳤구나?”

가볍게 입은 옷으로 피가 배어 나오자 여자아이는 가만히 제 손을 가져다 베르타스의 상처에 대었다.

“힐.”

자그마한 빛이 일면서 그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놀란 눈으로 여자아이를 바라보자 여자아이도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이젠 안 아프지?”

“응.”

멀리서 누군가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여자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앗! 나 이제 가볼게!”

가려는 아이의 손을 잡고 베르타스가 입을 열었다.

“또…… 볼 수 있어?”

“어려울 것 같은데. 나 이제 집에 가야 하거든.”

“그럼…….”

머뭇대던 베르타스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저기 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숙부가 보낸 자객이 틀림없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아이의 손목을 잡고 냅다 뛰었다.

“야! 나……!”

“도망가야 해!”

* * *

“안 돼!”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베르타스는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한동안 손을 펼칠 수 없었다. 식은땀으로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주변을 살폈다. 그녀가 없었다. 

“어딜 간 건가.”

숙소가 옆이니 숙소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베르타스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젖은 몸이 불쾌했다. 이렇게 오래전의 기억을 꿈꾼 것은 꽤 오래간만이었다.

“전쟁터도 아닌데……. 대체 왜…….”

비슷한 여인을 봤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과거에 만났던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잔상처럼 어제 본 그녀의 얼굴에 겹쳐졌다. 

“닮았군.”

정말 닮았다. 어릴 적 그 아이와.

“살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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