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MANIAC (17/17)

15. MANIAC

메피스토. 그는 악마다.

물론 악마 중에서도 딱히 평범한 부류는 아니었다. 마계의 우두머리이자 마왕인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다 가진 삶의 실상은 권태뿐이었다. 혹자의 선망이 무색하게도 그랬다.

결핍이 결핍된 삶은 또 다른 형태의 결핍이었다. 모든 것이 당연해서‚ 그 어떤 것도 자극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삶은 그렇게 의미 없이‚ 지루하게 흘러갔다. 그 똑같은 시간의 연속에서 메피스토는 미쳐 버리기 직전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에게도 한때‚ 재밌는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살육이 그랬다. 기어오르든‚ 알짱거리든‚ 강하다고 뻐기든 거슬리면 다 죽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가 없어졌다. 굳이 죽여야 할 존재가 없어지니 모두가 그를 마왕이라고 불렀다.

권좌에 오르자 대부분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그는 살육 자체보다는 꿈틀대는 누군가를 짓밟는 데서 쾌감을 느꼈기에‚ 살육 또한 금세 흥미를 잃었다.

술도 약도 재미가 없었다. 그런 찰나의 쾌락은 금세 휘발되어 버렸다.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따지자면 그는 무성욕자에 가까웠다. 애초에 좆이 서질 않으니 교접은커녕 후계도 만들 수 없었다.

그래. 이걸 보고 누군가는 결핍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딱히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욕구가 없으니 결핍이 아니었다.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단지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지루한 집권을 계속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유일한 유희 거리는 인간이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꼴같잖은 소원을 빌었다.

소환 진을 그리고. 제물을 바치고. 제각기 기괴한 방법으로 정성을 들였다. 그 지랄 같은 정성으로 소환하려는 건 한결같이 가장 센 악마‚ 바로 마왕이었다.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사연을 들어 보면 모두 제 주제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한 욕심이었다.

치러야 할 대가도 모르고 끊임없이 징징거리며 그런 것에 무모하게도 영혼까지 걸었다.

주제도 모르고 마왕을 소환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모두의 소원을 들어줄 순 없고. 그들 중 적당한 대상을 선별해 적당히 가지고 놀다 청소해 버리는 건 메피스토의 취미였다. 그 기저에는 인간에 대한 짙은 혐오가 깔려 있었다.

세라 에보트와의 첫 만남도 그런 악취미에서 비롯되었다.

[세라 에보트‚ 22세. 인형의 집]

처음에는 좀 특이한 여자구나 싶었다. 직접 별장까지 설계한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정성이었다.

원하는 대로 게임을 진행해 주고 청소하려 했는데.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

늦은 오후. 마왕의 침전.

방 안에는 불면을 없애기 위해 피운 향 내음이 가득했다. 근래 그는 얕은 잠을 길게 자는 편이었다.

방에 들어온 보좌관이 힐끔 눈치를 살폈다.

메피스토는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고 있었다. 나른한 눈에는 타고 난 살기가 가득했다.

꽤 오랜 기간 최측근으로 그를 보필했으나‚ 그 속내는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지체할 수 없는 건이라 침전까지 찾아들었다.

“문제가 있다고.”

넌지시 묻는 마왕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보좌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쓸데없는 서론이나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지독히 싫어했다.

두렵지만 최대한 빨리 실토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그‚ 그것이…….”

“말해.”

“지금 ‘마왕 소환 건’으로 진행하고 있는 계약 말입니다.”

“세라 에보트인지 뭔지. 그 남자들 감금하겠다고 별장까지 지은 또라이 말인가?”

방금 낮잠에서 깬 메피스토는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아‚ 네. 그 별장 또라이 건은 맞는데. 아무래도 계약자를 혼동해서 잘못 데려온 것 같습니다.”

보좌관은 뭐가 그리 무서운지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마왕은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 시답잖은 놀이에는 이미 흥미를 잃은 까닭이었다.

반복되는 패턴에 진저리가 나서 슬슬 접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즘엔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미리 받아 둔 의뢰‚ 즉 ‘세라 에보트’ 건은 보좌관에게 맡기고 그저 도장이나 찍어 줄 요량이었는데. 뭔가 단단히 꼬인 것 같았다.

“내가 고른 계약자 말고 아예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고?”

“네. 아랫것들이 실수로…….”

“누군데.”

“이 여자입니다.”

보좌관이 손을 벌벌 떨며 서류를 내밀었다.

[엘레나 디아즈‚ 21세. 인형의 집]

서류에는 메피스토가 직접 고른 계약자‚ 세라 에보트가 아닌 전혀 생뚱맞은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필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 같은 방법으로 진행하길 원하는 또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혼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라 에보트를 데려와야 하는데‚ 모르고 엘레나 디아즈를 데려왔다는 거군.”

“네.”

“서류 둘 다 줘 봐.”

두 개의 서류를 살펴보니 헷갈릴 만도 했다. 몹시 흡사한 내용이었으니까.

[인형의 집]

[이름]

- 세라 에보트‚ 22세.

[의뢰 개요]

- 장소는 에보트 후작가의 별장.

- 펠릭스 세르반테스‚ 에단 디아즈‚ 세바스찬 클라인 납치 후 함께 감금.

- 4층 펠릭스 세르반테스‚ 3층 에단 디아즈‚ 2층 세바스찬 클라인.

이게 계약하기로 했던 세라 에보트의 서류였고.

[인형의 집]

[이름]

- 엘레나 디아즈‚ 21세.

[의뢰 개요]

- 장소는 에보트 후작가의 별장.

- 펠릭스 세르반테스‚ 에단 디아즈‚ 세바스찬 클라인 납치 후 함께 감금.

- 4층 펠릭스 세르반테스‚ 3층 에단 디아즈‚ 2층 세바스찬 클라인.

이게 엘레나 디아즈의 서류였다.

여기까지는 이름만 다를 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전히 동일했다.

‘소환 날짜를 보니 엘레나 쪽이 세라의 의뢰를 베꼈군.’

메피스토는 날짜를 확인한 후 혀를 쯧 찼다.

이런 계획을 따라 한 것도 한심한데‚ 주제도 모르고 마왕을 소환하는 것까지 똑같이 한 모양이다.

다른 것은 오직 ‘특이 사항’뿐이었다.

[특이 사항]

- 우리 애들 안 다치게 잘 부탁드려요. 힘써야 하거든요♡

이게 세라 에보트의 주문 사항이었고.

[특이 사항]

- 특정 드레스와 꾸밈 필요.*

- 1층에서 세라 에보트 등장.

- 미약과 세뇌 사용(펠릭스 세르반테스‚ 에단 디아즈‚ 세바스찬 클라인에게 선 작업 필요).

이건 엘레나 디아즈의 주문 사항이었다.

뒷장에는 드레스와 꾸밈을 자세히 설명하는 도안과 남자들에게 어떤 세뇌를 해야 하는지까지 적혀 있었다.

꼴같잖은 세라 에보트의 주문 사항에 비해‚ 엘레나 디아즈 쪽은 구체적인 옵션이 있는 듯했다.

“…….”

이게 뭐라고 골치 아픈 일까지 생기지?

메피스토는 같잖다는 듯이 헛웃음을 뱉었다.

어차피 악마까지 소환하는 놈은 다 거기서 거기다.

하다 하다 결국엔 갈 데까지 간 인간. 성가신 벌레처럼 혐오스러웠다.

제 주제에도 안 맞는 헛꿈을 꾸는 건 마찬가지고‚ 누구와 계약하든 끝나면 죽여 버릴 테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착수했다면서.”

“네. 남자들은 납치해서 각층에 배치했고‚ 엘레나 디아즈를 데려왔습니다.”

“세뇌나 미약은?”

“아직입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적당히 처리해. 청소나 깔끔하게 하고.”

“그대로 진행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응.”

메피스토는 협탁 위에 서류를 내팽개치며 온기 없이 답했다.

“어차피 미쳐서 악마까지 소환하는 것들인데. 누가 죽든 무슨 차이라고. 엘레나인지 뭔지로 해.”

“…….”

“더 자야겠으니까 나가 봐.”

보좌관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다시 간추려서 들었다.

여기서 더 귀찮게 하면 마왕의 심기를 거스를 걸 알면서도 나가지 못한 채 영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나가라는 소리 못 들었나.”

“…그‚ 그게. 하필이면 엘레나 디아즈가 의뢰의 희생물로 원래 계약자인 세라 에보트를 지정해서요.”

“…….”

“꼼꼼히 살피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죽여 주십시오.”

그가 짜증스럽게 노려보자 보좌관이 파드득 떨며 몸을 낮췄다.

생각해 보면 지독한 무기력증이었다. 하루에 반 이상을 침전에 누워 있으니‚ 공백을 메우느라 보좌관도 죽어날 터였다.

“이러니 맡겨 놓질 못하지.”

“송구합니다.”

“엘레나 디아즈 쪽은 일단 진행하지 말고‚ 시간 좀 끌고 있어.”

메피스토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뺏어 들었다.

“세라 에보트 쪽은 내가 직접 처리하지.”

***

세라 에보트.

한순간에 계약자에서 희생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여자.

엘레나는 세라와 같은 소원을 빌었지만‚ 자신만의 추가 옵션이 있었다.

우선 감금된 남주들을 미약을 먹여 정복한 후‚ 1층에서 세라 에보트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들을 감금한 범인이라는 누명을 씌운 후‚ 그녀를 죽이는 것.

정확히는 세뇌된 세 명의 남자에게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단당할 예정이었다.

다시 말해‚ 엘레나의 소원대로라면 세라 에보트는 엘레나 디아즈 앞에서 죽어야 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아랫것들의 실수라지만 본인이 부재한 탓도 있었기에‚ 메피스토는 특별히 그녀를 구제해 주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독대한 자리였다.

세라 에보트가 일방적으로 피해자가 된 상황.

해서‚ 메피스토가 그녀에게 내세운 보상안은 ‘조건 없는 계약 해지’였다.

악마를 통해 소원을 이룬 자의 말로는 반드시 비참해진다.

특히나 마왕 소환의 경우는 더 그랬다. 메피스토는 지독한 결벽증이었고‚ 작업이 끝나면 계약자를 청소해 버리곤 했으니까.

그래서 ‘계약 해지’가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라 생각했다.

사실을 알리고‚ 마왕의 마수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메피스토는 눈앞의 여자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탐스러운 밤색 머리칼. 발그레한 장밋빛 뺨. 도톰한 입술. 어린잎을 머금은 듯한 녹안에 가녀린 몸까지.

세라 에보트는 지나칠 정도로 예뻤다.

여느 인간들보다‚ 아니 미모로 칭송이 자자한 여느 악마들과 비교해도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마계는 마왕을 얼굴로 뽑나 봐요?”

반면 개념은 좀 없는 것 같았다.

마왕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라니. 제법 건방지기까지 했다.

메피스토는 기가 차서 연신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했는데 마왕이 불릴 줄은 몰랐어요. 제국 제일의 주술사에게 거금을 주고 배운 악마 소환술이거든요!”

이렇게 보니 약간 제정신이 아닌 것도 같았다.

“마지막에 재채기하는 바람에 약간 부정이 탄 것 같긴 하지만요. 헤헤.”

“…….”

아니‚ 약간이 아니라 아주 회까닥 돈 모양이다.

메피스토가 답이 없자‚ 또 금세 귀가 쳐진 토끼처럼 시무룩해졌다.

“죄송해요. 인간 남자 중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매우 드물거든요. 그래서 제가 잠시 넋을 놔 버렸어요.”

그녀가 긴 속눈썹을 살랑거리며 눈을 곱게 접었다. 꽃이 피는 것처럼 해사한 미소였다.

“쓸데없는 얘기는 집어치우고. 본론만 이야기하지.”

메피스토는 그 미소가 껄끄럽게 느껴져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죠. 실례지만 저도 일종의 당사자니까 서류 좀 봐도 될까요?”

세라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엘레나의 의뢰서를 읽어 보았다.

볼수록 기가 막힌 지 뒷장에 붙은 세부 지시서까지 꼼꼼히 읽어 내렸다.

“엘레나 얘는 또 병이 도졌나 보군요. 그렇게 머리채를 잡히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세라는 서류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진저리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지. 널 따라 하는 것 말이야.”

“네. 성인식 때 입은 장미색 드레스라니. 그걸 어떻게 구하시려고요? 저를 위해 딱 한 벌만 제작한 ‘하나뿐인 내 새끼’라고요.”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는지‚ 별도로 첨부된 서류에 ‘특정 복장’ 부분을 지적했다.

드레스를 두고 ‘하나뿐인 내 새끼’라니. 기도 안 찼다.

“진주 구두도요. 이것도 구두 장인이 진주를 한 알‚ 한 알 정교하게 줄 맞춰서 박아 넣은 ‘특별한 아이’고요.”

심지어 구두를 두고도 ‘특별한 아이’라니. 제 것에 대한 애착이 아주 강한 여자 같았다.

“절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창의성 없는 스타일은 질색이라. 좀 성가시네요. 하다 하다 소원까지 따라 이루려 할 줄은 몰랐는데.”

그녀가 조금 소름 끼친다는 듯 제 팔을 감싸고 비볐다. 메피스토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세라는 혼자 숨을 고르더니 좀 진정했는지‚ 그를 꿰뚫듯이 쳐다보았다.

“우선 감사해요.”

“뭐가.”

“그냥 절 죽이고 넘어가실 수도 있었을 텐데. 친히 말씀해 주셔서요.”

“내가 좀 기분파여서 말이야. 근데 지금 기분이 좀 가라앉으려고 하거든?”

메피스토가 눈을 치켜뜨자 움찔 놀라는 모습이 한없이 하찮아 보였다.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쐐기를 박기로 했다.

“악마답지 않게 착한 맘을 먹었을 때 감사합니다‚ 하고 인생 똑바로 살라고. 악마 같은 거나 부를 생각하지 말고.”

“그러니까 결론은 계약을 없던 일로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싫은데요.”

“뭐?”

“바로잡으려면 계약 해지가 아니라‚ 원래대로 진행해 주셔야죠.”

이럴 수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왕 자비를 베푸시는 거‚ 소원을 원래대로 들어주시라고요.”

“이봐‚ 인간.”

“인간 아니고 세라 에보트요. 그냥 세라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세라.”

아니 호칭이 뭐가 중요해. 답도 없는 여자 때문에 눈앞이 어질거렸다.

“정신 단단히 나간 건 알겠는데. 소원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해. 그게 상상 이상으로 가혹한데 괜찮겠나?”

“다 각오하고 불렀다고는 생각 안 하세요?”

장난스럽기만 하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세라 에보트.”

“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넌 예쁘고‚ 부자에다 아직 젊잖아. 그놈들이 아니라도 남자는 깔렸고 말이야.”

“제가 예뻐요? 정말요?”

왜 저러지. 그런 말 처음 듣는 사람처럼? 갑자기 추궁하듯 물으며 들이대는 통에 말문이 막혔다.

메피스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걸 왜 묻지?”

“모두 절 여자로 안 보거든요. 작심하고 꼬셔 봤는데 전부 다 실패했어요. 약혼자도 그렇고‚ 소꿉친구도 그렇고. 대신관님도요.”

“…대체 무슨…….”

“남들은 저더러 예쁘다는데‚ 전 못 믿겠어요.”

아니‚ 거울도 안 보나?

울컥 짜증이 치밀어서 쏘아붙이고 싶었다.

“예뻐. 당장 올라타서 박아 대고 싶을 정도로. 됐나?”

무심결에 말이 좀 과격하게 나갔다.

이 정도면 겁을 좀 먹었으려나. 메피스토는 조금 평정을 잃었나 싶어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

그녀가 말없이 눈만 끔뻑거렸다.

“어쨌든 내가 자비를 베푸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럼 저랑 하실래요?”

“미쳤나?”

메피스토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고는 생각했지만‚ 마왕을 상대로.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까는 분명히 올라타서 박고 싶으시다고…….”

그녀가 잔뜩 상기된 채로 배시시 웃었다.

“겁도 없군. 지금 감히 누굴 상대로 도발하는 건지 알고는 있나?”

“네.”

겁박해 봐도 눈빛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꽤 강적을 만난 것 같았다.

“소원만 이뤄 주신다면 얼마든지 저를 취하셔도 좋아요. 벗고 누울까요?”

그녀가 앞섶의 리본을 풀자 뽀얀 가슴골이 드러났다. 그 우유 같은 살결에 자꾸만 눈이 가는 것도 환장할 지경이었다.

“하지 마.”

“왜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마왕인데 꼭 사제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뭐?”

“다 가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전 하나도 안 행복해요.”

하얀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아마도 진심인 것 같았다.

“배부른 소리란 것도 알고‚ 미친 소리란 것도 알아요. 근데 다른 걸 다 가지면 뭐 해요? 정작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는데.”

간절한 눈빛을 보자 굳이 기를 쓰고 말려서 뭐 하나 싶기도 했다.

적어도‚ 다 가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엔 동의했다.

“부럽네.”

“네?”

무려 마왕씩이나 되는 자가 자신에게 부러운 게 있다니.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지고 싶은 게 있다는 게.”

그런 게 있었다면 삶이 이렇게 공허하지 않았으려나.

어차피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안 해 주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해낼 기세였으니까.

그래서 될 대로 되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 소원대로 해 주지.”

“감사해요. 근데 엘레나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조금 성가시기까지 했다.

“그건 네 알 바 아니지 않나.”

“알 바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원하는 남자가 같잖아요?”

“…….”

“전하의 계약자는 저예요. 애초에 그쪽 부하 실수로 생긴 일이니까‚ 어떻게 처리하실 건지 확실히 말씀해 주셨으면 해요.”

일일이 따져 묻긴. 확실히 어디 가서 손해는 안 보고 살 성격이었다.

메피스토는 한숨을 푹 쉬며 마지못해 답했다.

“엘레나 디아즈와 정식 계약을 한 건 아니지만‚ 이미 영혼이 악마의 손을 탄 상태고.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으니 그냥 보낼 수는 없어.”

“그래서요?”

“그러니 엘레나인지 뭔지 먼저 진행하고 네 걸 진행해 주지. 물론 네가 죽는 파트는 환영 마법으로 진행할 거고.”

“절대로 안 돼요!”

세라가 당치도 않다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럽긴. 무방비 상태로 봉변당한 그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넌 내가 마왕이라는 자각은 있나?”

무슨 소원 수리해 주는 집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보자 보자 하니 계약자의 분별 없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더 황당한 건‚ 이걸 또 궁금해서 들어주고 있는 자신이었다.

“죄송해요. 제겐 그만큼 중요한 일이어서요.”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색색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귀 안 먹었어. 듣고 있으니 얘기해.”

“그러니까 셋 중에 두 명은 무려 동정이거든요.”

“동정?”

메피스토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걔가 먼저 하면 그 매우 중요한 조건이 사라지잖아요!”

목에 핏대를 세운 게 그 남자들의 동정을 지키기 위함이라니.

역시나 맛이 간 여자구나.

메피스토가 텅 빈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전하. 생각해 보세요. 저를 위해 마왕까지 소환해서 준비한 특별 선물인데. 누가 먼저 열어 보면 기분이 좋겠어요? 그것도 제 소원마저 똑같이 이루려 하는 소름 끼치는 계집애가 말이에요.”

“안 좋겠지.”

“네. 못 참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세라가 감격한 얼굴로 메피스토의 두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금세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이건 불공평해요. 애초에 걔랑은 계약한 것도 아니시잖아요?”

별장에 남자들을 감금해 놓고 무슨 짓을 할지 대충 상상하긴 했지만. 저렇게 대놓고 밝히는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잊지 마세요. 전하의 계약자는 저예요.”

“그래.”

“아‚ 그리고 제가 전하께 잘생겼다고 한 건 걔한테 비밀로 해 주세요.”

“왜?”

“또 탐낼 거거든요. 걘 아주 중증이라고요.”

비밀이라니. 황당함에 자꾸만 헛웃음이 났다.

계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아직도 잘생긴 마왕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이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되겠나.”

“네. 얼마든지요.”

“그렇게 동정에 집착하면서. 셋 중에 동정이 아닌 하나는 왜 넣었지?”

예리한 지적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세라가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되게 잘한대요‚ 걘.”

“능숙하단 뜻인가.”

“네. 아무래도 동정인데 능숙하긴 힘들잖아요.”

세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것치고는 꽤 현실적인 구석이 있었다.

“동정인데 잘할 수도 있잖아.”

“네? 세상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녀는 나무라듯 쏘아붙였지만……. 바로 여기 있었다.

악마는 뭐든 잘했다. 특히 그쪽으로는 절륜하게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서‚ 메피스토는 안 해 봐서 그렇지‚ 한다고 하면 끝내주게 잘할 자신이 있었다.

성욕이 없던 탓에‚ 개발해 보기 위해 온갖 난잡한 시청각 교육을 받은 것도 있고 말이다.

몸이 동하지 않아 보기만 했지만‚ 성관계가 어떤 건지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딴 걸 말하면 저 미친 여자는 ‘최고다! 그럼 저랑 해 봐요!’ 할 게 뻔하다고나 할까.

굳이 피곤한 일만 생길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저런 미친 여자를 상대로 왜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제 약혼자인데 저만 못 해 봤어요. 전 걔가 좋은데‚ 절 피해서 너무 속상해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제법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메피스토는 그녀의 요구 사항을 다시 한번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까. 동정남 둘에 잘하는 남자 하나. 이 셋을 다 가지겠다고?”

“네.”

“욕심도 많군.”

“헤헤. 전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직성이 풀려서요.”

본인이 별난 걸 아는지. 혀를 빼꼼 내미는 모습이 왠지 밉지는 않았다.

“알겠어. 이왕 진행하는 거‚ 하자 없도록 하지.”

메피스토는 이 또라이 같은 욕망덩어리의 게임을 꼭 관전하고 싶었다.

우선 세라 에보트의 건의대로‚ 엘레나 디아즈의 작업 방식을 변경했다.

어차피 정식 계약이 아니었기에 조항을 철저히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엘레나에게는 ‘세라가 극구 아끼는 남자들’ 대신‚ 그들의 모습으로 변신한 몽마를 보냈다.

엘레나는 자신의 꿈속에서 몽마들과 꿈같은 환상을 즐겼다. 철저히 실체가 없는 로맨틱한 환상이었다.

몽마가 주는 쾌락에 중독된 그녀는 그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게 바로 세라 에보트가 되고 싶었던 엘레나 디아즈의 말로였다.

이게 플레이어가 본 이 게임의 ‘노멀 모드’였다. 엘레나 입장에서는 ‘해피 엔딩’이었으나. 정확히 말하면 ‘메리 배드 엔딩’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곧바로 세라 에보트의 진짜 작업에 착수했다.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계약자 자신이 스스로 감금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할 것.]

이번에도 변태처럼 자세한 요구였다.

그래도 그녀는 엘레나 디아즈처럼 세뇌 마법이나 미약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기억을 지운 채로 본인이 세팅한 저택에 남자들과 함께 넣어 달라. 그게 전부였다.

보통의 인간과는 달랐다. 계약자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을 원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계약자는 제법 건방졌다. 마치 시시한 게임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처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메피스토 또한 이 특이한 인간의 행보에 제법 흥미가 생겼다.

***

그렇게 진행해 달라 생떼를 쓸 땐 언제고.

세라 에보트는 자신이 만든 ‘인형의 집’에 입성한 이래 내내 잠만 자고 있었다.

자신이 꾸민 일이라는 기억을 지워서일까. 아니면 이제 와 무기력증에 빠진 걸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세 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다 상관조차 없다는 듯이. 이상한 일이었다.

이쯤 되니 궁금함에 애가 타는 건 메피스토 쪽이었다. 원래 이런 게임에 개입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두 눈으로 그 뻔뻔한 낯짝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머리와 눈 색을 바꾸고 집사로 잠입했다.

“한심하긴.”

메피스토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침대에 폭 파묻힌 모습이 겨울잠에 빠진 토끼 같았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고 잠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메피스토는 그녀를 안아 올려 똑바로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뼈가 있긴 한 걸까.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말랑한 감촉이 제법 나쁘지는 않았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메피스토는 어느새 그녀 옆에 누워 자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뺨도 말랑하려나.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을 만지자 보드라운 솜털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가벼운 손길에도 눈꺼풀을 꼼지락거렸다. 무척이나 긴 속눈썹이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비처럼 팔랑대던 것이 떠올랐다.

동그란 코끝을 톡 건드려 보았다. 분명 화장을 안 했는데도 은은하게 분내가 나는 것 같다.

그 짓궂은 손길은 그녀의 입술에도 머물렀다. 다른 데도 그랬지만 특히나 기분 좋게 말캉거린다. 불그스름한 게 잘 여문 과실 같기도 하고.

한 입 베어 물고 싶어서 괜스레 이가 간지러웠다. 잇새에 끼우고 잘근잘근 씹어 보고 싶다. 아파하려나? 씹는 게 아니면 쪽 빨아 보고도 싶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길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내가 왜 이러지. 식인 같은 걸 하는 취미는 없는데.’

이게 식욕인지 아니면 그저 괴롭히고 싶은 가학적인 욕구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혹시 허기가 져서일까. 생각해 보니 식사를 거른 것 같다. 끼니를 건너뛰기는 대책 없이 잠에 빠진 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배가 고파서 잠깐 미쳤던 거겠지.’

간단한 결론에 도달한 메피스토는 만찬을 준비했다. 그리고 대책 없이 단잠에 빠진 계약자를 깨웠다.

“…누‚ 누구세요?”

못 알아보는 걸 보니 기억은 확실히 지워진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알베르토라고 합니다.”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제 이름과 비슷한 어감의 이름을 지껄여 보았다.

조금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말해 놓고도 신경이 쓰였다.

“알베르토요?”

“네. 오늘부터 이 저택에서 세라 아가씨를 돌봐 드릴 집사입니다.”

“…아‚ 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댔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하냐고 물으니 그냥 피곤했다고 둘러댄다.

꼬르륵-

예상대로 배도 고픈 게 맞았다.

“…….”

제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진다.

“역시 시장하신가 봅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

계약자부터 배불리 먹인 후 본인도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일단 든든히 먹어야 의욕도 생길 것이다.

“…독 같은 건 안 들었겠죠?”

“네?”

다소 황당한 물음에 헛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았다. 아무래도 저를 해치기라도 할까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럴 셈이라면 자고 있을 때 꿀꺽했겠지. 말캉한 입술도 보송한 뺨도.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나 동그란 어깨까지.

전부 빠득빠득 깨물고 빨아 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는데. 어이가 없었다.

그는 선심을 써서 음식을 하나씩 확인해 주었다. 그제야 조심스레 한술 뜨기 시작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악어의 입 안인 줄도 모르고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무슨 일인지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 먹였으면 네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걸 가지러 가라고 방에서 내쫓아야 하는데. 그 꼴을 또 보고 싶어서일까. 자꾸만 뭘 만들게 되는 자신도 약간 미친 것 같았다.

그 독특한 계약자는 딱히 가리는 것도 없었다. 주면 주는 대로 잘 먹었다.

뭐‚ 특히 더 좋아하는 건 있었다. 티본스테이크를 주었을 때는 양 엄지를 치켜세웠고‚ 달콤한 것이라면 한층 더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케이크는 또 어찌나 좋아하는지. 메피스토는 마왕궁 주방장에게 다양한 케이크 레시피까지 받아 왔다.

“끼니마다 혀가 녹을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먹다간 금세 토실토실해지겠어.”

양껏 먹으면서도 체중을 걱정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드레스가 낀다니. 색깔별로 예쁘게 수십 벌 지어 입힐까도 싶었다.

물론 홀딱 벗겨 두는 것도 귀여울 것 같았다.

“누가 나 통통하게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그러나.”

둔한 줄만 알았더니. 눈치도 제법이었다.

계약자는 여전히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금당한 사람치고는 꽤 순수하게 즐기는 것 같았다.

밥도 해 먹이고‚ 옷도 갈아입히고. 꼭 사육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인형 놀이를 하는 것도 같았다.

마계에서 가장 고귀한 악마가 한낱 인간을 돌보는 것에 빠져 지내다니. 누가 들으면 비웃을 만한 이야기지만 상관없었다.

메피스토는 이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가는 계약자가 제법 기꺼웠다.

그리고 자꾸만 피가 몰리는 아랫도리 때문에 깨달았다.

이렇게 물고 싶고 빨고 싶은 감각은 식욕이 아니라 색욕이라는 걸.

***

다이닝 룸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무거운 기류에 발끝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세라는 잔뜩 겁먹은 눈으로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기다란 식탁에는 펠릭스‚ 에단‚ 그리고 세바스찬이 나란히 둘러앉아 있었다.

세라는 그들의 상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온몸이 구속구로 결박된 채 눈을 가리고 재갈까지 문 모습이라니. 마치 산 채로 도살을 기다리고 있는 짐승 같았다.

거나하게 차린 요리들과 그녀의 전리품들까지. 오직 세라 에보트를 위한 최후의 만찬이었으나 전혀 기껍지 않았다.

만찬이 끝나고 나면 계약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결국 다른 계약자들처럼 청소 당하는 걸까.

도망쳐야 하나. 어디로?

애초에 달아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살려 달라고 빌어 볼까.

내려올 때도 목숨을 걸었는데. 왜 그렇게 살려고 버둥거렸지?

계약을 맺은 건 내가 아닌데.

내가 왜 죽어야 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앉아요‚ 아가씨. 식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피스토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의자에 끌어 앉혔다. 그리고 곁에 붙어 앉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못 먹어? 일부러 좋아하는 것들로만 차렸는데.”

메피스토는 제 정체를 밝힌 이후로 말이 짧아졌다.

세라가 음식에 손도 대지 못하자 턱을 괸 채 골똘한 얼굴로 물었다.

오른쪽엔 펠릭스‚ 왼쪽엔 에단‚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세바스찬까지.

묶여서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 남자들을 앞에 두고 식사하라니. 아주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내 성의를 봐서라도. 응?”

눈이 마주치자 그가 더없이 해사하게 웃었다.

“…….”

세라는 마지못해 접시 위에 있던 당근 조각을 입에 넣었다.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입 안이 버석거렸다. 여러 번 씹었는데도 도무지 삼킬 수가 없었다.

“맛없나.”

왜 그러지. 이런 적 없었잖아.

메피스토가 기운이 빠지는지 연신 중얼거렸다.

“뱉을까?”

그래도 반응이 없자 뱉으라며 손바닥까지 내밀어 주는 모습이 아주 극성이었다.

세라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억지로 음식물을 목구멍에 넘겼다.

콜록콜록.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잔기침이 터졌다.

메피스토는 행여나 또 뭐가 잘못될까‚ 냉큼 물을 챙겨 주었다.

살뜰한 보살핌은 달라진 게 없는데.

정체를 알고 나니 그 모든 것이 일종의 사육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떨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안색을 살피던 그가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혼자 손뼉을 쳤다.

“아‚ 이 새끼들 때문에 그래?”

“…왜 묶은 거야?”

“그냥. 시끄러워서.”

세라가 바들바들 떨며 묻자‚ 그는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는 듯한 낯으로 답했다.

하긴‚ 악마에게 그런 감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꾸 으르렁거리잖아. 좀 얌전해지라고 묶어 놨어.”

“…….”

“역시 인간은 성가셔.”

꼭 벌레를 보는 듯한 온기 없는 시선.

악마에게 인간이란‚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터뜨려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걸까?

그럴 거면서. 나한테는 왜 이렇게까지 각별한 거지?

늘 자신을 좇던 집요한 시선과 손길이 좋아서 하마터면 안주할 뻔했다.

그건 단지 계약자에게 물리는 달콤한 사탕이었을까?

그것도 모르고 이제껏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한 걸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도무지 무언가를 삼킬 기분이 아니었다.

세라는 바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치울까? 영 잘 못 먹네.”

혹시 어디 아픈 건가. 메피스토가 손으로 동그란 이마를 덮으며 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와. 이 땀 좀 봐.”

“…….”

그러고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톡톡 닦아 주었다.

“맞지. 주기 전에 독 있는지 확인하고 줘야 먹는데. 미안해‚ 아가씨.”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던 그의 눈에 일순간 살기가 돌았다.

“근데 이젠 믿을 때도 됐잖아.”

“아‚ 아니야. 나‚ 나는…….”

“그냥 예뻐서 자꾸 먹이는 거야. 오물오물. 귀여워 죽겠네.”

정말로 귀여워서 못 견디겠는지 뺨을 꾹꾹 눌러 댔다. 그 모습이 마치 장난기 심한 소년처럼 보였다.

“식사 싫으면 디저트라도 먹을까?”

메피스토가 손끝으로 케이크의 생크림을 찍어 건넸다. 그녀가 입을 벌리지 않자 아랫입술에 툭 묻혔다.

“이걸 먹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메피스토.”

“왜. 아가씨.”

“이제 청소할 거야……?”

그것 때문에 이랬구나. 다소 직선적인 물음에 그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지금은.”

그리고 그녀의 턱을 끌어 촉‚ 입을 맞췄다. 입 안에 퍼지는 크림의 맛이 다디달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잡아먹을까 하는데.”

나른한 눈에는 웃음기와 살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탁 부딪치자 눈앞의 음식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식탁에서 먹을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를 가뿐히 안아 올리더니 식탁에 앉혔다. 그리고 몸을 서서히 깔아뭉개듯 덮쳐 왔다. 그가 더 가까이 닿아 올수록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여‚ 여기서는 좀…….”

“이렇게 벌벌 떨면 더 꼴리는데.”

가느다란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묻었다. 촉‚ 촉. 부드러운 점막의 감촉이 여린 살갗에 고습하게 달라붙었다.

“…제‚ 제발.”

누가 악마 아니랄까 봐. 이 사악한 사내는 그녀가 도리질을 칠수록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간지러운 숨이 귓불 아래까지 흩어졌다. 세라의 얼굴은 순식간에 그가 뿌린 열기에 잡아먹혔다.

“뭘 모르나 본데‚ 난 네가 우는 것도 좋고‚ 욕하거나 애원해도 좋아.”

그가 취한 것처럼 달뜬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악마잖아‚ 나.”

어쩔 줄 모르고 바동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그를 더 자극하는 듯했다. 살갗이 닿을 때마다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심장이 쿵쿵 뛰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가까스로 메피스토의 품을 밀어냈다.

“…자‚ 잠깐만.”

“응?”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야?”

세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아‚ 맞지. 기억 못 하는구나.”

그는 가장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소원 들어주면 넌 내 소원 들어주기. 간단하지?”

“그래서 네 소원은 뭔데?”

“글쎄. 그건 너한테 달린 것 같은데.”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던 걸까. 의뢰 일지를 훔쳐봤으니 처분이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가늘게 떨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는지 봤으니 알 테고.”

“…….”

“한번 발버둥 쳐 봐‚ 아가씨.”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커다란 손으로 양 손목을 교차해 결박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일까. 그저 가벼운 몸짓에도 세라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결벽증이라서. 어떻게 해야 성에 찰지 좀 고민 중이야.”

결벽증이라는 말과는 상반되게도‚ 그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그녀의 목덜미와 쇄골을 끊임없이 흠빨았다.

“더‚ 더러워. 땀 흘렸단 말이야.”

“큭큭‚ 그래서 청소할까 봐 무서워?”

별것도 아닌 일에 움찔움찔 떠는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놀리고 싶었다.

“이상하지? 넌 아무리 물고 빨아도 안 질려. 심지어 다른 새끼들의 손을 탔는데도 그래.”

“…흐응‚ 흐.”

“그게 또 기분이 더러워서 미칠 것 같단 말이지.”

세라가 앓는 듯한 비음을 터뜨리며 온몸을 비틀었다. 그럼에도 그는 짓궂은 자극을 멈추지 않았다.

싫다고 도리질해 보아도‚ 귓가에 낮은 음성만 맴돌 뿐이었다.

“계약만 아니었으면 내 걸 다른 새끼한테 보낼 일도 없었어.”

“읏‚ 흐으…….”

“그런 좆같은 걸 주문한 게 넌데. 내 계약잔데. 씨발.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알베‚ 아‚ 아니 메피스토‚ 제발…….”

“그래서 잡아먹을 거야.”

차려 둔 먹잇감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날 것의 정염으로 들끓었다.

“똑똑히 보여 줘야지. 네가 누구 건지.”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결박된 펠릭스가 보였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부서지도록 문을 두들기고‚ 욕지거리를 내뱉던 아까와는 달리 무력한 모습이었다.

“아. 먼저 약혼자한테 보여 줄까?”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펠릭스의 눈을 가리고 있던 끈이 저절로 풀어졌다. 세라와 펠릭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분노일까‚ 아니면 공포일까. 알 수 없었다.

“펠릭스 세르반테스. 애먼 놈 잡지 말고 잘 봐.”

메피스토가 보란 듯이 그녀의 목과 쇄골‚ 어깨에 차례로 입술을 묻었다. 여린 살을 빨아 당기며 이를 세워 잘근거리고 떼어 내길 반복했다.

그의 입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꽃잎이 떨어진 것처럼 불그스름한 순흔이 생겼다.

“봐. 전부 내가 한 짓이야.”

자랑하고 싶은 걸까. 메피스토는 스스로 만든 자국을 내보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아직 성에 차지 않는지 앞섶의 리본을 풀고 가슴을 잡아 꺼냈다. 생크림처럼 하얀 유방이 출렁거리며 고스란히 드러났다.

으‚ 으으! 펠릭스가 발작하듯 몸을 비틀며 괴로운 신음을 뱉었다.

메피스토는 그의 신음에 오히려 더 흥이 나는지. 한쪽 가슴을 사납게 움켜쥐었다.

“아흐‚ 으‚ 자‚ 잠깐.”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원초적인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메피스토는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망설임 없이 젖가슴을 물었다.

말랑한 살갗 곳곳에 울혈을 만들고 정점을 빨아들였다. 유두에 닿는 점막의 감촉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쭙쭙‚ 일부러 난잡한 소리를 내며 세차게 감아 빠는 통에 세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끝만 바동거렸다.

그래.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나쁜 놈이다.

난잡한 행실로 약혼녀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었으니. 뿌린 대로 돌려받는 셈이었다.

사실 에단과 관계하는 소리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메피스토는 모든 걸 낱낱이 다 보여 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녀를 탐하고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다가도 묘하게 고양되는 느낌이었다.

가슴 전체에 간지러운 감각이 들끓었다. 피하려고 어깨를 뒤틀면서도 내심 조금 더 강하게 자극해 줬으면 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얄궂게도 수치심은 어느새 배덕감으로 변했다.

어차피 다 소용없는 생각이다.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으니까.

“그러게 요 예쁜 걸 왜 방치했어. 나 같은 놈한테 다리나 벌리게.”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제 손으로 하나하나 입힌 가터벨트와 팬티 같은 것들이 우악스럽게 찢어졌다.

무릎을 잡아 벌린 그가 그녀의 음부를 활짝 드러나게 했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앞에 둔 사람처럼 슬쩍 입맛을 다시더니 바지춤을 풀고 성기를 꺼냈다.

다리 사이로 뜨겁고 묵직한 것이 닿아 오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어 무릎을 오므렸다.

“왜 그래. 젖었으면서.”

소심한 반항 따위 소용없었다. 메피스토는 그 가느다란 이성의 끈마저 끊어 버릴 작정인지‚ 뒷무릎을 붙잡고 찌걱찌걱 페니스를 음부에 문질렀다.

점도 짙은 애액과 젖은 살갗이 뒤섞이는 소리가 방 안을 음란하게 울렸다.

부끄러움에 몸을 떨고 있는데 메피스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박는 것도 보여 주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단이 내벽을 흉포하게 가르며 파고들었다.

“…아!”

쿵‚ 습격 같은 삽입이었다. 정수리가 얼얼하고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집사와의 교접은 늘 배려 깊고 상냥했는데‚ 오늘은 다소 성마른 느낌이었다. 흐를 정도로 젖었는데도 내벽이 난자당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흐응‚ 응‚ 응.”

세라는 악마 밑에 깔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휘저었다.

뭔가 크게 흔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에단이 악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 이번엔 이쪽이야?”

메피스토는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아주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눈치채고는 바로 목표를 바꾸었다. 이번엔 에단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풀렸다.

에단의 새까만 눈동자는 초점을 찾자마자 바로 세라를 향했다. 황망한 눈빛이었다.

“날 봐야지.”

메피스토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제 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또 보란 듯이 그녀를 들쑤셔 댔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박아 대서일까. 발갛게 충혈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파?”

“…으응. 흑‚ 흐으.”

“미안해‚ 아가씨. 내가 좀 오래 참아서 힘 조절을 못 했네.”

메피스토가 후‚ 낮은 숨을 뱉으며 그녀의 이마에‚ 뺨에‚ 코에 잔키스를 뿌렸다.

허리를 빠르게 털어 대던 그가 삽입의 속도를 낮추었다. 귀두로 내벽의 굴곡을 하나하나 핥아 보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잔뜩 들쑤셔진 질 내벽이 끓는 것처럼 달아오르고 쿵쿵 맥이 뛰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뜨거워진 내벽이 끝도 없이 조여들며 그의 성기를 움켜 안았다.

“아가씨‚ 재밌는 이야기 해 줄까.”

“응?”

“약혼자를 3층으로 보낸 게 과연 누굴까?”

그가 웃으며 자신을 지목했다. 누가 악마 아니랄까 봐. 사악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살아서 내려왔으니 망정이지. 무슨 속셈으로 그런 무모한 장난을 친 거지?

“너무‚ 끅‚ 해.”

세라가 끅끅거리며 눈을 홉뜨자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그래도 덕분에 계약은 다 완수했잖아.”

“읏‚ 너‚ 넌 진짜‚ 흣‚ 나쁜 놈이야.”

“악마가 나쁜 짓 하는 게 뭐 어때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 장난 때문에 하마터면 유혈 사태가 일어날 뻔했으니까.

“에단 디아즈. 기발한 고문법이었어. 너 때문에 나까지 회까닥 돌아 버릴 뻔했네.”

메피스토는 에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여기 묶인 건 다 네 탓이야. 절교 타령하면서 비겁하게 도망쳤잖아.”

친절하게도‚ 이런 일을 당하게 된 이유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를 약 올리듯 그녀의 음핵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듯 굴리며 들쑤셔 댔다. 음부의 안팎으로 쏟아지는 짙은 자극에 그녀의 허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흐으응. 그‚ 그만.”

거부하면서도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세라는 꼭 간지러움에 잡아먹힌 것처럼 허벅지를 비틀며 숨을 할딱였다. 내벽은 좆을 가득 문 채로 마치 경련하듯 씰룩거렸다.

“후우‚ 쌀 뻔했잖아. 살살 물어‚ 아가씨.”

강한 사정감을 느낀 메피스토가 그녀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탁한 숨을 뱉었다.

“흑‚ 흐으‚ 히끅‚ 끅.”

“잠깐 놔줄까.”

놀란 그녀가 쉴 새 없이 흐느끼자 메피스토는 선심이라도 쓰듯 결박을 풀어 주고 성기를 뽑았다. 한참이나 정신없이 흔들린 세라는 바들바들 떨며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갔다.

세라는 꼭 네발짐승처럼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아랫도리는 얼얼하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정면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바스찬이 보였다.

이제 어떡하지. 어쩔 생각으로 그의 품을 벗어난 거지.

무슨 배짱으로?

얄궂게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막막함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만약 문이 잠겨 있으면?

메피스토한테 살려 달라고 빌어 볼까? 날 좋아하니까 자비를 베풀 수도 있잖아.

아니‚ 좋아하는 건 맞는 걸까? 특별히 기회를 주긴 했는데. 그냥 변덕일 수도 있잖아.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의 조각이 교차했다.

뒤를 돌아보자 메피스토가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치 이미 사로잡은 먹잇감을 앞발로 이리저리 가지고 놀듯 여유로운 눈빛이었다.

흉기처럼 검붉은 성기는 여전히 꼿꼿하게 세운 채로‚ 거추장스러운지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 냈다.

“아가씨‚ 대신관님이랑 손잡고 기도라도 하려고?”

메피스토는 세바스찬의 눈가리개를 풀어 버렸다.

잔뜩 울어서 발갛게 짓무른 눈이 드러났다. 세바스찬의 눈물을 보자‚ 차마 못 할 짓이라는 생각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망설이고 있던 사이‚ 테이블로 기어 올라온 메피스토에게 다시 사로잡혔다.

엎드려 있는 여체 위로‚ 꼭 교미를 시도하는 수컷처럼 몸을 덮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뒷덜미에 촉촉 입을 맞추었다.

그저 가벼운 입맞춤일 뿐인데도 꼭 뜯어 먹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불쌍해서 어떡해. 이렇게 질질 짜는데. 잠깐 젖이라도 물리지 그랬어.”

그가 짓궂은 농을 치며 그녀의 젖가슴을 조몰락거렸다.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놀듯 거리낌 없는 손길이었다.

장난기를 머금은 목소리였지만 얼굴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해코지할 거잖아.”

“귀찮게 해코지는 무슨.”

그냥 죽여 버리지.

그가 섬뜩한 말을 지껄이며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엉덩이를 덮은 드레스 자락을 찢어 버리더니 새하얀 엉덩이를 드러나게 했다.

둔부에 한기가 든 것도 잠시‚ 육중한 페니스가 순식간에 내벽을 가르고 들어왔다.

“흣.”

허리가 뒤로 꺾이고 고개가 젖혀졌다. 메피스토는 마치 흘레붙는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뒷골이 얼얼할 정도로 강한 삽입에 자꾸만 무릎이 꺾이고 몸이 휘청거렸다. 애액으로 범벅이 된 음부에 음낭이 쩍쩍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거근을 밀어 넣었다가 빼낼 때마다 새빨간 속살이 딸려 나왔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과연 절경이었다.

그는 세라의 골반을 그러쥐고 양껏 박아 넣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몸이 밀려 올라가고 세바스찬과 가까워졌다.

메피스토는 아연하게 세라를 보고 있는 세바스찬을 비웃듯이 물었다.

“대신관님‚ 아가씨가 악마한테 따먹혀서 어떡해요?”

뽀얀 살덩이 두 개가 세바스찬의 코앞에서 정신없이 출렁대며 흔들렸다. 골반을 타고 온몸을 집어삼킨 흥분의 열기에 눈이 멀 것처럼 멍했지만 버텨야 했다.

세라는 혹시라도 세바스찬의 얼굴에 젖가슴이 닿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허리를 비틀어 댔다.

“아흥‚ 으‚ 메‚ 메피스토‚ 넘어질 것‚ 흐‚ 같아‚ 그‚ 그만…….”

“쟤한테 구해 달라고 해 봐.”

분명히 눈으로 봐서 알 텐데도. 메피스토는 더 거칠게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닿을까 무서워서 허리를 뒤로 젖히고 자신에게 매달리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세라가 팔을 뒤로 뻗어 메피스토를 붙잡았다. 목적을 달성한 그가 씩 웃었다.

“못 믿겠어?”

“흑‚ 흐으‚ 응.”

“어떡하지‚ 우리 아가씨. 나 없으면 못 사는데.”

정말이지.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악마였다.

“내가 도와줄게.”

세라가 먼저 손을 내민 후에야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녀의 가슴을 받쳐 안았다.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가빠 왔다. 쉴 새 없는 삽입에 잔뜩 헤집어진 아랫도리가 살 기둥과 끈끈하게 엉겨 붙었다.

골이 흐물거리는 열감에 지금 느끼는 감정이 공포인지‚ 쾌감인지‚ 죄책감인지‚ 만족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가씨는 쟤들이 그렇게 좋아? 악마에게 영혼을 바칠 만큼?”

메피스토가 성기를 빼내고 그녀의 몸을 돌렸다. 열이 올라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를 마주 본 자세로 제 허벅지 위에 올라앉게 했다.

나른하게 기운이 빠진 세라는 고개를 가누기가 힘들었다. 메피스토의 목을 안고 몸을 기댄 그녀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묻잖아. 대답해야지.”

숨이 아직 헐떡거려서 답을 할 기운이 없었다. 아니‚ 뭐라고 답해야 하지.

좋다고 하면 죽이려나.

싫다고 해도 죽일 것 같은데.

모르겠다. 뭐라고 해야 맞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몽롱했다.

그저 이 암담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뭐‚ 상관없어. 아가씨는 다 먹었고. 내 화풀이도 다 했고. 용건은 다 끝났으니까.”

그가 땀에 젖어 달라붙은 세라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촉‚ 촉‚ 뺨에 입을 맞추었다.

“죽일까‚ 이제?”

그리고 섬뜩한 말을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하는 동시에 시스템 창이 쐐기를 박았다.

[시스템: 마왕 ‘메피스토’가 남주들을 제거하고 당신을 독점하길 원합니다.]

그러니까 계약자가 아니라 그녀의 희생자들을 청소하겠다고?

상상하지 못한 전개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세라 에보트. 내 소원은 널 독차지하는 거야.”

이걸 살았다고 안심해야 하는 걸까. 헛웃음이 났다.

[시스템: 경고! 마왕 ‘메피스토’와의 엔딩을 선택하시는 경우‚ 다른 남주들은 사망합니다.]

[시스템: 마왕 ‘메피스토’를 설득하고 ‘다 같이 살아요’ 엔딩을 쟁취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다같살 엔딩이 말 그대로 죽음을 피하는 엔딩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애초에 이게 타협이나 설득이 가능한 일인가?

저 세 명의 남자를 죽이고 혼자 살아남으면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시스템: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실패 시 남주들과 함께 강제 배드 엔딩(청소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실패하면 다 같이 죽는다.

혼자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남주들을 희생시켜야 할까? 그리고 혼자 마왕의 방에서 영원히 안락하게 살라고?

“어떻게 할 거야‚ 아가씨?”

세라가 대답이 없자 메피스토가 대답을 보챘다.

어떻게 할지는 나한테 달렸다고 했었지.

믿고 싶지 않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사람을 셋씩이나 죽이고 편안함을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정신이 나간 채로 살아남으나‚ 강제 배드 엔딩을 맞으나. 어차피 둘 다 배드 엔딩이다.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겠지.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세라가 ‘예’를 선택했다.

“왜 하필 나야? 그것부터 알아야겠어.”

“아가씨가 귀여워서.”

망설임 없이 답하는 걸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어떻게 귀여운데?”

그녀가 되묻자‚ 메피스토가 슬며시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습적인 입맞춤에 세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봐. 입 맞출 때마다 움찔 놀라는 것도 귀엽고.”

“응.”

“배부른데도 맛있으면 꾸역꾸역 다 먹는 것도 귀엽고. 먹을 때 오물거리는 것도 귀여워.”

착각일까. 정말 예뻐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여기.”

젖은 음부에 페니스를 문질러 대던 그가 질구를 찔러 올렸다.

“으응.”

세라가 눈 한쪽을 이지러뜨리며 더운 숨을 뱉었다. 체중이 실려서인지 더 깊이 박히는 것 같았다.

“아래로 오물거리려고 애쓸 때는 미칠 것 같아.”

그의 말에 반응하듯‚ 내벽이 움찔거리며 그의 좆을 게걸스럽게 빨아 삼켰다.

“이렇게?”

세라가 그의 목을 안은 채 낑낑거리며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여튼 진짜 못해‚ 아가씨.”

서툰 요분질에 픽 웃음이 터진 메피스토는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고 교접부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근데 그것도 꼴려. 완전히 돌았나 봐‚ 내가.”

허리가 바르르 떨리고 내벽이 씰룩대며 오므라들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정말 오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여자한테는 안 꼴려. 아가씨한테만 좆이 서는데. 어떡해?”

메피스토가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책임지셔야지.”

“거짓말. 흣‚ 악마 말을 어떻게 믿어.”

아무래도 그저 사탕발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메피스토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눈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못 믿겠음 이걸 써 보든가.”

그가 손가락을 부딪치고 손바닥을 펼치니 시계 줄이 달린 작은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시스템: 아이템 ‘진실의 목걸이’를 획득하셨습니다.

- 효과: * 발언의 진위를 가려낸다. 해당 발언이 진실일 경우 펜던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런 게 있었어?

목걸이를 받아 든 세라가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실을 가리는 마도구야. 여기서 빛이 나면 진실이고‚ 아니면 거짓이야.”

일종의 거짓말 탐지기 같은 거구나.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펜던트를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이네.”

메피스토가 그것 보라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런 걸 써야 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존재라니.

세라는 이런 위험한 남자와 얽히게 된 자신의 신세가 황당해서 헛웃음을 삼켰다.

“아가씨.”

“응?”

“난 아가씨한테만 서는데. 넌 왜 딴 놈한테도 젖어?”

그가 바로 추궁을 해 왔다.

거짓말을 해 봐야 다 들킬 테고. 복잡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세라는 그냥 솔직하게 부딪치기로 했다.

“그래서 싫어?”

“배짱 좋네. 난 용납 못 하겠는데. 어떡하지.”

허리를 끌어안는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게임이라면 미친 척 수락하고 쓰레기 엔딩을 보고 끝낼 텐데. 직접 겪는 건 사절이었다.

삽입보다는 치대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에도 아랫배가 기분 좋게 간지럽고 체온이 달아올랐다.

아‚ 남주들 앞에서 하기엔 미친 짓이긴 해도 기분은 좋네. 세라는 메피스토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의 은근한 허릿짓에 몸을 맡겼다.

“악마한테 계약이라는 게 절대적이긴 한가 봐?”

“그런 건 왜 묻지.”

“내려올 때까지 안 죽이고 얌전히 기다려 준 걸 보니까 그런 것 같고‚ 기특해서.”

“알아주니 고맙네. 누군 공과 사 구분하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렇게 독점하는 것에 집착하면서. 제가 1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어떻게 버틴 걸까.

결국 계약 때문이었다. 계약자와 자신의 이름으로 맺어진 계약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것이 악마의 규칙이었으니까.

“그래서 정정하라고 말했는데. 다 죽이고 싶으면 이야기하라고.”

“…그게 진심이었어?”

“응.”

그저 듣기 좋으라고 내뱉는 빈말인 줄 알았는데. 메피스토에겐 계약 이행이 일종의 고문인 셈이었다.

“근데 끝까지 하더군. 감히 누굴 고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 그랬나?”

“어쩔 수 없잖아. 그게 세라 에보트의 소원이었고‚ 내 소원도 아닌데 함부로 바꿀 순 없으니까.”

“무슨 소리지.”

“나도 너한테 중요한 고백 하나 해야겠어.”

세라가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안쪽에 물려 있던 페니스를 빼내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진실의 목걸이를 보여 주었다.

목걸이 줄에 걸린 펜던트가 마치 최면을 거는 것처럼 천천히 흔들렸다.

“실은 나‚ 세라 에보트가 아니야.”

진실. 펜던트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본인이 준 마도구니 의심의 여지는 없을 터였다.

“뭐?”

“못 들었어? 난 세라 에보트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

메피스토는 듣고도 믿지 못하겠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5층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세라 에보트의 몸에 들어와 있었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마도구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들은 말을 한참 곱씹던 메피스토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지금껏 세라 에보트인 척한 건가.”

“응‚ 네가 지금껏 알베르토인 척한 것처럼.”

뭐 문제라도? 세라가 눈을 곱게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럼 넌 누구야?”

“원래 있던 곳에선 ‘유세라’라고 불렀어.”

“유세라?”

“응. 나도 세라니까. 그냥 하던 대로 세라라고 부르면 돼.”

세라는 눈 하나 끔뻑 안 하고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지껄였다.

메피스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 펜던트를 확인해 보았다. 고장이라도 난 건지. 역시나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이 계약은 유효하지 않아. 난 세라 에보트가 아니니까.”

잠시 말이 없던 메피스토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그래서 내가 싫어?”

그의 얼굴이 굳어지려던 찰나‚ 세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왕을 상대로 거짓 연극을 해 왔다니. 그걸 고백하고도 이렇게 뻔뻔할 줄이야.

메피스토는 기가 차는지 연신 실소했다.

“미안한데 내가 진짜 세라 에보트였어도 달라질 건 없어. 애초부터 줬다 뺏는 불공정 계약이잖아. 세라 에보트는 자기 영혼을 팔아서라도 다 가지길 원했을 텐데. 이게 소원을 들어준 거라고? 이런 건 인정 못 해.”

악마와의 계약에 공정을 기대한 건가? 눈앞의 여자는 악마 못지않게 막무가내였다.

메피스토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이봐.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의논이 아니라 통보를 하는 거야.”

“아‚ 그래서 날 네 침전에 가두고‚ 저놈들을 죽이겠다고?”

“응. 네 말대로 네가 누구든 상관없잖아. 이미 일어난 일도‚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바뀌는 건 없을 테니 말이야.”

“뭐‚ 그렇게 해서 날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세라가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냥 내 껍데기만 가진다면 말이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섹스하고. 날 사육하는 것이 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무슨 소리지?”

“이봐‚ 마왕님. 당신은 악마지만 난 인간이에요.”

메피스토가 격앙된 목소리로 묻자‚ 세라는 더 힘주어 말했다.

“나 때문에 애먼 사람을 셋씩이나 죽이고‚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귀염 떨길 바라?”

“…….”

“네가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그건 주제넘은 욕심이라고 생각해.”

겨우 인간 여자에게 한 방 먹고 할 말을 잃은 꼴이라니.

메피스토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연신 실소했다.

그냥 멋대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는데도. 세라는 전혀 아쉬울 게 없어 보였다.

“어이가 없군.”

“날 온전히 가지고 싶다면 설득해 봐. 어린애 떼쓰듯 협박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메피스토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물었다.

“안 그래요? 마왕 전하.”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 거지. 분명 세라 에보트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처음 세라 에보트를 만났을 때의 모습과 다분히 겹쳐 보이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메피스토는 이 건방진 인간 여자가 싫지 않았다. 해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조금 더 들어 주기로 했다.

“원하는 게 뭔데.”

“내 이름으로 된 신규 계약.”

“웃기지도 않는군.”

“안 할 거야?”

그럼 누구 손해일까? 당당하게 되묻자 정답을 아는지‚ 조금 누그러든 얼굴로 답했다.

“뭐. 들어 보고 판단하지.”

“고마워요‚ 마왕님.”

세라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나도 네가 좋아. 일단 몇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네 여자가 될게.”

알베르토는 완벽했다. 정체를 밝힌 지금도‚ 뭐 좀 사이코 같긴 하지만 취향에 맞았다.

“말해.”

“얘들은 안 죽였으면 좋겠어. 단지 ‘세라 에보트 표 인형 놀이의 희생자’일 뿐이잖아.”

그들과 세라 에보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세라의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저들은 세라 에보트의 그릇된 욕망으로 인해 저택에 갇혔고‚ 명백한 피해자다.

살기 위해 남주들을 이용했으니 제 할 도리는 하고 싶었다.

“이후로도 그 어떤 보복이나 해코지도 해선 안 돼. 그냥 풀어 줘.”

이 미친 저택에서 탈출할 기회를 준다는데. 제정신이 박힌 놈들이라면 도망가겠지.

세라는 이게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라 에보트가 아니란 걸 밝혔고‚ 묶어 두고 이런 수모까지 주었는데.

그들과 잘해 볼 기대까지 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내 앞에서 저 새끼들을 감싸는 건가?”

메피스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응. 난 쟤들도 좋아. 다 가지는 게 세라 에보트의 소원이기도 했고. 나도 겪어 보니‚ 그녀의 뜻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야.”

애초부터 모두 욕심 나서 모아 둔 것 아닌가?

‘세라 에보트’가 세기의 사랑을 꿈꾼 거라면‚ 굳이 세 남자를 가두지 않았을 것이고.

고군분투 끝에 모두가 그녀를 원하게 되었는데.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건 일종의 포기이자‚ 차선이었다.

“근데 왜 날 택하는 거지?”

“그야 네가 제일 좋으니까.”

말이나 못 하면.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메피스토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널 선택한 거잖아. 이 정도는 참작해 줘.”

곱씹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별없는 여자에게 코를 꿰여 이런 황당한 소리나 들어 주고 있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유나 들어 볼까.”

“넌 내가 원하는 거 다 해 줄 수 있잖아. 그 점이 제일 꼴려.”

“아니면 싫어?”

“모르겠어. 네가 날 그렇게 길들였잖아.”

거창한 거래라도 청하는 양 눈을 빛내고 있지만‚ 결국 전부 다 개소리다.

더 당황스러운 건 저런 궤변에 속절없이 끌린다는 점이었다.

“넌 날 온전히 갖길 원하잖아. 안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라 에보트가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하자 없는 선물을 원했듯이.

메피스토도 제 여자에게 하자가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 껍데기만 차지하는 건 사절이었다.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데도 그녀의 헛소리를 들어 주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 결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 줘. 뒤에서 얘들한테 헛짓거리하다 걸리면‚ 나도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하겠어.”

“그게 전부야?”

“아니. 그럴 리가.”

‘세라’라는 이름에 뭐가 있는 건지. 유세라는 세라 에보트 못지않게 뻔뻔했다.

“마계 안 가고 이 집에서 지낼래. 매일 네 침전에서 너만 기다리는 건 싫어. 네가 왔다 갔다 해. 그러다 싫증 나면 얼마든지 계약을 파기해도 좋아.”

계약하자면서 먼저 파기를 입에 올리다니.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완전히 불공정 계약인데. 결국 다 네 맘대로 하겠다는 거잖아.”

“전하‚ 악마와의 계약은 원래 불공정 계약이라면서요. 계약은 원래 아쉬운 쪽이 불리한 거예요.”

어쩌겠는가. 애초부터 공평한 계약으로 맺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마왕이랍시고 힘으로 찍어 누르려 했지만‚ 목줄을 쥔 건 그녀 쪽이었다.

물론‚ 요 하찮은 게 뭐라고 하든 침전에 가두고‚ 강제로 사육하듯 기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녀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소원을 들어줄 때 얼굴에 피어나던 그 간지러운 웃음을 좋아했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몸이 아니라 영혼까지 온전히 한번 가져 보고 싶었다.

그건 강제로 되는 일이 아니니 일단은 그녀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마왕이 어디서 영혼이라도 팔았는지. 인간 여자에게 호구 노릇이나 하고 다니는 걸 알면 마계 놈들이 난리 나겠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영혼이라도 팔아 갖고 싶은 게 생겼고‚ 그걸 위해선 오직 한 가지만 확실히 해 두면 되었으니까.

“약속은 전부 이행하지.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뭔데.”

“넌 이제부터 내 것이고. 이 계약 파기 못 해.”

세라가 픽 웃으며 메피스토의 목을 끌어안았다.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둘 사이에 신규 계약이 맺어졌다.

메피스토는 약속을 지켰다. 아무런 위해 없이 그들을 풀어 주기로 했다.

저택의 문이 열리고‚ 결계가 허물어졌다. 이곳은 더 이상 누군가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에보트의 별장을 나가지 않았다.

나를 혐오하는 남주들과 갇혀버렸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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