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61)

6화.

이실리스는 남자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면서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살아 돌아온 그대를 위해.”

“휴식처에서 만난 용병 아가씨를 위해.”

서로 다른 건배사를 하며 술을 넘겼다. 그 이후엔 소소한 잡담을 하며 술을 마셨는데, 그와 보내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함께 전쟁터에서 있었던 아픔을 나누고, 슬픔을 이야기하고 죽은 동료들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날이 밝았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지켜보던 이실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새는 줄도 몰랐군.”

“나도 그렇군.”

의자에 기대어 앉은 남자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즐거웠네.”

“나도.”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 그녀를 남자의 한마디가 붙잡았다.

“다음에 또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당연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남자가 만족한 듯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흔들리는 공기가 그렇다 말하고 있었다. 이에, 이실리스는 자신의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음에 슬쩍 미소 지으며 방을 나섰다.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미남이고 실력 또한 출중한데, 말도 잘 통하니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군.’

남자의 방을 나와 밤을 함께 지샌 그를 생각하며 복도를 흡족히 걷던 그녀는 한 덩치의 남자가 맞은 편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 앞에 왔을 무렵, 마치 길이라도 막으려는 듯 떡하니 버틴 채, 그녀를 못마땅한 듯한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어봤다.

‘그의 부하인가 보군. 감히.’

남자의 시선에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큭!”

“타지에선 시선을 조심해야 하지.”

가벼운 전격 마법을 시전한 그녀가 나지막한 경고의 말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고서야 이실리스는 그녀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쓰러지는 그녀였다.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바로 유혹해서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이실리스였지만, 자신의 체면이 쉽게 잠자리를 가지는 싸구려식의 하룻밤은 허용치 않았다.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 안에서 어느 정도는 공을 들인 뒤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기의 아버지가 될 대상이니 말이다.

‘남자를 순리대로 유혹하려니 그것도 피곤한 일이군.’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만이 화려한 별채 안을 가득 채웠다.

* * *

“각하! 대체 뭡니까?”

침대에 몸을 눕히던 베르타스가 다시 몸을 일으키면서 인상을 썼다. 

“뭐가 말인가. 헥터 경?”

“지금 이 방에서 나간 여자 말입니다.”

“보았나?”

“그럼 눈이 있는데 어떻게 안 봅니까? 마법사가 왜 우리 숙소에 있느냔 말입니다!”

“안 될 것이 있나?”

“아니, 신분도 알 수 없는 자를 힐렌튼의 군인들이 머무는 숙소에 두면 어쩝니까! 거기다 여자를!”

“보았으면 알 텐데. 그리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

그의 말에 말이 없는 헥터를 보던 베르타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뭐야, 벌써 당했나?”

“그냥 위아래로 훑어본 게 전부인데 전격 마법을 날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정도이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귀족 레이디를 위아래로 훑어봤는데, 가볍게 전격 마법으로 끝났다니.”

“귀족이요?”

“느끼지 못하였나?”

“그런 거 모릅니다!”

“그러니 자네 눈을 눈이라 부르지 않고 눈깔이라고 부르지.”

“각하!”

씩씩대며 분노하는 헥터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타스가 말을 이었다. 

“피곤하니 쉬어도 되겠나. 보시다시피 어제 술 마시느라 잠을 자지 못했거든.”

“각하도 말입니다. 그러는 것 아닙니다. 여자와 단둘이 있는데 어떻게 술만 마실 수 있습니까?”

“전쟁터를 전전하는 전우를 만났는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자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군.”

“저도 각하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신분도 모르는 마법사를 들입니까?”

헥터의 말에 베르타스가 자세를 바로 했다.

“혹시 저자가 황태자나 황제의 첩자이면 어떻게 하려고요.”

“저렇게 수준 높은 자를 첩자로 둘 정도로 대단한 자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군.”

“그래도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각하.”

“잔소리는 그만하면 되었네. 이제 자도 되나?”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듣지 않으시겠죠?”

“듣긴 들을걸세.”

“듣기만 하시면 뭐합니까?”

“들어는 준다니까?”

“됐습니다!”

베르타스의 고집을 아는 헥터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베르타스가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곤하였다.

“하여튼.”

베르타스의 고집을 이길 수 없는 헥터가 중얼거렸다. 방금 보았던 여자의 모습을 보니 첩자 노릇을 할 정도로 곤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들의 대장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 헥터는 이 일을 자신의 동료들과 논의해 보겠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베르타스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걸린 늦은 시간이었다.

“너무 잤군.”

최근 들어 이렇게 오랜 시간 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편안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인가.’

자꾸 떠오르는 여자의 웃음이 그의 눈앞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 얼굴이 더욱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그녀의 삶을 지난 밤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젊은 여자가 전쟁터를 전전하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 베르타스는 생각했다. 어쩌면 제가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 전쟁터를 전전하는 그녀의 삶을 안온하게 보호해 주고 싶다고.

“보호?”

처음 본 여자에게 왜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인가. 어릴 적 그 아이와 닮았기 때문인가. 시간은 많았으니 베르타스는 좀 더 알고 싶었고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끌리는 그녀에 대해서.

* * *

“으음.”

가벼운 신음과 함께 이실리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한결 가벼웠다. 건국 황제의 마력이 자신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지만 황성에 있었을 때보다 몸이 훨씬 편했다. 꿈도 꾸지 않고 잠들었던 자신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처음이로군.”

어릴 적 ‘그 일’이 있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잠든 것은.

“그 남자 때문인가.”

남자와의 대화가 그녀를 편안하게 했다. 와인으로 인한 숙취를 마법으로 가볍게 날려 보내면서 이실리스가 뻐근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긴 시간을 잔 탓에 출출함이 밀려왔다.

이실리스는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치고 방문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니면 그가 기다린 것인지, 제 방 앞 복도에서 남자와 마주쳤다.

“늦게 나오는군.”

“그대도 그러하군.”

“저녁 먹으러 가려는데……. 함께 가겠나?”

“나쁘지 않군.”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미는 남자의 손을 잡으면서 이실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이틀간 더 술을 마셨다. 남자를 알아가면 갈수록 남자와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후계를 갖기 위한 외유였으니 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소드마스터.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정도의 강인함. 전쟁터를 전전했으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고귀함을 가진 남자. 이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면 그 아이는 어떠할까.

‘적어도 비슷한 아이가 태어나겠지.’

술집에서 술을 홀짝홀짝 넘기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물었다. 짙어진 시선을 보니 저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남자도 하는 것 같았다.

“술을 다 마시고 나면 뭘 할 거지?”

“계획은 아직 없는데…….”

“그럼 함께 가겠나?”

저 남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실리스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남자의 강인한 손이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맞잡은 손이 뜨거운 탓일까? 그녀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것에 대한 기대감에 몸이 떨려왔다.

“추운가?”

다정한 그의 말투에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다행이라는 듯한 미소를 띠고 그녀를 에스코트하면서 술집을 나섰다. 

나서는 그의 걸음걸음이 우아했다. 일전에 기사의 도리를 말했으니 적어도 귀족 그것도 고위 귀족일 것이다. 남자의 얼굴에 흐르는 귀태는 일반인이 가질 수 없었다. 레이디 운운하는 것을 보니 제법 지위가 높은 자인 듯했다. 오히려 좋았다. 지위가 높은 자이니 하룻밤에 연연하지도 않을 테고, 적어도 그녀 자신이 황손이니 상대는 귀족이 되어야지 싶었다.

‘제법 몸도 마음에 들고.’

탄탄하게 짜여진 남자의 근육은 전쟁터에서나 마주칠 그것이었다.

“별채로 가겠나?”

남자의 말에 좋다고 답하기에는 애매해서 이실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결심은 끝났다. 한 달간 이 남자와 잠자리를 해야겠다. 황실연회에서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접근하는 영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남자였다. 잘난 남자였다. 가지고 있는 무력도 제법 되어 보였고 권력도 있어 보이고, 지위도 있어 보였다.

‘일단 옆 나라 황족은 아니고……. 왕국도 아니고……. 야만족도 아니니…….’

위험 분자들과 머리카락 색이 달랐다. 그러니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이실리스가 그를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경험은?”

자신의 말에 오묘한 표정을 짓는 남자였지만 그녀는 결심을 한 이상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남자가 경험이 있는지 알아야 자신이 결정할 것이 아닌가. 아픈 건 싫었다.

“글쎄…….”

입꼬릴 끌어올리며 미소짓는 남자의 얼굴이 어쩐지 묘하게 위험해 보였다.

“경험이 있나 보군. ……잘 됐군.”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남자의 애매하면서도 위험해 보이는 표정마저도 이실리스를 강하게 끌었다. 

어느새 숙소에 다다랐고 남자와 나란히 걷는 그녀였다. 예쁜 것들이 많았다. 물이 흘러나오는 분수도 마음에 들었다. 저렇게 사소한 것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을 보니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많이 풀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강하게 쥐고 끌어당겼다.

“위험……!”

그냥 걷다 보니 정원에 장식된 냇물에 빠질 뻔한 그녀였다. 강하게 허리를 잡아 오는 손길에 이실리스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감히 누가 황제의 몸을 부여잡을까. 이런 식의 밀접한 접촉은 드문지라, 이실리스는 또다시 순간 당황했다. 항구에 이어 이 남자에게만 두 번째라니.

“아…….”

당황하여 이실리스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에는 뜨거운 불꽃이라도 옮겨놓은 듯, 정염이 서려 있었다. 그 눈빛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흡, 잡아먹힐 듯한 이 기분은…….’ 

“조심하지.”

“……고맙군.”

고마움을 표하는 이실리스의 말에 남자는 단정한 입술을 늘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런 남자의 웃음은 따뜻했고 설레도록 멋스러웠다.

‘잠깐, 멋지다고?’

그녀에게 있어 멋짐이란 언제나 힘이었다. 물론, 남자의 힘이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고집스러움도 마음에 들어찼다. 그런데, 이런 소소한 남자의 웃음마저도 마음에 들어버린 그녀였다.

“그럼 가지.”

허리를 놓아주면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뒤를 따라서 이실리스도 걸음을 옮겼다. 남자와 함께 당도한 곳은 그의 숙소 앞이었다. 바로 근처에 자신의 별채가 있었다.

“여기는…….”

“내 방 앞이지.”

“알고 있어.”

“이미 여러 번 와 보지 않았나?”

“그렇지.”

남자의 부하와 마주친 그 복도에서 그녀는 망설였다. 이미 여러 날 동안 남자의 방에 들락날락했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릴까. 그녀의 주춤거림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남자가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의 얼굴을 얄궂게 들이대었다. 그 바람에 입술이 거의 맞닿을 뻔했다.

“이제 와서 빼는 것은 아니겠지.”

“누……. 누가…….”

으르렁거리는 남자의 속삭임에 이실리스가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숨결이 맞닿자 잠시 숨을 멈추는 그녀였다.

“흡!”

입술을 덮치는 남자의 단정하고 매섭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기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