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61)

1화.

이토르트 항구.

“날씨 좋네.”

‘시끄러운 소리, 밝게 웃는 사람들…. 저들이 모두 나의 사람들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실리스도 절로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날이 무척이나 좋았다. 밝게 비친 햇살로 인해 눈이 부셨지만, 환하게 내리쬐는 햇볕, 그 아름다운 금빛을 받으며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로브를 쓰고 있어 그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환하고도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저 사람들이 있어, 내가 있는 거지.”

그녀가 다스리는 제국의 제국민들이었다. 이실리스는 그들을 바라보다 코끝을 스치는 바다 내음에 몸을 돌렸다. 푸른 빛 바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이 순간. 그녀는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제국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에 있었다.

평범하게 제국민들과 섞여들어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볼 기회가 얼마나 있었을까. 처음이었다. 그녀에게는. 

가끔 외유를 나오기는 했으나, 제국의 황제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라르헨 제국의 여제인 그녀는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 * *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말인가?”

“지금 나열된 영식 중에서 얼른 고르십시오!”

이실리스는 신하들의 아우성에 표정이 싸늘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변한 제 얼굴에 신하들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후계가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일찍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지.”

“그…. 그래도 나라엔 후계가 있어야 합니다!”

저 말이 왜 자기들 멋대로 할만한 후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들릴까. 그녀는 턱을 괴고 무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후계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왜 그대들의 입맛에 맞는 후계가 있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지? 설명해 보겠나, 공작?”

이실리스의 말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얼어붙은 분위기에 나서서 이야기할 만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부름을 받은 공작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입도 열 줄 모르는 팔푼이들 주제에…….’

어디라고 감히 후계를 논하는가. 화려한 의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알현실 안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그 정적을 깨뜨리고 입을 여는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후계 문제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십니다.”

“그 후계를 낳는 사람은 나라네.”

헛소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시선을 던졌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여는 것을 보니 작정한 것 같았다. 이렇게 소모적으로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으니 지칠 법도 한데 저들은 지치지도 않고 그녀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외려 그녀가 지치고 있었다. 항상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상황에서 끝나니 원.

“지존의 자리에 오르신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후계의 문제를 논하여도 될 것 같습니다. 폐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저 입을 꿰매주고 싶었다. 얼마 전에 개발한 마법을 난사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였다.

“폐하! 마력이……!”

“아, 실례하였군.”

분노로 인하여 갈무리되지 못한 마력이 새어 나왔다. 금방 가라앉는 마력 운용에 신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도 늘 같았다. 그녀는 화를 내고 신하들이 만류하면 마력을 집어넣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다시 말해보지. 뭐라고 하였나 공작?”

“아닙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는 공작의 얼굴을 응시하며 이실리스가 차게 웃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웃는 그녀의 서늘한 표정에 신하들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봐줬더니 밑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군.’

다시 한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라르헨 제국의 황족이 어떤 사람인지 저들에게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감히 황족의 후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다니. 세상 살기 싫은 모양이로군.”

이실리스가 시리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가는 그녀를 침묵으로 일관한 채 잡을 수 없는 신하들이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그녀가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 실내는 이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공작님!”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입조심 하게!”

섣부른 남작의 말에 공작이 그를 향해 일갈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겐가! 우리가 후계에 대해서 논한 것은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기를 바라면서 논한 것이 아니야! 알고 있지 않나!”

공작의 말에 수군거리는 귀족들이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의 생각은 반으로 나뉘었다. 정말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의 후계를 논하거나. 각자의 사정일 뿐 이실리스가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줄지는 의문이었다.

“황제께서 영 뻣뻣해서 말이야.”

공작의 혼잣말에 귀족들이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알현실 곳곳에 빛나고 있는 영상석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공작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남자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는지.”

“공작! 말씀이 심하시오!”

공작의 말을 듣다가 참지 못한 후작이 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 공작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이제 혀까지 차며 다들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군.”

“그러게 말일세.”

“이번엔 얼마나 가려나.”

“뭐, 한 시간이면 되지 않겠나?”

“나가세.”

공작과 후작이 다투는 틈을 타서 다들 우르르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귀족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다툼을 하는 둘이었다.

“갔나?”

“갔네.”

“하아.”

공작이 한숨을 내쉬자 후작도 한숨을 내쉬었다.

“왜 우리 폐하께서는 이런 일을 시키셔서.”

“그러게나 말일세.”

여제인 이실리스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즉위하기 전, 공작과 후작을 불러 미리 명령을 내린 그녀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후작과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고 했네만.]

[저희가 십년지기인 것은 아십니까?]

[그보다 더 오래된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네. 그러나 권력이라는 것은 친동기간이라도 돌아서게 만드는 것일세.]

공작과 후작은 갑자기 자신들을 부른 황제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공작!]

[그렇게 해 드리죠.]

공작의 말에 후작이 반발했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실리스는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대체 왜 이런 것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지존의 뜻이 그러하니 신하된 자로서 따를 수밖에 없지요.]

[내 어머니의 말씀대로군.]

고개를 끄덕이며 아련한 눈빛을 띤 황제의 모습에서 공작은 그때 그녀가 모친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을 느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황제였던 모친이 그녀 곁을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그 5년 전부터 한결같이 후작과 공작은 현 황제 이실리스를 위한 일이랍시고 이러고 있었다.

“그래도 나라를 위해서 후계는 필요하네.”

“폐하께서 꼼짝도 하지 않으시니 쉽지 않을 걸세.”

“영식들의 얼굴을 보시고도 그러하신가?”

“얼굴이 중요한가? 나는 우리 폐하의 취향을 모르겠네. 남자에겐 도통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 원.”

“내 생각도 그렇네만……. 설마 정말로 여자를 좋아하시는 건…….”

“헛소리를!”

누가 들을까 두렵다는 듯이 후작이 공작의 입을 막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영상석에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 * *

“하하하하!”

“지금 이게 웃으실 일입니까?”

그녀의 보좌관인 사이르카 후작이 타박했다.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폐하. 하아…….”

“왜 자네가 흥분하고 그러나.”

“그러게 말입니다. 왜 제가 흥분을 할까요.”

사이르카 후작의 말에 이실리스가 웃었다. 빙긋이 미소 짓자 방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렇게나 아름다우신 분인데…….’

타오르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에 푸르름이 넘실대는 군청색 눈동자를 보면서 후작은 저절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실리스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어릴 적 황궁의 정원에서 뛰다가 넘어진 자신을 발견한 그녀가 그에게 회복마법을 걸었던 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사이르카의 장자인 그는 제국의 아카데미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보좌의 자리에 섰을 때, 잠깐 생각했다. 저 여인이 자신에게 마음을 줄 수도 있다고. 

그러나 저 사람은 제국의 황제.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다가서기엔 너무나도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옥좌라는 것이 무서웠다. 지고의 자리라는 곳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여인일 수 없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황제를 내리누르려는 신하들을 버텨낸 그녀였다. 

“어쩌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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