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바람난 약혼자와 갇혀 버렸다 (4/17)

03. 바람난 약혼자와 갇혀 버렸다

세라는 부스스 실눈을 떴다. 희뿌연 시야에 게임을 시작할 때 봤던 그 천장이 보였다.

‘이제 본 게임 시작인가.’

알베르토와 치장을 마무리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의식을 잃은 것도 몰랐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완전히 다른 방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다 되어서 강제 시작된 모양이었다.

[시스템: 4층‚ ‘펠릭스 세르반테스’(관계: 약혼자)가 이곳에 있습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바로 옆에서 날 선 숨소리가 느껴졌으니까. 그 주인이 알베르토가 아니라는 것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젠 어쩌지. 그녀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운 채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시스템: 제한 시간 내에 ‘펠릭스 세르반테스’를 굴복시키세요. (남은 시간: 12시간) - 실패 시: 사망]

…아‚ 싫다. 시스템이 한 번 더 못 박아 주니 더 암담하게 느껴졌다.

그냥 다 꿈이면 좋겠다. 세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아 보았다. 그럴수록 잠이 오긴커녕 정신만 더 또렷해졌다.

플레이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봤던 오프닝인데.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라 에보트.”

냉랭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는 척하지 말고 그만 일어나지.”

들켰네. 세라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펠릭스가 보였다. 그는 모로 누워 턱을 괸 채 싸늘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금의 여파인 걸까. 헝클어진 머리칼‚ 비스듬히 풀린 셔츠. 늘 강박적으로 말끔하던 평소와는 달리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타고난 외모만큼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 깨끗한 금발에 벽안‚ 선이 고운 이목구비까지.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귀족일 수밖에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여유롭고 어딘지 권태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눈동자에는 이렇다 할 온기가 없었다. 아마 이제껏 그래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겠지.

게임 할 때는 한 번쯤 무너뜨려 보고 싶은 냉혈한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 펠릭스였다.

세라가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자‚ 그는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고귀하신 약혼녀께서 날 이런 같잖은 곳에 가둔 것도 모자라‚ 침대까지 기어 올라오실 줄이야.”

펠릭스가 한껏 빈정거렸다. 감금부터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까지. 모두 세라의 짓이라고 확신하는 말투였다. 억울했지만 그동안의 행적을 놓고 봤을 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세라 에보트는 파혼을 요구하는 펠릭스에게 일방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불사하고 있었는데‚ 이미 한 번의 감금 전과가 있었다.

눈을 뜨자 침대에 혐오하는 약혼녀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상황. 펠릭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구걸도 아주 가지가지 해.”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막말을 들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뭐라 받아치고 싶은데. 자신을 벌레 보듯 깔보는 저 눈을 마주하고 나니 머리가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펠릭스의 시선이 세라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무언가 자세히 살피려는 것처럼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그때‚ 펠릭스가 돌연 세라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그의 돌발 행동에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 새끼 왜 이러는 거야?’

온몸이 발발 떨리고 심장이 달음박질쳐서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세라는 파리하게 떨리는 입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꾹 깨물었다.

이윽고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잡아채더니 이리저리 돌려 목덜미를 살폈다.

“뭐지‚ 이건.”

아차‚ 알베르토가 남긴 키스 마크를 본 걸까. 민망함에 세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하다 하다 안 되니 이젠 자작극까지 벌이는 건가.”

“네?”

“내가 한 짓이라고 우길 건가 본데. 이젠 잤으니 책임지라고 생떼라도 부릴 셈이야?”

그가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였다.

“하나뿐인 여식이 몸이 달아 이딴 짓까지 벌인다는 걸 에보트 후작이 알면 통곡하겠군그래.”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폭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부로 부모 이야기까지 꺼낼 일인가.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잘못될까 무서운 것과는 별개로 펠릭스의 무례한 태도는 견딜 수가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내려가요.”

“뭐?”

“불쾌하니까 내려가라고요.”

그녀가 싸늘하게 말하자 그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군. 애초부터 나한테 원하던 게 이딴 거 아니었나?”

“착각하지 마세요.”

“뭐라고?”

“제가 이걸 공작께서 낸 자국이라고 말한 적 있던가요?”

세라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을까. 그의 시선이 약간 흔들렸다.

그래. 이렇게 균열이 생겼을 때 쐐기를 박아야 했다.

“좋게 이야기할 때 내려가요. 당신을 상대로 허접한 자작극까지 꾸밀 정도로 몸 달지 않았으니까.”

진짜 미쳤나 봐.

자기도 모르게 할 말을 다 쏟아 낸 세라는 온몸이 쿵쿵거려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세라 에보트‚ 갑자기 왜 이러지.”

“…….”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그가 세라의 안색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래도 자신이 알던 약혼녀와는 너무 딴판이었을까.

속이 다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좀 불안했다. 이제부터 자빠뜨려야 할 남자한테 이렇게 대책 없이 막말해도 되는 걸까.

[시스템: 경고! 캐릭터 붕괴 위험 발생! – ‘펠릭스 세르반테스’가 평소와는 너무 다른 당신을 의심합니다.]

[시스템: 캐릭터 붕괴 지수가 90% 이상을 넘게 되면‚ 강제 배드 엔딩을 맞게 됩니다. (현재 캐릭터 붕괴 지수: 86%)]

…아‚ 역시 안 되는구나.

너무 열 받아서 잊고 있었는데‚ <누가 그녀를 감금했나>는 플레이어의 자유도가 높은 대신‚ 여주의 캐릭터 붕괴를 극도로 꺼리는 게임이었다.

‘하긴‚ 게임을 계속 못 깼던 것도 캐릭터 붕괴 지수 때문에 몸을 사렸기 때문이지.’

튜토리얼에는 이런 게 없었기에 알베르토에게는 제법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본 게임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알베르토는 게임 진행을 위한 NPC고‚ 펠릭스는 공략 캐릭터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이제야 정신이 바짝 든 세라는 후‚ 옅은 숨을 내쉬었다.

세라 에보트는 겉으로만 숙녀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떼를 쓰는 유아적인 캐릭터였다.

세라는 완벽한 세라 에보트를 연기해야만 했다.

[시스템: 현재‚ 캐릭터 붕괴 지수가 80%를 초과하여 위험 상태입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너무 흥분했던 걸까.

‘좀 참을걸.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저놈한테 할 말 다 해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현재 상태로는 한 번만 까딱 잘못하면 강제 배드 엔딩일 것 같았다.

그때‚ 시스템 창이 한 번 더 떠올랐다.

[시스템: 미션! ‘그건 오해예요‚ 공작님!’ - 합당한 사유를 들어 ‘펠릭스 세르반테스’를 설득하십시오. (성공 시: 캐릭터 붕괴 지수 대폭 하락 / 실패 시: 캐릭터 붕괴 지수 대폭 상승)]

뭐지‚ 저 유치찬란한 미션은? 게다가 결과는 완전 모 아니면 도였다. 세라는 머리가 지끈거려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합당한 근거라니. 다행히도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무리 저라도 공작께서 제 아비를 욕보이시는데‚ 그걸 듣고만 있긴 거북해서요.”

세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호구 멍청이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이 있는 법이고.

[시스템: 합당한 사유로 인해‚ 캐릭터 붕괴 지수가 대폭 하락합니다. (현재 캐릭터 붕괴 지수: 52%) - 앞으로 70%를 초과할 때까지는 별도 표시하지 않습니다.]

[시스템: 칭호 ‘건드리면 물어요’를 획득합니다. - 플레이어의 자기 방어권 상승. 칭호의 효과로 상대의 폭언에 대한 방어 시‚ 캐릭터 붕괴 지수가 폭등하지 않습니다.]

…이게 되네? 세라의 입장에서는 조금 얼떨떨한 성공이었다.

“그래. 그건 내가 좀 무례했군. 사과하지.”

펠릭스가 담백한 사과를 건네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끝까지 싸워 봐야 수습만 힘드니. 적당한 선에서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진작 그러셨어야죠.”

세라는 일부러 가시를 세워 말했다. 이렇게 있던 정나미도 떨어뜨리는 게 ‘세라 에보트’의 화법이니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원형 탁자에 앉았다. 탁자에는 간단한 요깃거리와 반쯤 비워진 위스키병‚ 시가 케이스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공작이 늘 분신처럼 지니고 다니던 권총이었다.

한 방 먹였다고 뿌듯해하던 것도 잠시‚ 총을 보자 제가 처한 현실이 파악되면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별안간 ‘노멀 모드’에서 보았던 세라 에보트의 처단 장면이 떠올랐다.

탕! 총성과 함께 몸이 꺾이듯 고꾸라지는 모습. 끈적한 피가 웅덩이를 이루었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직 죽기 싫어.’

세라는 떨리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까딱 잘못하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걸 빌미로 가두기까지 했으면서. 왜 이제 와 시치미인지 모르겠네.”

펠릭스는 멈칫대는 그녀를 향해 턱짓을 하며 말했다.

“나와 침대에 있는 걸 치가 떨리도록 싫어하는 것 같으니. 저쪽으로 앉지.”

“그‚ 그러죠.”

못할 것도 없지. 세라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짜증스럽게 위스키를 따르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 방금까지 자다 일어났음에도 눈 밑이 퀭한 걸 보니 이 상황에 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떤 말을 해야 이 남자를 무너뜨리고 한 층 내려갈 수 있을까.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플레이 할 때는 호감도를 높여 엔딩까지 보고 싶은 마음에 정성을 들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이다.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넣고‚ 흔들고‚ 싼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왜 말 안 하지?”

애초에 세라 에보트가 할 말이 뭐였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관자놀이에 총알이 박힐까 무서운데. 그게 무슨 대수일까.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하는 거 딱 질색인데.”

“…목이 말라서요.”

펠릭스가 실소했다. 당돌하게 쏘아붙일 땐 언제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얼어 있는 모습이 어이없는 까닭이었다.

“차가 남아 있으니 알아서 마시지 그래.”

“…….”

“설마 차 시중이라도 들어주길 바라는 건가?”

“아‚ 아뇨. 제가…….”

세라가 떨리는 손으로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처음이어서일까. 다기가 달각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쪼르륵. 그녀가 찻잔에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들이부었다. 다 식어서 온기도 없는 찻물에 차 찌꺼기 같은 것들이 섞여 혼탁했다.

늘 딱 마시기 좋게‚ 깨끗하게 우려 주던 알베르토가 그리웠다.

콜록콜록!

급하게 들이켜자 사레에 들렀는지 발작적인 기침이 터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힐끔 그의 얼굴을 보자‚ 세상에서 가장 하찮을 것을 보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다 떨기만 하다가 죽어 버리겠어.’

긴장감을 해소할 만한 무언가가 절실한 가운데‚ 그가 마시고 있는 위스키가 눈에 들어왔다.

[시스템: 아이템 ‘독한 위스키’(효과: *긴장 완화)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술이라도 마셔야겠다.

세라가 위스키병으로 손을 뻗자‚ 펠릭스가 그걸 가로챘다. 결국 두 사람이 동시에 술병을 잡은 꼴이 되었다.

“무슨 꿍꿍이야?”

“하‚ 한 잔만 줘요. 콜록콜록!”

“마시지 않는 게 좋겠어.”

“공작님은 마시고 있잖아요.”

“내가 영애랑 같나?”

“다를 건 뭐예요? 나도 성인이고‚ 에보트에 있는 건 다 내 것이에요.”

역시 세라 에보트다운 대답이었을까? 펠릭스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아졌다.

“그래서 이딴 허접한 별장에 날 가둬 놓은 건가? 영애의 것이라서?”

“아뇨‚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납치범 주제에 시치미를 떼다니. 어이가 없군. 말로 할 때 놓는 게 좋을 거야.”

“아‚ 안 놓으면‚ 쏘‚ 쏘기라도 하실 건가요?”

눈시울이 발갛게 젖어 울기 직전인 세라를 보고‚ 펠릭스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대체 총은 왜 쳐다보는 건지. 납치는 본인이 해 놓고 피해자인 척하다니. 가증스럽기 그지없지 않나.

“놔. 내가 따라 줄 테니.”

그가 유리잔에 위스키를 반쯤 따르고는 세라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잔을 더듬더듬 받아 든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끄으.”

세라는 목구멍이 타는 것 같은 작열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몇 모금 더 똑같은 모양으로 삼키더니‚ 이내 두 뺨이 발그레해져서는 눈꼬리를 길게 눕혔다.

그 꼴이 꼭 눈밭에 파묻힌 토끼처럼 청승맞아 보였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펠릭스는 기가 차서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을 마셔서일까. 목덜미와 쇄골 곳곳의 흔적이 더 발갛게 물들어서 한층 더 볼썽사나운 몰골이 되었다.

왜 저딴 꼴로 나타난 거지? 봐 달라는 건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게 또 묘하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방 안에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할 말이 있다면서 뜸만 들이다니. 말하기 어려운 일이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말할 게 없었다거나. 둘 중 하나인 게 분명했다. 그동안의 행보를 봤을 때는 아마도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세라는 위스키가 무슨 성수라도 되는지‚ 잔을 두 손으로 고이 받쳐 들고 연신 홀짝거렸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게 거슬렸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오늘따라 특히 더. 입 안이 까끌해진 펠릭스가 미간을 좁히며 시가를 꺼냈다.

그때‚ 그녀가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파혼해 드릴게요.”

살짝 치켜뜬 눈은 어딘지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뭐?”

“공작께서 원하시던 대로 이제 약혼녀 안 한다고요.”

“취했나?”

펠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파혼을 막기 위해 단식 투쟁이며‚ 자살 소동이며 죽음도 불사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받아들이겠다니. 좀처럼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한편‚ 세라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길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눈 딱 감고 질렀는데 괜찮겠지?’

내심 ‘캐릭터 붕괴 지수’가 걱정이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조금 더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긋지긋하군. 얕은 수로 날 겁박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펠릭스는 그저 약혼자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쇼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건조하게 답했다.

“취한 건 맞는데 진심이에요. 용기가 필요해서 술기운을 빌렸을 뿐이고요.”

“이래 놓고 번복하는 거 싫으니 술 깨면 얘기하지.”

“맹세코 번복할 일 없어요. 계약서라도 쓸까요?”

세라는 정말 진심이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애정을 강요하다가 총 맞는 일 따위는 피하고 싶었으니까.

물론 그동안 세라 에보트가 적립한 업보와 전과가 있다 보니‚ 펠릭스가 이렇게 나오는 것도 전적으로 이해했다.

“왜 이래?”

펠릭스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묻잖아. 갑자기 왜 이러냐고.”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다는데 이유가 중요한가요?”

“남자라도 생긴 건가.”

“…네?”

짐작은 하겠지‚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이야.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시선을 피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같잖은 질문인 모양이었다.

“그 볼썽사나운 자국도 그렇고.”

역시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세라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맞아요.”

순순히 인정하자 펠릭스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라는 담담하게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정신이 완전히 나갔군.”

“아뇨. 나갔던 정신이 돌아온 거죠. 공작께서 끊임없이 일깨워 주신 덕분에 이제야 현실을 깨달았어요.”

“질투라도 하길 바라는 거라면 관둬. 그럴 일 없으니까.”

“정말로 상관없어요. 깨끗이 끝내고 각자 갈 길 가고.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어차피 공작께서도 원하던 바 아닌가요?”

진심인가. 펠릭스가 진위를 가리려는 듯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이쪽에서 파혼을 요구할 때는 말도 안 된다며 패악질이더니. 어이가 없었다.

“아‚ 혹시 베세르크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세라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치며 눈을 곱게 휘었다.

베세르크는 에보트 후작가에서 지참금으로 넘기기로 한 에보트의 영지였다.

에메랄드 광산을 품고 있음은 물론‚ 인접국과의 중개 무역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에보트 후작이라도‚ 재산 중 노른자위 땅을 넘기는 것은 큰 결심이 필요했다. 후작이 자신의 하나뿐인 딸에게 얼마나 꼼짝 못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쨌거나 베세르크라니. 해상 무역을 하는 세르반테스의 입장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을 터였다.

후작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땅이라고 한들 딸의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을 테지.

‘에보트 후작님‚ 죄송해요. 일단 저도 살아야 해서요.’

속으로 혼잣말을 뇌까린 세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혼인은 제가 먼저 깬 걸로 하죠. 지참금은 반환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껜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뻔뻔스럽게도. 세라는 자신의 약혼이 그러한 조건들로만 이뤄진 것임을 다 안다는 듯 지참금의 처우를 논하고 있었다.

펠릭스의 입장에서 아무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돈 때문이냐고 하다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베세르크 영지는 분명히 거절했어. 애초에 이 약혼을 지속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요?”

“난 그냥 영애가 싫어. 약혼이 유지된 건 영애가 계속 생떼를 써서지‚ 돈 때문이 아니야. 대체 날 뭐로 보고……!”

“공작께서는 제가 한가하게 적선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세요? 자존심 상해 하실 것 없어요. 공짜 아니고 거래를 제안하는 거니까.”

“뭐?”

“조건이 있다는 말이에요. 들어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 얼마나 대단한 조건인지 들어나 보지.”

못내 짜증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대체 무슨 조건을 걸 속셈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세라가 탁자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더니 턱을 괴고 빤히 쳐다보았다. 다소 노골적인 시선에 펠릭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세르반테스 공작님‚ 저랑 딱 한 번만 자요.”

“미쳤나?”

“아뇨. 미치지 않았어요.”

방금까지 파혼하자더니. 딱 한 번만 자자고? 눈앞의 여자가 뱉은 황당한 말에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본인 입에서 나온 말이 얼마나 미친 소리인지 모르는지‚ 말간 얼굴로 주시하는 그녀를 보니 속이 끓는 것 같았다.

“남자가 생겼다고 했던 것 같은데.”

“네. 보시다시피 그분과는 제법 잘되어 가고 있어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목덜미를 보여 주었다.

“누구야‚ 그 새끼는.”

펠릭스는 목이 타는지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혹시 그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던 기사단장 놈인가.”

“네?”

“맨날 업혀 다닌다더니. 이젠 깔리기로 했나?”

갑자기 왜 집요하게 물어보는 거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면 신전에서 자숙할 때 그랬나? 거기 대신관이 꽤 반반하다던데.”

그러니까 그는 소꿉친구인 에단과 대신관 세바스찬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기가 찼다. 관심조차 없는 것 같더니. 대체 무슨 심리지?

그리고 지금 누구와 바람났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은 아실 거 없고. 디아즈 영애와 혼인하고 나면 차차 알게 되실 거예요.”

디아즈 영애란‚ ‘노멀 모드’의 여주 엘레나 디아즈를 일컫는 것이었다.

우습기도 하지. 그러니까 본인도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며 파혼을 요구한 주제에‚ 지금 뻔뻔하게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세라는 그의 오만한 낯짝을 보며 몰래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다만 누군지 알면 공작께서 그 총으로 보복이라도 하실까 염려가 되어 그래요. 저도 제 연인은 보호해야죠.”

“내가 왜 그런 성가신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질투가 아니라 명예 때문이죠. 귀족 사내들에겐 자존심이 목숨보다 소중하잖아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감히‚ 제국 내 가장 고귀한 사내의 것에 손을 대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 정신 나간 놈이지 않은가.

펠릭스가 그걸 아끼느냐‚ 아끼지 않느냐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자비를 베푸신다 해도‚ 천하의 세르반테스 공작께서 약혼녀가 바람나서 헤어지다니. 그런 소문이 돌면 좋을 게 없으실 테니. 그때까진 저도 잠자코 있겠다고요.”

또 무슨 술수를 쓰며 협박하려는 건지 지켜보았는데‚ 눈앞의 여자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펠릭스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그녀의 뻔뻔한 낯을 다시금 찬찬히 살폈다.

“오늘은 뭐랄까. 꼭 세라 에보트가 아닌 것 같군.”

순간‚ 정곡을 찔린 세라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시스템: 경고! 캐릭터 붕괴 위험 발생! – ‘펠릭스 세르반테스’가 평소와는 너무 다른 당신을 의심합니다.]

[시스템: 캐릭터 붕괴 지수가 90% 이상을 넘게 되면‚ 강제 배드 엔딩을 맞게 됩니다. (현재 캐릭터 붕괴 지수: 82%)]

[시스템: 미션! ‘그건 오해예요‚ 공작님!’ - 합당한 사유를 들어 ‘펠릭스 세르반테스’를 설득하십시오. (성공 시: 캐릭터 붕괴 지수 대폭 하락 / 실패 시: 캐릭터 붕괴 지수 대폭 상승)]

이 새끼 또 시작이네. 의심이 짙어지기 전에 뭐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무언가를 떠올린 세라가 숨을 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구 딸인지 잊으신 건가요?”

“뭐?”

“저를 얼마나 얼빠진 인간으로 보셨는지는 몰라도 저도 에보트랍니다. 저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에보트 후작가가 그만한 부를 일궈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에보트 후작은 철저한 사업가였고‚ 거래와 협상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물로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제국 내 일등 신랑감을 딸에게 선물할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는데. 뭐 문제라도?’

세라가 픽 웃으며 그를 주시했다.

“그동안은 귀찮아서 편한 방법을 썼을 뿐이에요. 무릇 협상이란 저 또한 가진 몫을 내어 줘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

“떼를 쓰고 협박하는 게 더 간단한 일인데 뭐 하러 그런 성가신 걸 하겠어요?”

그녀의 뻔뻔한 대답에 펠릭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시스템: 합당한 사유로 인해‚ 캐릭터 붕괴 지수가 대폭 하락합니다. (현재 캐릭터 붕괴 지수: 33%)]

이런 논리도 이상한 막무가내 궤변이 먹혀서 다행이었다. 이 또한 ‘세라 에보트’이기 때문이겠지. 세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 나지? 그 새끼랑 하면 되잖아.”

“저도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근데 좀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요.”

“무슨 거지 같은 소리야.”

“애석하게도 그분은 제가 처녀인 걸 모르시거든요. 심지어는 아주 능숙한 줄 아시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니 난처하게 됐네요.”

세라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 떨구었다.

이 여자‚ 미친 거 아닐까? 난처하건 말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펠릭스는 생각할수록 기가 차는지 연신 실소를 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영애가 한 거짓말을 나더러 대신 책임져 달라는 건가.”

“네. 역시 영민하신 분이라 이해가 빠르시네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하게 된 데는 공작님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으시거든요.”

“뭐?”

“저라고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싶었겠어요? 세르반테스 공작님의 약혼녀라고 하니‚ 다들 당연히 경험 많고 능숙할 줄 알더라고요.”

세라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상대를 책망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완벽한 귀족이었고‚ 모든 여자가 그를 흠모했으며‚ 그의 아랫도리는 그 환상을 널리 충족시켜 줄 정도로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해서 그런 오해가 달라붙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 내 탓이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는 주제에 뭐가 저리 당당하지? 너무 뻔뻔하게 나오니‚ 펠릭스는 꼭 그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았다.

“아뇨. 다는 아니고 일정 부분이요.”

그녀는 얄밉게도 틀린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름을 느꼈다.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야지.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고백해. 처음이라는데 그걸 싫어할 사내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럼 공작께서 저를 여자로 보지 않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다고. 제 입으로 그 창피한 이야길 하란 말인가요? 자존심 상하게?”

“그래서‚ 그 같잖은 명예를 위해 첫 경험을 내다 버리겠다는 건가?”

“제 명예는 같잖지 않아요. 그리고 공작님 정도면 첫 경험 상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고요. 여기다 비밀 유지 계약까지 덧붙이면 완벽할 것 같은데요.”

“…하아.”

이어지는 궤변의 향연에 정신이 혼미해진 펠릭스가 시가에 불을 붙이더니 다소 조급하게 빨았다.

중요한 영지까지 내놓으며 그 대가로 좆질이나 해 달라니. 대체 무슨.

“지금 나한테 남창 노릇을 하라는 건가.”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죠. 그렇게 생각하시는 편이 더 흥분되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을게요.”

세라가 눈을 곱게 휘며 생글거렸다. 펠릭스는 몇 모금 빨지도 않은 시가를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이건 뭐‚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긴‚ 애초에 정상적인 여자라면 그따위 돼먹지 않은 청을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왠지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그깟 좆질이 뭐라고 사람을 이따위로 기분 더럽게 만들지? 게다가 본인은 처음이라면서. 감히‚ 공작을 상대로 용기도 가상했다.

그가 앞머리를 초조하게 쓸어 넘겼다. 얼른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이 기분 나쁜 불쾌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세워 보든가.”

펠릭스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제법 순순히 나오자 놀랐는지‚ 세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서야 박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이제 다 됐다! 세라가 희열 가득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알겠어요. 그럼 계약은 성립됐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봐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기어코 세우고 말 테니 걱정 마셔요!”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이게 뭐라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 번만 싸면 저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고‚ 베세르크 영지까지 넘긴다는데. 뭐‚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까짓거‚ 남창 한 번 되지 뭐. 잠깐의 굴욕만 참는다면‚ 펠릭스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었다.

“저기‚ 그럼 키스부터 할까요?”

“…뭐?”

펠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물었다.

“안 해 봤지만 대략적인 절차는 알아서요. 넣기 전에 입 맞추고‚ 몸을 만지고 그런 거요.”

망측한 소릴. 그는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온 세라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녀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펠릭스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은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하얗고 고왔다.

답이 없자 못내 민망한지‚ 목덜미를 박박 긁어 댔다.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목덜미에 어지럽게 피어 있는 흔적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감히‚ 제 이름으로 된 걸 탐하다니.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실은 거슬려서 쏴 버리고 싶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물건이라 한들 소유는 소유였다. 저가 허락하기 전에 남의 손을 타다니. 결벽증은 아니지만 질색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보여도 태생이 귀족이어서일까. 그녀는 고귀한 자들의 심리를 아주 영악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린애처럼 생떼나 쓰면서 무도한 행패나 일삼다니. 아주 질 나쁜 여자였다. 역시‚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목덜미에 머물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도톰하고 빨간 입술은 잘 익은 과실처럼 곱게 여물어 있었다.

그래. 최악치고는. 여자로서 제법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다는 건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입술로 내뱉는 말은 영 밥맛이지만‚ 모양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그럼 맛은 어떨까. 살짝 빨아 보는 정도야 뭐‚ 괜찮지 않을까. 그런 꼴같잖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니‚ 절대 안 되지.

펠릭스는 그런 한심한 망상을 하는 스스로에게 혐오를 느꼈다.

상대를 제 뜻대로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저런 유아적인 여자에게 이용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욕정을 이용하는 건 몰라도‚ 욕정에 지배당하는 건 사절이었으니까.

자신을 훑어내리는 음험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맹수의 영역인 줄도 모르고 폴짝거리는 토끼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주제에 키스라니.

건방진 소릴.

저 멍청한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자지러질 때까지 누르고 싶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대책 없는 질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얼른 날 선 말을 쏟아 내 저 한심한 낯짝을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애가 나라면 그런 한가한 짓을 할 것 같나?”

“그럼요?”

“영애를 만족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야. 이게 싫다면 관두지.”

“괜찮아요. 성교만 해 주신다면 저는 전혀 상관없어요.”

일부러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는데. 그녀는 거슬릴 정도로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냥 박고 싸기만 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 뻔뻔한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제가 공작님 취향을 잘 몰라서 여쭌 것뿐이니 오해 마세요.”

“내 취향?”

“네. 절 싫어하시니. 그나마 취향에 맞는 걸 해 드려야 발기할 것 같아서.”

세라가 초조한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상스럽게. 다 큰 숙녀가 손가락을 빨다니. 빨간 입술이 꼬물대며 달싹이는 모습을 보자‚ 아랫배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시선을 돌렸다.

“빨면 될까요?”

“뭐‚ 뭘 말하는 거지.”

그녀가 검지로 그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성기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

펠릭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망측스러운 질문이어도 이해해 주세요. 구강성교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없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단언컨대 그런 사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너무 확언해 버린 걸까. 세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아‚ 그렇군요‚ 따위의 영혼 없는 감탄사를 뱉었다.

잠깐 정신 줄을 놔 버렸다. 펠릭스는 제 행동에 수치심을 느꼈다.

“아‚ 아니 그러니까. 아마도 없을 거라고.”

“저 그럼 공작님께서도 입으로 하는 걸 좋아하시나요?”

“제발‚ 좀……!”

“제가 뭐 실수한 거라도……?”

세라는 더러운 말을 내뱉어 놓고도‚ 뭐가 잘못됐냐는 듯 말간 얼굴이었다.

펠릭스는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귓바퀴까지 뜨끈해짐을 느꼈다.

“…뭐‚ 나쁘진 않지. 이만 세우지 않는다면 말이야.”

“네에. 안 그러도록 조심할게요.”

펠릭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있다간 완전히 말려들 것 같다는 불안감이 그를 불쾌하게 했다.

“…….”

“…….”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그럼 침대에 누우실래요?”

먼저 그 침묵을 깬 이는 세라였다.

“싫어.”

“네?”

“설지 안 설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침대까지 가야 하지?”

그는 뻔뻔한 낯으로 의자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건 명백한 심술이었다. 빨아서 세우기로 합의를 본 줄 알았는데. 그가 갑자기 방어적으로 날을 세우자 세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 그‚ 그게 구강성교는 처음이라. 자‚ 자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제가 잘…….”

세라가 난감한 듯 머뭇거리자‚ 그가 조소하며 무릎을 넓게 벌렸다.

“여기.”

“…네?”

“가랑이 사이에 붙어서 꿇으면 되겠네.”

“무릎을요?”

“응.”

그는 그런 식으로 또 한 번 굴욕을 주었다. 세라 에보트는 누구 앞에 한 번도 무릎 꿇어 본 적 없는 후작 가의 금지옥엽이었다.

“다음은 좆 꺼내서 빨면 되고. 그래도 안 서면 그걸로 끝이고.”

“…….”

“뭐 더 알려 줘야 하나?”

원래부터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일부러 한층 더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남자 좆이나 빨라고 그런 굴욕을 맛보게 하는데도 이 미친 짓을 계속할 수 있을까.

펠릭스는 그게 궁금했다.

“싫으면 관두지.”

“그러죠.”

세라는 의외로 담담했다. 눈빛에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냥 정말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심산인지.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바닥에 꿇어앉더니‚ 그의 혁대를 풀기 시작했다.

일부러 굴욕을 주려 꿇으라 했는데. 자존심 상해하기는커녕 묘하게 고양된 낯빛이었다. 그 모습에 왠지 부아가 치밀었다.

볼썽사나웠다. 제 무릎 사이에 달라붙어 페니스를 꺼내는 꼴이라니. 초조한 듯 천천히 떨리는 속눈썹과 하얀 살결‚ 깊게 팬 가슴골에 번갈아 가며 시선이 닿았다.

제길‚ 허리띠를 채 풀기도 전에 바지춤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건 좀 어렵네요.”

세라는 허리띠를 제대로 풀지 못해 끊임없이 바르작거렸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박아 주기만 하면 된다더니. 부끄럼이라도 타는 걸까. 얼굴은 물론 귀 끝까지 발그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이게 뭐라고 꼴리냐고.

울컥 짜증이 치민 펠릭스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씨발‚ 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죄송해요. 이런 거 처음 풀어 봐서.”

펠릭스가 욕설을 씹어뱉으며 바지를 풀고 성기를 꺼냈다. 잔뜩 성이 난 페니스가 꺼떡거리며 튕겨 나왔다.

오오‚ 펠릭스의 좆은 생각보다 더… 육중했다. 세라는 제 얼굴 앞에 세워진 꼿꼿한 살 기둥을 보며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렇게 선 건가?’

세우라더니. 안 서면 그걸로 끝이라더니. 이만큼이나 세워 놓고 무슨 내숭이지? 크기를 보니 더 손댈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이걸 꺼내고 싶어서 온갖 궤변을 다 늘어놓았는데. 막상 눈앞에 마주하고 보니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약간 겁이 났다.

“이거‚ 또 세워야 해요?”

“왜. 이제 와 무르기라도 할 셈이야?”

“아뇨. 이미 선 것 같아서.”

“아직 끝까지 다 안 섰어.”

“진짜요?”

“궁금하면 빨아서 확인해 보든가.”

“알겠어요. 그럼 시작할게요?”

세라가 두 손으로 성기의 밑동을 그러쥐었다. 마치 성스러운 것을 다루듯 예의 바른 손길이었다.

아직 다 안 섰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성기가 딱딱하게 몸집을 키웠다.

쥐기만 했는데도 심지를 세우다니. 못 세울까 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꽤 민감한 몸이었다.

이제 빨아야겠지? 세라가 조심스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시작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귀두에 점막이 닿으며 촉‚ 젖은 소리가 났다. 따뜻하기도 하고. 살갗이 꼭 벨벳처럼 제법 부드러웠다.

기분 좋은 감촉에 그대로 입술을 비비며 살짝 빨아 보았다. 혀끝으로 살살 문지를 때마다 표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선단을 가득 머금고는 입천장으로 지그시 누르듯 압박하자 펠릭스가 읏‚ 탁한 신음을 뱉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크기라 상상처럼 쪽쪽 빠는 것은 어려웠지만‚ 이를 세우지 않도록 노력하며 혀를 비볐다. 살 기둥으로 타액이 흐르며 쭙‚ 빠는 소리가 났다.

더 깊게 빨아 당겨 볼까. 입 안을 열고 기둥에 점막을 미끄러뜨리며 삼켰다. 길이가 길어서일까. 아무리 애를 써도 절반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콜록콜록.”

욕심이 과했던 걸까. 한껏 집어삼켰더니‚ 컥컥 잔기침이 터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울긴. 목구멍을 열어야지.”

펠릭스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얼굴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훈수를 두었다.

“…….”

“못 하겠으면 관두고.”

그러면서도 물기 가득한 세라의 눈가를 손끝으로 훔쳐 주었다. 그 손길에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다‚ 다시 해 볼게요.”

입으로 안 되면 손을 쓰면 되는 일이었다. 세라는 흘러내린 타액을 윤활제 삼아 기둥을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무방비로 가해지는 짙은 자극에 펠릭스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페니스는 울퉁불퉁한 핏줄을 세우며 완전히 일어섰다. 여린 점막 안에 선액을 질금거리며 꺼떡대는 기세가 제법 무서울 정도였다.

“다 세웠어요.”

“하아…….”

“이제 어떻게 할까요?”

세라가 배꼽 아래까지 일어선 그의 성기를 보여 주며‚ 숙제를 검사받는 학생처럼 물었다.

이렇게 거의 수직으로 세워 놓고는. 아직 덜 섰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올라와서 다리 벌려.”

“네?”

“여기 누우라고.”

펠릭스가 다소 조급하게 탁자를 향해 턱짓했다. 밭은 숨을 내쉬는 걸 보니 침대까지 갈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탁자요?”

“바쁘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탁자에서 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뭐‚ 침대건 탁자건 넣기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똑바로 누울까요?”

“일일이 허락받지 말고 마음대로 해.”

“네.”

세라는 다기를 한쪽으로 밀어 두고‚ 순순히 탁자에 올라가 누웠다. 무릎을 세워서 벌린 채 팔을 머리 위로했다.

펠릭스가 바로 몸을 일으켜 삽입할 수 있도록. 그가 앉은 의자 바로 앞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코앞까지 대령했으니 바로 드시면 됩니다‚ 공작님.’

빨아서 예열도 완료했겠다. 빠는 동안 기대해서인지 그녀의 다리 사이도 조금 젖은 것 같았다.

이렇게 세라는 그의 좆에 한껏 박힐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왕 테이블에 눕는 거‚ 제 모습이 마치 ‘그를 위해 차려진 만찬’처럼 보일 것을 기대했으나.

“…….”

“…….”

역시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나더러 벗기라고?”

아뿔싸. 자세만 야했지‚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아니 제가…….”

세라가 허둥대며 치마에 손을 뻗었다. 펠릭스의 반듯한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이지러졌다. 제 옷인데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는 걸 보자 못내 짜증스러웠다.

“있어 봐.”

펠릭스는 성마른 손길로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치맛자락을 치우자 하얀 가터벨트와 속옷이 드러났다.

성가시게. 많이도 입었네.

펠릭스가 그녀의 가랑이에 걸쳐진 조잡스러운 것들을 뜯어내듯 벗겨 버렸다. 젖혀진 치맛자락 아래로 발그스름한 음부가 드러났다.

잔뜩 물이 고인 질구가 새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쑤셔 넣고 싶었지만‚ 겉보기에도 너무 좁게 닫혀 있었다. 마구잡이로 비집고 들어가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욱여넣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또 그걸 빌미 삼아 얼마나 치댈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그가 혀를 쯧‚ 찼다. 하여튼 귀찮을 정도로 손이 많이 가는 여자였다. 그녀의 다리를 더 넓게 벌리고는 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저‚ 아‚ 안 넣어 주실 거예요?”

“겁도 없이. 박을 생각부터 해?”

“그‚ 그야. 그러려고 세운 거니까요.”

“찢기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펠릭스가 목이 타는지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안았다. 올라타지 않고 가랑이 사이에서 머무는 것을 보니 입으로 해 주려는 모양새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세라가 와락 다리를 오므렸다.

“이‚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입 다물어.”

“하지만‚ 아깐 제 만족 같은 건 상관없다고…….”

“이제 내 것도 아닌데 망가뜨리기라도 했다가 떠안기 싫어서 이러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펠릭스는 음부에 입술을 묻으려다 그녀의 다리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발발 떨리는 발목이 제법 가냘팠다. 조금만 힘주어 안으면 부러질 것처럼.

투명할 정도로 뽀얀 복사뼈에 손끝이 닿았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살갗에서 쿵쿵 맥이 뛰는 것 같았다.

펠릭스는 꽉 그러쥐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입술을 붙여 보았다. 의외의 장소에 숨결이 닿자 세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쓸모없긴.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가느다란 다리였다. 이런 하찮은 다리로 정원이라도 걷는지 의문이었다. 조금 걷는 척하다가 하인에게 업어 달라 징징대기나 하겠지.

그녀를 업은 사내는 등 뒤로 느껴지는 풍만한 가슴을 느끼며 몰래 발정할 테고. 그것도 모르고 떼를 쓰고‚ 막무가내로 구는 것에 그 욕정을 이용하겠지. 너무 세라 에보트다워서 헛웃음이 났다.

그는 입술로 기다란 궤적을 그리다 허벅지 안쪽에서 멈추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엉덩이 살 사이로 고습한 음부가 보였다. 불그스름한 게 아주 먹음직스럽게 익어 있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허벅지 사이가 경련하듯 흔들렸다.

“힘 빼.”

펠릭스는 뽀얀 엉덩이를 반으로 쪼개듯 움켜쥐고 오만한 낯으로 명령했다.

“그럴게요.”

세라는 제법 고분고분했다. 명령에 따라 다리를 스르륵 무너뜨리자‚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음부에 입술을 묻었다.

춥‚ 소음순을 머금고 살짝 빨아 당기자‚ 새빨간 질구가 벌름거리며 점도 짙은 애액을 게워 냈다.

씨발‚ 뭔데 이렇게 달지.

질구에서 꼭 농익은 과실처럼 단내가 확 풍겨서 머리가 어질거렸다.

아까부터 어디서 단내가 난다 했더니. 배 속에 설탕이라도 품은 걸까. 혀끝에 감겨 오는 점액의 맛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달았다.

아‚ 맛있어. 왜 이걸 지금까지 몰랐을까.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게걸스럽게 빨고 싶었다.

입술 사이에 클리토리스를 끼우고 혀끝으로 궁굴리자‚ 움찔 구멍을 떨며 단물을 내놓았다. 뭐‚ 나름 빠는 보람이 있었다.

펠릭스는 제 윗입술이 애액으로 젖어 드는 게 기꺼워서 끊임없이 음핵을 핥으며 자극했다.

“으응.”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고양이 울음 같은 비음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괴롭히듯 혀끝으로 지그시 음핵을 누르고‚ 잘근거리기도 했다.

그녀가 강한 자극을 견딜 수 없는지 허리를 움찔움찔 떨며 테이블보를 움켜쥐었다.

“하아‚ 공작님. 저‚ 전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박아 달라고?”

“네에.”

저 좋은 거 해 주는데도 세라는 뭐가 그리 급한지. 자꾸만 삽입을 재촉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나. 왜 그렇게 서두르지?”

“그‚ 그게‚ 거‚ 거기 때문에요.”

“거기라니. 알아듣게 이야기해.”

“죽을까 봐서.”

“뭔데.”

“그…….”

“설마 내 좆 말하는 건가?”

펠릭스는 일부러 짓궂게 물어보았다. 저 자그마한 입술에서 더러운 단어가 나오는 걸 꼭 들어 보고 싶었으니까.

“네. 고‚ 공작님…….”

“공작님‚ 뭐. 정확히 이야기하라니까.”

“…좆.”

머뭇대다 그 단어를 내뱉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성기가 꺼떡거렸다.

“힘들게 세워 놨는데. 사그라들어 버리면 못 하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음부를 빨리며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얼마나 야한데. 좆이 죽는다고?

어이없는 걱정이었다.

“내 좆이 죽을까 봐 걱정돼‚ 세라 에보트?”

“…네. 안 서면 안 해 주신다고…….”

그는 울먹거리며 하찮은 걱정이나 해 대는 세라를 마구 괴롭히고 싶었다.

“그럼 젖이라도 꺼내 보든가.”

“가‚ 가슴이요?”

“응. 혹시 아나. 나한테 아래 빨리면서 젖이라도 흔들면 안 죽을지.”

“그런 걸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 그걸 싫어하는 남자도 있을까. 펠릭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저 새하얀 젖가슴이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으니까.

“꺼낼게요‚ 그럼.”

세라가 손을 발발 떨며 주섬주섬 앞섶을 풀었다. 그 모습에 신경질이 나서 펠릭스는 음부를 빨다 말고‚ 그녀 위로 기어 올라왔다.

“하여간 할 줄 아는 게 뭐야.”

이제껏 제 손으로 해 본 게 있긴 할까. 수음이라도 해 봤다면 다행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갑자기 짓궂은 짓을 시켜 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만져 봤어?”

“…네?”

“네 가슴‚ 손으로 주물러 봤냐고.”

“그야‚ 씻으면서…….”

그가 큰 손아귀로 단추와 리본을 거칠게 뜯어내고는‚ 가슴을 끄집어냈다. 말랑한 두 개의 살덩이가 쏟아지듯 출렁이며 튀어나왔다.

“씻으면서 야하게 주무르고 아래로는 질질 흘렸나?”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넣어 줄 사람 없어서 위아래로 비볐냐고.”

망측한 소리였다. 세라는 말을 하다 멈추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위‚ 물론 해 봤지만 했다고 고백하기는 부끄러웠다.

“안 해 봤으면 지금 해 봐.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있어야지.”

“네?”

“밑에 마저 빨아 줄 테니까. 넌 이거나 얌전히 주무르고 있으라고.”

“제가 제 가슴을요?”

“왜‚ 아니면 젖도 빨아 줘야 하나?”

“아‚ 아뇨. 그냥 주무를게요.”

“됐고. 움켜쥐고 가지런히 모아서 내 앞에 내밀어.”

“네?”

“빨리. 좆 죽으면 책임질 거야?”

“아앗‚ 네.”

펠릭스가 일부러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하자‚ 자그마한 손으로 낑낑거리며 가슴을 모아 쥐었다.

풍만한 가슴은 남자의 손아귀에도 넘쳐흐를 것 같았다. 채 수습도 못 하고 앞쪽으로 내민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또 언제 세운 건지‚ 진분홍빛이 도는 유두가 살덩이에 밀려 뾰족하게 내밀어졌다. 발간 홍조를 띤 젖꼭지는 꼭 앵두 알처럼 영글어 보였다.

제기랄‚ 뭐가 이렇게 맛있게 생겼어. 한 입 베어 물고 싶게. 늘 거슬릴 정도로 싫은 여자 주제에 몸뚱이는 또 왜 이리 야한 건지. 어이가 없었다.

“젖꼭지 튕겨봐.”

“제가요?”

“되묻지 말고. 그 새끼한테 능숙해 보여야 한다며. 남자 앞에서 젖꼭지 하나 못 비비면서 무슨.”

“해‚ 해 볼게요.”

세라가 손끝으로 양쪽 유두를 살짝 튕겨 보았다. 어깨가 움찔하며 뒤틀렸다.

입 안에 군침이 가득 고이자마자‚ 펠릭스는 식욕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가슴을 크게 물었다.

“하으!”

젖꼭지와 유륜이 입 속으로 쪽 빨려 들어가자 세라가 자지러지듯 몸을 떨었다.

뜯어 먹히는 것 같은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쥐고 있던 젖무덤을 놓칠 뻔했다.

“세라 에보트. 젖꼭지 빨리기 싫어?”

“아뇨. 그‚ 그냥 놀라서.”

“계속 빨 거니까 꽉 붙들어.”

“읏‚ 흐으‚ 왜…….”

“건방지게 말대꾸는. 좆질 필요 없나.”

“아흣‚ 아‚ 아뇨.”

펠릭스는 그녀가 내민 젖꼭지를 번갈아 빨고‚ 혀끝으로 희롱하면서 한 손으로 음부를 파고들었다.

유두를 쭙쭙대며 빠는 소리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찌걱찌걱 비벼 대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세라는 좀처럼 앞뒤가 안 맞는 펠릭스의 행동이 영 혼란스러웠다.

좆질을 볼모로 거만하게 명령이나 해 대고. 짜증 날 정도로 재수가 없는데 또 그게 묘하게 흥분되었다.

상대를 만족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왜 이렇게 물고 빨아 대는 거지. 꼭 흥분시키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섰으면 그냥 박아 주면 될걸. 어차피 처녀라는 건 다 살기 위한 거짓말일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걸까. 스스로 좋아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혐오하는 여자를 유린하며 성욕을 느끼는 가학적인 성격인 걸까. 저 성격 파탄자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상황에서 고자보다는 오히려 변태가 나을지도 몰랐다. 살기 위해 무조건 섹스를 해야 하는 세라의 입장에서는 고마웠다.

아래위로 몰아치는 자극에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 회음부를 맴돌던 그의 손가락이 내벽을 깊게 파고들었다.

“흐읏.”

세라의 안쪽이 그의 손가락을 연신 빨아 당기며 달라붙었다. 펠릭스는 손가락이 씹히는 것 같은 감각에 안쪽을 넓히듯 둥글리며 후우‚ 낮은 신음을 뱉었다.

“이렇게 좁아터져서야.”

“읏‚ 으응.”

“성가셔.”

충분히 넣어 흔들고는 손가락의 개수를 한 개 더 늘렸다. 그녀의 안은 터질 것처럼 뜨겁고‚ 빠듯하고‚ 축축했다.

이거 박을 수는 있는 걸까. 손가락 두 개만으로 대책 없이 떨어 대는 여체를 보자 그냥 헛웃음이 났다.

펠릭스는 중지와 약지로 가위질하듯 안쪽을 넓혔다. 분명히 흐를 정도로 풀어 주었는데도 질 내벽이 빡빡하게 감겨 왔다. 가쁜 숨이 그녀의 입술 끝에서 정신없이 할딱거렸다.

“세라 에보트.”

“흐으‚ 읏‚ 으.”

“대답.”

“네. 흣. 흐.”

“네 손으로 아래 비벼 봐.”

“왜 자꾸‚ 흐응‚ 그런 거‚ 윽.”

“능숙해 보이고 싶다며.”

세라는 몰려오는 수치심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능숙해 보이는 거랑 자꾸 자위시키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큰맘 먹고 좋은 거 가르치는데 애새끼처럼 칭얼대기만 하고. 어이가 없네.”

“수치스럽단 말이에요.”

“할 줄 아는 게 뭐야. 너 좆도 잘 못 빨잖아.”

“미안하네요. 못 빨아서.”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대놓고 핀잔을 주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래서 보내 준다잖아요. 얼른 싸지르고 잘 빠는 년 만나면 되겠네.”

세라는 울화가 치밀어서 얼른 박히고 끝내고 싶었다.

“그건 알아서 할 테니까‚ 미안하면 네 가랑이나 만져.”

“이야기가 그게 왜 그렇게 되는데요? 그까짓 거‚ 저도 배우면 잘할걸요? 애인 거는 능숙하게 잘 빨아 줄 거니까 참견하지 마세요.”

왜 자꾸 이래라 저래라야. 세라는 뻔뻔한 낯짝이 꼴도 보기 싫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새끼 거?”

착각일까.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펠릭스가 숨을 후‚ 뱉더니 그녀의 턱을 잡아채 제 앞으로 고정시켰다.

“씨발‚ 진짜 꼴리는 게 뭔지 알려 줘?”

“뭔데요. 그게.”

“좆 빠는 거보다 네 몸뚱이가 더 야하니까‚ 이용하라고. 밑구멍으로 질질 흘리면서 단내 풍기면‚ 씨발.”

“읏‚ 흐으.”

“그 새끼도 나처럼 좆 세우고 정신 못 차리겠지.”

입이 왜 저렇게 거칠어졌지? 아까부터 ‘씨발’이라는 말만 몇 번째 듣는 건지.

고귀한 신분답게 결코 흥분하는 법이 없던 펠릭스는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해 보였다. 위화감을 느낀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펠릭스의 눈은 무슨‚ 약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자위 보는 게 소원이라는데. 세라가 손을 아래로 뻗어 음핵을 비볐다.

“흐으응.”

질 안이 후벼지는 동시에 음핵을 자극하자‚ 발등이 오므라들 정도로 좋았다.

“건방지게 굴어 봐. 잘하잖아‚ 그런 거.”

“펠릭스. 그‚ 그만. 흐으‚ 읏‚ 아아.”

건방지게 굴라니까 바로 이름을 부르며 웅얼거렸다. 항상 깍듯하게 세르반테스 공작님이라더니. 제 이름 따위‚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 없으면서… 건방지게. 갑자기 실없이 간지러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페‚ 펠릭스‚ 이제‚ 읏‚ 으응.”

새된 교성에 제 이름이 섞이자 더 괴롭히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무슨 명령을 하려는 것 같은데.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밭은 숨만 내쉬며 달싹대는 입술이 거슬렸다.

입 안에 삼켜 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키스 같은 시시한 걸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잠깐‚ 저 얄미운 입술이 지껄이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고 싶다. 그뿐이었다.

“페‚ 펠릭‚ 흡.”

펠릭스가 세라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헐떡거리며 전하려던 말이 그의 입술에 전부 잡아 먹혔다.

난잡하게 혀를 얽고 뿌리까지 빨아 당기자‚ 따스한 타액이 입 안에 흘러들었다.

아니‚ 이게 왜 달게 느껴지냐고.

다분히 굴욕이었다. 제게 좆질이나 구걸하는 한심한 여자에게 제발 단물 좀 흘려 달라고 물고 빨면서 보채고 있지 않은가.

“벌려. 박아 줄 테니.”

정신없이 혀를 뒤섞던 펠릭스가 입술을 거칠게 떼어 내고 달뜬 숨을 뱉었다.

“흐응‚ 응‚ 아. 어‚ 어디…….”

“네 손으로 잡고 벌리라고.”

그의 명령에 그녀는 양손으로 허벅지 안쪽을 붙잡고 음부를 활짝 벌렸다.

벌어진 질구에 찬기가 들던 것도 잠시‚ 그 위로 묵직한 페니스가 길게 문질러졌다. 애액으로 선단과 몸통을 충분히 적시고는 천천히 삽입했다.

“으.”

딱딱한 귀두가 비좁은 내부를 가르듯 파고들자‚ 묵직한 통증이 골반을 타고 퍼졌다.

그저 끄트머리만 걸쳤을 뿐인데도. 허리가 움찔 꺾이며 시야가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더 벌려야지.”

“…지금 읏‚ 최대한.”

“이래서 박을 수나 있겠어?”

여기서 더 못 벌린다고요. 최대한 벌어진 그녀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발발 떨렸다.

알베르토도 그렇고‚ 펠릭스도 그렇고. 누가 19금 게임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다 성기의 크기가 비현실적이었다.

망상으로 즐길 때나 좋지. 그걸 직접 받아 낼 때는 큰 각오가 필요했다.

“그냥 흐‚ 한 번에‚ 읏‚ 넣어요.”

“명령하는 거야?”

변태도 아니고. 다 알면서 되묻는 모습이 얄미웠다. 세라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터지겠는데.”

펠릭스가 허공에 뜬 채 힘겹게 버티는 다리를 받아 팔에 걸고 페니스를 힘주어 밀어 넣었다.

“아!”

“반 넣기도 힘든데. 후우‚ 건방지게.”

“천천히 하니까‚ 읏‚ 흐으‚ 더 아프단 말이에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책망하듯 말하자‚ 그가 낮게 웃었다.

“좋아‚ 소원대로 해 주지. 아프면 날 씹든지‚ 할퀴든지.”

“…네?”

“일단 박고 정산하자고.”

선심 쓰듯 조건을 내건 펠릭스가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마치 부시를 친 것처럼‚ 꽉 다물린 내벽 안에 살 기둥이 세게 마찰하며 뜨거워졌다.

“흑‚ 흐으‚ 자‚ 잠깐!”

“후우‚ 천천히 하면 아프다며.”

습격과 같은 삽입에 척추 마디마디가 저릿하게 튀는 느낌이었다.

흐읍‚ 깜짝 놀라 숨을 멈춘 것도 잠시‚ 어느새 재미를 붙인 그가 쉴 새 없이 찧어 대는 통에 절로 숨이 헐떡거렸다.

“뜨거워. 불난 거 같아.”

“흐응‚ 으‚ 으으.”

“이렇게 푹 젖었는데 불이 붙을 수 있나.”

조급하게 흘레붙던 펠릭스가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원래 몸이 이렇게 뜨거운 편인가?”

“하윽‚ 으‚ 흐.”

“세라 에보트. 박아 주니까 좋아서‚ 응? 완전히 맛이 갔나 봐.”

지금 맛이 간 게 누군데. 늘 권태로운 얼굴로 그녀를 깔보던 남자는 여기 없었다. 불에 데기라도 한 건지‚ 견딜 수 없게 달뜬 얼굴을 하고선 조급하게 박아 넣었다.

할퀴라면서. 그는 세라의 손에 깍지를 낀 채 결박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움켜쥐는 힘이 강한 통에 세라는 주먹을 쥐지도 못하고 붙들려만 있었다.

깨물라면서. 이렇게 쉴 새 없이 들썩대며 박으면 어딜‚ 어떻게 물라는 건데?

지금 세라는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그의 밑에 깔려 묵직한 압박감을 견디며 하염없이 흔들리는 것밖에는. 세라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왜 깨무는 거야.”

“으흑‚ 흐‚ 아프단 말이에요!”

“아프다고 자기 걸 깨무나?”

“그럼 뭘‚ 흑‚ 할 수 있는데요. 당신한테 이렇게 흣‚ 묶였는데!”

아차‚ 아주 정신을 놨었네. 펠릭스가 그녀를 벼랑까지 몰아붙이고 만 제 꼴을 보고 옅게 웃었다.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꼭 토끼몰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라 에보트는 겁도 없이 폴짝대다가 길목에 몰리니 발라당 자빠져 비탈로 굴러떨어지는 멍청한 짐승 같았다. 기세 좋게 까불더니만 제 밑에 깔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대는 꼴이라니. 어쩐지 쌤통이었다.

별것도 아닌데 정복욕이 느껴졌다. 마치 토끼가 두 귀를 붙잡힌 채 저 살겠다고 온몸을 비트는 걸 보고 있는 것 같달까. 얄궂은 쾌감 비슷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묘하게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입술이라도 물려 줘?”

“됐어요.”

“싫어? 그럼 좆 물릴까?”

“깨물 건데‚ 잘리고 싶어요?”

세라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새침하게 날을 세우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삽입을 계속했다.

“지금도 후우‚ 씹히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곧 잘리려나.”

“헛소리 말고 윽‚ 조용히 박기나 해요.”

그녀가 눈가를 찡그리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젖은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속눈썹이 저렇게 길었던가. 눈물이 맺혀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꼴이라니.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의 짐승처럼 청승맞아 보였다.

왜 이게 꼴리지. 미친 척 그녀의 눈가를 흠빨아 보고 싶었다.

“눈감아 봐.”

“눈은 왜요.”

“빨고 싶어서.”

“미쳤어요?”

“미쳤지‚ 아니면 갑자기 좆이나 박잔다고 박고 있겠어? 바람난 약혼녀한테?”

펠릭스가 페니스를 길게 뺐다가 쿵‚ 들이받았다.

“흐읏!”

묵직한 귀두에 자궁구가 찍히며 꼭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아랫배에서 열기가 끓자‚ 세라의 골반은 곧장 한계까지 뜨거워졌다.

그 반응이 재밌는지 펠릭스는 몇 번을 반복해서 길게 방아질을 했다.

이거 심술부리는 건가. 세라도 잘한 건 아니었지만‚ 먼저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 하니 파혼하자고 한 주제에.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요.”

“맞지. 주제 몰라서 미안.”

“먼저 파혼하자 한 건‚ 흣‚ 펠릭스 당신이에요.”

“그러게. 내가 개새끼네. 닥치게 뭐라도 물려 줘‚ 그럼.”

그래. 저 망측한 소리 좀 못 하게 하려면 뭐라도 물리는 게 낫겠지. 세라는 그에게 얼굴을 내밀어 입을 맞췄다.

촉‚ 호흡이 짧게 붙었다 떨어져 나가자 그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옳지.”

그가 손깍지를 풀고는 세라의 몸을 일으켜 등허리와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자세 바꿀 거야. 목 안아.”

세라는 그의 명령대로 두 팔을 교차해 목을 안았다. 그가 그대로 탁자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공중에 붕 떠서 대롱대롱 매달린 자세가 되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몸이 밀착되자 안에 박힌 성기가 더 깊게 파고들었다. 안쪽을 꿰뚫린 채 낭떠러지까지 몰아붙여지다니. 곡예를 하는 것처럼 발끝이 저릿했다. 막연한 공포가 밀려왔다.

“내려 줘요. 힘들어.”

“혀 빨게 해 주면.”

“술 주면요.”

아슬아슬한 체위가 버거워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가 순순히 놓아줄 리는 없고‚ 술이라도 머금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았다.

“주정뱅이네.”

그가 잔에 남은 위스키를 입에 머금고는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발그스름한 혀가 내밀어지자마자‚ 펠릭스가 다급하게 입술을 겹쳤다.

입맞춤과 함께 흘러들어 온 독주에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술을 남김없이 받아 마시자 그는 다분히 집착적으로 혀를 빨아 댔다. 타액이 새어 나오는 족족 빨아 삼키는 통에‚ 세라는 꼭 흡혈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성기를 박은 채로 침대까지 걸어갔다. 설마 저를 떨굴까 봐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음부를 찔리며 움찔움찔 떨어 대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대로 방 한 바퀴를 다 돌면 기절하겠지. 펠릭스는 그녀를 침대에 던지듯 풀어 주었다.

침구에 폭 파묻힌 그녀가 발간 얼굴로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엎드릴까?”

펠릭스의 명령에 세라가 순순히 침대에 엎드렸다.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벗겨져 있던 하체 위로 다시금 쏟아졌다.

“이거 거슬리는데. 어떻게 좀 해 봐.”

“네?”

“아니면 내가 하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드레스 자락을 북 찢어 버렸다. 세라는 기함하며 이불을 움켜쥐었다.

어차피 찢을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속옷도 찢어졌는데. 발가벗은 아랫도리를 하고선 어떻게 돌아다니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엉덩이 들어.”

그러거나 말거나. 펠릭스는 그녀에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페니스를 찔러 왔다.

“흐윽!”

갑작스러운 삽입에 허리가 꺾이고 고개가 한껏 젖혀졌다. 충격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쿵‚ 울리는데도 쉴 틈 없이 무자비한 삽입이 이어졌다.

“아흐‚ 잠깐‚ 흐응‚ 응‚ 아아!”

과한 자극에 어깨를 비트는데도 그는 온몸을 옥죄듯 감아 왔다. 그렁그렁 맺혀만 있던 눈물이 뺨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흑‚ 흐으.”

짧은 흐느낌과 함께 홍조를 머금은 엉덩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거세게 밀어 넣는 통에 버티고 있던 팔이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상체를 무너뜨리자‚ 펠릭스가 삽입을 유지한 채로 그녀의 등을 덮듯이 깔아뭉갰다.

“울어?”

“흑‚ 몰라.”

“우는 거 맞네.”

그의 손가락이 눈 주변을 확인하듯 훑었다. 이윽고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목뒤로 부서졌다.

“그러는 당신은‚ 흣‚ 웃어요?”

“응‚ 울리니까 좋아서.”

그가 낮게 웃으며 이불 틈에 손을 비집어 넣어 유방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삽입의 속도는 늦어졌지만 느릿하게 허리를 돌리는 바람에‚ 내벽은 뜨겁게 흐물거렸다.

마치 주름 하나하나에 제 것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만들려는 듯 집요하게 휘저어 댔다.

“아‚ 이거‚ 아아‚ 이상해.”

“얘기해‚ 그 새끼한테.”

“아흐‚ 으‚ 아아!”

“너 나랑 안 비빈 곳 없다고.”

그럴 때마다 애액으로 범벅이 된 음낭이 회음부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내 좆물 냄새 나는 여잘 좋아하는 변태 새끼니까.”

“으흑.”

“친히‚ 구멍 터질 때까지 싸 준다고 전해.”

“취했나 봐요‚ 당신.”

“그러게. 네가 미치게 예뻐 보이는 걸 보니. 완전 맛이 갔나 봐.”

질 내벽을 샅샅이 뒤지다 유독 경련이 이는 지점을 찾아낸 펠릭스가 귀두로 지그시 눌러 댔다.

“흐읏.”

누르지만 말고 쑤셔 주면 좋겠는데. 가려운 데를 눌린 채 결박당한 세라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세라 에보트. 재주도 좋아.”

“왜요.”

“혼자서도 잘 박네.”

“너무해‚ 흣.”

유유하게 관망하기만 하던 그가 몸을 일으키고는‚ 그녀의 엉치뼈를 누르며 깊게 삽입하기 시작했다.

질 내벽이 삽입을 반기는 것처럼 욱신대며 조여들었다. 펠릭스가 탁한 신음을 뱉었다.

“하‚ 엄청 조여. 쑤셔 주니까 좋아?”

“으응‚ 응‚ 좋아.”

“좋은데‚ 씨발. 내 좆물 품고 딴 새끼한테 간단 소리가 나와?”

“너‚ 너도 딴 여자랑‚ 흐읏.”

“못 가게 꽉꽉 물어 대면서. 다른 여자랑 하라고?”

제길‚ 뭐가 그렇게 쉬워?

함부로 다른 이를 입에 담는 세라를 보자 심사가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으윽!”

펠릭스는 그녀의 젖은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허리가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자 꼼짝도 못 하게 누른 채 안쪽에 사정했다.

숨통을 끊을 듯이 내리찍는데도 살겠다고 헐떡이는 사냥감처럼‚ 세라의 음부가 쏟아부어지는 백탁 액을 탐욕스럽게 받아 삼켰다.

불덩이처럼 뜨겁던 세라의 온몸이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었다. 펠릭스는 그녀의 젖은 목덜미를 혀로 핥다가‚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정면으로 돌려 눕혔다.

성기가 길게 뽑히며 안에 고였던 체액이 엉망으로 흘러내렸다.

“이런‚ 다 흘렸잖아.”

“하아‚ 하아…….”

“딴 놈한테 보내려면 처음부터 다시 싸 줘야겠네.”

그가 그녀의 다리를 안은 채‚ 아직 수그러들지 않은 성기를 다시 박아 넣었다.

“흐읏!”

그는 질질 짜면서 흔들리는 그녀를 샅샅이 눈에 담았다. 목덜미에 다른 놈이 낸 흔적을 보자 빠득 이가 갈렸다.

이 안에 더 많이 싸질러서‚ 아예 제 씨물에 절여 버려야 건방진 생각을 못 하겠지. 그런 기이한 다짐이 들었다.

“후우. 다른 여자들은‚ 세라 에보트.”

그가 세라의 귓가에 사악하게 속삭였다.

“너 주고 남으면 생각해 볼게.”

근데 남을까 모르겠네. 그가 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미친‚ 아직 안 끝난 거야?’

세라는 취기 때문인지‚ 지칠 줄 모르고 흘레붙어 대는 수컷 때문인지 정신이 아득해져서 눈앞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시스템: 새로운 자극 발생!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묻긴 왜 물어. 어차피 지금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세라는 술기운에 혼몽해진 의식을 붙잡고‚ 그의 입술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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