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숙취 해소
눈을 뜨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세라는 자신을 감고 있던 사내의 팔을 치우고 조심스레 일어났다.
‘으‚ 머리야.’
정말이지 지독한 숙취였다. 얼굴은 푸석하고 눈알이 뻑뻑했다. 몸을 일으키는데 현기증에 시야가 절로 흔들릴 정도였다.
과음과 연이은 정사의 여파일까. 세라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대체 몇 번을 한 거야.’
지난밤을 되새겨 보던 세라는 두통이 일자 횟수를 세어 보는 것을 포기했다.
섹스하다 목말라서 중간중간 술로 목을 축였고‚ 막판에는 필름이 끊긴 건지 뒤로 갈수록 기억 자체가 드문드문 완전하지 않았다.
딱 한 번만 자고 깔끔하게 클리어 한 후 다음 층으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그놈의 술이 원수였던 걸까.
어쩌다 펠릭스의 잠자고 있던 변태 본능을 깨워 버렸고‚ 한번 붙은 욕망의 불길은 쉽게 진화되지 않았다. 결국 다 하얗게 태우고 나서야 꺼진 모양이었다.
이 미친 게임은 섹스하다가 실신하는 게 기본값인 건가. 아니‚ 한번 섹스하면 실신하도록 하는 게 기본이라는 게 더 맞으려나.
[시스템: 4층‚ ‘펠릭스 세르반테스’(상태: 약혼자)를 클리어 했습니다. (남은 시간: 2시간 15분)]
달가운 알림을 이제야 확인한 세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일 좀 해라‚ 시스템아.’
알베르토가 있었으면 깨워서 밥까지 먹여 줬을 텐데. 애초에 과음하기 전에 숙취에 좋은 약차를 대령했을지도.
그래‚ 그런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기본적인 알림도 제때 울리지 못한 어수룩한 시스템 덕분에 골반이 빠질 것 같았다.
뭐‚ 사실 취해서 못 들은 걸 수도 있고. 불분명했다.
‘내가 미쳤지. 감금당한 주제에. 작작 좀 마실걸.’
긴장을 풀기 위해 빈속에 안주도 없이 들이부었더니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꼭 느낌이 사고 친 것 같네.’
머리는 산발에 옷가지는 다 찢어져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몰골과 숨 쉴 때마다 풍기는 알코올 냄새. 실수로 원나잇을 했을 때의 그 얼떨떨한 느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드디어 펠릭스 세르반테스랑 잤다.
번번이 타임아웃으로 배드 엔딩만 봤었는데. 그 냉혈한을 무너뜨리다니.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셀 수도 없이. 과연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세라는 제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펠릭스를 찬찬히 살폈다.
지독히도 잘생겼네. 거기다 지위와 재력까지 갖췄으니. 과연 여자라면 누구나 선망할 법한 사내였다. 세라가 그에게 그토록 집착하며 안절부절못한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이거 꿈은 아니겠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서‚ 손끝으로 그의 머리칼을 쓸어 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예쁜 눈썹이 드러났다.
그녀는 홀린 듯이 그걸 어루만져 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진짜네. 다행이다.’
큰 산을 하나 넘은 셈이었다. 세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만져 볼까. 이왕 손댄 김에 날카로운 콧날과 도톰한 입술까지 훑어 보았다.
그의 입술은 말랑하고 따뜻했다. 이 입술로 물고 키스하고‚ 젖꼭지가 퉁퉁 붓도록 빨고. 온몸이 발발 떨릴 때까지 아래를 핥아 주었지.
정사의 기억에 왠지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세라는 얼른 손길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펠릭스가 감금한 범인인 것 같지는 않고.’
펠릭스는 꾸준히 파혼을 요구해 왔다. 게다가 그는 절대로 파혼만은 안 된다고 우기던 세라 에보트에게 감금당했던 적도 있었다.
에보트 후작이 말리는 통에 풀려났고‚ 세라에게 치를 떠는 상태였는데 굳이 가둘 이유가 있을까.
‘황당해하는 모습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단 말이지.’
술기운에 기대지 않았다면‚ 이런 완벽한 전리품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그래‚ 술기운‚ 술기운 때문에.
세라는 순간적으로 그도 많은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나 깨면 돌변하는 거 아닐까.’
겁도 없이 딴 놈이랑 바람났다고 고백까지 했고. 건방지게 이름을 부르고‚ 좆을 깨물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앞에서 질질 짜며 제 손으로 음부를 비벼 댔던 기행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쪽팔려서 죽고 싶다.’
수치스러움은 둘째 치고‚ 아무리 술김이라지만 본인이 한 무도한 행동들을 생각해 볼 때‚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아‚ 일단 총부터 치우자.’
어쩌겠나. 어떻게 자빠뜨린 펠릭스인데. 무조건 살아야 했다. 세라는 총을 집어 침대 밑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어쩌지. 술병도 치울까. 그렇지‚ 유리병도 깨면 흉기가 될 수 있으니까.
쨍그랑-!
하‚ 씨발. 허둥대며 유리병을 치우려다 넘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깨지진 않았지만 제법 큰 소리가 나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설마 깬 건 아니겠지?’
그녀가 숨을 죽이고 홱 돌아보았다. 펠릭스는 여전히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되지도 않게 나대지 말고 빨리 나가자.’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내린 결론은 매우 명쾌했다. 어차피 일회성 관계였다. 물론 일회성이라기엔 좀 횟수가 많긴 했지만‚ 사는 게 중요하지. 공략 같은 건 애초에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깨기 전에 조용히 도망가는 게 낫겠지. 부랴부랴 나가려던 세라는 넝마가 된 제 드레스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 꼴로 다음 남주들을 만나야 하나? 의복이라고 볼 수도 없는 수준으로 망측하게 찢어져 있었다.
앞섶은 다 뜯어져서 가슴을 가리지도 못하고‚ 치마는 뭐 거의‚ 치마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다급하게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세라는 옷장에서 공작의 코트를 찾았다.
좋아‚ 이거면 되겠지. 품이 한참 크긴 했지만‚ 몸을 가리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아주 비싸 보이는 코트였지만 뭐‚ 상관없었다.
‘찢어발긴 보상이라고 생각하세요.’
누구보다 빠른 정신 승리였다. 옷도 갖춰 입었겠다. 문을 열고 살금살금 나가려는데‚ 별안간 시스템 창이 울렸다.
[시스템: 공략 캐릭터를 두고 그냥 나갈 수 없습니다. 우선‚ ‘편지’를 작성하여 사정을 설명하세요.]
편지는 무슨 편지야. 오직 다른 캐릭터에게만 배려심 넘치는 시스템 때문에 세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스템: 미션! ‘펠릭스 세르반테스’에게 편지를 쓰겠습니까?
> 예/아니오]
선택권을 주는 걸로 보이지만 실상은 문고리를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선택이 아니라 강제라는 뜻이었다.
그럼 어떡해. 시키는 대로 써야지. 세라는 한숨을 푹 쉬고는 책상에 앉아 깃펜을 들었다.
‘후‚ 뭐라고 쓰지.’
마음이 급해서일까. 막상 편지를 쓰려니 머릿속이 새하얘져 어떤 말을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하나.
거짓말한 걸 제외하곤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뭐라고 해야 저 총을 제게 겨누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놈과 바람나서 미안해요. 깨물겠다고 협박하고‚ 아프다고 징징거려서 미안해요. 같잖은 핑계로 박아 달라 매달려서 미안해요.
아니‚ 아니지.
이러다가 ‘같은 공간에서 공기를 더럽혀서 죄송해요’까지 쓸 기세네.
쓸데없이 저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동의하에 가진 관계이고‚ 억지로 강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쪽은 ‘캐붕 지수’도 고려해야만 했다.
세라 에보트라면 어떻게 할까.
자‚ 따지자면 이건 사고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쪽에서 고의적으로 낸 접촉 사고긴 한데‚ 저쪽도 좋다고 흘레붙어 즐겼으니까. 이를테면 ‘쌍방 과실’이겠지.
펠릭스의 자유분방한 연애 사상을 생각했을 때‚ 부담을 주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내 좆물 품고 딴 새끼한테 간단 소리가 나와?”
뭐‚ 잠시 그런 약 빤 것 같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다 취해서 한 이야기이고. 진심이면 애초부터 딴 여자 들먹거리며 파혼하잔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지.
‘그래‚ 그래. 가볍게. 부담 없이.’
세라는 가볍게 ‘어제는 즐거웠어요.’부터 적기로 했다.
그리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켜야 하고. 먼저 나간다는 것도 알려야겠지.
그녀는 고심 끝에 간단한 편지를 완성했다.
[세르반테스 공작님께.
어제는 즐거웠어요. 베세르크의 새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파혼은 약속대로 해 드릴게요. 죄송하지만 저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그럼 디아즈 영애와 행복하세요.
-당신의 ‘전’ 약혼녀‚ 세라 에보트-]
군더더기 없는 편지였다. 세라는 뭔가 떠오른 듯 추신을 덧붙였다.
[추신: 실은‚ 처녀라는 거 거짓말이에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길.]
여기까지 쓰니 어쩐지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몇 마디 덧붙였다.
[제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공작님을 기만한 점‚ 그리고 지금까지 괴롭혀 온 것도 모두 진심으로 사죄드려요.]
이 정도는 적어 줘야겠지.
편지를 완성한 세라는 탁자에 잘 보이게 올려 두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
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졌다. 방 안이 적막에 휩싸이자마자 펠릭스는 눈을 떴다.
아니‚ 실은 안겨 있던 그녀가 제 품을 벗어나 바르작거릴 때부터 깨어 있었다. 실눈을 뜨고 그녀의 행동을 몰래 눈에 담았다.
깨어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펠릭스의 품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실눈을 뜨고 보니 두통이 있는 건지 연신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대형 사고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지. 연신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저가 꼬드겨 놓고는. 어이도 없지.
펠릭스는 그녀의 팔을 휙 끌어당겨 제 밑에 다시 깔아뭉개고 싶었다.
왜‚ 이제 와 후회되느냐고. 후회하면 네 주제에 어쩔 거냐고. 일일이 따져 묻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별안간 그녀가 그의 얼굴을 만졌다. 손끝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긴 후‚ 눈썹부터 입술까지 구석구석 훑었다.
뭐가 그리 기쁜지‚ 연신 피식거리며 웃었다. 갖고 싶다 벼르고 별렀는데도 좀처럼 가질 수 없던 것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오랜 시간 뒤쫓아 온 사냥감을 사로잡은 것처럼 감회가 남다를 터였다.
특히 입술이 마음에 드는지‚ 손끝이 한참을 머물렀다. 자지러질 때까지 물고 빨고 핥아 준 입술이니 정들 법도 했다.
좋은 건 알아서는. 펠릭스는 그 하찮은 손가락을 아작아작 씹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러다 갑자기 손길을 거두더니 총을 숨겼다. 자길 쏠 거냐고 발발 떨어 대더니. 총만 보면 소름이 돋는 모양이었다.
숨길 거면 좀 제대로 숨기든가. 머리만 이불에 파묻은 후 숨바꼭질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침대 밑에 밀어 넣는다니 어이가 없었다.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허둥지둥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화들짝 놀라 뚝 멈춰 섰다.
혹시나 다쳤을까 눈을 부릅떴는데‚ 그녀가 돌아보는 통에 질끈 눈을 감았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찢어발겨진 제 옷을 보고 시무룩해졌다. 어차피 입을 필요도 없는데 뭐 어때서. 제대로 갖춰 입으면 성가시기만 할 것 같았다. 펠릭스는 진즉에 찢어 버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옷장을 뒤져 코트를 꺼냈다. 마음에 드는지 이리저리 대보더니 맨몸 위에 걸쳐 입었다. 그 뒷모습이 꼭 코트에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방금까지 몸을 섞은 남자 옷을 제 옷처럼 입은 모습이라니.
제기랄‚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펠릭스는 당장이라도 저 코트를 벗기고 제 몸 안에 가두고 싶었다.
뒤에서 쏟아지는 음험한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야무지게 허리에 끈까지 묶고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 앞에 총총 걸어가더니 문고리를 돌렸다.
정말 이대로 한 번 따먹기만 하고 나가려는 건가? 저걸 붙잡아서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따져 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문고리를 놓은 세라가 무언가 작심한 듯 책상에 앉았다.
목덜미를 박박 긁으며 한참 무언갈 쓰더니‚ 탁자에 잘 보이도록 놓아두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거짓말처럼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갔다. 펠릭스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탁자에서 꼬깃꼬깃한 메모를 발견했다.
[세르반테스 공작님께.]
펠릭스라며. 막판에는 야‚ 너‚ 하면서 잘도 건방지게 굴더니 공작님이라니. 이제 와 공손한 척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어제는 즐거웠어요. 베세르크의 새 주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파혼은 약속대로 해 드릴게요.]
너무 과음해서일까.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정확히는 꼭 모래알이라도 뿌린 것처럼 버석거렸다.
[저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그럼 디아즈 영애와 행복하세요.]
그렇게 저주를 퍼부을 땐 언제고. 이렇게 흔쾌히 행복하라고?
아니‚ 그런 꼴같잖은 축복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단어가 더 신경을 긁었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뭘까. 설마 그 새끼한테 가려고?
밤새 넘치도록 싸 주었는데. 뻔뻔하게 그 냄새를 묻히고 다른 놈 품에 안길 생각을 해?
깨는 것도 못 기다리고 도망쳐 나갈 정도로 급한 모양이지.
[-당신의 ‘전’ 약혼녀‚ 세라 에보트-]
약 올리는 건가. 일부러 ‘전’ 부분을 강조해 둔 것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씨발‚ 이게 뭐야.”
욕지거리를 내뱉은 펠릭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분명 먼저 이 관계를 끝내려던 것도 자신이고. 타인을 조종해야 직성이 풀리는 유아적인 여자에게 치가 떨렸던 것도 맞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철저히 몸만 이용당하고 버려진 기분이었다.
[추신: 실은‚ 처음이라는 거 거짓말이에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길.]
지금 그딴 것에나 집착하는 쓰레기 취급하는 건가?
애초에 그녀의 말 따위 신뢰하지 않았다. 술 먹고 한 번만 자자는 여자의 말을 전부 신뢰할 만큼 순진하지도 않았고.
물론 처음은 아니라지만 세라 에보트는 성교에 서툴렀다. 버벅대는 것만 봐도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펠릭스는 이 상황이 재밌으면서도 같잖았다.
그냥‚ 주제도 모르고 폴짝거리기에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심정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공작님을 기만한 점‚ 그리고 지금까지 괴롭혀 온 것도 모두 진심으로 사죄드려요.]
사정 필요 없고‚ 사과도 필요 없었다. 사람 기분을 이렇게 시궁창에 처박아 놓고. 뭐 하는 짓이지? 기분이 처참해진 펠릭스는 편지를 와락 구겨 버렸다.
그는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만한 여유가 못 되었다. 붙잡아서 제가 당한 수모를 응징해야 했다.
그 여자가 다른 놈 품에 가기 전에. 펠릭스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
[시스템: 돌발 미션이 발생했습니다.]
방을 나오자마자 갑자기 뜬 돌발 미션에 세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망치려고 편지까지 써 놓고 나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눈앞이 어질거렸지만 침착해야만 했다.
[시스템: 4층 ‘응접실’에 알사탕이 떨어져 있습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알사탕을 찾으세요.
-알사탕 수집 현황 (0/3)]
뜬금없이 알사탕을 수집하라니. 그것도 세 개씩이나? 진심이야?
어이가 없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 보았다.
4층에서의 빠른 탈출이냐. 아니면 정체불명의 허접한 아이템 수집이냐. 세라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당장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눈을 시퍼렇게 뜬 펠릭스에게 붙잡히는 걸 생각하면. 으‚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답지 않은 돌발 미션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스템: 돌발 미션! ‘알사탕을 찾아라!’를 수행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일단 무시‚ 무시‚ 무시.
지금 알사탕이나 주울 때냐.
이런 한가한 짓은 일단 4층을 벗어난 후에 해 주리라 다짐하던 그때였다.
[시스템: 허접한 아이템도 다시 보자! 공략을 위해 작은 미션도 소중히 여겨 주세요!]
[시스템: 죄송합니다. 돌발 미션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그녀의 선택을 튕겨 냈다.
‘플레이어나 좀 소중히 여겨 주겠니?’
섹스하다 실신하고. 겨우 도망쳐 나왔는데 알사탕이나 수집하라니. 다소 황당했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내 의사는 왜 물은 거야?’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시스템: 돌발 미션을 진행합니다.]
그래. 빨리하고 끝내자. 세라는 텅 빈 눈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시스템: 4층 ‘응접실’로 이동해 주세요.]
시스템이 4층 설계도를 보여 주며 위치를 알려 주었다. 세라는 종종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
[시스템: 4층 ‘응접실’ 탐색을 시작합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철커덕‚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세라는 화들짝 놀라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역시 헛돌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뭐야‚ 또 갇힌 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
[시스템: 플레이어 보호 차원에서 잠금 조치합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알사탕을 찾다가 펠릭스한테 붙잡히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긴 해도 이미 감금당한 상황에 또 감금이라니.
[시스템: 탐색이 끝나면 ‘응접실’의 문은 자동으로 개방됩니다.
- 안심하고 알사탕을 찾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러니까. 알사탕을 다 찾을 때까지는 못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알사탕이 뭐길래 응접실에 가두면서까지 찾으라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은 또 왜 이렇게 넓어.”
자꾸 투덜대고 싶지 않은데‚ 에보트의 사치스러운 별장은 응접실마저 드넓었다.
다소 웅장한 규모의 응접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분명 응접실 곳곳에 떨어진 알사탕이라고 했었지. 떨어뜨렸다면 보통 바닥에 있을 터였다.
알사탕이니까 데굴데굴 굴러서 어디 가구 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세라는 우선 바닥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알사탕‚ 알사탕. 어디 있니.”
눈에 불을 켜고 카펫을 훑어보았다. 하필이면 얼룩덜룩 화려한 무늬의 카펫이라 더 찾기 어려웠다.
이 넓은 바닥에서 무작정 알사탕을 찾으라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차근차근 이 잡듯이 찾아보자.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겠다‚ 세라는 엎드려서 바닥을 살폈다.
카펫 위로 샅샅이 손을 더듬으며 기어 다녔다.
순간‚ 손가락 사이에 동그란 물체가 걸렸다.
“오예!”
종이 껍질에 싸인 알사탕이 맞는 것 같았다. 세라는 조심스레 껍질을 살짝 벗겨 보았다.
단내가 훅 풍기는 게 알사탕이 맞았다.
[시스템: ‘껍질에 싸인 알사탕’을 발견했습니다.]
[시스템: 껍질을 벗기고 ‘알사탕’을 인벤토리에 넣으세요.]
뭐 그야 어렵지 않지.
세라는 망설임 없이 종이 껍질을 걷어 내 버렸다.
[시스템: ‘알사탕’을 획득했습니다. 획득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담습니다.
-알사탕 수집 현황 (1/3)]
다소 노가다라 그렇지‚ 어렵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탕 한 개를 획득하고 용기를 얻은 세라는 부지런히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얼마 되지 않아 무릎이 욱신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세라 에보트의 육체는 예쁘기만 할 뿐 내구성은 쓰레기였다. 체력의 한계까지 끌어 써서 관계하고 왔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손등으로 진땀을 닦는데‚ 테이블 다리 옆에서 동그란 물체를 발견했다.
“혹시 저건가?”
테이블 밑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세라가 그 동그란 물체를 집어 올렸다.
[시스템: ‘먼지 묻은 알사탕’을 발견했습니다.]
먼지로 범벅이었지만 알사탕이 맞았다. 시스템이 확실히 확인해 주었다.
“찾았다!”
아차‚ 큰 소리 내면 안 되지.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다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시스템: 먼지가 묻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손수 먼지를 제거하여 ‘알사탕’으로 만드세요.]
겨우 찾았는데.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이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세라는 눈물을 머금고 알사탕에 붙은 먼지를 떼어 냈다.
사탕 표면이 끈끈해서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손톱을 세워 하나하나 섬세하게 제거했다.
[시스템: ‘알사탕’을 획득했습니다.]
손끝이 온통 끈적끈적해질 정도로 집요하게 떼어 낸 끝에 멀쩡한 알사탕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삽질이란 말인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 이제 마지막 한 개만 더 찾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른 또 남은 사탕을 찾아야 하니까. 다음 사탕을 향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쿵! 테이블에 머리를 박아 버렸다. 정수리에 얼얼한 둔통이 느껴지고 눈앞이 핑 돌았다.
세라는 화들짝 놀라 알사탕을 놓치고 말았다.
[시스템: 먼지가 묻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손수 먼지를 제거하여 ‘알사탕’으로 만드세요.]
“하아…….”
그러니까 획득하자마자 인벤토리에 넣었어야 했나 보다.
“이 빌어먹을‚ 거지 같은 저질 게임…. 두고 보자.”
다시 한 올 한 올 먼지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손끝이 끈적해서일까. 먼지와 손톱이 온통 엉망으로 엉겨 붙어서 아까보다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너무 힘을 주어서일까. 손톱 끝이 부서졌다.
“…하 씨.”
울컥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안 할래. 흐윽‚ 집에 가고 싶어.”
울 일도 아닌데 괜히 서러운 감정이 폭발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히끅‚ 끅.”
아무래도 술이 덜 깨서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세라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뺨을 툭툭 쳤다.
[시스템: ‘알사탕’을 획득했습니다. 획득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담습니다.
- 알사탕 수집 현황 (2/3)]
이 고생을 했는데. 이제 겨우 두 개째였다. 남은 하나를 더 찾을 생각을 하니 아득한 기분이었다.
“집에 가려면 찾아야지. 끅‚ 뭘 어떡해.”
세라는 오랜 사회생활로 체념이 빠른 편이었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박박 닦고는 끈적거리는 손끝을 코트에 비볐다.
“후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긴 숨을 내쉬었다. 조금 울고 나니 오히려 개운했다. 정수리에 작은 혹이 난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세라는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테이블 밑을 기어 나왔다.
“또 어디에 있으려나.”
무릎이 갈리도록 바닥을 기어 다녔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구 밑 틈새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다짜고짜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콘솔과 장식장 밑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컴컴해서 보이지 않을뿐더러‚ 그 좁은 틈으로 꺼낼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길고 얇은 작대기 같은 게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래. 자고로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생물이다.
세라는 뭔가 써먹을 게 없나 응접실 안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둘러본 결과 눈에 하나 들어오는 게 있었다.
바로‚ 벽에 걸린 장식용 장검이었다.
“자‚ 하나만 걸려라.”
가까스로 떼어 낸 그녀는 바닥에 누워서 가구 밑을 후비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안 좋은 공기에 잔기침이 났다. 장식장 밑을 후벼 판 결과 먼지만 잔뜩 나왔다.
그렇게 장식장과 콘솔 몇 개의 아래를 후빈 후‚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책장이었다.
“제발 이번엔 나와라.”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리고는 납작한 검을 밀어 넣었다.
툭.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에 신이 났다. 검 끝으로 살살 굴려 보니 이건 분명‚ 틀림없는 알사탕일 거라는 느낌이 왔다.
세라는 낑낑거리며 그 물체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엄마야!”
알사탕의 몰골을 살핀 세라는 그만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시스템: ‘벌레 붙은 알사탕’을 발견했습니다.]
오‚ 제발. 그것만은 안 돼요.
시스템이 무얼 시킬지 알고 있었기에 더 막막했다.
세라는 눈앞이 아찔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스템: 이대로 인벤토리에 담을 수 없습니다. 알사탕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해 주세요.]
정확히는 죽은 벌레였다.
벌레를 어떻게 떼어 내야 할까. 손으로 떼어 낼 만큼 비위가 강하지는 않았다.
“이‚ 일단. 진정. 진정하자. 또 도구를 쓰자고.”
맨손으로는 절대 못 만지겠고. 뭔가 대신 집을 것이 필요했다.
세라는 심호흡 후‚ 테이블 위에서 냅킨 두 개를 가져왔다. 알사탕을 냅킨으로 감싼 후‚ 조심스럽게 죽은 벌레를 떼어 냈다.
“벌레야‚ 천국 가려면 여기서 깔끔하게 떨어지렴.”
분명히 죽어서 말라비틀어져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되살아나 다리를 꿈틀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세라는 눈을 질끈 감고 사탕에 붙은 벌레를 털어 냈다.
[시스템: ‘알사탕’을 획득했습니다. 획득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담습니다.
- 알사탕 수집 현황 (3/3)]
[시스템: 돌발 미션! ‘알사탕을 찾아라!’ 완료!]
[시스템: 보상으로 ‘세라 에보트의 일기 조각(4층)’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세라 에보트의 일기라고?
확실히 그거라면‚ 뭔가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 있는 건데?”
열람할 수 있다고만 하고 뜸을 들이는 시스템이 좀 수상했다.
[시스템: 아이템 ‘응접실의 책장’에서 ‘세라 에보트의 일기 조각’을 찾을 수 있습니다.
- 힌트: 책 사이에 끼워져 있음.]
눈을 들어 책장을 보자‚ 못해도 백 권은 되어 보이는 책들이 빡빡하게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날 굴리지 못해 환장한 게임인가 봐.”
이쯤 되니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알사탕을 줍느라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헛수고로 만들 수는 없었다.
“또 노가다가 답이지 뭐.”
막막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단순한 정공법이다.
세라는 책장의 책을 하나하나 뽑아서 탈탈 털기 시작했다. 정확히 반쯤 뽑아 털어 냈을 때‚ 툭 하고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시스템: 아이템 ‘세라 에보트의 일기장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찾았다.
“별거 아니면 죽여 버릴 거야.”
세라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일기장 조각을 읽어 보았다. 삐뚤빼뚤한 필체를 보니 세라가 어린 시절에 쓴 일기 같았다.
[또 세르반테스 공작저에 갔다.
세르반테스 소공작‚ 그러니까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오늘도 말이 없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가장 아끼는 사탕을 주었다. 이건 분명히 필승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싫다며 내팽개쳐 버렸다.
아버지가 출장 다녀오면서 사다 주신 비싼 건데. 나도 하루에 한 개만 먹는 건데. 사탕 알이 바닥에 우르르 떨어졌다.
떨어진 사탕 알이 왠지 내 자존심 같아서. 내 손으로 하나하나 다 주웠다.
속상해서 눈물이 찔끔 났지만 참았다. 어떡하지. 펠릭스는 아무래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싫다고 말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게 일종의 장기 투자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고.
나도 동의한다. 펠릭스는 내가 얻을 수 있는 혼약자 중에 가장 예쁘고 탐나는 남자다.
지금은 일기에만 몰래 펠릭스라고 쓰지만. 언젠가는 꼭 친해져야지. 소공작님 말고‚ 펠릭스라고 직접 불러 보고 싶다.
내가 싫다고?
어쩌라고. 난 너 좋아. 예쁘잖아.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열 받아서 오늘은 사탕을 두 개 먹었다.]
어른의 눈으로 볼 때 아주 귀여운 일기였다.
‘어릴 때부터 짝사랑했었네. 펠릭스는 어릴 때부터 좀 예민하게 굴었고.’
빙의 후 인위적으로 태도를 바꾸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이랑 다를 바 없었다.
가장 아끼는 사탕까지 줘 가며 환심을 사려 애썼는데. 얼마나 속상했으면 늘 한 개만 먹던 사탕을 두 개나 먹었을까.
귀여워서 픽 웃음이 났다.
펠릭스는 세라 에보트를 왜 그렇게 싫어한 걸까.
‘물론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야 판단할 수 없겠지만. 일기만 봐서는 제법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말이지.’
세라는 갸웃거리며 일기 조각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시스템: 이제 ‘응접실’을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미션도 끝났고. 얼른 이 지옥 같은 4층을 탈출해야 했다.
세라는 문틈으로 인기척을 살핀 후‚ 살금살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세라는 망연자실한 채 4층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거 내려갈 수는 있는 거니.’
답답해서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펠릭스가 깰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4층을 다 헤집고 다녔는데 내려가는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미션도 했고. 알사탕도 찾았는데. 문제가 뭘까.’
조건대로 펠릭스 세르반테스와 잤다. 한 번도 아니고 기억도 안 날 만큼 잤다.
그냥 물고 빨고 끝낸 것도 아니었다. 온몸에서 그의 체액 냄새가 날 정도로 여러 번 절정에 다다랐다.
‘노멀 모드에서는 안 이랬잖아요!’
남주와 관계를 맺으면 바로 한 층 내려갈 수 있었던 노멀 모드와 난이도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억울해서 울분이 차올랐다.
‘더군다나 그놈의 알사탕도 찾았잖아!’
세라는 억울했다. 꼭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황망하기도 했다. 조건은 채웠는데‚ 왜 내려가는 계단이 안 보이는 걸까?
원래대로라면 여기 복도의 중앙에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야 했다.
“시스템 창.”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시스템 창을 호출했다.
[시스템: 4층 미션‚ ‘펠릭스 세르반테스’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시스템: 돌발 미션! ‘알사탕을 찾아라!’를 완료하셨습니다.
- 알사탕 수집 상태(3/3)
- 보상 아이템 ‘세라의 일기장’을 인벤토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현재 미확인 알림이 없습니다. (남은 시간: 1시간 24분)]
아니‚ 그러니까 클리어 했는데 왜 아래층으로 못 가는 거냐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시스템: 플레이어의 잦은 호출이 감지되었습니다.
시스템은 언제나 플레이어에게 편의를 제공합니다.
- 시스템의 도움말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이렇게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게임이니 난이도 조절도 실패한 거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쨌든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펠릭스가 잠에서 깨어나고‚ 그 편지라도 봤다면 큰일이었다.
세라는 얼른 도움말을 요청했다.
[시스템: 주의! 미션 클리어 후‚ 해당 층에서 주어진 시간을 모두 소모해야 다음 층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 TIP: 하드 모드의 특전: 황금 같은 여유 시간! 감금한 범인의 흔적을 찾는 것에 활용해 보세요.]
양심도 없네. 그런 건 좀 진작 알려 줬어야 하지 않나?
불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이 게임의 ‘저세상 난이도’에‚ 맛이 간 시스템도 일조하는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일단 한 시간 넘게 버텨야 하는데 어쩌지.
펠릭스가 일어났다고 전제할 때‚ 먹고 튄 상황이란 걸 알았을 텐데. 기꺼울 리가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갈까?
아니‚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천만다행으로 펠릭스가 아직 자는 중이고‚ 편지를 잡아 없앤다 한들 깨서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일단 침착하고‚ 숨을 곳을 찾아보자.’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목덜미에 한기가 들었다.
“세라 에보트.”
제발 들리지 않길 바랐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어디 가?”
펠릭스 세르반테스.
그녀가 공략한 첫 번째 남주가 표정 없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
싸늘한 물음에 세라는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펠릭스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천천히 걸어왔다. 포위망에 갇힌 먹잇감을 거두려는 맹수처럼 위압적인 걸음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뛰고 몸이 비틀거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세라가 더듬더듬 뒷걸음질 쳤다.
소용없는 짓이다. 그녀는 퇴로를 탐색할 틈도 없이 구석까지 몰려‚ 포악한 손길에 사로잡혔다. 등 뒤로 딱딱한 벽이 느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묻잖아. 어디 가냐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차라리 화를 낸다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겠는데‚ 고저 없이 차분한 목소리에 오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무서운 거야?”
그가 바르르 떨리는 허리를 단단히 가두며 물었다. 세라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그의 품에 결박되었다.
“아니면 이게 무서운 건가.”
눈 깜짝할 순간 시리고 묵직한 감각이 이마에 닿았다. 이게 총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달칵‚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새카매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말 안 하면.”
“…….”
“하나씩 써 보고 판단하지.”
총구가 강하게 들이밀어졌다. 쇳덩이가 이마를 파고드는 것 같은 감각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어쩌지. 그에게서는 이미 흥분을 넘어선 살기가 느껴졌다. 날것의 감정을 마주하자‚ 세라는 복잡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무섭지만 말려들면 안 되겠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개죽음당할 순 없었다.
그녀가 눈을 꾹 감고 옅은 숨을 뱉었다.
“…내려요‚ 총.”
“지금 명령하는 건가?”
“아뇨. 제안. 그러니까 제안을 하는 거예요.”
“제안이라.”
잔뜩 겁에 질렸음에도 또박또박하게 말하려 애쓰는 그녀를 보고‚ 그가 헛웃음을 뱉었다.
순간 다시 눈을 뜬 그녀가 그를 똑바로 주시해 왔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도 눈동자만큼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공작님은 지금 대화가 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대화?”
“네‚ 총 겨누고 하는 건 대화가 아니라 협박이에요.”
동요하는 걸까. 허공에서 얽힌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공작께서 절 위협하시면‚ 저도 제대로 된 답을 드릴 수 없어요. 그러니 우선‚ 그 총부터 내리세요.”
낮게 침잠된 목소리. 그녀는 마치 저를 쏘지 않을 걸 아는 사람처럼 차분한 말투를 하고 있었다.
“하아…….”
펠릭스가 여전히 총을 겨눈 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도망갈 거잖아.”
분명 떨고 있었다. 먼저 위협하고서도 겁을 먹은 건 오히려 펠릭스 쪽인 것 같았다.
“아뇨.”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궁금해요. 당신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
펠릭스가 천천히 총을 내리더니‚ 세라가 입은 코트 주머니 안에 넣었다.
옳지.
총을 거두자‚ 세라는 이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그는 얌전해졌으나 아직 불안정해 보였다.
그녀가 칭찬하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 눈짓에 사납게 날을 세우던 그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미안해요. 먼저 나와서.”
“…….”
“공작님을 속이고‚ 코트를 훔친 것도 다시 사과드릴게요.”
“펠릭스…….”
“…네?”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공작님 같은 같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펠릭스라고 불러.”
펠릭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더듬거리며 호칭을 정정해 주는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네. 정말 미안해요‚ 펠릭스.”
“…….”
“아직 저한테 할 말이 더 남은 거죠?”
일단은 좀 더 달래야겠지. 제한 시간이 지나야 아래층으로내려갈 수 있으니까.
내심 걸리는 게 있다면 얘기하고 풀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왜 화가 난 건지 말해 주면‚ 사과할게요.”
“나도 잘 모르겠어.”
펠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무언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가 스스로 내뱉고도 어이가 없는지‚ 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귓바퀴까지 빨개져서는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왜 이러지. 세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살폈다.
“봐요.”
“…….”
“나 봐요‚ 펠릭스.”
조심스레 그의 손을 떼어 내자‚ 어쩐지 치부를 들킨 것처럼 곤란한 얼굴이었다.
뭐지.
꼭 울 것 같은 눈을 하고선.
“제가 어떻게 할까요.”
“…….”
세라가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쓸었다. 몰아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어 대는 모양새가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말해 봐요. 할 수 있는 거면 제가…….”
“…가지 마.”
순간 세라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의 오만한 입술에서 흩어진 말이 너무도 볼품없어 보였기 때문에.
“펠릭스…….”
“나는 원래 배움이 느려. 그러니 잠깐만이라도.”
그가 제 뺨에 있는 손을 끌어당겨서 그녀를 제 품에 넣었다. 그의 돌발 행동에 세라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이 좆같은 기분이 뭔지 알 때까지‚ 옆에 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