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3층 전체를 빌리는 것보다 그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그도 아니라면 몸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거나. 후드를 쓰고 있는 여자는 이 이토르트 항구에서 드물었다. 마법사가 돌아다니지 않는 항구였기에 로브를 쓴 사람이 지나간다면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었다. 의심할 만한 것은 또 있었다. 여자가 쓴 마법. 웬만한 마법사들은 이토르트 항구에 오지 못한다.
‘마력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여기에 올 이유가 있었나.’
여자의 이름으로 빌린 방이 아니니 여자의 행적을 찾는 누군가가 온다면 그녀의 거취를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베르타스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여자에게 별채를 권했던 것이다.
‘순순히 그렇게 한다고 할 줄은 몰랐지만.’
생각보다 경각심이 없는 여자였다. 그도 아니라면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이는군.’
보석을 꺼내 드는 그녀를 보면서 베르타스가 마음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위험에 처한 레이디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기사로서 당연한 일. 아까 항구에서의 제 무례로 값을 치른 것으로 합시다.”
제 말에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연한 물빛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연한 물빛이라…….’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더 짙은 군청색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짙은 군청색은 라르헨 제국에서 황족의 색. 더구나, 로브 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에 짙은 군청색의 눈동자라면 라르헨 제국의 황제일 터. 황제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단 말인가. 라르헨 제국도 지금 자신들이 사절로 찾아올 것이기에 정신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기시감이 들었다. 저 얼굴에 군청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을 본 듯했다. 계속해서 드는 익숙함에 그가 결심했다.
‘계속 두고 보면 알 수 있겠지.’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저 여자도 위험을 피해서 이곳에 온 이상 금방 떠나지는 않을 터.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알아볼 심산이었다. 전쟁터에서 구르기만 한 자신이 과연 저 여자를 어디에서 본 것인지 그게 궁금한 베르타스였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 * *
이실리스는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스코트하겠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저 손을 잡아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마음대로 자신의 상황을 오해한 것은 오히려 제게 득이 되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측근들이 이곳에 와서 저를 찾더라도 남자가 내어준 별채에 있다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갖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온 그녀로서는 이 한 달이 너무나도 중요했다.
‘계획대로 하겠다.’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에는 다른 속셈도 있었다. 제법 마음에 들어 미련이 남았던 자인데, 제때 다시 나타나 준 저 남자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질 생각이었다.
‘가까이에 있다 보면 동하겠지. 사내란 그런 자들이니.’
그런 사내들을 너무 많이 보았기에 그도 같은 자일 것으로 여겼다. 이미, 제 손에 닿아온 그의 온기는 충분히 뜨거웠고 에스코트하면서 웃는 그 웃음도 싱그러워, 이실리스는 자신의 계획이 금방 성공의 종을 울리리라 여겼다.
“가장 안쪽의 독채가 비어있군. 그 옆은 내 숙소고.”
“굳이 그런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내 숙소로 오지.”
남자의 말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해. 여성이 그대뿐이라 무슨 일이 생길까 해서 하는 말이니.”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쪽의 수하들이겠군.”
그녀의 말에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긴 하겠군.”
짧은 시간에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한 남자의 말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본 남자가 순간 말을 잃었다.
“왜?”
웃는 모습이 이상하였나 하여 이실리스가 물었다. 자신의 말에 당황하는 남자의 모습이 우스웠다. 귓불까지 빨개지는 얼굴은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아니. 그렇게 웃으니…….”
“웃으니?”
답은 나와 있었지만 계속해서 캐물었다. 강인해 보이는 남자가 제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이 제법 유쾌했다.
“……예쁘다고.”
이제 볼에 열까지 나는지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면서 말하는 남자를 향해 더욱 크게 웃는 그녀였다. 그녀의 웃음에 남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뭘 드릴까요?”
이실리스는 술집에 들어갔다. 방안에만 있기는 무료하여 늦은 밤이었지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마음이 소란스럽기도 했고.
“이실리스 한잔.”
어이없게도 술집에 자신의 이름을 건 술이 있었다. 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술을 제작한 제작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술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아가씨 그 술 독해요.”
컵을 닦던 바텐더가 그녀에게 말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독해도 마법으로 술기운을 날리면 그만이었다.
“한 잔.”
어쩔 수 없다는 듯 술을 한잔 따르는 바텐더였다. 군청색의 술이었다.
“색깔이…….”
“황제 폐하를 상징하는 색깔이라 그렇소.”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하는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눈동자 색깔이기는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면서 바텐더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참전용사인데 우리 폐하께서 날 살려주셨지. 그렇게 아름다우신 분은 처음이었소. 전쟁터에서 고고하게 서 계신 아름다운 분. 아직도 잊지 않는다오. 그분이 했던 그 말. 죽지 않게 해줄 테니 버텨라.”
“저 영감탱이 또 그 소리구만!”
옆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실리스는 기억을 되돌렸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이전의 기억이 선명했다. 야만족과의 전쟁이었다. 자국민들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직접 전선으로 날아가서 대단위 마법을 난사했던 그 날이었다. 저 남자에게 그 말을 한 날은.
“그래서 난 결심했다오. 이 전쟁이 끝나면 내가 그분의 이름을 딴 술을 만들어서 바치리라! 그래서 만들어진 술이 이거요.”
“그래서 폐하의 이름을 땄나?”
“어차피 그분의 진명은 아무도 모르잖소. 그러니 드러난 이름을 부르는 것쯤이야.”
마법사의 진명은 부르는 사람에 의해 구속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마법사의 진명은 철저하게 숨겨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것은 마도제국인 라르헨에서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실리스는 마법사이자 이 제국의 황제였다. 그녀의 진명은 그녀의 어머니인 선대 황제만이 알고 있었고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녀의 진명을 알기 위해서는 신전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의 방에 가야 했다. 황실의 피를 타고난 사람, 그것도 직계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방에 그녀의 진명이 숨겨져 있었다.
“예쁘군.”
“그거 생각보다 독하다오. 우리 폐하를 위해서 내가 만든 술이오!”
“그럼 진상을 하면…….”
“하려고 해 봤지! 그런데 중간에서 안 된다고 해서 포기했다네.”
“안 된다고?”
“이 항구를 다스리는 영주가 하지 말라고 했다네.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다나?”
득이 될 것이 없다니. 뭔데 그런 것을 판단한단 말인가.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밑도 끝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술을 넘겼다. 독했다.
“아가씨 그걸 그렇게 마시면…….”
“아가씨 혼자야?”
걱정스러운 바텐더의 말 뒤로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무리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을 걸고 있었다. 무리의 한 명이 그녀의 후드를 잡아당겼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게 되었다. 순간 술집에는 정적이 흘렀다. 물빛 눈동자에 붉은 머리카락. 시원하게 뻗은 눈매에 다른 사람을 내리누르는 시선. 도도해 보이는 그 얼굴에 모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무례하군.”
조용히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불량배들이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래도 여기서 알아주는 사람들인데 우리와 한잔 어때?”
그들의 말에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고 비웃는 그녀였다. 그 찰나 간의 비웃음에 화가 난 무리가 그녀에게 손을 올렸다. 마법을 펼치려는 찰나, 그녀의 앞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그 남자였다.
‘너무 자주 마주치는 것은 좋지 않은데…….’
“그런데 벌레가 붙었군.”
살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불량배들이 흠칫했다.
“발걸음이 이곳에 닿았나?”
“방안은 무료해서.”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가 답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불량배들이 자신들의 먹잇감을 어쩐지 강한 놈에게 뺏긴 듯해 감히 남자의 멱살은 잡지 못하고 분풀이 삼아 욕을 해댔다. 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검이 전광석화로 움직였다.
정말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팔이 잘려나갔다. 이윽고 비명이 이어지고 목숨이라도 부지하고자 소란스레 빠져나간 불량배들이었으나, 남자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같은 거로 한 잔.”
바텐더가 손을 덜덜 떨면서 술을 따랐다. 저렇게 압도적인 무력은 오래간만이었다. 그녀는 술을 털어 넣고 말했다.
“즉결 처분이라니……. 이곳의 치안병이 올 수도 있을 텐데?”
“귀족 모독죄는 즉결 처분이지. 항구도시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죄는 크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실리스가 다시금 술을 주문했다. 잔에 채워진 술을 보면서 남자가 말했다.
“군청색 술은 처음 보는군.”
“황제폐하를 상징하는 색이라오.”
자신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는 바텐더였다. 그의 설명에 이실리스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서 구해져 그로 인해 자신을 찬양하는 제국민이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쁘군.”
“……뭐?”
“예쁘다고.”
넘어간 후드를 조심스럽게 씌워주면서 남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평범한 여자는 아니로군.”
“너도 평범한 남자는 아니로군.”
남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치면서 이실리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은 남자가 싫지 않았다.
“전쟁에 참가했나?”
그녀의 말에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보는 남자였다.
“어떻게 알았지?”
돌변한 남자의 분위기에 술집엔 긴장감이 넘쳐 흘렀다. 주위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이실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혈향이 흐르거든. 네게서.”
“이거 참. 지운다고 지웠는데 쉽지 않군.”
“나도 너와 같은 사람이라.”
저도 전쟁터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은근하게 내비친 그녀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대도?”
“그대라니. 우습군. 용병에게 그런 말은 필요 없지.”
시선을 주고받는 둘 사이에 긴장감이 넘쳤다. 방금 남자의 행동에 이목이 쏠렸는데 그녀의 말에 다시 시선이 몰렸다.
“아가씨 용병이었소?”
옆에서 끼어드는 바텐더의 말을 무시하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