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08. 치정극 (2) (10/17)

나를 혐오하는 남주들과 갇혀버렸다

2권

08. 치정극 (2)

펠릭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세라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에단이 제 허리에 팔을 감고 나오는 상황이었고 하필 그때‚ 펠릭스와 딱 마주쳤으니까.

‘뭐야. 남주가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는 거였나?’

노멀 모드에서는 모두를 클리어 후 깔끔하게 1층에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발치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보시다시피. 바람났는데요.”

게다가 에단이 세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이렇게 쐐기까지 박아 버렸으니. 더욱 할 말이 없을 수밖에.

‘갑자기 개 막장 전개로 흘러가네.’

빙의한 게 아니면 재밌었겠지만. 펠릭스에게 총이 있다는 걸 떠올리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경이었나. 내 약혼녀의 장난감이?”

펠릭스가 텅 빈 눈으로 물었다. 아까 4층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혔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네. 근데 어쩌죠. 아직 놀이가 안 끝나서.”

에단은 말이 꽤 짧았다. 그가 기사단장이라고는 해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공작을 상대로 이렇게 나오다니.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았는지‚ 펠릭스가 헛웃음을 뱉더니 목표물을 바꾸었다.

“세라.”

무서울 정도로 침잠된 목소리에 세라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적당히 놀았으면 돌아와야지.”

그의 파란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나 좀 화나려고 하는데.”

“당신이 세라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있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에단이 나섰다. 펠릭스의 입매가 뒤틀렸다.

“왜 남의 약혼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그야 이름을 안 부르기엔‚ 지나칠 정도로 밀접한 관계니까요.”

“자격이 있건 없건. 경이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해.”

“엘레나는 어쩌고 이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악연은 악연이었다. 그들에겐 세라 말고도 엘레나도 얽혀 있었다.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디아즈 경‚ 내 약혼녀는 원래 이쪽이야.”

펠릭스는 아주 간단하게 그녀의 가족 앞에서 엘레나를 내팽개쳐 버렸다.

‘선 세게 넘네.’

세라는 움찔 떨며 에단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으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는 공작님이 부럽네요. 편할 대로 살아서.”

“그 빌어먹을 기사도 같은 건 나랑 상관없지. 근데 경은 지켜야 하지 않나?”

“지금 제 앞에서 기사도를 운운하는 겁니까?”

“감히 공작의 여자를 건드리다니. 과연 제국의 검다운 배짱이긴 한데.”

펠릭스가 총구를 에단의 이마에 겨눴다.

“그래도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을까?”

눈앞이 깜깜해진 세라가 파드득 떨며 말렸다.

“펠릭스!”

그녀가 펠릭스를 말리려는 순간‚ 에단이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에단. 놔줘.”

“싫어.”

세라는 애끓는 눈으로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에단은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페‚ 펠릭스. 내가 잘못했어요. 이‚ 일단 그 총부터 내려 줘요.”

펠릭스는 텅 빈 눈으로 말이 없었다. 세라가 말리는데도 총을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네가 사과를 왜 하는데.”

에단은 혼비백산한 채 사과하는 그녀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시스템: 경고! 유혈 사태 발생 위험!

‘펠릭스 세르반테스’와 ‘에단 디아즈’가 육탄전을 벌일 위기에 처했습니다.

- 남주 캐릭터 사망 시 ‘강제 배드 엔딩’을 보게 됩니다.

- 강제 배드 엔딩: ‘영원한 안식’으로의 감금]

영원한 안식이라니. 다 죽는다는 이야기인가.

섬뜩한 말에 세라는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에단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저 총부터 내리게 해야 했다.

아직 속마음 퀘스트도 못 끝냈는데. 공략 캐릭터를 죽여 버리면 2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막혀 버린다.

“별로 깊은 관계 아니에요. 다‚ 당신 때문에 너무 화나서. 그냥 홧김에. 그‚ 그러니까……!”

펠릭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경. 내 약혼녀가 장난감 이제 질렸다는데?”

“뭐 지금부터 깊게 놀아 보죠. 그럼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순간 문이 열리고 몸이 훅‚ 뒤로 떠밀리는 게 느껴졌다.

***

눈 깜빡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에단은 나왔던 방으로 밀고 들어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쾅쾅! 쾅쾅쾅쾅!

펠릭스가 욕설을 뱉으며 발작적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단은 문을 걸어 잠근 후 옆에 있던 나무 상자를 이용해 문을 아예 틀어막았다.

[시스템: 경고! 그가 당신을 감금한 범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진짜 감금이다.

[시스템: 미션! ‘에단 디아즈’의 속마음을 수집하세요.

- 현재 ‘에단 디아즈’의 속마음 수집 상황 (0/3)

- 실패 시: 사망.]

이 타이밍에 ‘속마음 퀘스트’가 뜨다니. 세라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세라 에보트.”

아니나 다를까. 에단이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방금까지의 격앙된 몸짓과 달리 무섭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

거기서 오는 괴리가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게 뭐야. 시시하게. 써먹을 거면 이 정도는 써먹어야지.”

그가 실소했다. 그리고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쓰러져 있는 세라 앞에 털썩 쪼그려 앉아서는 바닥에 고꾸라진 그녀의 턱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용당해 준다잖아. 내가.”

잔뜩 가라앉은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무겁게 내리꽂혔다.

“윽‚ 흐으…….”

우악스럽게 꺾인 고개가 그의 앞에 고정되었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진땀이 흘렀다. 전신을 잠식하는 듯한 두려움에 정신이 혼몽해졌다.

“나랑 떡 치겠다고 달려들던 배짱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의 까만 눈은 텅 빈 것처럼 초점이 불분명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녀의 낯빛을 살피는 게 꼭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에‚ 에단. 내‚ 내가 자‚ 잘못했어.”

세라는 자꾸만 무너져 내리려는 고개를 붙잡고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뭘 잘못했다는 건데.”

“이런 일에 널 끌어들여서.”

우선 사과부터 해야 했다. 퀘스트 때문이라지만‚ 어쨌든 모두 자신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일은 맞았으니까.

지친 걸까. 아니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걸까. 에단은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헛소리 말고 일어나.”

그가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세라를 잡아 일으켰다.

“흐읏.”

그녀가 눈가를 와락 찡그렸다. 손바닥이 축축하길래 긴장한 나머지 땀이라도 흘린 줄 알았는데‚ 넘어질 때 쓸린 건지 피가 맺혀 있었다.

“씨발.”

그 멍청한 몰골을 보자 에단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 새끼한테도 늘 이러겠지. 그놈 때문에 떠밀려 넘어지고‚ 살이 쓸려 상처가 났음에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휘둘리며 눈치를 살피고. 예뻐해 달라 애정을 갈구할 걸 생각하니 또 못내 짜증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어떡하려고 이래.”

세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매달렸다.

제 손에 피가 나는 걸 알고는 있는 건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뭐가.”

“아까 봤잖아. 그 사람 총 있어.”

애초부터 그게 무서웠다면 이런 짓을 벌였을까.

차라리 이 터질 것 같은 머리통에 총알이라도 한 발 박아 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나가자. 내가 먼저 나가서 빌고 타이를게. 응?”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라는 진땀을 흘리며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 총‚ 저기 있는데.”

에단이 실소하며 바닥을 향해 턱짓했다. 아까 몸을 밀어 넣을 때 무슨 수라도 쓴 건지. 펠릭스의 권총이 안쪽으로 딸려 들어와 있었다.

“이젠 무슨 핑계를 대려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총이 펠릭스가 아닌 에단의 손에 들어온 게?

“…….”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세라는 멍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랑 갇히기 어지간히도 싫은가 봐. 아니면 저 새끼한테 가고 싶은 건가?”

에단이 이죽거리며 물었다.

사실 캐물어 볼 필요도 없었다. 한눈에 봐도 불안해서 전전긍긍하는 게 보이는데. 굳이 확인 사살할 이유가 있을까.

“…미안해.”

또 사과하지.

저 사과가 이쪽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걸 알기나 알까.

“뭐가 미안한데.”

“다 내 잘못이야.”

“…….”

“내가 복수하려고 네 몸을 이용한 거잖아. 넌 그냥 엘레나 때문에 화가 나서…….”

헛소리.

이제 더는 저런 정신 나간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뭐?”

“엘레나 때문 아니라고.”

폭탄선언에 세라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

“세라 에보트.”

그가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입술이 비틀어졌다.

“다 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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