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치정극 (1)
[시스템: 3층‚ ‘에단 디아즈’(상태: 소꿉친구)를 클리어 했습니다.]
우선 클리어는 했다. 아직 속마음 수집이 남아 있겠지만.
‘나른하다.’
창고에서 에단과 몸이 엉킨 채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일단 당연히 아팠지만 좋았고‚ 죽을 뻔했지만 기절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 밤새 몇 번이고 안기다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이렇게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하는 거겠지.’
어디 하나 부러지거나 다치지 않은 게 어디야. 더는 해롱대지 않는 거 보니 이미 단련된 걸지도 모르겠다.
세라가 싱거운 생각을 하며 픽 웃었다.
지금까지 완벽한 집사님을 비롯해 연달아 세 명을 넘어뜨렸다. 누군가가 소감을 묻는다면?
‘남주들이 맛있고‚ 집착도 짜릿해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솔직히 실패 시 사망 같은 지뢰 요소만 없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지금은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거지. 이왕이면 안전하게 즐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펠릭스도 아늑한 쓰레기통이었지만‚ 에단은 진짜 달콤하다.’
펠릭스는 예쁘고 우아한 개새끼였으나 지배욕이 심해서 얼얼할 지경이었다.
뭐‚ 가끔 그런 자극적인 게 당길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에단 쪽이 더 나은 것 같았다.
‘사실 알베르토가 남주라면 고민도 필요 없다. 그쪽이 진짜 완벽한 밸런스 캐릭터지.’
조신하고‚ 절륜하고‚ 사려 깊고. 종마같이 잘빠진 몸매까지 다 갖췄으니까.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품평을 즐기니. 꼭 뷔페에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에단이야.’
그녀는 아래를 찔린 채 단단한 가슴 위에 쓰러져 있었다. 세라는 자신의 전리품인 에단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 새끼 때문에 울지 말고 나한테 오라고 하는 소꿉친구라니. 게다가 이 몸에‚ 이 크기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게다가 동정. 하‚ 동정 최고다. 이 청정하고 맑은 일급수의 느낌.’
키워드 조합이 사기였다. 관계하다가 은은하게 소유욕을 드러내며 흑화하는 모습까지도 입맛에 맞았다.
‘알베르토도 동정이라고 했지만‚ 걔는 너무 능숙해서 믿음이 안 가.’
힘 조절을 못 해서 어쩔 줄 몰랐던 에단의 모습이 떠오르며‚ 신뢰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가슴! 흉부가 기가 막혀.’
정말이지. 모양도 촉감도 완벽하고‚ 그 위에 누워 있자니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시스템: 돌발 미션이 발생했습니다.]
또 돌발 미션이라니. 야속한 시스템은 잠깐의 쉴 틈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네발로 기어 다니며 알사탕을 주웠던 것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깐 자는 척하면 사라지려나. 세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시스템: 돌발 미션! ‘에단이 잠든 사이.’를 시작합니다.]
역시나 어림도 없다.
“…에이 씨.”
세라가 작게 욕설을 짓씹으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반항하듯 삐걱거렸다.
이제는 수락이 당연하다는 듯 의사조차 묻지 않았다. 미션 이름을 보니 에단이 깨기 전에 해치워야 하는 미션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시스템: 잡동사니들 속에서 소꿉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찾아보세요.
- 아이템 ‘추억의 물건’ 수집 상황(0/3)]
이 상자가 그득한 곳에서 추억이 담긴 물건을 찾으라니. 또 노가다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지금 세라는 끈으로 손이 묶여 있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갈수록 태산이네.’
노멀 모드에서는 이런 거 없었는데. 엘레나 디아즈가 아닌‚ 세라 에보트의 몸에 빙의한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근데 뭐 어떡해. 해야지.”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잠깐만 더 자고 있어.”
세라는 조심스레 페니스를 뽑고는‚ 그의 이마에 촉 입을 맞추었다. 에단은 여전히 고른 숨을 쉬며 곤히 자고 있었다.
주르륵. 애액과 씨물이 섞인 끈적한 액체가 허벅지 사이로 흘렀다.
일단 옷부터 추스르고 싶었지만 손이 묶인 상태라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휴‚ 모르겠다. 옷차림이 뭐가 중요해.’
빠른 체념을 마친 세라는 찬찬히 창고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전부 나무로 된 박스들이네.’
지금은 쓰지 않아 따로 정리해 둔 잡동사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쩌겠나. 하나하나 다 뒤져 보는 수밖에. 세라는 작심하고 나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보기 시작했다.
아직 묶여 있는 손이 불편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지 하나하나 열수록 요령이 생겼다.
“…귀여워라.”
드레스 상자를 발견한 세라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큰 상자 안에는 어린 소녀가 입을 법한 드레스들이 가득했다.
모양도 색깔도 가지각색이었다. 한결같이 어른용 드레스를 미니어처로 줄여 놓은 듯 사치스러운 것들뿐이었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이라더니. 어릴 때부터 드레스에 환장했던 모양이지.
하긴‚ 5층에서 별다른 일 없이 방 안에 있기만 했는데도 알베르토가 매일 다른 드레스를 입혀 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옷을 거의 다 끄집어냈을 때쯤 상자 바닥에서 리본이 잔뜩 달린 샛노란 드레스를 발견했다.
‘얜 좀 펑퍼짐하네.’
색깔이 화려해서 잠옷 같지는 않은데. 정교한 디자인의 다른 드레스들과는 달리‚ 입고 벗기 편해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시스템: 추억 아이템 ‘에단의 드레스’를 획득했습니다.]
‘에단의 드레스? 그럼 이게 에단이 입었던 거라고?’
세라는 제 눈을 의심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녀는 손에 들린 샛노란 드레스와 우락부락한 그의 몸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짐승 같은 몸을 가졌다고 해서‚ 어릴 때도 똑같았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도무지 매치가 안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면 에단이 사 준 건가.’
그렇다기엔 세라가 추구하는 스타일과는 다소 다른‚ 엉성한 디자인이었다.
세라는 드레스를 살펴보다가 오른쪽 가슴에 수놓아져 있는 글귀를 발견했다.
[블루베리 백작 영애]
블루베리라니. 다소 황당한 이름이었다. 귀족의 고결한 성이 한낱 과일 이름일 리가 없지 않나.
누가 봐도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즉석에서 지은 이름 같았다.
[시스템: 아이템 ‘추억의 물건’ 수집 상황(1/3)]
진위야 어찌 되었든 하나 찾았으니까. 세라는 이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샛노란 드레스를 나무 상자 위에 올려 두고‚ 다른 상자를 열어 보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몇 개의 박스를 더 열어 보았다. 어린아이들이 읽을 법한 동화책 꾸러미라든가‚ 세라의 교과서 같은 것도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후우‚ 팔 아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손은 묶여 있지‚ 또 몇 개 뒤적였다고 팔은 쑤시고 아프지. 세라는 점점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이건 뭐지?’
이것저것 뒤지다가 그릇 같은 게 들어 있는 상자를 찾아냈다.
자그마한 접시라든가. 포크라든가. 대부분은 식기류였다.
아기자기하게 구색은 갖추었지만 조잡하기 짝이 없는지라. 소꿉장난에 쓰이던 그릇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 추억 아이템 ‘소꿉장난 세트’를 획득했습니다.]
[시스템: 아이템 ‘추억의 물건’ 수집 상황(2/3)]
역시나 세라의 예상이 적중했다.
특히나 그녀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앙증맞은 찻잔 세트였다.
여기다 물 따르고 차 마시는 놀이를 한 걸까. 애들은 다 똑같구나 싶어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블루베리 백작 영애 거]
찻잔의 아랫면을 보니 익숙한 이름이 또 새겨져 있었다.
[에보트 후작 영애 거]
똑같은 디자인의 찻잔에 세라의 별칭이 적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블루베리 백작 영애’는 소꿉장난 상대역이었던 모양이다.
“뭐 하냐.”
귀여운 그릇들에 정신이 팔려 있던 찰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뭘 놀라고 그래.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것처럼.”
에단이 뒤에서 세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살거렸다.
“홀딱 벗고 뭐 하냐고.”
등 뒤에서 뜨겁고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미친놈이 그새 또…….’
짐작이 맞는다면‚ 그녀를 실신하도록 괴롭혔던 흉기인 게 분명했다.
[시스템: 돌발 미션! ‘에단이 잠든 사이’가 ‘에단 앞에서’로 변경됩니다.]
[시스템: 난이도가 자동 상향 조정됩니다.
- 디버프 상태 적용: 에단 디아즈의 간섭]
‘아악!’
에단의 개입으로 갑자기 변경된 미션에 세라는 절규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 일단은 수집할 아이템도 하나 남았고‚ 미션을 무사히 마치려면 침착해야 했다.
“일단 뒤에 그 망측한 것 좀 어떻게 해 봐.”
세라가 샐쭉하게 쏘아붙이자 에단이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아‚ 이거?”
그렇게 쑤셔 대 놓고 양심도 없지. 에단은 또 그 거대한 몽둥이로 다리 사이를 슬금슬금 문질러 왔다.
“이참에 수납해 버리게 엉덩이 좀 들어 주실래요?”
또 넣고 흔들려는 수작이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거기에 순순히 넘어갈 세라가 아니었다.
“블루베리 백작 영애?”
그녀의 호명에 에단이 순간 얼어붙었다.
“무서우니까 몽둥이 좀 치워 주세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샛노란 드레스를 보여 주었다.
놀리려던 것도 잠시‚ 에단이 드레스를 홱 낚아채더니 뒤로 집어 던져 버렸다.
“이‚ 이딴 걸 왜 아직도 가지고 있어!”
세라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어머‚ 블루베리 영애.”
“누‚ 누가 블루베리 영애야!”
귀엽긴. 아무래도 흑역사를 제대로 들춘 모양이다. 에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블루베리 영애‚ 저 때문에 깜짝 놀라셨나 봐요. 무례를 사과드릴게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애걸하듯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이 정도면 민망해서 간섭 못 하겠지. 역시 소꿉친구 퇴치에는 ‘흑역사 끄집어내기’만 한 것이 없다.
제대로 한 방 먹인 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계속 뒤적거렸다.
“야‚ 멍청아.”
한참을 잠자코 있던 에단이 그녀를 불렀다.
“네에‚ 블루베리 영애. 무슨 용건이세요?”
“그‚ 그놈의 블루베린지 라즈베린지 타령은 좀 집어치우고.”
“어머‚ 유서 깊은 블루베리 백작가를 욕보이시는 거예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내팽개치시다니. 실망이에요‚ 블루베리 영애.”
에단 퇴치법을 터득한 세라는 한결 여유롭게 답했다.
“손 내놔 봐.”
또 무슨 수작이지? 세라는 그의 제의를 가뿐히 무시하기로 했다.
“불필요한 접촉은 사절할게요. 제가 어제 좀 무리해서요‚ 블루베리 영애.”
그가 세라의 몸을 돌려 손목을 홱 잡아챘다. 잠깐 방심하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꼭 필요한 접촉이면요? 에보트 영애.”
“무슨 짓이야?”
“풀어 달라고 하지. 미련하게 묶인 채로 뒤지고 있냐.”
에단은 툭 쏘아붙이며 손목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손목이 빨개졌네.”
“네가 안 풀어 줬잖아.”
한 번만 싸고 풀어 준다고 할 땐 언제고. 밤새 묶여 있었더니 뻐근하게 아픈 것 같았다.
“그러게. 진작 풀어 줄걸. 미안.”
“…….”
“잠깐만 있어 봐.”
그가 잊지 않고 연고를 꺼내 손목에 발라 주었다.
민망하다는 핑계로 핀잔만 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다정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옷 입어야지.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내내 벗고 있었는데‚ 뭐.”
“아‚ 아깐 나한테 계속 안겨 있었고. 지금이랑 같냐.”
에단이 구시렁거리며 세라의 네글리제를 다시 입혔다.
“하긴‚ 자는데도 안 추웠어.”
“내 몸에 열이 많아서 그래.”
쑥스러워서 눈도 못 마주치면서도‚ 헝클어진 머리도 반듯하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난 몸이 찬데. 부럽다. 둘이 섞으면 딱 좋을 텐데.”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 세라를 터뜨릴 듯이 껴안았다. 그녀가 숨이 막히는지 연신 콜록거리자 이마에 촉 입을 맞추었다.
“참고 있으니까 자극하지 말지?”
“아‚ 아니. 그‚ 그냥 한 소린데. 내가 무슨 자극을 했다고…….”
“섞는 걸 계속 상상하게 되잖아.”
하여튼 변태가 따로 없다. 상상만으로도 다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지‚ 거대한 성기가 꺼덕거리며 그녀의 말랑한 몸을 쿡쿡 찔렀다.
“아까는 뜨겁다더니. 하여튼. 이랬다저랬다.”
“그‚ 그건…….”
하긴‚ 아까는 꼬시려고 몸이 뜨겁다고‚ 도와 달라고 했었지.
세라는 조금 민망해져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랑 있어서 그랬나?”
슬쩍 올려다보자 에단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 좀 벌려 봐.”
“못 해. 지금도 다리 후들거린단 말이야.”
“안 할 테니까 벌려 보라니까?”
막무가내였다. 그녀가 몸을 비트는데도 커다란 손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뭐가 잔뜩 나왔네. 찜찜하겠다.”
퀘스트 때문에 바빠서 신경도 못 썼는데. 아무래도 그가 질펀하게 싸질러 둔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챙겨 주려던 거였구나.
이상한 쪽을 상상했던 세라는 민망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네 몸에서 내 좆 물 냄새 나.”
역시나 저질이다. 그가 눈을 곱게 접으며 사악하게 속삭였다.
“닦아 줄게. 걸터앉아 봐.”
“됐어.”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 에단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큰 나무 상자 위에 앉혔다.
“닦는 거 싫으면 빨아 줘?”
“미쳤냐.”
“왜. 그게 더 깨끗할 수도 있는데.”
그가 재밌다는 듯이 히죽거리며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냈다.
“제대로 안 벌리면 입으로 한다.”
“알았어. 버‚ 벌릴 테니까 망측한 소리 좀 그만해.”
세라는 그의 협박에 하는 수 없이 다리를 활짝 벌렸다. 보드라운 손수건으로 흘러내린 체액을 말끔히 닦아 주었다.
“선물.”
그가 체액으로 범벅이 된 손수건을 건넸다. 세라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뭐라는 거야.”
“바람피우고 싶을 때마다 꺼내 봐. 물론 나 있을 땐 날 쓰고. 내가 훈련 갔을 때.”
“이걸 왜 쓰는데.”
“난 이거 쓸 거니까.”
그의 손끝에 찢어진 세라의 팬티가 달랑달랑 걸려 있었다.
“미쳤나 봐‚ 진짜. 뭐에다 쓴다는 건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민망해서 급히 빼앗으려는데 에단이 확 낚아채며 숨겼다.
“자신과 오붓한 시간 보낼 때?”
“자위할 때 쓴다는 거잖아!”
“응. 원정 가면 네 생각날 것 같아서.”
“더러워‚ 진짜.”
“혼자 건전하게 푼다는데‚ 왜.”
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정말로 편한 사이니까 이런 장난도 치는 거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세라는 그에게 조금 실없는 질문을 해 보기로 했다.
“이런 거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지금까지 안 했어?”
“누구처럼 아무한테나 좆 세우는 거 질색이야.”
그가 딱 잘라 답했다. 딱 봐도 펠릭스를 겨냥한 말이었다.
이렇게 은근한 척 노골적인 질투라니. 짜릿해서 가슴이 속절없이 뛰었다. 하지만 모른 척 더 떠봐야 할 타이밍이었다.
“좋아하는 여자 없었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별걸 다 묻는다는 듯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
그가 옅게 웃으며 답을 얼버무렸다. 그 웃음이 약간 쓸쓸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이렇게 거리낌 없게 행동하는 걸 보니‚ 아주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에단은 왜 절교를 선언했던 걸까.
“근데 아까부터 뭐 찾는 거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에단이 기습 질문을 했다.
‘뭐라고 핑계 대지.’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자연스러운 핑계가 뭐가 있을까. 세라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아‚ 그냥 창고니까. 옛날 물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그랬구나.”
“그‚ 저어‚ 너 보니까 어릴 때 생각도 나고. 갑자기 꺼내 보고 싶어졌어.”
즉석에서 만든 핑계치고는 자연스러웠다. 에단도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같이 뒤질까?”
“응?”
“심심해서.”
그가 눈을 끔뻑거렸다. 갇혀서 딱히 할 것도 없는 터라 거절하기에도 약간 애매했다.
“흑역사 들춰서 놀리려는 거지?”
“잊었나 본데‚ 방금 흑역사로 놀린 건 너고. 난 무고한 피해자다.”
“어쨌든 전부 내 물건이잖아.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한데.”
“내 물건도 많을걸요‚ 에보트 영애.”
“응?”
“저랑 늘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던 거 생각 안 나시나 봐요.”
하긴‚ 어릴 때 거의 같이 자라다시피 했다고 했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인 에보트 후작은 늘 사업으로 바빴기 때문에 세라는 에단과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있었다고 했다.
그런 사이에 새삼 숨길 게 뭐가 있냐는 말이었다.
“뭐‚ 그건 그렇죠‚ 블루베리 영애.”
“아까처럼 블루베리 영애 지분도 있으니까‚ 같이 뒤져 보도록 해요.”
“알았어. 대신 뭔지 다 보여 주기다?”
“그래.”
단단히 다짐받고는 둘이서 사이좋게 앉아서 상자를 열어 보았다. 남은 상자가 꽤 많아서 언제 찾나 했는데‚ 동시에 여니 확실히 속도가 빨랐다.
함께 가지고 놀던 기차 장난감이라든가. 그림 그렸던 스케치북이라든가. 숲에 놀러 갔다가 주웠던 신기한 모양의 돌멩이 같은 것들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그걸 다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일부는 친절하게 뭔지 메모가 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둘러댔다.
누군가와의 추억을 이렇게 일일이 보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세라 에보트가 친구로 에단을 많이 아꼈구나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
“이것 봐. 어릴 때 쓴 목검인가 봐. 나도 검술을 했었나?”
세라가 손잡이에 ‘세라 에보트’라고 새겨져 있는 목검을 보여 주며 에단을 불렀다.
에단은 무언가를 골똘히 보느라 답이 없었다.
“대체 뭘 보는 거야?”
눈을 굴려 살피자‚ 글씨가 빼곡히 적힌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일기야?’
저렇게 재밌게 볼 만한 건 그거밖에 없지 않나?
세라가 채 가려 하자‚ 에단이 휙 뒤로 숨겨 버렸다.
“뭔데 그래?”
“글쎄. 아무것도 아니야.”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이 불안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 일기장이지?”
세라가 눈을 홉뜨고 묻는데도 답이 없었다.
‘왠지 저게 마지막 아이템일 것 같은데.’
4층에서도 마지막엔 일기장 조각을 얻었으니까. 세라 에보트의 일기는 어떤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남의 일기장을 보는 게 어디 있어. 얼른 내놔.”
“싫은데?”
그걸 빼앗기 위해 팔을 붕붕 휘젓던 세라는 그만 중심을 잃고 그의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
“와‚ 무서워라. 이젠 막 덮치네?”
얼떨결에 그녀가 그를 잡아먹듯 덮친 자세가 되었다. 그녀의 두 눈이 터질 듯이 커졌다.
“장난치지 말고 줘.”
“뽀뽀해 주면.”
“얼르은.”
“뽀뽀해 주면 준다니까.”
정말이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줄 거야?”
“속고만 살았나.”
그가 얼른 하라는 듯 장난스럽게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딱 뽀뽀만이다.”
“입술 떨어지겠네요.”
세라가 한숨을 푹 쉬고는 마지못해 입술을 겹쳤다. 자연스럽게 잇새를 비집고 들어온 혀가 점막을 더듬었다.
그녀는 발발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낚아챘다.
[시스템: 추억 아이템 ‘세라의 일기장’을 획득했습니다.]
[시스템: 아이템 ‘추억의 물건’ 수집 상황(3/3)]
[시스템: 돌발 미션! ‘에단 앞에서’를 완료하셨습니다.]
완료하면 뭐 하냐고! 붙잡혀서 볼 수가 없는데!
이래서 ‘디버프 상태’라고 했구나. 세라가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하아. 뽀뽀만이랬잖아.”
“뽀뽀 맞는데?”
“숨이 막히는데 무슨 뽀뽀야.”
세라는 호흡이 모자라는지 연신 할딱거리며 에단의 가슴팍을 퍽 쳤다.
“이거 다 봤어?”
“아니. 꼼꼼히 읽느라 앞에 몇 장만 봤어.”
“뭔지 확인하게 저리 떨어져.”
“알겠어.”
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픽 웃었다. 쭉 넘기며 훑어보는데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시스템: 보상으로 ‘세라 에보트의 일기 조각(3층)’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 힌트: 제국력 562년 9월 15일]
이것 빼고는 말이다.
세라는 빠르게 해당 날짜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며칠 전‚ 에단과 숲으로 소풍을 갔다.
진짜로 오랜만에 나온 기사단 휴가인데.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야속하게도 세찬 장대비가 내렸다.
그러니까 무슨 소풍이냐며 에단이 엄청 화를 냈다. 잠깐이라도 둘이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마음 같지 않아서 나도 속상했다.
사냥꾼의 오두막에서 비를 피하다가 깜빡 잠들어 버렸다. 눈을 뜨니 내 방이었고 에단은 없었다.
비를 쫄딱 맞고 돌아와서 그런지. 나는 열 감기를 앓았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밀린 일기를 쓴다.
에단은 아버지에게 많이 혼난 걸까. 에밀리한테 물어보니 이젠 안 오겠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아마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랬는데. 이번엔 기분이 좀 이상하다.
진짜 다신 안 볼 사람처럼 느껴져서 불안하다. 시간을 두고 편지라도 해 봐야겠다.]
읽어 보니 에단과 절교한 당시의 일기인 것 같았다.
‘애초에 에단은 왜 절교하자고 한 거지?’
일기에도 구체적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났을 때 별로 어색하지 않았던 걸 보면 화가 풀린 건가?
살뜰하게 연고도 발라 주고. 옷도 입혀 주고. 추울까 봐 걱정해 주고. 오히려 다정해 보였는데.
‘싫어서 절연한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 봤어?”
“응?”
“다 봤음 나가자.”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에단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우리 나갈 수 있는 거야?”
“응. 뭐 저 정도 문 따는 거야 어렵지 않지.”
에단이 자신 있게 단언했다.
대체 기사단 출신이야‚ 아님 도적단 출신이야.
기사단이라는 건 현대로 치면 특수 부대 같은 개념이려나.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는 에단을 보자‚ 문득 이제껏 왜 갇혀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나갈 수 있는데 일부러 안 나갔던 거야?”
“그럼 같이 가야지‚ 혼자 홀랑 나가냐?”
그가 세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너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그러니까 네 말은‚ 나 풀어 주지도 않고 기다린 거네.”
“그러게. 실은 묶인 걸 보니 좀 꼴리기도 했고.”
…이 새끼가. 세라가 눈을 흘기며 툴툴거렸다.
“기다려 봐.”
에단이 금속으로 된 막대기 같은 걸로 열쇠 구멍을 쏘삭거리더니.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갈까?”
그가 세라의 허리를 끌어안고 나가려고 문을 여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둘이 왜 여기 있지?”
펠릭스 세르반테스였다.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