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개와 늑대의 시간
눈을 뜨자 푹신한 침대 위였다. 세라는 작게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알몸으로 잠들었는데‚ 언제 입힌 건지 네글리제 차림이었다. 구마 의식으로 인해 흠뻑 젖었던 시트도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으응.”
그녀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성수라고는 하나 차가운 물을 너무 맞아서일까. 미열이 조금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시스템: 2층 플레이 제한 시간은 8시간 남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몸이 자꾸 으슬으슬 춥고 푹푹 가라앉았지만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아직 세바스찬과의 미션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세바스찬은 어디 갔지?’
아까부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예배실로 돌아간 걸까.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구마 의식이라지만 사제에게는 정숙하지 못한 행동이었을 테니. 기도가 필요하겠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막막했다.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성물로 가 버린 후‚ 진짜 좆은 구경도 못 했으니까.
경건한 대신관의 손길로 절정에 오를 정도면 제법 잘한 거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게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주와의 ‘성교’는 해당 층을 공략하는 데 필수 조건이었다.
이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세바스찬은 또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사제 따먹기 더럽게 힘들구나.’
그녀의 매무새를 추슬러 주며 정욕 하나 없는 단정한 시선으로 쳐다봤던 게 떠올랐다.
성수 세례에 엉덩이를 맞고‚ 수치스러운 말로 조련을 당하고. 그렇게 생고생하고도 못 따먹었으니. 정말이지. 고난의 행군이 따로 없었다.
진짜 삽입을 위해 다시 한번 그 과정을 거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지.’
그동안 고생한 게 아까워서라도 꼭 따먹고 말겠다고. 세라가 전의를 새롭게 다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님‚ 저 새끼 천국으로 보내고 전 지옥 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세바스찬을 만나야 했다.
한 번의 구마 의식으로 경계심을 무너뜨렸으니까. 또 악령 타령하면서 치유부터 받고‚ 잘 꼬드기면 탈의시킬 수 있겠지.
달칵-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고리가 헛돌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설마‚ 갇힌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이번에는 ‘정화의 방’에 감금된 것 같다.
[시스템: 돌발 미션! ‘정화의 방’을 탐색하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세요!]
시스템 창이 뜨며 알람음이 아득하게 울렸다.
‘하긴‚ 돌발 미션이 나올 때가 됐지.’
이제는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미션도 익숙해졌다. 세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가를 긁적였다.
일단 진정하고 이 방부터 뒤지자. 그러다 보면 저 문을 열 방법을 발견하든지. 뭔가 해결책이 생길 터였다.
[시스템: 2층‚ ‘정화의 방’을 탐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세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예’ 버튼을 눌렀다.
어디부터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세바스찬이 서랍에서 딜도‚ 아니 성물인지 뭔지를 꺼냈던 게 떠올랐다.
[시스템: ‘아주 사적인 서랍’의 탐색을 시작합니다.]
고작 서랍 따위에 거창하게 뭐라는 거야.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협탁의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은 의외로 휑했다. 가장 먼저 언제 난잡한 액을 묻혔었냐는 듯 깨끗하게 정돈된 성물이 보였다.
물론 좋긴 했지만‚ 이것만 없었어도 ‘진짜’를 박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세라는 성물을 보니 치가 떨려서 침대 위로 집어 던져 버렸다.
풀썩. 성물이 이불에 파묻혔는지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방 안에 죽은 듯한 적막이 일었다.
‘…그래도 가짜 좆치고는 제법 느낌이 훌륭했었지.’
세라는 이불에 떨어진 성물을 흘끗 흘겨보았다.
단단한 재질의 유리로 되어 있으니 위생적일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실용적인 아이템이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자.’
누가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 챙기자니 좀 부끄러웠다. 그녀는 초식 동물처럼 좌우를 빠르게 살피고는 성물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건 그렇고.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누가 가져온 건가?’
우선 세바스찬은 이걸 성물이라고 하며 망설임 없이 서랍에서 꺼냈고‚ 완벽하게 사용했다.
‘근데 누가 봐도 용도가 그쪽이잖아.’
어쨌든 사실 소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고 찝찝한 아이템이었다. 마치 이런 쪽의 치유가 필요한 걸 알았던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정숙한 대신관의 소지품이라기엔 좀 괴리감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점점 알 수 없는 의혹만 커졌다.
어딜 더 살펴볼까 두리번거리다가 ‘가련한 성도의 드레스’를 꺼내 입었던 큰 옷장을 발견했다.
[시스템: ‘아주 사치스러운 옷장’의 탐색을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옷장이었다. 세라는 걸린 옷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부 여자 옷에 드레스였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 이곳은 에보트의 별장이고‚ 세라가 떼를 써서 돈지랄로 사들인 곳이니까.
본집에도 있을 텐데. 별장에 이만큼 가져다 놓으려면 도대체 옷이 얼마나 썩어나는 걸까. 부러울 정도로 호사스러운 삶이었다.
‘드레스 호더처럼 더럽게 많은 것 빼고는 이렇다 할 특이 사항은 없는 것 같은데…….’
옷을 들어 올릴 때도 시스템이 조용한 걸 보니 헛수고를 한 것 같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옷장 문을 닫으려는데 구석에서 큰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시스템: 아이템 ‘아주 은밀한 상자’를 열어 보시겠습니까?
- 주의! 해당 아이템은 개봉할 경우‚ 다시 봉인할 수 없습니다.
>예/아니오]
찝찝한 건 사양이다. 세라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아니오’를 누르려는데‚ 알람음이 다급하게 울렸다.
[시스템: 해당 아이템을 미개봉할 경우‚ 후유증으로 ‘디버프 상태’에 시달리게 됩니다.
- 디버프 상태 ‘궁금해 죽겠네.’
> 궁금해서 자꾸 떠오른다. 궁금증을 해결할 때까지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다.]
이건 ‘예’를 누르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안 보려니까 진짜 궁금해 죽겠네.’
시스템의 바람대로 그녀는 ‘예’ 버튼을 꾸욱 눌렀다. 상자를 옷장 밖으로 꺼낸 세라는 망설임 없이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취향의 소품과 의상이 다소곳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먼저‚ 세라는 망사 소재로 된 나풀거리는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시스템: 아이템 ‘음욕의 여신 드레스’]
과연 이름부터가 망측했다.
이게 드레스라고? 전혀 의복의 역할을 못 할 것 같은데.
세라는 아이템의 설명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시스템: ‘음욕의 여신 드레스’
- 효과: * 여체의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상대를 유혹하고‚ 성감을 돋운다.
- 입은 채로 자유로운 성교가 가능한 실용적인 아이템입니다.]
실용의 개념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우선 ‘음욕의 여신 드레스’는 전체가 망사로 되어 있었다. 아래는 말할 필요도 없이 훤하게 뚫려 있었고.
연인 간의 은밀한 이벤트를 위해 입는 코스튬처럼 애초부터 입으나 마나 한 옷이었다.
그보다 망측한 건 또 있었다.
[시스템: 아이템 ‘여신님의 충직한 개의 목줄’
- ‘음욕의 여신 드레스’와 세트 아이템으로 함께 착용할 경우‚ 효과가 증폭됩니다.
- 효과: * 착용 시‚ 여신님의 심미적인 만족감을 상승시키고 호감도가 증가한다.]
이젠 뭐‚ 거의 노골적인 SM 플레이잖아? 아까는 맞는 쪽이더니. 의상은 무슨 일인지 때리는 쪽이었다.
누가 준비한 걸까.
아까 그 성물을 가장한 딜도부터 이런 코스튬까지 준비해 둔 걸 보면‚ 아예 미리 작정한 것 같다.
세바스찬? 아니면 제3의 누군가?
정확히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플레이가 미리 계획되어 있었고‚ 그걸 계획한 사람이 변태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옷장은 볼 만큼 본 것 같고.’
이만큼 뒤졌으나 아직 제일 중요한 증거를 못 찾았다.
다른 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세라의 일기장 조각’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겠지.
책장에 있으려나. 세라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커다란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시스템: ‘거룩한 책장’의 탐색을 시작합니다.]
‘정화의 방’이어서일까. 망측한 성인 소설책들만 가득했던 ‘세라의 방’과 달리‚ 전혀 그녀의 취향은 아니겠지만 종교 서적이 잔뜩 꽂혀 있었다.
아마 에보트 후작은 딸이 조금은 정신 차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실도 만들고 이 방도 만든 것이겠지.
‘관련 있어 보이는 제목부터 하나씩 뽑아볼까.’
어차피 게임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아이템은 세라가 집어 올리는 순간 시스템 창이 뜨게끔 되어 있었다.
세라는 그중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하고는 냉큼 뽑아 들었다.
[시스템: 아이템 ‘배덕한 신전의 밤’을 보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역시‚ 맞네. 이건 애초부터 꺼내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거룩한 책장에서 이건 누가 봐도 튀는 제목 아닌가?
종교 소재라는 것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진 서적이었다.
책을 펼치자 쪽지가 툭‚ 떨어졌다.
[시스템: 아이템 ‘세라 에보트의 반성문’을 획득했습니다.]
반성문이라고? 그녀는 세라 에보트가 신전에서 자숙할 때 매일 반성문을 작성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것 때문에 세바스찬이 꽤 골머리를 앓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나 하고 읽어 보니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대신관님께.
이건 제가 요즘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랍니다.
사제와 신도의 관계가 이리도 끈끈하다니. 한층 더 신앙심이 높아지는 느낌이었어요.
요즘 독서를 자주 하고 있어요. 이런 류의 책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려요!
독서도 좋지만. 사제복 차림의 대신관님을 보는 것만큼 즐겁지는 않네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기도해요. 기도실에서 나체로 기다릴게요.
- 지금도 벗고 있는 세라 에보트 드림.]
반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망측한 내용이었다.
외설적인 노래 가사를 적어서 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참 창의적으로 유혹하고 괴롭혔구나.
왠지 그를 자빠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아직 동정남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안 넘어가고 참았다는 건데.’
매일 이런 반성문을 받았다면 그도 여러모로 고역이었을 터였다.
“…쪽팔려.”
대리 수치라는 게 이런 것이려나. 세라 에보트의 만행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녀는 ‘세라의 반성문’을 인벤토리에 담고는 책을 덮어 버렸다.
‘아직 일기장은 발견 못 했단 말이지.’
탐색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녀가 뚫어지게 책장을 훑어보다가 맨 구석에서 제목이 안 적혀 있는 노트를 발견했다.
[시스템: 아이템 ‘세바스찬 클라인의 신앙 일지’를 읽어 보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신앙 일지라. 일단 관련이 있는 내용 같으니까 한번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예’를 선택한 후‚ 그걸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일지인 만큼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오늘의 할 일이나 계획 같은 것들이 간단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찾을 것이 남아 있는 만큼‚ 세라는 탐색을 계속했다. 연신 뒤적이자 그의 신앙 일지 안에 끼워져 있던 작은 노트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시스템: 아이템 ‘어린 세라의 일기장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지.
도대체 언제 나오나 했다. 실은 세라가 처음부터 찾은 건 그녀의 일기장 조각이었다.
[오늘은 신전에 갔다.
아버지가 고위 사제와 이야기하러 간 사이 어린 사제 하나가 내 드레스에 포도주를 엎었다.
르블랑 부티크에서 특별히 맞춘 건데.
아끼는 드레스가 다 망가져서 짜증이 났지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떠는 모습이 가여워서 그냥 내 실수라고 둘러대 주었다.
되게 불쌍한 애였다. 꼬맹이여도 사제라면서. 재수 없게 하필이면 최대 후원자 딸한테 실수나 하고. 신이 보살펴 주지도 않는 걸까?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비쩍 말라서는 온통 멍 자국이 있었다. 대체 그런 조막만 한 애를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때리지?
아무래도 그 음흉하게 생긴 고위 사제 짓 같다. 그 새끼는 돈만 밝히고. 그냥 생긴 게 기분 나쁘다.
내가 아버지라면 그런 느끼한 개자식이 있는 곳에는 후원금을 안 줄 텐데.
아무래도 돈이 남아도시는 모양이다. 난 외동딸이니까 책임지고 열심히 축내야겠다.]
어린 사제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쓰다니. 세라 에보트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싶어서 놀라웠다.
‘얘 생각보다 착한데?’
저 날은 무슨 일인지 악명에 걸맞지 않은 자비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물론 돈을 열심히 축내겠다니. 마지막 줄은 세라 에보트다웠지만.’
세라는 픽 웃으며 신앙 일지를 덮으려는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시스템: ‘세바스찬 클라인의 신앙 일지’에서 ‘대신관의 메모’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말 안 해 줬으면 그냥 넘어갈 뻔했는데. 뭔가 필요한 정보니까 짚고 넘어가는 것일 터였다.
세라는 ‘예’를 선택했다. 방금 일기장 조각이 끼워져 있던 페이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할 일]
딱 보니까 세바스찬이 할 일을 메모해 둔 것이다. 날짜를 보니 세라 에보트가 반성문을 제출했던 날짜와 며칠 차이가 나지 않았다.
- 도서관에서 악령이나 구마 관련 서적 구해 올 것.
원래 관심이 많은 분야였던 모양이다. 세라가 악령이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눈을 빛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까.
- 르블랑 부티크에서 사제복 찾아올 것.
르블랑 부티크라면‚ 세라의 일기에 나온 고급 부티크를 이야기하는 건가?
‘어쩐지 사제복 핏이 예사롭지는 않았지.’
돈이 좋긴 좋았다. 사제복을 입은 세바스찬은 신이 빚은 걸작처럼 보였으니까.
‘그래도 대신관치고는 뭔가 사치스럽네.’
평소 검소하고 청렴한 모습이라 이렇게 고급 부티크에서 맞추는 줄은 몰랐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아이고‚ 머리야.”
한꺼번에 많은 정보를 흡수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세라는 인벤토리 목록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시스템: 2층 ‘정화의 방’ 탐색 결과]
- 누군가가 미리 준비한 의심스러운 물건들(성물‚ 코스튬 세트).
- 세바스찬에게 제출한 세라의 반성문(음란한 편지).
- 세바스찬의 메모(악령‚ 구마 관련 서적 및 고급 부티크에 관한 내용).
- 세라의 일기장 조각(어린 사제에 관한 것).
일단 정보는 얻을 만큼 얻은 것 같은데‚ 나가려고 문고리를 돌려 보니 여전히 잠겨 있는지 헛돌았다.
아직 안 뒤진 데가 있던가?
‘욕실은 아직 안 봤지.’
아무래도 욕실에 뭐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문이 굳게 닫힌 욕실로 다가간 그때‚ 세라는 안에서 수상한 인기척을 느꼈다.
[시스템: ‘욕실’ 탐색을 시작합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욕조에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시스템: 당신은 숨어 있던 ‘세바스찬 클라인’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시스템의 안내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세라는 숨을 죽였다.
“…윽‚ 흐윽.”
세바스찬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발갛게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었기 때문에.
‘대체 왜 우는 거지?’
그러니까 분명히 우는 게 맞았다. 뽀얀 두 뺨에 굵은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이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눈물을 닦으려는 건지‚ 한 손에는 손수건을 쥐고 연신 뺨을 문질렀다.
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끼는 통에 물결이 출렁거리다 흘러넘쳤다.
“흣‚ 세라.”
하필이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설마 나 때문에 우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다짜고짜 구마 의식을 부탁하고‚ 좀 짓궂게 굴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울 일이던가.
“흐윽‚ 윽.”
아니‚ 저 정도면 좀 달래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앳된 얼굴로 흐느끼는 걸 보니 안고 젖이라도 물려서 토닥토닥해 줘야 진정할 것 같았다.
그가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꾹 깨물더니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소리와 함께 물결이 파도처럼 점점 거세졌다.
착각일까. 찰박대는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다 점점 빨라지는 것도 같았다.
“하아‚ 세라‚ 세라 에보트. 흐으‚ 윽.”
그가 끝내 물기로 그렁그렁한 눈을 질끈 감았다. 거세게 일렁이던 물결이 욕실 바닥으로 흘러넘치더니 이내 서서히 잦아들었다.
뭐지. 운다기엔 좀…….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벌벌 떨리는 손을 물속에서 꺼내 살펴보았다. 하얗고 섬세한 손끝에는 끈적한 액체가 잔뜩 엉겨 있었다.
“…….”
결국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걱정이 파스스 식어 버렸다.
그러니까 그녀도 방금 깨달았다. 그가 제 이름을 외며 열중한 일이 다름 아닌 수음이었다는 사실을.
‘미쳤다. 남자 자위하는 거 처음 봐.’
다소 충격적인 장면에 세라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성직자들도 욕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저 고결한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이름이 세라 에보트라니. 다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레이스 손수건은 딱 봐도 여성용이었다.
‘…혹시 세라 에보트 거 아냐?’
일단은 개인적인 문제니 못 본 척하는 게 낫겠지. 조심스레 문을 닫고 자는 척을 하려는데.
[시스템: 경고! ‘욕실’ 탐색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
짧은 경고와 함께‚ 삐그덕-
눈치 없는 욕실 문이 소리를 내며 서서히 안쪽으로 열렸다.
“…….”
순간‚ 문 쪽을 쳐다보는 세바스찬과 정면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해요. 절 애타게 부르시는 것 같길래…….”
열이 올라 발개진 세바스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제 손에 쥔 손수건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재빠르게 손안에 구겨 넣었다.
이걸 어쩌지. 뭐라고 수습해야 할까. 기껏 구마 의식으로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는데. 자위 관전 한 방에 나락으로 가 버린 것 같다.
일단‚ 지극히 사적인 시간을 방해한 건 맞으니까. 납작 엎드려 사죄해야겠다 생각하던 그때였다.
“…영애의 회복을 위해 성수 안에서 기도 중이었습니다.”
“…네?”
“옷을 입어야 하니 그만 나가 주십시오.”
어딜 되지도 않는 핑계를.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이쪽을 위해 기도했다고?
남의 이름 부르면서 자위해 놓고. 그게 할 소린가? 어이가 없었다.
성물이랍시고 딜도를 들이댈 때부터 좀 이상하다 했지만. 이젠 하다못해 자위해 놓고 기도라고 둘러대는 꼴이라니.
그의 뻔뻔한 태도에 미안한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상한 오기마저 싹트는 것 같았다.
“정말 멋진 기도네요?”
“…네?”
“성수에 몸을 담근 채 알몸으로 기도하시다니. 제 이름을 부르고 음경까지 흔드시면서요. 끝내 정액까지 짜내셨으니 더 효과가 좋으려나요?”
“…….”
정곡을 찌르자 세바스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세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벼랑까지 몰아갔다.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대신관님께서 저를 위해 이토록이나 노고를 해 주셨다고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세에 눌린 세바스찬이 고개를 떨구며 순순히 죄를 인정했다.
“기도하셨다면서요. 뭘 잘못하셨다는 거죠?”
“영애를 상대로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뭘 용서해 달라는 건가요?”
그녀가 건조한 얼굴로 서릿발처럼 몰아붙였다.
“모형 성기를 성물이랍시고 사용하신 거요?”
“그건…….”
“저한테는 발정 난 어린 양이라고 엉덩이까지 때리면서 꾸짖으시고는. 제 이름 부르면서 몰래 수음하신 거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잘못을 사죄하는 모양새였지만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는다.
성수를 맞고‚ 엉덩이를 맞고. 음란하다며 질책당한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삽입도 거부하고 철벽을 쳐 놓고는 뒤로는 이렇게 음습한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다소 황당한 일이었다.
“손안에 있는 거 주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세라는 끝까지 추궁해 보기로 했다.
“…네?”
“확인할 게 있으니까 주시라고요.”
세바스찬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답이 없었다.
끝내 숨기려는 걸 보니 들키면 안 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인데. 그 또한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끝까지 숨기시려거든 제게 사죄할 마음이 없으신 걸로 간주할게요.”
세라가 눈을 치켜뜨자 그가 마지못해 손수건을 내밀며 시선을 피했다.
손수건을 낚아챈 그녀가 그걸 꼼꼼히 살폈다. 에보트의 문양이 수놓아진 레이스 손수건. 역시 세라 에보트의 것이었다.
“제 손수건은 대체 왜 가지고 계신 거예요?”
득달같이 캐묻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세라는 잠자코 답을 기다리며 찬찬히 그의 낯빛을 살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은 말을 곱씹어 확인하는 것처럼 한참이나 말이 없던 그는 여전히 파리한 얼굴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그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긴 숨을 내쉬더니 자조적인 얼굴로 되물었다.
“…안 되는 거였나 봐요.”
뭐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던 아까와는 태도가 딴판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거나. 내가 잠깐 미쳤었다거나.
지금까지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반응을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날 선 반응을 보이자 세라는 도리어 조금 민망해졌다.
“그‚ 그야 그걸 쥐고 지극히 사적인 행동을 하시니까.”
이유를 설명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그의 시선이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무언가 작심한 듯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벌을 받을게요.”
“벌이요?”
듣고도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게 물었다. 세바스찬은 이미 결심이 단단히 선 듯했다.
“네. 대신 에보트 후작님이 아닌 영애께서 벌을 주셨으면 해요”
“제가요?”
“영애에게 저지른 잘못이니. 영애께서 친히 합당한 처벌을 내려 주세요.”
합당한 처벌이라. 세라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미션을 완료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처벌을 고르라니. 이건 뭐 2층을 탈출할 거의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지 않나.
설레는 마음에 광대뼈가 움찔거렸지만‚ 아닌 척 평정을 유지했다.
“정말 어떤 벌이든 상관없으신가요?”
“네. 그러니 에보트 영애.”
세바스찬의 입꼬리가 길게 호선을 그렸다.
“부디 엄하게 꾸짖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