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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형의 집 (16/17)

14. 인형의 집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세바스찬은 곁에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방 안에 오직 혼자뿐이었다.

“아…….”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근육이 욱신거리고 현기증에 시야가 휘청거렸다.

너덜너덜해진 망사 드레스에 산발이 된 머리. 살갗은 온통 빨리고 깨물린 듯한 울혈로 엉망이었다.

“여긴 또 어디야.”

빌어먹게도 관계하다 정신을 놓고‚ 다른 곳에서 눈을 뜨는 건 이제 수없이 겪어서인지 무덤덤했다.

이쯤 되니 어떻게 내려왔는지 궁금하지조차 않았다.

세바스찬이 이 저택 전체를 마력이 휘감고 있다고 했으니. 아마도 마법이겠지.

그나마 아직 목숨이 붙어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남주들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으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시스템: ‘2층’에서의 플레이 시간이 끝났습니다.

- ‘세바스찬 클라인’이 이제 당신을 숭배합니다.

- 현재 위치: 1층‚ 거울의 방]

시스템이 알려 주니 드디어 실감이 났다. 비로소 세바스찬 클라인까지 클리어 하고 1층으로 내려왔구나.

제단에서 도대체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세자니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삽입까지는 비싸게 굴더니 넣고 나서는 눈이 뒤집혀서…….

물론 좋았다. 동정남이라 해도 절륜함이야 기본 설정이니까 까무러칠 정도로 만족했지만.

어쨌든 어려서 그런가. 그게 쉽게 죽지를 않아서 받아 내느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그동안 참아 왔던 욕망을 터뜨리는 것처럼 집착적으로 그녀를 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숭배라니. 좀 맹목적인 것 같기도 하고.’

성직자여서일까. 그의 감정은 다분히 신앙 같은 구석이 있었다. 순수한 맹목이었다.

이쯤 되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조심스러웠다. 세바스찬 입장에서는 이쪽만 보겠지만‚ 세라는 걸쳐 둔 다리가 많았으니까.

그래도 마음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수음하고‚ 죄책감에 눈물을 뚝뚝 흘려 대던 모습이나. 가슴과 다리 사이를 빨며 올려다보는 말간 낯을 떠올릴 때면‚ 아랫배에서 묘한 열기가 들끓었다.

엄숙한 대신관의 모습은 다 가면이었던 걸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동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스템: 축하합니다. 당신은 모든 캐릭터를 공략하셨습니다.]

살얼음판을 무사히 건넜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시스템은 기어코 무시무시한 말을 덧붙였다.

[시스템: 현재 당신에 대한 남주들의 ‘집착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뭔가 불길했다. 세라는 자세한 설명을 읽어 보기로 했다.

[시스템: 이 경우‚ 남주 단독 엔딩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 단독 엔딩 강행 시‚ 강제 배드 엔딩‚ ‘몰살‚ 에보트 별장의 비극’이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게 뭔 개 같은 소리야?

엔딩도 마음대로 선택 못 한다고?

세라는 야박한 시스템에 그저 한숨만 나왔다.

[시스템: 현명한 중재로 ‘다 같이 살아요’ 엔딩을 만들어 보세요.]

다같살 엔딩은 무슨.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자면‚ 그냥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노멀 모드를 플레이 할 때는 집착 수치라는 언급조차 없었다.

그냥 무난하게 단독 엔딩이 가능했고‚ 이 경우 다른 남주들도 깔끔하게 승복했다.

호감도를 골고루 올려 다같살로 가도 전혀 다툼이 없었다. 오히려 남주들끼리 합방 순서를 합의하는 따스한 분위기였다.

여주를 흔쾌히 공유하다니. 그것도 나름대로 이상하긴 하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니까 편히 살고 싶은 맘뿐이었다.

누가 하드 모드 아니랄까 봐. 세라 에보트로 게임을 진행하니 남주들의 상태도 제법 파란만장했다.

세라는 그 세 남자가 만나면 어떻게 될지 잠시 상상해 보았다.

“공작의 여자를 건드리다니. 각오는 하고 벌인 일이겠지?”

눈이 뒤집힌 펠릭스가 에단을 죽이려고 할 테고.

“네. 얼마든지요.”

그럼 에단도 절대로 가만있지는 않을 거고.

“주인님. 여기 머리 아프니까 기도하러 갈래요?”

세바스찬 또한 자기랑만 놀자며 독점하려 할 테니.

그사이에 끼면 기필코 누군가 하나는‚ 혹은 여럿이 죽어 나갈 것이 뻔했다.

‘몰살 엔딩도 무리는 아니지.’

상상만 해도 으‚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구경하는 쪽이라면 조용히 팝콘을 뜯겠지만‚ 직접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에 몸을 맡기자니 그저 암담하기만 했다.

이 진저리 나는 게임은 어찌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스템: 당신을 감금한 범인을 찾지 않으면 엔딩을 볼 수 없습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아직 뚜렷하게 셋 중 누가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더 그랬다.

무심결에 협탁을 보는데 메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가씨‚ 너무 곤히 주무셔서 아직 씻기지 못했습니다. 목욕물을 받아 놓았으니 씻고 계십시오. 곧 돌아오겠습니다. -알베르토-]

확인해 보니 알베르토가 남긴 쪽지였다.

5층 ‘세라의 방’에 머무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베르토도 따라 내려온 걸까?

하긴 남주도 내려오는데 알베르토가 못 내려올 이유는 없었다.

‘버그 때문에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자는 동안 챙겨 준 거구나.’

목까지 끌어 덮여 있는 이불이라든지‚ 침대에 곱게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으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그가 남긴 쪽지를 보니 반가움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럼 이 꼴도 다 봤겠네.’

누가 봐도 인간이길 포기하고 흘레붙은 듯한……. 남에게 보이기 창피한 몰골이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기에‚ 민망해서 알베르토를 볼 낯이 없었다. 이불을 들추고 제 몰골을 확인한 세라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일어나는 건 보고 가지. 이 꼴로 와서 화난 걸까.’

4층에서 3층 내려갈 때가 떠올라 괜히 눈치가 보였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갈 때는 아예 만날 수조차 없었던 탓에 더 불안했다.

‘에휴‚ 모르겠다. 일단 시키는 대로 목욕이나 하자.’

그녀가 옷을 벗고는 냉큼 욕실로 들어갔다.

***

‘도대체 누가 감금한 범인이지.’

목욕물에 몸을 담근 세라는 아직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

‘혹시 세바스찬?’

세라는 그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들을 떠올렸다.

“약혼자랑 친구가 안 놀아 준다고. 나한테 놀아 달라고 떼썼던 거 알아요?”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제일 좋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엔 늘 나한테 매달렸잖아.”

사실 게임을 시작할 때 나온 ‘범인의 편지’를 떠올려 보면‚ 그가 가장 의심스럽다.

[아끼는 인형들 가운데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다름 아닌 ‘나’일 거라 확신해.]

이 구절과 뭔가 묘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나? 층수의 배치도 그렇고.

‘펠릭스와 에단이라는 선택지가 있어도‚ 역시 자신을 찾게 될 거라는 확신을 주려고 했던 것이라면?’

그저 정황상의 증거일 뿐이라서‚ 아직 범인을 세바스찬으로 확신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펠릭스일 가능성은 없나.’

펠릭스는 파혼을 요구하면서도 세라 에보트 주변의 남자들을 경계했다.

“혹시 그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던 기사단장 놈인가.”

“맨날 업혀 다닌다더니. 이젠 깔리기로 했나?”

응접실에서 처음 남자가 생겼다고 고백했을 때‚ 자연스럽게 에단과의 외도를 의심했고.

“아니면 신전에서 자숙할 때 그랬나? 거기 대신관이 꽤 반반하다던데.”

급기야는 세바스찬의 머리채까지 잡았었다.

처음엔 그냥 무심코 넘겼지만‚ 이건 파혼을 요구하면서도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닌 척해도 의부증이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 죽이려고 했던 거라면?’

총을 가지고 3층에 내려왔던 것도 그렇고.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세라 에보트한테 엄청 집착하고 있었으니까.’

아귀를 맞추자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개 막장이 따로 없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에단은?’

에단은 진짜 잘 모르겠다.

물론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단과는 눈뜰 때부터 온몸을 결박당한 채 갇혀 있었다.

‘묶인 걸 자기 것만 풀었다고 했지만‚ 이 또한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돌이켜 보면 다짜고짜 펠릭스를 의심하기도 했고. 엘레나 핑계를 댔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얘는 딱히 그럴 만한 사유가 없는 것 같은데?’

해서‚ 일단 에단은 논외로 제쳐 둔다 해도. 둘 중에 누가 범인일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저 몇 가지 의심만으로 범인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냥 안 나가고 알베르토랑 살면 안 되나.’

또 그런 싱거운 생각이 들어서 픽 웃었다.

‘그게 될 리가. 이 게임은 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행시키겠지.’

튜토리얼 때 ‘강제 시작’ 때문에 진땀을 뺐던 것이 떠올랐다.

목욕을 마친 세라는 샤워 가운을 걸쳐 입고 욕실을 나섰다.

범인은 저택 안에 있을 것이고‚ 반드시 부딪쳐야만 했다.

***

‘알베르토는 왜 안 오지?’

한참이 지나도 그의 소식이 없자‚ 세라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샤워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걸터앉은 채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말로 화가 난 걸까?’

괜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냥 앉아 있자니 안절부절못할 것 같은 기분이어서 벌떡 일어섰다.

달카닥. 문고리는 밖에서 잠겼는지 헛돌기만 했다.

‘뭐‚ 아무래도 갇혀 있는 게 안전한 상황이긴 하지.’

펠릭스는 눈이 뒤집혔을 테고‚ 다른 남주들도 세라 에보트를 찾는 상황일 테니까.

‘누가 쓰던 방 같은데.’

하릴없이 방 안을 빙글빙글 돌던 세라는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곳곳에는 사용하던 것 같은 개인 소지품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서 누군가의 안경을 발견했다.

‘이건 알베르토가 쓰던 거잖아?’

늘 깔끔한 슈트를 갖춰 입고 안경까지 쓰고 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늘 한치의 흠결 없이 단정해 보였는데.

‘안경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안경뿐 아니라 다른 소지품들도 있었다. 그가 늘 끼고 다니던 흰 장갑이라든지. 크리바트 같은 것도 보였다.

‘아! 알베르토가 지내던 방인가 봐.’

‘정화의 방’을 세바스찬이 쓰고 있었던 것처럼‚ 이곳은 알베르토가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5층에서 함께 지낼 때는 잠잘 때 빼고는 거의 붙어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5층에서 기다리리라 생각했는데‚ 알베르토도 따로 거처가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나 개인 공간이 필요한 법이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

‘알베르토도 자기 방에서는 편한 차림으로 지내나 봐. 다 풀어 놓고 갔네.’

함께 있을 때는 관계할 때를 제외하고 늘 갖춰 입고 있었는데. 조금 느슨한 차림으로 있는 알베르토도 보고 싶었다.

‘심심한데 자체 탐색 좀 해 보자.’

세라는 그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이 방을 살펴보기로 했다.

[시스템; 1층‚ ‘거울의 방’ 탐색을 시작합니다.]

이름이 ‘거울의 방’이어서일까. 평범한 침실과는 좀 달랐다. 전신 거울은 물론‚ 크기와 모양이 다른 다양한 거울들이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한결같이 예쁘고 고급스러운 것들이었지만 일반적인 광경은 아니었기에 다소 기이해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시선을 돌리자 한쪽 벽면을 꽉 채울 정도로 큰 진열장이 보였다. 안은 온통 값비싸 보이는 인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얜 뭐 좋아하는 건 다 모으나 봐.’

다 가져야 속이 시원한 걸까. 드레스도 구두도 호더처럼 모아 대더니 인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인형으로‚ 사람 못지않게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겉으로만 보기엔 부러운 삶인데. 마음이 허했던 거겠지.

남주들에게 애정을 갈구하던 내용의 일기가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에 혀를 쯧 찼다.

머무는 건 알베르토라도 에보트의 별장이기에‚ 이 방을 꾸민 건 세라 에보트일 것이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특이한 성벽이었다.

‘이렇게 잠깐만 봐도 정신병 걸릴 것 같은데. 알베르토는 괜찮으려나.’

왜 하필 수많은 방 중에 이 방일까. 밤에 자다가 저 많은 인형이랑 눈이 마주치면 섬뜩할 것 같았다. 세라는 홀로 몸서리를 쳤다.

꼿꼿하게 앉아 있는 인형들 사이에 혼자만 고개를 삐뚜름히 꺾고 있는 토끼 인형이 보였다.

‘토끼라니‚ 귀엽다.’

앙증맞게도 귀에는 큰 리본을 메고‚ 드레스 차림이었다.

세라는 홀린 듯이 그 인형을 집어 들었다.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인형을 떨어뜨리자 쨍그랑‚ 금속음이 들렸다. 머리 안쪽의 솜 사이에서 무언가가 나온 것 같았다.

‘이건 열쇠잖아?’

문을 여는 용도 같지는 않았고‚ 작은 보석함에 딸린 열쇠 같았다.

앙증맞은 리본이 묶여 있었고‚ 거기에는 세라 에보트의 약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일단 용도는 모르지만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잘 챙겨 넣었다.

‘이건 또 뭐지.’

책상을 뒤지다가 표지 없는 책을 발견했다. 꼭 노트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는 정확히 쪽지에 쓰여 있던 알베르토의 필체와 동일했다.

세라는 찬찬히 내용을 살펴보았다.

대개는 간단한 메모였다. 사람 이름‚ 의뢰 사항‚ 준비물 같은 것들. 자세한 설명은 없이 간단한 몇 줄이 전부였다.

‘업무용 수첩 같은 걸까.’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다른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빼곡했다.

누군가에게 특정한 의뢰를 받고 그 의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 아무래도 이런 걸 전문적으로 의뢰받는 것 같았다.

간결한 내용이라고는 해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은 자신을 돌봐 주었으니 고맙게 여겼으나‚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찜찜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나처럼 잘해 줬으려나.’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살뜰히 챙겨 주고. 섹스까지 해 주고. 그랬다면 묘하게 섭섭한데.’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알베르토는 어차피 NPC고‚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세라는 잡생각을 막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알베르토가 어쨌든‚ 여길 빠져나갈 생각을 해야지.’

세라도 누군가의 지시로 인해 납치당했으니‚ 이걸 읽어 보면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진행 중인 일이니까. 맨 마지막 페이지겠지.’

세라는 조심스레 메모가 적혀 있는 페이지 중 가장 뒤에 있는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이름]

- 엘레나 디아즈‚ 21세.

낯이 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잠시 눈동자가 커졌다. 엘레나 디아즈라면 노멀 모드의 여주였다.

[의뢰 개요]

- 장소는 에보트 후작가의 별장.

- 펠릭스 세르반테스‚ 에단 디아즈‚ 세바스찬 클라인 납치 후 함께 감금.

- 4층 펠릭스 세르반테스‚ 3층 에단 디아즈‚ 2층 세바스찬 클라인.

노멀 모드에서 있었던 사건인가. 의뢰자는 당연히 세라 에보트겠지.

노멀 모드의 범인은 질투에 눈이 먼 세라 에보트로 밝혀졌으니까.

[특이 사항]

- 특정 드레스와 꾸밈 필요.*

- 1층에서 세라 에보트 등장.

- 미약과 세뇌 사용(펠릭스 세르반테스‚ 에단 디아즈‚ 세바스찬 클라인에게 선 작업 필요).

특이 사항 부분이 조금 이상했다.

우선‚ 드레스와 꾸밈 부분에 별표가 되어 있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딱히 짚이는 부분은 없다.

‘이 날 세라 에보트가 원하던 드레스 코드가 있었던 모양이지.’

뭐‚ 이 부분이야 대충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한데‚ 의뢰자가 세라 에보트라면 굳이 1층에서 등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제로 그녀를 기다린 건 남주 세 사람의 싸늘한 멸시와 끔살 엔딩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별장인데도 굉장히 무방비하게 당했지.’

이뿐 아니라‚ 사실 가장 이상한 건 미약과 세뇌 부분이었다.

‘왜 남주들을 미약까지 먹이고 세뇌를 시켜? 누구 좋으라고?’

다 엘레나 좋은 짓 아닌가. 세라 에보트가 엘레나에게 유리한 짓을 할 이유가 있나?

‘…의뢰자가 엘레나라면 모를까.’

순간‚ 쿵.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인 생각이 스쳐 갔다.

‘설마……?’

세라는 정신없이 노트의 앞쪽을 훑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의뢰 내용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신기하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름이 적힌 사람이 의뢰자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엘레나 감금의 의뢰인이자 노멀 모드의 범인이 세라 에보트가 아니라 엘레나 디아즈였다고?

‘…말도 안 돼.’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자꾸만 헛웃음이 샜다. 꼭 실성한 사람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일단 진정.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노멀 모드를 진행했을 땐 엘레나 디아즈의 입장에서 시작했기에‚ 당연히 세라 에보트의 짓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난이도가 쉽긴 했지. 스토리가 탄탄한 게임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게임을 한 목적이 남주들과의 19금 씬을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급발진하듯 날려 먹은 개연성 또한 딱히 신경 쓰지 않았고.

뭐 어차피 판타지는 판타지고‚ 뽕빨물에 무슨 개연성까지 바라나. 이렇게 좀 너그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디아즈 영애가 좋아. 에보트 영애랑은 최대한 빨리 파혼하도록 하지.”

펠릭스도.

“네가 내 의붓동생이라는 게 싫었어.”

에단도.

“천사는 영애와 같은 미소를 지을 겁니다.”

세바스찬도.

밑도 끝도 없이 엘레나에게 빠져들었고‚ 성관계에 도달하는 것 또한 쉬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다 미약과 세뇌의 결과물이라니. 다소 충격이었다.

‘…그럼 이번 의뢰자는 누구지?’

일단 엘레나 디아즈가 했던 의뢰와 포맷이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다.

‘이건 엘레나의 의뢰를 아는 사람이 의뢰자라는 뜻인데.’

노트에는 엘레나 디아즈의 의뢰에 대한 내용 이후로 작성된 기록이 없었다. 아마도 아직 기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런데‚ 특히 이 마지막 줄이 너무 찜찜해.’

세라는 기록의 마지막 줄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의뢰 완료 후 청소.]

다시 앞 장의 다른 의뢰를 살펴보니 전부 다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의뢰 완료 후 청소’라는 글귀가.

‘청소가 끝났다면. 지금 엘레나는 어디에 있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가씨.”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알베르토가 방으로 돌아왔다.

***

“…….”

세라는 선 자리에서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노트를 등 뒤로 숨긴 채 무언가 죄를 짓다 들킨 사람처럼 꿀 먹은 벙어리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왠지 자신의 입에서 나와야 할 것 같은 말이 알베르토의 입에서 나왔다.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시장하실 텐데. 제가 아가씨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 드린 것 같군요.”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인데도 알베르토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허리를 굽혀 정중한 사과를 할 뿐이었다.

“…아‚ 아니야. 괜찮아.”

안 들켰나? 아니‚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누가 봐도 당황한 티가 났을 것이다.

세라는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끼며 좀처럼 알베르토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뚜벅뚜벅.

알베르토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와서는 사로잡듯 허리를 안았다.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요.”

그와 동시에 뒤로 숨긴 노트는 그의 손에 들어갔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기절할 것 같았다.

“…….”

“뭘 그리 당황하시는지.”

그가 귀엽다는 듯 이마에 촉 입을 맞추었다.

“꼭 죄짓다 들킨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의 품 안에 안기자 샤워 가운 사이로 하얗고 여린 몸이 조금 드러났다.

단단한 가슴팍에 말랑한 살결이 밀착되고 심장이 쿵쿵 뛰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손에 든 노트를 다시 책상에 내려놓으며‚ 쥐고 있던 열쇠마저 빼앗았다. 세라는 조마조마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이‚ 이건…….”

“이 노트보다는.”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안아 올려 책상 위에 앉히고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자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 그걸 간단히 열고는 세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마 이게 더 도움 되실 겁니다.”

상자 위에는 ‘세라 에보트’의 약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그는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 좋아하는 장난감을 쥐여 준 사람처럼 흐뭇한 표정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알베르토의 팔 사이에 갇힌 상태라 피할 수도 없었다.

‘이것도 날 돕기 위해 주는 걸까……?’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지만‚ 거부하는 것도 우스울 테지. 일단은 그가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

“…고마워.”

세라는 간단한 감사 인사를 하며 얼떨떨하게 상자 안을 살폈다. 상자 안에는 그녀가 아끼던 것 같은 각종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그러다 맨 아래 납작한 노트 같은 것을 발견했다. 힐끔 알베르토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 안에는 세라 에보트의 필체로 잡다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웨딩드레스는 세르반테스 공작 부인답게 우아한 스타일로 해야지. 세르반테스에서 내려오는 파란 사파이어 반지를 물려받을 테니까 미색 계열로 할까?

소공작님도 그때쯤이면 키가 훌쩍 자라 있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아주 높은 구두를 신을 거야.]

이건 어렸을 때의 메모 같고.

[성인식 때는 최대한 어른스러운 드레스가 필요해! 어깨를 훤히 드러낸 장밋빛 드레스를 입어야지. 진주가 박힌 구두도 신을 거야.

아카데미에서 돌아오신 소공작님이 반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야.

얼마나 멋지게 성장하셨을까. 르블랑 부티크가 제일 낫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다른 데도 와 보라고 해야겠다.]

성인식 직전에도 메모를 남겼던 것 같다.

[남쪽 엘리브 해에 가고 싶다. 파란 바다가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던데. 바다는 어떤 느낌일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다.

아버지는 바쁘셔서 이번 여름 휴가도 건너뛰실 테고. 타운 하우스를 빌려서 에단과 같이 가면 허락해 주시려나?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몰래 수영도 배워 보고 싶다.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으면서 지내면 나도 에단처럼 까무잡잡해져서 돌아오겠지?

에단과는 뭘 해도 재밌다. 에단은 진절머리 난다지만 나랑 있을 때의 표정을 보면‚ 그냥 하는 소린 게 분명하다. 숨바꼭질하다 창고에 갇혔을 때도 우린 재밌었으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는 아마도 에단과 남부에서의 휴양을 계획했던 모양이다. 절교하기 전이니까 저렇게 휴양지를 갈 생각에 들떴던 거겠지.

살펴보니 일종의 ‘위시 리스트’나 아니면 ‘버킷 리스트’ 같기도 했다.

[와 씨‚ 밤을 새워 코피 날 뻔했다. 배덕한 신전의 밤은 역시나 명작이다. 홀린 듯이 읽고 또 읽었다. 하도 읽어서 이제는 책이 너덜너덜해질 것 같다.

낮에는 고결한 얼굴로 신을 섬기고‚ 밤에는 여신님의 개가 되어 온몸을 핥는 충직한 사제라니. 짜릿하다.

우선 나도 대신관님과 해 보고 싶은 게 많다. 준비물은 모두 주문해 두었다. 이제 대신관님을 꼬시기만 하면…….]

…물론‚ 세바스찬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신전에서 자숙할 때 썼던 메모인 모양이다.

정말로 진지했던 모양인데‚ 다시 봐도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세라는 본인이 한 게 아닌데도 다시 수치심을 느꼈다. 알베르토가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슬쩍 눈치를 살피자 눈이 마주쳤고‚ 그가 슬며시 웃었다. 아마도 읽은 모양이다.

내가 한 거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라는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다.

어느새 마지막 장이었다. 이건 뭐랄까. 일종의 설계서 같았다.

집 그림이 그려져 있고‚ 위치에 맞게 깨알 같은 글씨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총 5층짜리 저택. 에보트의 별장.]

[5층‚ 세라의 방. 한 층을 통으로 쓸 것. 벽면에는 ‘배덕한 신전의 밤’ 같은 소설을 가득 채우고. 식사도 방에서.

침실과 연결되는 큰 방. 욕실도 화려하게. 매일 목욕할 거니까 향유는 종류별로 구비해 둘 것.]

마치 5층에서의 생활을 들여다본 듯한 글이었다.

[4층 응접실. 펠릭스 세르반테스. 까다로운 공작님의 취향에 맞추어 최고급 가구들을 배치해 놓을 것.

초조할 테니 위스키 정도는 제공해 주자. 벽지에 시가 냄새 배는 것은 질색이지만 넌 잘생겨서 봐준다.]

[3층 창고. 에단 디아즈. 가장 누추한 곳을 줘서 미안하지만‚ 넌 기사니까 상관없겠지.

우리가 가장 재밌었던 순간을 떠올리길 바라.

덧붙여서 훈련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볼까. 날 두고 혼자 홀랑 탈출하면 가만 안 둘 거야.]

[2층 예배실‚ 그리고 정화의 방. 세르반테스 클라인. 우리 대신관님‚ 갇혔어도 기도는 하셔야겠죠.

특별히 제단은 튼튼하게 만들어 두었어요. 늘 기도를 올리는 곳에서 날 섬긴다면 매우 짜릿할 듯. 기대된다!]

소름 끼치게도. 모두 겪고 내려온 일이다.

[1층‚ 거울의 방.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잔뜩 모아 둬야지. 거울이랑‚ 인형이랑‚ 그리고…….]

메모를 읽어 내린 세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가씨.”

“…….”

“이제 원하던 걸 찾았습니까?”

알베르토가 새파래진 그녀의 뺨을 감싸며 시선을 맞추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홀연히 알람음이 울렸다.

[시스템: 당신을 감금한 범인의 이름을 말하세요. (제한 시간: 10초) - 실패 시: 사망]

10‚ 9‚ 8‚ 7…….

6‚ 5‚ 4‚ 3…….

…….

그래. 이쯤 되면 부정할 수 없겠지.

“세라 에보트.”

그녀가 헛웃음을 뱉으며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자신.”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딩동댕!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시스템: 축하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감금한 범인을 찾았습니다!]

***

세라 에보트가 모두를 감금한 범인이었다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왜?

가지고 싶어서?

과도하게 많은 드레스와 구두도 그렇고. 이 방에도 거울이나 인형을 잔뜩 모아 둔 것을 보니 수집벽이 있는 건 분명했다.

세라는 처음 시작할 때 세라 에보트가 친히 보냈던 편지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라서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한다 했었지.

약혼자 펠릭스도‚ 소꿉친구 에단도‚ 그리고 자신이 후원했던 세바스찬까지. 자신만의 인형 집에 가두고‚ 전부 다 가지고 싶었던 걸까.

어쨌든 세라 에보트의 정확한 심정은 알 수 없다. 그저 그럴듯하게 유추할 뿐이다.

이제 남은 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뿐이었다.

“왜 이제껏 감췄어? 난 왜 전혀 몰랐고?”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의뢰자가 세라 에보트라는 것 말이야.”

“아.”

알베르토가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말갛게 웃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세라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기억을 지우기라도 한 거야?”

일부러 직설적으로 물었다.

빙의자라고 해도‚ 세라 에보트조차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시스템도‚ 알베르토의 태도도 그녀가 모르고 있다는 걸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었으니까.

“네.”

알베르토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말씀 못 드린 건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 의뢰 당시 그걸 원하셔서요.”

“왜?”

“아마도 의뢰자인 걸 들킬까 봐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 세 명한테?”

“네. 죄책감 같은 걸 가지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스스로가 범인인 걸 잊는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하나?

실패해서 죽으면 어쩌려고?

이거 완전 또라이잖아?

‘그럼 자기가 직접 했어야지!’

직접 그 살얼음판을 대신 건너온 입장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무모하달지‚ 배짱이 두둑하달지. 알면 알수록 참 제정신은 아닌 여자애였다.

꼬르륵-

하필이면 지금‚ 눈치도 없이 배 속에서 작은 천둥이 일었다.

생리적 반응인데 어찌하겠나. 아까 세바스찬을 공략할 때부터 굶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아마도 바라던 만큼 작은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알베르토의 입술에서 픽 웃음이 새어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장하신가 보네요. 일단 식사부터 하셔야겠습니다.”

쪽팔려. 무게 잡고 있었는데 이게 뭐람. 세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연신 사랑스러운 눈으로 주시했다.

“다이닝 룸에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만찬?”

“네. 마지막 식사니까 잘 먹이고 싶어서요.”

마지막이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범인도 맞혔고‚ 이제 남은 건 엔딩뿐이었다.

엔딩마저도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다 같이 살아요’ 버전으로 보라고 지정해 주었고‚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남주들 사이를 중재하는 것도 문제지만‚ 알베르토가 가장 신경 쓰인다.

안경도‚ 장갑도‚ 크리바트도 갖추지 않고 느슨한 차림을 한 그는 어딘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각이 많아져서 멍하니 있는데 그가 세라의 몸을 안아 전신 거울 앞에 내려 주었다.

“특별히 아가씨가 가장 좋아하시는 드레스로 치장해 드리겠습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샤워 가운을 벗기고 몸을 거울 앞으로 돌렸다.

새하얀 나신이 드러나자 반사적으로 가슴을 가렸다.

“아가씨‚ 절 못 믿으시는 거 압니다.”

“…….”

그가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이며 손목을 그러쥐었다. 나른한 시선과 거울을 통해 마주쳤다.

“그래도 집사로서 마지막 도리는 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스르륵 팔을 풀었다. 팔로 가렸던 풍만한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알베르토는 정욕이라고는 없는 단정한 눈으로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세라는 마치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몸을 맡겼다.

살갗에 섬유가 닿는 감촉이 선득했다. 옷을 여며 주며 손끝이 스칠 때마다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둔부에 그의 중심이 자꾸만 닿았다. 뜨겁고 또 묵직했다.

분명히 참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쪽엔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속옷부터 드레스까지 차곡차곡‚ 능숙한 손길로 옷만 입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알베르토는 정체가 뭐지. 왜 이런 의뢰를 받는 걸까.’

아까 노트를 보니 한두 건이 아닌 데다 심지어는 엘레나의 의뢰까지 맡았을 줄은 몰랐다.

의뢰 완료 후 청소라니. 죽인다는 뜻일까.

이번 의뢰가 끝나면 이쪽도 청소 당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꾸만 스치는 손길이 이제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느껴진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드레스가 입혀졌다.

세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히 이 드레스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장밋빛 드레스.

[성인식 때는 최대한 어른스러운 드레스가 필요해! 어깨를 훤히 드러낸 장밋빛 드레스를 입어야지.]

아까 세라의 노트에서 읽었던 메모가 떠올랐다.

‘세라 에보트가 성인식에서 입었던 옷이라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알베르토가 진주가 박힌 구두를 꺼내 주었다.

[진주가 박힌 구두도 신을 거야.]

심지어는 구두까지.

분명 어디서 본 차림인데. 어디서 봤지.

한참을 골몰하던 세라는 비로소 그 출처를 떠올리곤 입을 틀어막았다.

‘…엘레나가 노멀 모드에서 입었던 옷이랑 똑같잖아?’

폐인처럼 했던 게임이니까. 엘레나가 감금 내내 입었던 옷차림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라는 냉큼 아까 보았던 엘레나 관련 기록을 떠올렸다.

[특이 사항]

- 특정 드레스와 꾸밈 필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엘레나 디아즈가 세라의 성인식 드레스를 따라 입었다는 말이네?’

그제야 퍼즐이 하나둘씩 짜 맞춰졌다.

하필이면 세라 에보트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 것.

세라가 에단에게 보낸 편지를 전하지 않고 빼돌린 것.

거리가 가까운 신전이 많은데도‚ 굳이 에보트 후작가가 후원하는 신전까지 봉사를 다닌 것.

세라가 아끼던 드레스마저 따라 입고‚ 그녀가 계획한 ‘인형의 집 프로젝트’를 정확히 똑같은 방법으로 의뢰한 것까지.

엘레나는 무서울 정도로 세라 에보트에게 집착했다. 남주들을 갖는 게 아니라‚ 꼭 세라 에보트가 되는 게 목적인 사람처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원까지 똑같이 이루려 하다니. 소름 끼쳐.’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세라를 완전히 모방하기만 한 것이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엘레나 디아즈의 의뢰에는 몇 가지 치명적인 추가 옵션이 있었다.

[특이 사항]

- 1층에서 세라 에보트 등장.

- 미약과 세뇌 사용(펠릭스 세르반테스‚ 에단 디아즈‚ 세바스찬 클라인에게 선 작업 필요).

세라는 ‘노멀 모드’의 줄거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별장에 갇혀 홀린 듯이 엘레나에게 빠져든 남주들. 그들은 1층에서 만난 세라 에보트를 이 납치극의 범인으로 몰고는.

…그녀를 처단한다.

‘그게 다 엘레나의 소원으로‚ 미리 세뇌당한 상태여서 그런 거라고?’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노멀 모드만 클리어 해서 몰랐는데. 세라 입장에서는 엘레나가 빌런이잖아?’

그냥 빌런 수준이 아니라 범인이라는 누명까지 씌워서 죽인 셈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세라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정리해 보았다.

- 노멀 모드는 엘레나 디아즈의 자작극이다.

- 하드 모드는 세라 에보트의 자작극이다.

- 엘레나 디아즈는 세라 에보트의 카피 캣이었고‚ 노멀 모드에서 세라 에보트에게 누명을 씌워 그녀를 처단했다.

게임 초반에 시스템이 설명할 때는 분명 ‘노멀 모드’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다 거짓말인가?

분명 알베르토의 의뢰 일지에 적혀 있었으니 있었던 일이겠지.

몰아치듯 쏟아지는 정보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또 거짓인지.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엘레나는 어떻게 됐어?”

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분명 이 사건의 진위를 알고 있을 터였다.

“자고 있습니다.”

역시나 알려 줄 마음이 없는지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였다.

의뢰 후 청소라고 적혀 있었는데 자고 있다니. 그냥 둘러대는 거짓말인가.

“거짓말.”

“그럴 리가요. 전 아가씨한테 거짓말 안 합니다. 할 필요도 없고.”

알베르토는 계속 모순된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다분히 뻔뻔스러웠다.

무엇보다 이 사건의 실체를 알면서도 묵묵히 제 소임을 다 하는 남자의 실체가 궁금했다.

‘…그리고 답은 왜 알려 준 걸까.’

알베르토는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 흐뭇한 얼굴로 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누구야?”

거울을 통해 시선이 마주쳤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는 아가씨를 도와주는 역할‚ 그 자체라고.”

이렇게 대놓고 추궁해 묻는 데도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바로 그 점이 더 섬뜩했다.

“그래서 정답까지 알려 준 거야?”

도와주는 자라고는 해도 이건 거의 떠먹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사건의 전말이 담겨 있는 노트를 제 손에 쥐여 준 건 알베르토였으니까.

“아 그거요? 공짜 아닌데.”

“…뭐?”

“말했잖아요. 내 도움에는 늘 대가가 있다고.”

그는 금방이라도 세라를 집어삼킬 것 같은 눈빛으로 유유히 웃었다.

“뭐‚ 제 사심이 좀 관여했던 건 사실입니다. 이쪽도 사정이 좀 급해서.”

“그게 무슨…….”

“계약이고 뭐고.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거든요.”

그가 세라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세라는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아‚ 생각해 보니 거짓말을 하긴 했네요. 딱 하나니까 봐주셔야 합니다.”

“…뭘 거짓말했는데?”

“제 이름이요. 다시 소개할까요? 이제 슬슬 알 때도 됐잖아.”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알베르토의 머리 색과 눈 색이 바뀌었다.

칠흑 같은 흑발에 피보다 더 붉은 적안. 색깔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뭘 놀라요. 새로운 놈이랑 떡 치는 거 좋아하면서.”

“…….”

“메피스토.”

귓가에 낯선 이름이 아득하게 울렸다.

“마왕입니다‚ 아가씨.”

그의 목소리는 해사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시스템: 히든 남주 ‘메피스토’(직업: 마왕)가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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