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IN
세바스찬이 사제가 된 건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모두가 신의 선택이라고 했다. 기억도 안 나는 까마득한 예전부터 그는 신전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의 출생도 부모도 몰랐다. 이곳에서 머문 것이 아홉 해라고 했으니까 나이도 대충 그 정도지 않을까 어림할 뿐이었다.
빈민가의 골목 어귀에서 어미도 없이 배곯아 죽어 가는 핏덩이를 누군가가 주웠고‚ 이곳에서 거두었다고 했다.
상급 사제들에게 매질을 당할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오갈 데도 없는 널 거두고 먹이고‚ 재우고 살린 건 모두가 신의 뜻이고. 넌 그 뜻에 보답해야만 한다고.
그 보답이라는 게 절대적인 복종일까. 살기 위해 따라야 했고‚ 아직 어린 그는 딱히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럴 만한 배짱도 용기도 없었다.
죽는 것은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도 신의 선택이라는데. 죽는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이 있나. 그런 자조적인 생각만 들었다.
신전은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무리 어린아이여도 이곳에서 먹고 머물기 위해서는 일해야 했다.
성서 공부 시간과 약간의 예배 시간을 제외하면 주로 신전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거나‚ 포도밭에 나가곤 했다.
뙤약볕 아래 혹사하듯 일하고 나면 어린 견습 사제들의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서 한층 더 볼품없는 몰골이 되었다.
세바스찬은 살갗이 잘 타지 않는 편이라‚ 신관들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주로 표적이 되곤 했다. 허옇고 곱상한 낯짝을 지닌 탓에 혼자 일을 게을리했다고 맞았다.
그러면서도 오늘같이 외부에서 손님이 오는 날에는 꼭 세바스찬을 차출했다. 신전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제일 반반한 외모를 가진 탓이었다.
신전의 이미지를 위해 당연한 결정이었지만‚ 세바스찬은 그게 못내 곤혹스러웠다.
일과 후엔 혼자만 편한 일을 했다고 맞고‚ 따돌림당하고. 더 험한 일을 맡게 되고. 결국 악순환이었으니까.
“후우.”
그는 와인 잔을 받친 쟁반을 들고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신전에 후원자가 생겼다고 들었다. 그가 선발된 것은 후원자의 방문 때문이라고 했다.
또 두들겨 맞을 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늘 고요하던 신전이 제법 분주했다. 빠듯한 살림 사정과는 달리 신전은 표면적인 품위를 지켰다.
그 때문에 웬만한 규모의 후원에는 이 정도로 법석을 떨지는 않는데‚ 오늘 오는 후원자는 에보트 후작으로‚ 제법 거물급 인사였다.
에보트 후작은 제국 내 큰손이자 꽤 유명한 사업가였다. 그런 자가 신전의 후원자로 나섰으니 필시 보통의 규모는 아닐 터였다.
아침 예배 시간에 대신관은 사제들을 모아 놓고‚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세바스찬 또한 평소답지 않게 깔끔한 사제복을 입었다. 자신보다 키가 훌쩍 큰 사제에게 얻어 입은 것이라 기장도 길고 품이 컸지만‚ 평소 꾀죄죄했던 차림에 비하면 제법 말끔해 보였다.
그의 임무는 에보트 후작이 시음할 포도주를 가져다주고‚ 포도주의 이름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세바스찬은 긴장해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오늘 해야 할 임무를 머릿속에 되뇌어 보았다.
어려운 와인 이름은 물론 풍미까지 외워서 설명해야만 했다. 포도라면 진절머리 날 정도로 봤지만‚ 포도주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어린 사제가 알 리가 없었다.
에보트 후작은 복도 끝 대신관의 집무실에 와 있다고 했다. 집무실은 이제 코너만 돌면 코앞이었다. 잠시 멈춰 선 세바스찬이 길게 심호흡했다.
‘떨지 마. 백 번도 넘게 외웠잖아. 잘할 수 있어.’
자신을 토닥이며 코너를 도는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집무실 문 앞에서 엿보고 있었다.
‘대체 여기는 무슨 일일까.’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밤색 머리칼을 곱게 땋아 올린 모습이 꼭 잘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예뻤다.
‘저길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지.’
내성적인 세바스찬은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여자아이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기다리기엔‚ 에보트 후작과 대신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야겠지.
불편한 마음에 괜히 눈치를 보며 걷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자신을 향해 알은체를 했다.
“안녕?”
화들짝 놀란 세바스찬이 긴 옷자락을 밟고 넘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쟁반을 놓치고 말았다.
와장창-
와인 잔이 쏟아져 깨지면서 바닥이 온통 엉망이 되었다.
“…….”
혼비백산해서 수습해 보다가 홀린 듯이 시선을 들어 올리자‚ 여자아이가 포도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얼떨떨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인사 참 요란하게 하는구나?”
그녀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툭 쏘아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딱 봐도 고귀한 신분의 여자아이였기에 세바스찬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정신없이 용서를 빌었다.
“웬 소란이냐.”
문이 열리고 화들짝 놀란 대신관과 소파에 앉아 있는 에보트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이런. 에보트 영애‚ 괜찮으십니까?”
웬만하면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는 대신관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에보트 영애라면 에보트 후작의……?’
여자아이의 정체를 알아챈 세바스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세바스찬! 너‚ 넌 조심하지 않고……!”
대신관이 윽박지르는 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렸다.
“…….”
난 이제 죽었구나. 잔뜩 겁을 집어먹은 세바스찬은 몸이 얼어붙어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에보트의 금지옥엽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뿐인 어린 외동딸이 포도주를 뒤집어쓰다니. 그것도 말단 견습 사제의 실수로.
이건 단순히 매를 맞거나‚ 기도실에 갇혀서 금식 기도를 하는 걸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차라리 이대로 고통 없이 죽어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라‚ 대체 이게 무슨……. 다친 데는 없느냐?”
상황을 알아차린 에보트 후작이 부리나케 달려 나와 제 딸의 안위를 살폈다.
포도주도 포도주지만 잔이 깨져 바닥에 유리 파편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또 어쩌다가!”
“제가 나빴어요. 심심해서 깜짝 놀라게 했더니. 헤헤.”
여자아이는 구김살 없는 말투로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이렇게 겁쟁이 꼬맹이인 줄은 몰랐거든요.”
짓궂게 웃으며 세바스찬을 놀려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아직 어린 견습 사제라 서툰 탓에……. 아가씨께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대신관이 진땀을 삐질 거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워낙에 천방지축인 녀석이라 하녀를 붙여 두었는데. 또 따돌리고 혼자 돌아다닌 모양이군요.”
“그래도 이 녀석이 조심성 없이. 정말 죄송합니다. 이 견습 사제는 따로 불러 엄하게 꾸짖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저토록 굽실대는 대신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얼마 전 고위 귀족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 하급 사제 하나가 죽도록 맞고‚ 반병신이 되어 내쫓겼던 일이 떠올랐다.
하물며 세바스찬은 견습 사제였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저어‚ 그럼 제가 꾸짖어도 될까요?”
여자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였지만‚ 결코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네?”
“따지고 보면 이 아이는 대신관님이 아닌 저에게 잘못한 것이니까요. 드레스를 버린 것도‚ 다칠 뻔한 것도 저고요. 처분을 해야 한다면 그걸 정하는 사람은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법 똑 부러지는 답변이었다.
“…세라.”
“그‚ 그러시겠습니까?”
에보트 후작이 나무라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신관은 오히려 비위를 맞추기에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선뜻 세바스찬의 처우를 정할 권한을 넘겨주었다.
“에보트 영애가 참으로 영특하군요.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니 제법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상대방의 기분을 띄워 주는 데는 자식 칭찬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대신관은 작심한 듯 세라를 추켜세웠다.
제 편이 생기자 세라는 더 기세등등해졌다.
“아버지이‚ 제발 말리지 말아 주세요.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레스라고요.”
“…….”
“해 보고 싶어요. 네? 이것만 맡겨 주시면 사고 안 치고 얌전히 기다릴게요.”
세라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곱게 접었다. 에보트 후작은 도무지 못 이기겠다는 듯‚ 옅은 한숨을 쉬더니 손을 휘저었다.
“일단 에밀리한테 가서 옷부터 어떻게 하고. 말썽 부리지 않는 방향으로 알아서 하도록 해.”
“헤헤. 고맙습니다‚ 아버지!”
세라가 에보트 후작에게 달려가 목에 매달리더니 볼에 뽀뽀를 쪽 했다. 떨떠름하기만 하던 에보트 후작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멍청한 놈. 가서 처우에 따르도록 해라. 기라면 기고‚ 때리면 맞아. 알겠느냐?”
함께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던 대신관이 세바스찬을 일으키고는 귓가에 선득하게 속삭였다.
“…….”
세바스찬의 발끝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따라와.”
그러거나 말거나 세라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세바스찬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내내 두려움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신전의 처벌을 받으나 고위 귀족의 처벌을 받으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얘‚ 난 세라 에보트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세‚ 세바스찬입니다‚ 아가씨.”
그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며 답했다.
이제 구둣발을 핥으라고 하려나? 아니면 바닥을 네발로 기라고 하거나 옷을 발가벗기고 매질하려나?
세바스찬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수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딱히 과한 상상은 아니었다. 대신관 같은 고위 사제가 아니고서야 귀족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특히나 이렇게 직급이 낮은 사제는 그저 노예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옷 좀 갈아입고 싶은데. 남는 옷 같은 거 없어?”
“네? 옷이요?”
“응. 에밀리는 고해 성사 하느라 바빠서. 나한테 잘못한 걸 모두 낱낱이 고해하지 않으면 내쫓겠다고 협박했거든.”
아무래도 괴팍한 귀족 여자아이에게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눈앞이 까마득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저‚ 저도 고해할까요‚ 아가씨?”
“넌 됐고. 옷 어디 있냐니까? 나 찝찝하단 말이야.”
“제가 입는 옷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수‚ 숙소에…….”
“그래. 그쪽으로 안내해.”
***
에보트의 귀한 아가씨는 참 종잡을 수가 없었다.
평소 그렇게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으면서도 이런 초라한 옷을 걸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이거 엄청 편하다.”
세바스찬은 제 옷을 입고 헤헤 웃는 세라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와인으로 엉망이 된 드레스를 혼자 벗지도 못했다. 또 무례를 범할까 봐 시선을 딴 곳에 둔 채 수많은 단추와 끈을 풀어 주느라 애를 먹긴 했지만‚ 별 볼 일 없는 견습 사제의 옷을 입고도 티 없이 즐거워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어‚ 아가씨.”
“응?”
“저를 벌하지 않으시나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꾸짖겠다고 데려와서는 나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던 까닭이었다.
“무슨 벌을 받길 원하는데?”
세라가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되물었다.
“그‚ 그게‚ 아가씨의 뜻대로 따르라는 명을 받아서요.”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겠네. 난 또 특별히 선호하는 체벌이 있나 했지.”
꾸짖을 마음이 없는 걸까?
그녀는 계속 웃기만 할 뿐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이 세바스찬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 그게‚ 지금은 딱히 처벌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절 용서하신 건가 하고…….”
“누가 그래? 널 용서했다고?”
눈을 새침하게 치켜뜨는 모습이 꼭 새끼고양이 같았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 테니 부디 적당한 처벌을 내려 주시면…….”
“걱정 마. 나랑 놀아 주는 게 벌이니까.”
“…그‚ 그게 벌이라고요?”
“응. 다들 나랑 놀아 주기 힘들다던데?”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입가를 긁었다. 다소 황당한 발언에 세바스찬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버지는 너무 바쁘시고‚ 에단도 내 뒤치다꺼리 지긋지긋하대. 에밀리는 나 때문에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라던데?”
“…….”
“넌 어때? 지금 좀 힘들어?”
아니‚ 힘들 리가.
여전히 속내도 잘 모르겠고‚ 실수할까 봐 긴장되기도 하지만.
최악의 경우 내쫓길 것까지 상상한 세바스찬에게는 함께 놀아 주는 게 벌이라니.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습니다. 근데 아가씨‚ 정말로 다친 데는 없으세요?”
“없어. 나 말고 네가 다쳤던데?”
“전 안 다쳤는데요.”
“내가 봤는데.”
세라가 성큼 다가서더니 세바스찬의 소맷자락을 걷어 올렸다.
“여기 다쳤잖아.”
그녀의 말대로 가느다란 팔목에는 멍 자국이 울긋불긋했다. 세라는 관찰하듯 그의 팔목을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살갗이 희어서일까. 노랗고‚ 푸르고‚ 갈색도 있고. 크기와 색깔이 다른 멍 자국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한 번에 생긴 멍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걸 눈치챈 세라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 예전에 다친 거네.”
“…….”
세바스찬은 치부를 들킨 것처럼 창피해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가 너 때리는구나.”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못 그러도록 해 줄까?”
“아가씨가 왜요?”
지나친 참견이었을까. 시종일관 고분고분하던 그가 다소 날을 세우고 되물었다.
이걸 보고 가엾게 여기는 걸까? 나무랄 거면 때리든가 괴롭히면 될걸. 왜 같잖은 동정이지?
자기가 대체 뭘 알고.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다고?
아무리 철모르는 귀족 아가씨라지만 책임지지 못할 참견은 사양이었다.
“그냥.”
세바스찬이 그녀의 호의를 경계하거나 말거나. 세라는 말간 얼굴로 웃었다.
“아까 봤다시피‚ 난 힘을 남용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힘을요?”
“응. 너처럼 예쁜 게 망가지는 건 질색이고.”
무슨 망측한 소리인지.
그녀는 마치 장난감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파우치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서 건넸다.
“자‚ 이거 선물.”
“이게 뭐예요?”
“보면 모르니. 손수건이야. 까부는 애들한테 보여 줘.”
“이 손수건을요?”
“응. 거기 에보트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거든.”
세라가 마치 뽐내듯 손수건의 귀퉁이를 보여 주었다.
“더 나대면 내가 다 패 버린다고 전해.”
그녀는 고귀한 얼굴로 제법 상스러운 말을 했다. 세바스찬은 그걸 아연하게 쳐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너 웃니?”
“아‚ 아니에요. 그냥…….”
“아까 봤잖아. 아버지는 내 말에 꼼짝 못 하시거든. 너희 대신관님은 우리 아버지한테 꼼짝 못 하시고.”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여기서 제일 센 사람은 누굴까?”
세라가 질문과 동시에 검지로 스스로를 지목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뭘 믿고 저렇게 뻔뻔할 정도로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타고난 기질일까? 아니면 귀한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면 다 저렇게 되는 걸까?
“나 팔 아파. 얼른.”
얼떨결에 손수건을 받아 든 그는 뒤를 따라 걷다가‚ 예배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놀자고 하셨잖아요.”
“응. 여기서 놀 건데?”
“어떻게요?”
기도를 올리는 예배당에서 놀자니. 다소 뜬금없는 제안에 세바스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기도 잘하지?”
“네?”
“사제니까 잘하잖아.”
세라가 다짜고짜 그의 손을 끌고 예배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배당은 텅 비어 있었다. 에보트 후작의 방문으로 정기 예배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긴 예배당 의자에 털썩 걸터앉은 그녀가 옆에 앉으라는 듯이 툭툭‚ 제 옆자리를 쳤다.
세바스찬은 군말 없이 그녀의 옆에 살짝 거리를 띄우고 앉았다.
“조금 더 내 옆으로 다가와.”
“…….”
“빨리. 나 두 번 말하는 거 질색이야. 너 벌받는 중인 거 잊었어?”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화들짝 놀란 세바스찬이 조금 당겨 앉았다.
“나 기도하는 법 좀 알려 줄래?”
“기도요?”
“응. 소원이 있어서. 신전 온 김에 좀 해 보려고.”
내내 장난스러운 태도만 보여서 잘 몰랐는데. 제법 진지한 얼굴로 부탁하는 통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도 소원이 있구나.
하긴‚ 무언가를 가져 봤어야 원할 줄도 아는 법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적이 없는 그는 오직 바라는 게 버티는 것뿐이었다.
“이상해 보이니?”
“아‚ 아니요.”
“난 좀 어색해. 사실 가지고 싶은 걸 못 가져 본 적은 없거든. 근데 세상에는 뜻대로 잘 안 되거나 어쩔 도리가 없는 것도 있더라.”
“…오직 신의 일이라고.”
“응?”
“그런 걸 두고. 오직 신께서 결정하시는 일이라고. 기도하면 된다고 대신관님께서 그러셨어요.”
기도하면 된다니. 세라가 조금 마음이 놓이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하는 법 알려 줘.”
“저 같은 견습 사제가 어찌…….”
“네가 대신관 해. 나는 음… 세르반테스 공작 부인 할게.”
“네?”
“놀자고 했잖아. 역할극이라고 생각하자고.”
막무가내였다. 세바스찬은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어‚ 그럼 세르반테스 공작 부인.”
“네‚ 대신관님.”
“일단 이렇게 손을 모으고요.”
“응. 이렇게요?”
그녀가 작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확인받듯 물었다.
“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집중하고요. 신께 원하는 걸 말씀하시면 돼요.”
손수 시범을 보인 후‚ 슬쩍 눈을 뜨고 곁눈질하자 손깍지를 끼고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제법 긴 시간 집중하는 걸 보니 간절한 소원인 모양이었다. 신전에 살면서도 딱히 기도할 거리가 없던 세바스찬은 그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숱이 많은 밤색 머리칼을 가지런히 빗어 올려 묶었다. 발랑발랑 뛰어다니느라 조금 삐져나온 잔머리마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필시 늘 옆에 붙어서 돌봐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리감은 속눈썹이 꽤 길었다. 빨간 입술을 꼬물대며 뭐라고 작게 중얼거릴 때마다 간헐적으로 속눈썹도 떨렸다.
발그레한 두 볼에는 웃을 때마다 살짝 볼우물이 파였더랬다. 자꾸만 눈이 가는 걸 보니 이 여자아이를 돌보는 사람들도 그게 보고 싶어 자꾸만 웃게 할 것 같았다.
거울을 보고 웃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거울은 귀한 것이라 한낱 견습 사제 따위가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남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가 궁금했다.
울면 약해 빠지게 운다고‚ 웃으면 건방지게 웃는다고 늘 지적받아 왔기에 표정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뿐 아니라 신전의 모든 사제가 마찬가지였다. 늘 강박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들의 낯을 보고 있노라면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세라에게 자꾸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관님께서 기도는 안 하시고 절 훔쳐보고 계셨나 봐요?”
슬그머니 눈을 뜨고 곁눈질하는 세라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 네가 감시해 준 덕에 집중해서 원하는 거 다 빌었으니까.”
“잘하셨네요.”
“세 개나 빌었다?”
세바스찬은 시선을 피하며 의무적인 답변만 했다. 얼굴을 보다가 들킨 게 너무 민망해서였다.
“뭐 빌었는지 안 궁금해?”
“개인적인 일이시잖아요.”
“이야기하고 싶어.”
“왜요?”
“그냥. 답답해서. 우리 대신관님이 들어 주셨으면 좋겠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뭐 비셨는데요.”
그가 선심 쓰듯 마지못해 물었더니 그제야 눈을 빛내며 답했다.
“약혼자랑 친해지는 거. 친해지려고 선물도 줬는데 거절당했어. 걔는 내가 싫다고 했지만 나는 걔가 좋거든.”
하나를 이야기한 그녀가 손을 펼쳐 손가락 하나를 꼽았다.
고위 귀족들은 이른 나이에 약혼한다고는 들었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도 정혼자가 있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대놓고 싫다고 하다니. 마음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약혼자인지 뭔지. 굉장히 무례한 사람인가 보네.’
자기가 뭐라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인데도 왠지 모르게 거북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 또요?”
“친구랑 안 헤어지는 거. 나는 걔 없이는 심심한데‚ 걔는 나한테 시달리는 게 너무 힘들대. 나중에 크면 멀리 못 찾는 데로 떠나 버릴 거래.”
그녀가 또 손가락을 꼽았다. 또래 견습 사제들은 있지만 친구를 가져 본 적이 없기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신전 생활은 기본적으로 심심하다는 한가한 감정을 가지기가 힘들 정도로 혹독했으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 신께서 만나셨으면 잘 돌봐 주시라고. 그렇게 빌었어.”
초여름 신록 같은 눈동자가 약간은 서글퍼 보였다.
“근데 구체적으로 기도 못 해도 괜찮을까?”
“그게 무슨…….”
“나 사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그녀가 처연하게 말했다. 기억에도 없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하는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세바스찬은 문득 자기 자신은 어땠는지 고민해 보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도‚ 엄마에 대해 기도해 본 적이 있던가.
사실 이 삭막한 신전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겠지. 아이가 태어나도 키울 힘이 안 되니까 버렸을 테고.
낳아 준 어미니까 그리워하거나 기도해 줘야 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걸 느꼈는지‚ 그녀가 다시금 배시시 웃으며 그와 눈을 맞춰 왔다.
“귀부인들이 왜 고해 성사를 하나 했는데. 이제 알겠어.”
“네?”
“속마음을 털어놓을 땐 아예 모르는 사람이 편할 때가 많거든.”
“왜요?”
“말씀드렸다간 걱정하실 테니까.”
아버지 에보트 후작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네 덕에 마음이 편해졌어.”
“미천한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아냐. 너 되게 소질 있어.”
그녀가 너스레를 떨자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아‚ 그리고 이건 신께 기도 올리기 전에 너한테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떤 거요?”
“네가 나중에 커서 대신관이 되면 좋겠어.”
“제가요?”
“응.”
다소 엉뚱한 소원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녀는 만면에 싱글벙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 같은 게 어찌 그런…….”
“잘생겼잖아. 신전 입장에서도 좋은 일일걸? 너 같이 잘생긴 대신관이 있으면 신전 매주 오고 싶을 것 같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바스찬은 낯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아가씨!”
등 뒤에서 젊은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엄숙한 공간임에도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세라의 매무새를 추슬렀다.
“한참 찾았잖아요! 자꾸 이러시면 저 주인님한테 진짜로 잘린다고요!”
“기도 중이었는데 네가 방해했어. 나한테 잘리는 건 괜찮아?”
세라가 눈을 새침하게 올려 뜨며 툭 쏘아붙였다.
“아니‚ 아가씨이. 옷 꼴은 또 이게 뭐예요. 감기 걸리신다니까. 거참.”
“편하고 좋은데 뭐.”
“주인님 거의 다 마무리되셨대요. 그래도 제가 아가씨를 가장 오래 모신 하녀잖아요. 잘리면 다 새로 가르치셔야 하고 아가씨도 번거로우실 거예요. 맞죠?”
“잘린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괜한 소리 마시고. 같이 마차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요. 네?”
하녀가 거의 통사정하자 세라가 마지못해 답했다.
“금방 마무리할 테니까‚ 뒤에 가서 너도 기도하고 있어.”
“아가씨.”
“잠깐이면 돼. 너 때문에 늦어지잖아.”
“그럼 얼른 끝내셔야 해요?”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뒤로 물렀다. 그녀가 기도를 마저 하려는 듯 다시 손을 모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집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세바스찬.”
“네‚ 아가씨.”
“아버지한테 잘 이야기해 놓을게. 다음에 또 오면 오늘처럼 같이 기도해 주는 거다?”
같은 아이가 봐도 사랑스러웠다. 저런 게 바로 가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애로움이 아닐까.
세바스찬은 그녀의 호의에 순수하게 감탄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럼 손수건 잃어버리지 마.”
그녀가 고개를 까딱하며 작별 인사를 하더니 뒤에 있는 하녀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 후로 세라 에보트가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주지?
갑작스러운 호의에 세바스찬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런 걸 정말 받아도 되나.
살면서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돌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뜻 받아들이기엔 지나칠 정도로 낯선 감정이기도 했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세라 에보트가 왜? 자신이 가여워서? 불쌍한 애를 상대로 착한 일을 하고 싶어서?
단지 귀족 아가씨의 장난감이자 유희 거리일 수 있었다.
사업가가 신전에 후원하듯‚ 귀족 아가씨가 불쌍한 애를 후원하며 얻는 일종의 자기 위안이거나.
잘 모르겠다. 어차피 추측은 추측일 뿐이었다. 딱 한 번 만났고‚ 알량한 우월감을 얻기 위한 값싼 동정이 진심일 리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그녀가 네 은인이자 구원자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에보트의 외동딸에게 무슨 더러운 수를 쓴 거냐며 비아냥거리는 애들도 있었다.
세바스찬은 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녀의 선의를 거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저러다 질리면 관둘 것이고‚ 그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
귀족 아가씨의 변덕이라고 생각했던 후원은 의외로 긴 시간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세라에게 편지도 받았다. 그때의 일로 신전에는 당분간 못 가게 되었다면서. 에보트의 영지와는 거리가 멀어서 오는 게 번거로울 만한데‚ 그럼에도 그녀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에보트 후작이 출장 가서 집을 오래 비웠다는 둥‚ 친구와 싸웠다는 둥‚ 약혼자에게 또 바람맞았다는 둥. 시답잖은 일상을 주절거리는 편지가 간헐적으로 날아들었다.
세바스찬은 답장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고‚ 그녀의 말에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함부로 말을 얹었다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었기에 보내고도 초조할 것 같았다.
믿지 않는다면서도 그녀가 준 달콤한 안온을 잃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에보트의 후원을 받는 그를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에서 헐뜯고 수군거리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미움받는 건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고된 노동에서 제외되었고‚ 교육 위주로 참여하면서 신전 생활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 다른 사람들 말대로 그녀는 그의 은인이자 구원자일지도 몰랐다.
일전에 그녀가 말한 대로 그는 꽤 재능 있는 사제였다. 영리함은 물론이고‚ 성력이 개화하자 실력으로 상급 사제들을 추월해서 대신관의 신임을 얻었다.
신을 섬기면서도 기도라는 걸 진심으로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신께서는 이런 미천한 자식에게도 기적을 내려 주시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대신관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대신관이 되어서‚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그냥 결실을 싶어 오기를 부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걸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긴 시간이 흐르고‚ 세바스찬은 그녀와의 약속대로 대신관이 되었다.
그러나 세라 에보트가 신전에 다시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전과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
“에보트 영애.”
상급 사제가 방문을 두들기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안쪽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최대 후원자의 따님답게 그녀는 신전에서 가장 호화로운 귀빈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에보트 후작에 의해 억지로 끌려들어 온 것이라는 말이 진짜인지‚ 기분이 좋지 않아 식사도 물렸다고 들었다.
사교계의 꽃이었던 그녀는 제법 큰 추문을 일으키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파티장에서 엘레나 디아즈를 때리고 포도주를 끼얹으며 패악질을 부렸다고 했다.
에보트 후작은 소문이 잠잠해지길 원했고‚ 일을 크게 키우는 대신 신전에서 자숙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한 듯했다.
“기척이 없습니다‚ 대신관님.”
상급 사제는 세바스찬의 눈치를 살폈다. 세바스찬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답했다.
“내가 하지.”
방 안에만 틀어박힌 지가 벌써 이틀째였다. 살뜰히 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그녀가 아무리 저기압이어도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에보트 영애‚ 대신관입니다.”
그는 다시 한번 노크하며 기척을 냈다. 여전히 묵묵무답이었다.
“영애. 후작께서 상태를 살펴 달라고 당부하셔서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미리 짧게 경고한 후‚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독한 포도주 냄새가 확 풍겼다. 방 안에는 빈 술병과 그녀의 개인 소지품 같은 것들이 번잡스럽게 널려 있었다.
세라 에보트는 잔뜩 술에 취한 채‚ 네글리제 차림으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누가 에보트 영애에게 포도주를 주었느냐.”
“수소문해서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알아서 수습할 테니‚ 나가서 일 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보는 눈이 많아 봐야 좋을 게 없지. 어쨌든 신전의 후원자이고 에보트의 상속녀다. 너도 입 단속하도록 해.”
“네‚ 대신관님.”
고개를 꾸뻑 숙인 상급 사제가 방을 나가자 세바스찬 혼자 남았다. 그는 엉망이 된 그녀의 몰골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았다.
탐스러운 밤색 머리칼은 다 풀어 해쳐져 산발이었다. 얼마나 울어 댄 건지‚ 발그레한 뺨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까만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한층 더 까매 보였다.
잔뜩 흐트러지고 망가진 모습이 꼭 다른 사람 같았다.
하긴 그날로부터 십수 년이 흘렀고 그동안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무엇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변하게 만든 걸까. 본인이 원한 대로 대신관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본 첫 모습이 이렇게 엉망으로 취해 정신을 잃은 모습이라니.
어쨌든 남들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에보트의 외동딸에 대해 이런저런 추문이 돌아 봐야 신전의 입장만 골치 아파질 것이다.
신전의 사제들도 모두 눈이고 귀였다. 함께 왔던 상급 사제의 입은 막았지만‚ 본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도 힘들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또 띄기 전에 세바스찬은 난장판인 방을 주섬주섬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혀를 쯧 찼다. 하녀 없이는 기본적인 주변 정리도 못 하는 걸까. 고위 귀족의 딸이란 허울만 좋았지‚ 어항 밖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관상어처럼 무력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탁자 위에 노트 한 권이 보였다. 방을 정돈하던 그는 홀린 듯이 그걸 집어 들었다.
세바스찬에게 보냈던 것과 같은 시답잖은 일과와 그녀의 느낌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노트는 그녀가 매일 적는 일기장인 것 같았다.
남의 일기를 읽는 일이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노트를 넘기고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 에단의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부터 약혼자 세르반테스 공작이 엘레나 디아즈와의 추문을 앞세워 파혼을 요구한 일.
자신에게 네 약혼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엘레나를 보고 얼마나 모멸감을 느꼈는지까지.
그녀가 최근 겪은 일들이 시간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에는 다소 흐트러진 필체로 토막글이 적혀 있었다.
[세라 에보트. 그래도 난 네가 좋아.]
스스로 토닥거리며 적어 둔 메모가 자못 서글퍼 보였다.
방을 대충 정리한 세바스찬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추스르기 위해 소파로 다가갔다.
헝클어져 땀과 눈물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겨 주었다. 세라는 젖은 뺨에 상냥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속눈썹을 잘게 꼼지락거렸다. 붉은 입술은 달뜬 숨을 내쉬며 조금씩 달싹였다.
깨면 낯선 인기척에 화들짝 놀랄 것 같아서. 어느새 성큼 자라 어른이 된 제 얼굴을 단번에 알아볼 리도 없을 것 같아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일단은 침대로 눕혀야겠지. 반듯이 뉘고 이불도 덮어 줘야 감기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세바스찬이 천천히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잠결에 사람의 온기를 느꼈는지‚ 그녀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세바스찬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말 작고 보드라운 몸이었다. 네글리제 자락이 살짝 들려서 뽀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자 반사적으로 아랫도리에 묵직하게 피가 쏠렸다.
…이게 무슨.
세바스찬은 얼른 눈길을 거두고 침대에 그녀를 내려 주었다.
긴 숨을 푹 내쉬는데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제가 인사가 늦었네요‚ 대신관님.”
“…….”
“반가워. 히끅.”
배시시 웃은 그녀가 해롱해롱하며 팔을 뻗더니 그를 안으려고 했다. 세바스찬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 저지했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고귀한 분이셔서어‚ 끅‚ 저 같은 주정뱅이랑은… 헤헤‚ 인사도 안 해 주시는 거예요……?”
“일단 오전에 다시 올 테니 주무십시오.”
“…치‚ 너무…해.”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어 주자‚ 혀가 풀린 발음으로 중얼거리다 베개에 얼굴을 고꾸라뜨렸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잠든 걸 확인한 그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오늘따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바스찬은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했던 기도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약혼자와 가까워지고 싶어 했고‚ 가장 친한 친구를 지키고 싶어 했다.
돌아가신 모친의 평온을 바랐으며‚ 그가 대신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소리도 했다.
약혼자도‚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도. 그녀가 안 하던 기도까지 하면서 지키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었다. 애정을 갈구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등을 돌리는 게 그녀에게 꽤 상처인 듯했다.
그도 귀족 영애들에게 세르반테스 공작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고해 성사를 종종 듣곤 했다.
그저 공작이 정략혼 전에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즐기는 것이겠거니 했다. 자유연애를 즐기다가 때가 되면 정략혼을 하는 귀족은 흔했으니까.
엘레나 디아즈도 그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파혼을 요구했다니. 어린 시절부터 바라던 혼인이었으니 상심이 클 만했다.
대규모 마물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에단 디아즈가 기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기사단은 접경 지역으로 자주 출정했기에 에단 디아즈가 수도에 자주 머물 수 없는 건 알았지만 세라와 완전히 절교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엘레나 디아즈는 그의 의붓동생이지 않은가.
모든 걸 다 가진 줄 알았던 그녀가 정작 간절히 바라던 건 하나도 가지지 못하다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예배가 있어 잠을 충분히 자고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했지만‚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이후로 그저 마음이 흙탕물처럼 혼탁할 뿐이었다.
세라 에보트가 온다는 소식에 온 신경이 곤두섰던 걸까.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이겠지.
그는 잔뜩 긴장된 몸을 욕조에 담가 이완시키기 위해 탈의했다.
“…제기랄.”
그가 망측한 몸 상태를 보고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아까 그녀와 몸이 맞닿았던 일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그녀를 머릿속에 담은 일만으로도 이렇게…….
구제 불능으로 좆을 세워 버린 걸까?
아까부터 피가 몰려 뻣뻣해졌던 그의 중심은 배꼽 위까지 쳐들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대로는 잠을 이룰 수도‚ 내일 이른 시간에 열리는 예배를 집전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욕조에 몸을 비스듬히 뉜 세바스찬은 가지고 들어왔던 손수건을 펼쳐 눈 위에 덮었다. 마음이 삐걱거릴 때마다 꺼내 보던 세라 에보트의 손수건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이상했다.
그도 남자였기에 자고 일어나 보니 몽정을 한 적은 있었다. 그건 그냥 때가 되면 나오는 생리적인 반응이지‚ 딱히 음란한 생각을 하거나 수음을 한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엔 단체 숙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정식 사제가 되고 나서는 신성력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정결한 몸가짐을 가지려 애를 썼기 때문이었다.
사제의 계율에 금욕이 있었지만‚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다. 운신이 자유로운 고위 사제일수록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유려한 외모를 지닌 탓에 많은 귀부인과 귀족 영애가 그를 흠모했다. 그들로부터 받은 은밀한 제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키지 않아 모두 거절했다.
그에겐 육욕을 탐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원자에게만큼은 대신관이 된 제 모습을 떳떳하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무기력하던 그에게 삶의 의욕을 찾아 준 것도. 이렇다 할 목표를 만들어 준 것도 그녀였다.
메마른 삶에 등장한 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녀 덕분에 신을 믿었다.
그런데 지금 십수 년 만에 다시 만난 그의 후원자는 스스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세라 에보트.
매일 밤 자기 전에 되뇌었던 이름은 다를 게 없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뺨과 달뜬 숨을 뱉는 입술. 잔뜩 웅크린 어깨를 감싸자 부러질 듯 가녀린 몸이 타인의 온기를 쫓아 파고들던 모습까지.
이건 가여운 것에 대한 동정심일까. 아니면 아득하게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낙하를 지켜보며 느끼는 묘한 희열일까.
어느 쪽이든 그에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최음제 역할을 하는 건 확실했다.
본디 사특한 것은 실금이 간 곳을 파고드는 법이었다. 무결한 척했지만‚ 자극을 마주하면 바로 약한 민낯을 드러내는 균열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동안 발정하지 않았던 건 그 대상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지‚ 그가 결코 고결하거나 정숙한 사제여서가 아닌 모양이었다.
“…읏.”
기다란 손이 홀린 듯이 검붉은 좆 기둥을 가득 감아쥐었다.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손바닥 안에 열이 오르고 흉흉한 핏줄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낮고 탁한 음성을 뱉으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잔잔하던 물결이 일렁이며 욕실에 음란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젖은 낯을 떠올릴 때마다 선단은 질금거리며 선액을 뱉었다.
맑은 물속에 몸을 담갔음에도 그 끈적하고 묵직한 체액은 희석되지 않았다. 마치 신의 이름으로 고상하고 순결한 척 살면서도‚ 본성은 숨기지 못하는 제 모습 같았다.
그는 손에 고인 선액을 기둥에 바르며 아래로 깊이 쓸어내렸다가 힘주어 쥐어 올리길 반복했다.
“흐읏.”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강한 자극이었다. 아랫배에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며 이 죄책감 비슷한 쾌락이 아스라이 사라질까‚ 자꾸만 조바심이 들었다.
좆을 잡아 흔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들끓는 흥분에 그는 얼굴에 덮었던 손수건을 구겨 쥐고 연신 입가에 가져다 댄 채 물고 빨았다.
“…세라.”
엉망으로 흐트러진 세라 에보트를 떠올리며 좆을 흔들었다.
실은 아까부터 그런 망측한 상상을 했다. 뽀얗게 드러난 허벅지 위로 얇은 네글리제를 무자비하게 걷어 올리고 싶었다.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나신을 구석구석 핥고‚ 말캉한 젖가슴을 사납게 움켜쥐며 그녀를 샅샅이 맛보고 싶었다.
그를 대신관으로 만든 것도. 대신관이 된 그가 스스로 추잡한 욕정을 인정하게 만든 것도.
다름 아닌 세라 에보트였다.
그녀는 허락도 없이 자신을 제멋대로 짓고 또 허물었다. 마치 모래 장난을 치는 것처럼. 너무도 간단하게.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처럼 휘두르고‚ 또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휘둘리고. 전부 다 환멸스러웠다.
“세라‚ 세라 에보트…….”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세라 에보트에게 좆을 물린 채‚ 여린 몸을 깔아뭉개며 교접하는 상상을 했다.
“큭.”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가는 팔로 그의 목에 안타깝게 매달렸을 때‚ 망상 속 그녀가 마침내 교성을 내질렀다.
그는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열감을 느끼며 파정했다.
온몸에 나른한 탈력감이 들며 눈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짓뭉개듯 쥐고 흔들었음에도 여전히 이 사특한 살 기둥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다시금 그녀 앞에서 예쁜 거짓을 보이기 위해서는. 아닌 척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짓을 반복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