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61)

3화.

남자의 말에 놀란 이실리스가 눈을 크게 뜨면서 쳐다보았다. 정말 놀랐다.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저렇게 강인해 보이는 남자도 혼인에 대한 압박을 피할 수 없다니. 

‘하긴, 그것이 귀족의 숙명인가.’

우스웠다. 살아가는 것은 다 똑같은가. 제법 무력이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집안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다니.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얻으면서 이실리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도와줘서 고맙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리를 뜨기 위해 인사치레는 했다. 주변에서의 시선이 너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얼굴이 잘생긴 탓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며, 남자다운 외모였는데, 굵은 선들이 날렵하게 뻗은 얼굴은 단번에 시선을 끌 만한 미남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미남이 바람에 흑발을 날리며 로브를 휘두른 여자와 함께 있으니 시선을 끌 수밖에. 어쨌건 이실리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이 있는 쪽으로 쏠리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한곳에 오래 머물렀어.’ 

얼른 다른 곳으로 가봐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를 찾으려는 황궁 마법사들이 올 수도 있으니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뒤돌아서는 그녀의 팔을 별안간 잡으면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지?”

“이것 참.”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함부로 손을 댄다고 생각하면서 이실리스는 가볍게 마법을 시전했다.

“윽!”

꽤 아팠을 텐데 자그마한 신음을 제외하고는 변화가 없는 남자의 행동을 보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례하군.”

“……사과하겠어.”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가 입은 로브는 고급스러운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녀가 귀족이라는 것을 눈치챈 남자가 빠르게 사과하자 이실리스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영애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을 용서해 주시오.”

제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대며 말하는 남자의 정중한 모습에 한결 누그러진 이실리스가 속삭였다.

“이번 한 번은.”

“고맙다고 해야 하나.”

당찬 그녀의 태도가 재밌다는 듯,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화답을 했다. 그런 남자의 표정과 얼굴에 이실리스는 어쩐지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실리스는 기시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누굴까. 낯익은 얼굴이었다.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있나?”

“나를 유혹하는 건가, 영애?”

어떻게 들으면 지금 이 말이 저렇게 들릴 수가 있는지 잠시 고민하는 이실리스에게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으니.”

아니,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얼굴은 지금의 저 얼굴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앳된 얼굴이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민이 되었지만 이실리스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 제일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해 줄 남자를 서둘러 찾는 것이었다.

“그럼 실례.”

이실리스는 남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선 스쳐 지나갔다. 남자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이토르트 항구에는 특이한 결계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었기에 제국의 황궁을 제외하고 결계가 가장 강력하게 보강된 곳이었다. 이곳의 결계가 황족인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으나 얼른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저의 마력이 건국황제의 마력과 엉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조의 마력은 너무나도 대단하여 지금도 이 나라를 수호하고 있었다. 서 있는 동안에도 계속 그 마력이 자신의 몸 곳곳에 스미고 있었다. 핏줄은 핏줄이라고 상성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마력이 폭주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들은 이 항구에 오는 것을 꺼렸다. 아마 황실에 남아있는 자신의 보좌관들도 그녀가 이 항구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닌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남자였어.’

남자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남자의 잘 짜여진 근육은 그가 기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자는 소드마스터가 분명했다. 대마법사인 그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라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잘 갈무리해서 숨기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자가 틀림없었다. 

“최근에 누가…… 마스터의 반열에 올랐지?”

생각보다 소드마스터가 많아서 기억을 더듬었으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남자처럼 젊은 사람 중 누군가가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는 소문을 들었다면 분명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병인가.”

기사에 관한 소문엔 없었으니 용병만이 남았다. 그러나 용병이라고 하기엔 남자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용병 특유의 시시껄렁함이 없었다. 아니, 자유분방함이 없었다. 나라를 떠도는 용병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이 없고 절제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였지.’

그렇지 않다면 저런 기품이 나올 수 없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남자의 손놀림에서 느낄 수 있었다. 황궁을 드나드는 귀족들과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었다. 말도 섞지 않으려다가 잠시나마 대화를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무뢰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시선을 준 것이었다. 황제인 그녀의 시선을 잡은 사람이라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후사를 봐야 한다면 저런 자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소드마스터의 핏줄에 자신의 피가 섞인다면 그 후사는 아마 대단한 능력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은 깊어졌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무턱대고 그 남자에게 함께 자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실리스는 일단 숙소를 찾기로 했다. 선황제와 이곳에 왔을 때, 찾았던 숙소가 있었다. 

제법 마음에 든 남자였지만, 그녀는 미련을 산뜻하게 접고 선황제와의 추억이 깃든 숙소로 발길을 향했다.

“별채로.”

“죄송하지만 손님. 이미 별채는 선객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3층을 전부 빌리겠네.”

이실리스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주인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항구도시이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기도 했고, 그중에 신분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귀족들도 대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층 전체를 빌리려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석도 받나?”

“물론입니다.”

마법 주머니 속에 있는 보석을 꺼내려는 찰나,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별채는 내 숙소인데…… 여기서 또 보는군.”

그 남자였다.

* * *

베르타스 힐렌튼. 힐렌튼 제국의 공작이자 제국을 수호하는 검이었다. 얼마 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는 자신을 경계하는 황제의 눈을 피해 외국에 사절단을 자처하여 나와 있는 중이었다.

“알리지 않기를 잘했지.”

베르타스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비밀로 하기도 했고, 그 정도 경지에 이르면 기운을 갈무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밝혔다가 피곤해지는 것은 질색이었다. 지금의 황제는 베르타스의 숙부 되는 사람이었다. 베르타스의 아버지인 선황제가 죽고 나서 어린 그를 멀리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에 앉은 사람. 베르타스가 10세가 되자마자 국경으로 쫓아 보낸 장본인이었다. 그런 황제를 위해서 지금까지 헌신했던 베르타스가 돌아서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로 인해 짊어진 모든 것을 내버리고 사절단을 자처하여 라르헨 제국으로 오게 된 그였다. 

“혼인이라…….”

‘혈통 좋은 종마라 이건가.’

국경에서의 사소한 국지전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에게 들이밀어진 것은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한미한 가문이어도 상관없었다. 공작가를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영애들이라면. 그러나 목록에 있는 영애들은 하나같이 하자가 있었다. 염문설이 있거나 사치가 심한 자, 그도 아니라면 두문불출하는 자였다. 베르타스는 이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넘게 나는 여성을 들이민 것은 그리고 그녀가 황제의 정부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나지막하게 뇌까리는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려있었다. 부황의 죽음도 덮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 준다고 하기에 모든 것을 덮겠노라 서약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면죄부를 얻은 황제는 더욱 날뛰었다. 어린 자신을 전쟁터로 보낸 것도 모자라 살아 돌아오자 살수를 계속해서 보냈다. 제국민들이 자신이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제국을 수호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모든 공적이 황제에게 돌아가니 결국 무기력해진 베르타스였다. 그런 그를 보다 못한 부관, 헥터 경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죠! 거기서 한숨만 내쉰다고 변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관의 성화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여행은 다녀본 적이 없었다. 전쟁터와 술집만 전전했지,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머물러 본 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처 없이 걷다가 바다를 보게 된 그는 그곳에서 위태로워 보이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귀족인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그녀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베르타스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안녕을 고하고 등을 돌려 사라지는 그녀의 뒤통수를 자신도 모르게 미련이 철철 흐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어디로 가는 걸까?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군.’

붙잡을 틈도 없이 멀어져 버린 여자.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베르타스는 진득한 아쉬움과 뜻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타깝다고?’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숙소로 돌아오게 된 그는 다시 한번 그 여자와 마주친 것이다. 그녀는 3층 전체를 빌리기 위해 결제하려 했고 이에 그가 재빨리 나섰다.

“난 3층을 빌리겠다고 했는데.”

제 말엔 대꾸도 하지 않으면서 말을 이어가는 여자의 모습에 흥미가 돋았다. 뭐 하는 여자일까. 

“별채는 내가 전부 빌렸지만 한 채 정도는 내어 줄 수 있지. 어떤가 영애?”

자신도 말도 안 되는 제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족 영애라면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언사였다.

“무례하군.”

그러나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베르타스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냥 별채를 내어 드리지. 어차피 남는 곳이 있으니.”

“내게 원하는 게 있나?”

그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저 여자가 무엇이기에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별채에 여자를 들였다는 것을 부관이 알면 난리가 날 텐데.

“그럴 수도, 아닐 수도.”

흘러가는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베르타스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제 말에 고민하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쥐어진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까지…….’

정말 이상했다. 여자의 입이 열렸다.

“별채 값을 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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