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61)

5화.

“어디에 있었지?”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곳은 자일 평야로군.”

“아, 그 대단위 마법이 난사되었던 곳이군.”

“아는가?”

“알지. 아주 유명하지 않나.”

이실리스가 놀라며 묻자 남자가 웃으며 답했다. 유명하긴 했다. 그녀가 전쟁에 참여하여 두 번째로 큰 대단위 마법을 난사한 전쟁이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손짓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마도제국인 라르헨의 위상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했다. 그 전쟁이 있고 난 뒤로 자그마한 국지전들을 제외하면 큰 전쟁은 사라졌다. 

역사상 위대하다고 불리는 황제의 마력에 버금가는 마력을 타고난 그녀였다. 힘을 내보이는 것이 귀찮아 그동안 늘 조용히 있었는데 진심으로 화가 났다. 그 전쟁에서. 바다의 해적들이 육지로 올라와 제국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본 그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 난사한 마법이었다. 그 마법을 사용하고 며칠을 앓아누웠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제국민들을 지킨 것을.

“라르헨의 여제를 보았겠군.”

“마법사라면 그분을 경외하지 않을 사람은 없지.”

아무렇지 않게 저 자신을 추켜세우며 이실리스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남자가 또 한 번 웃었다. 어두운 눈동자가 빛을 담고 반짝였다. 

“용병인 너도 말인가?”

“마법사 용병이 드물지만 그렇지.”

“그럼 넌 라르헨 소속이 아닌 건가?”

마법사라면 대부분 라르헨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용병이라 소개했기에, 라르헨 제국에 머무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것을 묻는군.”

“……미안하군.”

처음 만난 이에게 너무 깊이 많은 질문을 해오는 남자에게 단호히 경고의 말을 날리자 바로 수긍하는 남자였다.

“반가워서 그랬지.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전우를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만났기에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나?”

“그도 그렇군.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우리가 서로 적이었을 수도 있으니.”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이실리스의 모습을 짙어진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속삭였다.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엔 힘을 담은 울림이 있었다. 그 낮은 울림은 이실리스에게도 전해져 그녀의 마음을 조용히 휘감았다. 어쩌면, 전쟁을 이야기한 그 순간부터 남자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진짜배기’ 사내는 드물었으니.

‘저만한 무력을 지닌 사내라면 더욱 드물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이토르트 항구에 그녀가 온 것이 행운일 수도 있었다. 이런 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남자와의 대화는 이실리스를 즐겁게 했다. 남자는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옆에서 듣고 있던 바텐더가 추임새를 넣는 것을 들으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남자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밤이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아, 그런가?”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가 술잔의 술을 비웠다. 피곤하긴 했다. 황궁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국경의 끝자락에 닿아있는 이토르트 항구까지 이동 마법을 사용한 그녀였다.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피곤함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여행지라 표정이 풀어졌나 생각했으나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황제.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 표정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 줄이야.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군.”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

남자의 말을 잘라내면서 이실리스가 잔을 들었다. 남자 또한 그녀를 향해 잔을 마주 들었다.

마지막 술을 목 안으로 단숨에 넘기고선 그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장소를 옮겨서 한 잔 더 하겠나?”

“좋은 생각이군.”

“그렇다면 가지.”

남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이실리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미는 남자를 마다할 수는 없는 법. 그녀를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피식 웃었다. 

“왜 그러지?”

“아니, 아니야. 숙소에 돌아가서 한잔하지.”

“좋은 술이 있나?”

“적어도 이곳의 술보다는 낫겠지.”

그녀의 이름을 딴 술은 고급술이긴 했지만, 그녀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키기엔 어려웠다. 술을 진상하겠다는 바텐더의 이름을 기억해 둔 그녀가 남자와 걸음을 옮겼다. 시끌벅적한 항구의 밤이 그들을 반겼다.

“소란스럽군.”

“사람 사는 곳 아닌가. 오히려 좋군.”

이실리스의 말에 웃으며 답하는 남자였다.

“그런 것인가.”

“그렇지. 너와 내가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 거야.”

남자의 말이 맞았다. 전쟁터에 있으면서 남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직접 들으니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자신처럼 전쟁터에 있었고 비슷한 일을 겪은 자가 한 말이라 더욱 그런 것인지, 이실리스는 동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자화자찬도 그 정도면 병이군.”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차피 너와 내가 같은 입장이니 겸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남자의 말이 싫지 않았다.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전쟁터에서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강하게 쥐면서 남자가 다시 말했다.

“너와 내가 아니었다면 이곳도 불태워졌을 수 있겠지.”

“너와 나, 둘 중 한 사람이 이곳에 침략했을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거야.”

“왜지?”

“나는 이곳을 사랑하거든.”

“이곳?”

“정확히는 이 항구를.”

“…….”

어딘지 아련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말하는 남자의 시선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내게 추억이 담긴 곳이거든.”

“그것 참. 나도 그러한데 그대도 그러한가?”

남자의 말을 가볍게 받아치면서 이실리스가 말하자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와 나. 상당히 닮았군.”

“어디가. 난 너같이 우락부락한 남자와는 달라.”

어떤 의미로 남자가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지만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실 남자의 모습은 우락부락하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날카롭게 생긴 얼굴이었다. 다른 곳에서 본다면 귀한 귀족으로 착각하리만큼 귀태가 흐르는.

‘아니 귀족이 맞겠지.’

남자는 귀족의 예법 그대로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재미있군.”

저의 말에 눈을 휘며 말하는 남자와 좀 더 얘기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앞에 숙소가 나타났다. 남자를 따라 도착한 곳은 남자의 방문 앞이었다.

“여기서 한잔하지.”

“낯선 남자의 방에 들어가라는 건가 지금?”

“이 방에 들어왔어도 이 방을 벗어날 정도의 무력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법 실력에 대해서 언급하는 그의 말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강제할 수 없었다.

‘여차하면 하나 던지고 사라지면 되니까.’

가지고 있는 마법 무구를 하나 던지고 사라지겠다는 생각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남자의 에스코트를 따라 방안에 들어서자 깔끔한 방이 그녀를 반겼다.

“뭐로 하겠나?”

“와인이면 좋겠군. 레드와인이면 더 좋고.”

기왕이면 붉은 레드와인이었으면 했지만, 이곳은 항구도시라 레드와인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남자가 매력적인 입꼬리를 쓱 끌어올리며 웃었다.

“마법도 부족해 투시력까지 지녔나 보군. 내가 레드와인을 가지고 있는 줄은 어찌 알고?”

“음?”

“운이 좋군. 그대.”

남자가 자신의 짐을 뒤적거리다 와인을 한 병 꺼내 들었다. 

“꽤 좋은 것을 들고 다니는군.”

와인병을 알아본 이실리스가 말했다. 비싸다고 할 수 있는 브레고 지방의 와인이었다. 그녀가 즐겨 마시는 술이라 그녀에게 진상되는 라인은 따로 있지만.

“우연히 사람을 구해주고 얻었지.”

“구해줘?”

“칼리파 제국의 병사들에게서 상인을 구해줬거든.”

“브레고 지방은 칼리파의 국경과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상하군.”

“나도 그런 생각을 하였지. 힐렌튼으로 가던 길에 방향을 잃었다더군.”

“힐렌튼?”

남자의 말에 의문점이 들었다. 논리에 맞지 않았다. 브레고 지방은 그녀의 제국에서도 남쪽 끝에 있었다. 그런 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북쪽 끝에 있는 힐렌튼에 판매한다고? 나라를 가로지르는 무역을 한다면 제국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서류에 도장을 찍은 기억이 없는 이실리스였다.

‘뭔가 있군.’

외유를 나오길 잘했다. 바로 조사하리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앞에 잔이 놓이고 붉은 와인이 그 안에서 찰랑거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붉음이었다. 라르헨 제국의 황족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고 그녀의 제국에서 추앙받는 색이기도 했다. 레드와인의 가격이 높아진 것은 그녀가 즐기는 와인이라는 것도 한몫했으나 황족의 색이라는 점이 더 컸다. 마실 수 있는 붉은 색은 이것이 유일했으니. 다른 붉은 색의 위스키는 일반인들은 마실 수 없는 황실에만 진상되는 술이었다. 그런 이유로 레드와인은 귀족들과 돈이 있는 평민들에게 사랑받았다.

“술을 앞에 두고 생각이 깊군.”

“그랬나?”

와인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넘기면서 이실리스가 웃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귀족들에게 이를 빌미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았다.

‘이런 것으로 기쁘다니. 나도 참.’

기뻐할 것이 이리도 없다니. 새삼 황제라는 자리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환하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지?”

“최근 웃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

“자일 평야 전쟁이 마지막이었다면 그동안 꽤 쉬었는데 웃을 일이 없었나?”

“전쟁터를 떠났다고 그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하긴 나도 그렇군.”

“그대의 기억은 어디에서 멈춰있지?”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한 남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파르고뉴 지역이군.”

“최근 힐렌튼과 칼리파 제국이 붙었다는 그곳 말인가?”

“용병이어서 그런가 사정에 밝군.”

“모를 수가 없지. 그곳은 거의 일 년간 국지전이 벌어졌던 곳 아닌가.”

“그렇지.”

“누가 이겼지?”

마지막 보고를 듣지 못하고 이곳으로 넘어온 그녀였다. 궁금했다. 칼리파가 이겼는가. 아니라면 힐렌튼인가. 

“힐렌튼.”

“그렇군.”

“그래서 여기 올 수 있었지.”

“힐렌튼 쪽에 용병으로 있었나?”

“아니, 국지전이 끝나서 여기 올 수 있었다는 소리였어.”

“힐렌튼 쪽이었군.”

“눈치가 빠르군.”

남자가 이기지 못했다면 살아 돌아올 리 없었다. 칼리파 제국에서 싸움에 진 용병들을 살려 보낼 리가 없었으니까.

“목숨을 부지한 것이 다행이군. 건배하지.”

이실리스의 말에 남자도 잔을 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본 남자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아름다움에.”

“웃기는군.”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남자의 말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는지 이실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아니. 정말 아름다워.”

“그런 찬사는 하도 들어서 지겹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