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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3/161)

2화.

사이르카 후작이 진지하게 물어오자 이실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에게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후작?”

“후계는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그것도 내 핏줄로 있어야 하겠지?”

“국혼을 하시렵니까?”

“국혼이라…….”

사실 이실리스는 혼인이 귀찮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한평생을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후계는 필요했으며, 그 후계는 자신의 핏줄이어야 했다.

마도제국인 라르헨 제국은 황실의 핏줄을 아주 중요히 여겼다. 일단 황가의 피를 타고난 사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마력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 대에 가장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사람이 황제가 되며, 나머지는 제국 곳곳에 자리하여 황제를 보필한다. 그렇기에 마력으로 제국을 수호하는 황가의 사람들은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정통성이 인정받는 곳. 그곳이 바로 황가였다. 

그런데 이번 대에 문제가 생겼다. 황실의 핏줄이 이실리스 그녀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문란했던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만을 사랑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되자 어머니는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크기만을 기다렸고, 어느 정도 자라서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밑에서 자란 이실리스는 사랑에 대한 약간의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어머니와 같이 강한 사람을 절절매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을 하고 싶었다. 황제인 자신에게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생각만은 늘 같았다. 국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면 아이만.

“아이… 아이라….”

아이는 필요했다. 후계로. 자신의 뒤를 이어서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국혼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누군가가 제 옆자리에 서는 것은 끔찍이도 싫었다. 내가 가진 권력을 나눌 수도 없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휴가를 가야겠어.”

“네?”

자신의 말에 후작이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실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휴가를 가겠다고.”

“갑자기 이 시기에요?”

“그래.”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국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아이를 가진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알려주고 간다면 그건 휴가가 아니지.”

말이 끝나자마자 공간이동마법을 펼치는 그녀였다.

“폐하! 지금은 안 됩니다! 힐렌튼 제국의 황제가……!”

사이르카 후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실리스는 무시하고 술식을 마무리했다.

* * *

그리고 지금 여기. 이토르트 항구의 한편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그녀였다. 청량함을 품은 바다 내음이 좋았다. 

언제 이런 여유를 가져볼 수 있을까. 혹시나 자신을 알아보는 자들로 인해 불편한 여행이 될까 싶어, 그녀는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눈동자 색이 바뀌는 시약까지 마셨다. 이 나라에서 눈동자 색깔이 바뀌는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제국이 생길 때부터 있는 불문율이었다. 건국 황제가 외모를 바꾸는 마법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결계가 걸려 있었다. 오직 황가에서 만드는 시약만이 그 결계를 피할 수 있었다. 외모를 바꾼다는 것은 라르헨 제국의 제국민들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특히 눈동자 색깔과 머리카락의 색이 혈통을 나타내는 증명서나 다름이 없었기에 제국민들은 자신들의 색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군청색의 눈동자는 황족을 상징하는 색이었기에, 그 색 자체로 단박에 황족의 신분임이 드러났으며 또한 경외의 대상이었다.

시약을 마시자마자 이실리스의 군청색 눈동자가 연한 하늘색으로 변했었다. 시약은 오직 눈동자의 색깔만을 바꾸어 주는 것이었기에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변하지 않았다. 그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게 후드로 잘 여미며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좋네.”

활기찬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황궁은 너무도 삭막했다. 시종과 시녀들은 발걸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다니는 이들이었다. 신하라는 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을 떠올린 이실리스의 머릿속으로 입에 칼을 물고 덤벼드는 귀족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저기 보이는 순수함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나의 제국민이라는 것이 함정이지.’

귀찮게 하는 귀족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서 이실리스는 측은지심을 가지기로 했다. 뭐든 다 용서할 수 있었다. 제 자리를 위협하는 것만 아니라면. 황족의 마력이 근간이 되는 나라에서 이실리스, 그녀의 자리를 넘보는 자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참아준 것인데…….”

후계에 관한 이야기는 도를 넘었다. 아직 선황제도 살아있는 마당에 후계를 논하다니. 그녀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옆에 누구를 세우려고 하는 것인지 그게 궁금했다. 그러나 답은 하나. 

‘내 자리를 위협하는 자라면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아이를 갖는다. 부군 없이.’

아름다운 도시. 이 항구도시에서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 적당한 남자를 찾아 아이를 갖고 귀환한다. 그게 바로 그녀의 계획이었다. 

한 달.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한 달뿐이었다. 정확하게 한 달 후, 라르헨 제국은 중요한 외교적 협상이 있을 예정이었다. 호시탐탐 그녀의 나라를 노리는 옆 나라의 황제와 만나야만 했다. 아마 그 자리에 자신이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을 빌미로 삼아 이 나라에 다시 발을 들일 수도 있었기에 이실리스는 반드시 그 시간에 회의 장소에 도착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 없군. 어디를 가야 하나.’

이실리스는 눈앞에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를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불어오는 세찬 바닷바람에 몸이 휘청이고야 말았다. 

“플….”

“위험해!” 

자신의 허리에 손을 감아 뒤로 당기는 강한 힘을 느끼면서 이실리스는 펼치려던 마법을 무효화시켰다. 단단한 팔로 인해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뒤를 향했다. 

“괜찮나?”

“어, 고맙군.”

햇살이 눈부셔서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시야를 찾으려 노력하는 그녀였다. 그 탓에, 햇빛에 자극받은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톡 하고 떨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하얀 얼굴을 타고 내린 눈물방울이며, 하늘빛 눈동자를 머금은 눈꼬리에 걸린 눈물은 애처로웠다.

“울었나?”

남자가 이실리스를 바로 세우면서 엄지로 눈가를 쓸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그녀의 얼굴을 쓸자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시녀들이 치장해 줄 때 외에 누군가의 손이 제 얼굴에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눈 안에 담겼다. 

날렵한 턱선 위로 있는 오뚝한 콧날에 강인한 입매. 그리고 매서운 눈매 안에 녹음의 푸르름을 지닌 눈동자. 그 눈동자 색과 어울리지 않는 칠흑의 까만 머리.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 남자의 시선에 이실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울었지?”

‘울어? 누가? 아……. 나?’

왜 우냐고 묻는 그의 말에 입을 뗄 수 없었다. 울다니. 햇빛에 눈이 부셔 떨어진 눈물을 보고 말하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나올뻔한 것을 참았다. 웃는 모습을 들킬 수 없어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웃음을 꾹꾹 참으며 그녀의 새하얀 손이 우아하게 뻗어졌다. 허나, 손수건을 잡으려는 순간, 남자의 손이 강하게 이실리스의 손을 잡아버렸다. 그에 이실리스는 또다시 흠칫 놀랐다.

‘감히…….’

그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이런 식의 접촉은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흠칫하는 그녀의 반응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남자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짧게 스쳐 지나간 미소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미소는 잔상처럼 그녀의 눈에 남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인데, 따뜻한 미소라니… 그리고 이 손은….’

이실리스의 손에 따뜻하게 닿아온 온기가 그녀에게 특별한 감각을 남겼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 잡았던 그 느낌과 똑같았다.

“아…….”

남자의 손은 그녀에게 그리움을 주었다. 

“…겁먹지 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누가 라르헨 제국의 황제인 그녀에게 겁을 먹게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시절. 지금은 선황이 되어버린 어머니와 함께 전쟁터를 전전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겁이라는 것은 없었다.

[똑바로 보아라. 저것은 사람이 아니고 너의 제국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두려워하면 아니 된다.]

전쟁터에서 맨 처음 살인을 저질렀을 때, 피에 젖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에게 선황제가 한 말이었다. 두려움? 그런 것은 황제에겐 사치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몰래 무서움을 삭였다. 무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뻗어 제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안온함. 그 손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다시 힘있게 잡았다.

“다행이군.”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에 이실리스는 시선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입꼬리만 살짝 올린 남자의 웃음은 그녀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쩐지 저 모습을 계속 보고 싶었다.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갑자기 든 생각에 이실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사연이지?”

남자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연이라니. 그런 것은 없었다. 단지 후계를 위해 국혼을 준비하라는 신하들의 말이 짜증 났을 뿐.

‘그렇다고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제게 다가와 순발력을 발휘해 구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오지랖 넘치게 사연까지 묻는 남자는 모로 보나 이상할 뿐이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정상인가?’

순간적으로 남자가 호구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우는 그녀였다. 호구라고 단정 짓기엔 눈이 예사롭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지만 차가운 눈동자. 자신과 같은 지배자의 느낌이 그대로인 남자의 모습에서 이실리스는 동질감을 느꼈다. 하여, 남자가 궁금해졌다.

‘휴가라 그런가….’

누군가를 향해서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자신을 늘 내리누르려는 신하들만 상대하다가 자신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누가 제국의 황제인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보좌라는 사이르카 조차도 그녀에게 말을 할 때, 항상 시선을 비스듬히 피했다. 제국의 황제란 자리는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마주할 수도 없는 자리. 경외만을 받아야 하는 자리. 그래서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에게 뭐라도 말하고 싶어진 것이.

이실리스는 감히 자신을 동등하게 바라보며 친절을 베푸는 자를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도망쳤어!”

“도망?”

제 말에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도망친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기에…….’

“어디서?”

들려온 남자의 말에 이실리스가 곧장 대답했다.

“집?”

황궁이 내 집이기는 했으니. 그러고 보니 왜 이렇게 웃길까. 내 집인데 마음 편히 쉴 수 없다니. 이게 황족의 숙명인 건가. 나오는 비소를 감출 수 없는 그녀였다. 싸늘한 웃음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집에서 혼인이라도 하라던가?”

“어떻게 알았지?”

“나도 그렇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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