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치트키
세라는 뻐근한 통증에 부스스 눈을 떴다. 간밤에 무리해서일까.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아래를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흰 피부 곳곳에는 빨고 깨문 듯한 울혈이 가득했다.
아연한 채로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는데‚ 목뒤에서 간지러운 숨이 부서졌다. 뒤이어 촉촉‚ 따뜻한 입술이 달라붙었다.
“일어나셨군요.”
알베르토의 목소리였다.
“…읏.”
아래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이물감에 세라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맙소사‚ 그가 페니스를 아직 빼지 않은 채‚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이러고 잔 거야?”
“네. 일부러 안 뺐습니다.”
“왜?”
“다 삼키실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요.”
말도 안 돼. 애초부터 그의 정액은 그런다고 흡수될 양이 아니었다. 밤새 몇 번이고 사정한 탓에 실신하듯 잠든 참이었으니까.
“미쳤네.”
“그러게요. 근데 어쩌죠. 또 서 버렸는데.”
그녀가 피식 웃으며 놀리자‚ 그의 페니스가 다시금 부피를 키우며 안쪽을 빠듯하게 채웠다. 다시 가해지는 자극에 질 내벽이 화끈거리고 움찔움찔 오므라들었다.
“이대로 흔들기만 하면 되는데. 한 번 더 할까요?”
미친‚ 아직도 이럴 체력이 남아 있는 거야? 그는 괜찮을지 몰라도 이쪽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세라는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중에. 지금은 힘들어.”
“아가씨는 누워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몸을 비트는데도 그는 더 세게 부둥켜안았다. 목덜미를 빨며 유두를 굴려 대는 통에 간지러워 어깨를 웅크리던 그때였다.
[시스템: 튜토리얼 모드가 끝났습니다. ‘세라의 방’(5층)을 나가 본 게임을 시작해 주세요.]
[시스템: 튜토리얼 모드 완료 후‚ 12시간 내 본 게임을 시작하지 않으면 강제 시작됩니다. (남은 시간: 4시간)]
강제 시작? 말도 안 돼.
예상치 못한 급 전개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알베르토와 관계를 갖는 게 이 게임의 ‘튜토리얼’이었던 거야?’
완료하면 12시간 안에 방을 나가야 하는 거고. 그중에 벌써 8시간이 지난 상황.
남은 시간은 고작 4시간이었다.
‘망했네.’
암담했다. 알베르토와의 생활에 익숙해져서일까. 이 방을 나갈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다.
그러게 가만있는 알베르토는 왜 건드려서는 화를 자초했을까. 그를 유혹하지 않았다면 계속 여기 머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버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계속 지분거리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자‚ 알베르토가 넌지시 물었다.
“아‚ 알베르토. 미안한데‚ 나 이제 나가야 할 것 같아.”
“…….”
그는 답이 없었다. 이 방에서 나가지 않길 바라는 걸까. 물론 가장 그러고 싶은 건 그녀였다.
나가면 매 순간이 살얼음판일 텐데 안락한 내 방을 두고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싶을 리가 있나.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것과 직접 그 캐릭터에 빙의한 상황이 되는 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도 알베르토한테는 좀 미안했다. 덕분에 한동안 아무 걱정도 없이 안온했으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하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함께 몸까지 섞어 놓고 꼭 버리고 도망가는 걸로 느껴질 테니까. 그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세라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돌봐 준 건 고마운데‚ 사정이 생겼어.”
“알고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세라의 정수리에 지그시 입을 맞추더니 성기를 뽑고 돌려 눕혔다.
등이 침대에 닿음과 동시에 정액이 회음부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그 끈적한 감각에 한쪽 눈을 찡그리는데 그가 몸 위로 올라왔다.
“…뭘 알고 있는데?”
“아가씨의 지금 처지.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전부요.”
“…….”
눈이 휘둥그레진 세라와 달리‚ 그는 그저 텅 빈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물어보면 알려 줄 생각도 있는데.”
그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 위에 아주 천천히 겹쳐졌다가 떨어졌다.
“물론 이런 대가는 있어야겠지만 말입니다.”
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뭘까.
생각해 보면 이 방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을 집사라고 소개한 것 말고 다른 언급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를 NPC라고만 생각했다.
아무 의욕도 없이 잠만 자던 그녀 앞에 나타나 욕구를 일깨워 준 것도 그였다. 그러니까 그와의 관계는 일종의 연습 게임이었다. NPC답게 게임 진행을 돕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셈이었다.
애당초 NPC였기 때문에 튜토리얼을 깨고 나면 이렇게 정보를 주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범인이 고용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건 사실이었다.
단순한 호의로?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만약 고용된 게 아니라면 이 사람은 누구지?
“…너 누구야?”
“집사요.”
“그거 말고. 진짜 정체가 뭐냐고. 날 가두라고 누구한테 고용된 거야?”
“이제야 그게 궁금한 겁니까.”
경계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데도 당황한 기색조차 없었다. 불편한 기류 속에 얼어붙은 이는 오직 그녀뿐인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고용된 게 맞겠네요. 다만 절 고용한 분이 누군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걸 찾는 게 아가씨의 몫이니까요.”
“…….”
하긴‚ 쉽게 알려 줄 순 없겠지. 알베르토가 지금껏 조력자 역할을 해 주었다고 해서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제 정체는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아가씨를 돕는 역할‚ 그 자체라는 거.”
단순히 튜토리얼을 깨서 게임을 시작하게 하는 용은 아니었나?
돕는 역할 그 자체라니.
그를 이 이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려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헛된 희망을 품는 걸까.
어쨌든 원하는 만큼 구체적인 답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밝힐 생각까지는 없다는 거겠지.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왠지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가씨를 도와주려고요.”
그가 느릿하게 그녀의 오금을 움켜잡더니 무릎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흘러내린 정액을 윤활제 삼아 다시금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읏.”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몸짓에 미처 거부할 새도 없었다. 세라는 제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커다란 페니스를 버겁게 받아 냈다.
이런 상황에 아무 생각도 없이 몸이나 섞자니 영 마뜩잖아서 엉덩이를 뒤로 빼는데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제보단 덜 아파하시는 걸 보니‚ 밤새 넓혀 둔 보람이 있네요.”
“헛소리하지 말고 내려가.”
“이대로 나가면 대책이라도 있습니까?”
이 방에 머물면서 아기 새처럼 주는 것만 받아먹었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세라가 알고 있는 건 플레이 하면서 무수히 겪었던 오답뿐이었다. 그마저도 첫 번째 남주이자 그녀의 약혼자‚ 펠릭스 세르반테스에 한정된 것뿐이고.
다른 두 남자는 하드 모드에서 깊게 얽혀 본 적이 없었다.
“…….”
정곡을 찔린 세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잇새의 입술을 빼며 엄지로 입 안의 여린 살을 훑었다.
“제가 아가씨라면 저를 최대한 이용하겠습니다.”
“지금처럼 애매한 소리만 할 거라면 관심 없어.”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
“뭐가 문젭니까. 몸이건 정보건 다 대 줄 의향 있다는데.”
일부러 튕겨 보았는데‚ 저를 이용하라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래. 그녀가 결코 손해를 보는 제안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 굽히고 들어가는 게 뭔가 자존심 상하고 괘씸할 뿐.
“씻고 나갈 준비 해야 해.”
“그런 시답잖은 일은 제 몫이니 맡겨 두시고.”
알베르토가 입술을 비틀며 그녀의 머리칼을 제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아가씨는 아가씨의 몫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몫이라니?”
“발정 난 개새끼한테 충분한 먹이를 제공하는 일이요.”
“너한테 미인계라도 쓰라는 거야?”
새침하게 묻자 그가 픽 웃었다.
“그거 좋네요. 어제처럼 모른 척 넘어가 드릴 테니 해 보시든가요.”
“그럼 주도권은 나한테 있어야지.”
그래. 이용할 땐 이용하더라도‚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확실히 써먹어야 했다.
그녀가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표정을 지운 채 그에게 명했다.
“너 누워. 내가 올라갈래.”
“제법 깜찍한 짓을 하시네요.”
세라는 손끝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도발이 싫지 않은지‚ 그가 실소하며 그녀의 눈을 홀린 듯이 주시했다.
“야‚ 강아지. 배고프면 건방지게 굴지 마.”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성기를 빼냈다. 검지를 세워 그를 뒤로 툭 넘어뜨리고는 허리 위에 올라탔다. 덕분에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었다.
꼴깍. 목울대가 길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얌전히 기다리는 거야. 감히 주제도 모르고 위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알겠어요‚ 아가씨.”
그의 손이 허리를 타고 젖가슴을 감싸 쥐려 하자‚ 이내 탁 쳐 냈다. 쉽지 않네. 중얼거린 알베르토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샜다.
“얌전히 굴랬지. 손버릇 나쁜 강아지는 딱 질색이야.”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먹이를 가진 건 주인님이고‚ 나가고 나서야 나중 일이니. 지금 당장 더 아쉬운 쪽은 본인이라는 것을.
알베르토는 주인님의 명에 따르기로 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옳지.”
세라가 그의 손을 잡아 제 허리 위에 올렸다. 손이 허리를 느릿하게 쓸어 올리자‚ 제법 마음에 든 세라는 그대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축축한 음부가 페니스 위에 비벼지고 찌걱찌걱 젖은 소리를 냈다. 페니스에 피가 몰려 잔뜩 부풀었는데도 야속한 주인은 느른하게 문지르기만 했다.
애가 타긴 했지만 싫진 않았다. 깔려서 보니 움직일 때마다 새하얀 젖가슴이 출렁대는 게 또 아주 절경이었으니까. 그는 제 위에서 낭창낭창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확실히 가는 허리에 비하면 버거울 정도로 풍만한 가슴이었다. 욕조에서 자꾸 결린다고‚ 주물러 달라고 안기며 징징거렸었지.
가만히 지켜보니 그럴 만도 했다. 단순히 유혹하기 위한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지켜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못 만지게 하니 더 만지고 싶기도 하고. 자꾸만 눈에 밟혀서 무슨 수라도 쓰고 싶었다.
“아가씨‚ 그렇게 큰 걸 달고 다니는데 허리 안 아프십니까?”
“왜 묻지‚ 그건?”
“무거우면 좀 받쳐 드릴까 해서.”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네‚ 아가씨.”
역시나 바늘구멍도 안 들어갔다. 성기를 앞뒤로 비벼 대면서도 허리춤을 쥐는 것 외엔 손끝 하나도 못 대게 하다니.
저를 반쯤 미치게 하려는 수작이라면 이미 성공이었다.
“아가씨.”
“왜.”
“복종하는 조신한 개새끼가 취향인가요? 재롱도 좀 부리고?”
“응.”
“아‚ 그래서 날 따먹은 거구나.”
“알면 좀 닥치지.”
“죄송해요. 그런 토끼 같은 얼굴로 험한 말하는 게 꼴려서요.”
취향하고는. 거친 말을 내뱉자마자 그의 페니스가 움찔거리며 다리 사이를 위협적으로 찔러 댔다.
“아가씨는 밥 먹을 때도 그렇고‚ 뭘 시킬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닌 척해도 꼭 꼴리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
“그래? 내 특기인가 봐.”
세라는 일어나는 성기를 엉덩이로 지그시 깔아 누르며 유유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선단이 군침을 흘리듯 선액을 뚝뚝 흘려 댔다.
“잘됐네. 나가면 너뿐 아니라 다른 놈들도 꼴리게 해 볼까 해.”
“알고 있지만. 아가씨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좀 열 받는데.”
“강아지‚ 너 아까부터 계속 그러는데. 버릇없게 말꼬리 자르지 마.”
그녀가 눈을 치켜뜨며 그의 목을 콱 조르듯이 눌렀다. 별 힘도 없는 자그마한 손으로. 어이도 없지.
알베르토는 그녀를 그대로 제 위에 무너뜨리고 쑤셔 박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아가씨께서는 또 조신한 게 좋으시다니까. 순순히 따먹히기 위해서는 참아야만 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알베르토는 눈을 곱게 접으며 공손히 답했다.
“그래서 그놈들이랑 다 흘레붙으면. 다시 올 겁니까‚ 아가씨?”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한데.”
“처음이니까요.”
“그딴 게 뭐 중요하다고. 그런 거 집착하며 발정하는 건 오직 사내들뿐인데.”
“아뇨. 아가씨 말고‚ 제가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예상도 못 했다든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색한 침묵에 그는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설마‚ 처음인데 책임 안 지실 겁니까?”
“지나치게 능숙한데. 처음 맞아?”
순진한 집사 꼬셔서 동정을 앗아 갔으면 책임지진 못할망정. 별것도 아니란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모자라 의심까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알베르토는 다른 방식으로 어필해 보기로 했다.
“저는 다 잘하잖습니까. 요리도 잘하고‚ 안마도 잘하고. 섹스도 잘합니다. 당연히.”
“모르지. 딴 놈들이 어떨지는 봐야 아는 거니까.”
“얄미워서 깨물고 싶네요.”
“물면 바로 나갈 거야.”
“그래서 꾹 참고 있잖아요. 착하니까 쓰다듬어 주십시오.”
완전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었다. 계속 콧대를 팍팍 누르는데도 꿋꿋하게 기도 안 죽었다. 세라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왜요. 몸도 주고 정보도 준다니까요.”
“그건 솔직히 너도 좋자고 하는 일 아니야? 생색은.”
“미치겠는데 어떡해요. 재롱도 못 부리게 하시고. 어떻게 해 주십시오‚ 제발.”
알베르토가 애타는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와 골반을 마구 움켜쥔 채 주물렀다. 그 손길에 별안간 움직임을 멈춘 세라가 오만한 낯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 알베르토?”
“네.”
“못 참겠어?”
“현기증 나서 미칠 것 같습니다.”
“복종해‚ 그러면.”
복종하라니. 이제껏 한 건 복종이 아니었던 걸까. 요 부스러질 정도로 연약한 게 명령해 대는 걸 보니 피가 쏠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시키시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짖기라도 할까요?”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묻더니 귓가에 속살거렸다.
“짖는 개는 질색이고.”
“어떻게 할까요‚ 그럼.”
그녀가 그의 목을 안아 일으켰다. 깔고 앉은 허벅지가 바위처럼 딱딱한데 또 중심은 터질 듯이 뜨거웠다. 그는 풍만한 가슴을 눈앞에 둔 채 애원하듯 말했다.
“알려 주십시오‚ 아가씨.”
“알려 주면?”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은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착한 개새끼가 될게요.”
흥분을 어쩌지 못하면서도 얌전히 있으려 애쓰는 게 귀여운지 세라가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럼 난‚ 핥는 개가 좋아.”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불그스름한 혀가 비집고 나와 그녀의 젖꼭지를 할짝할짝 핥았다.
혀끝으로 지그시 눌러 주면 좋겠는데. 야속하게도 간질이듯 살짝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어제 하도 쓰리도록 물고 빨아서 다 부르텄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핥아 주니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꼿꼿하게 선 진분홍빛 유두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정욕에 젖은 제 몸을 보고 스스로 흥분이 끓어오를 만큼.
“뭐‚ 빠는 개도 좋고.”
그녀가 알베르토의 머리를 힘주어 안더니 가슴을 내밀었다. 픽‚ 젖무덤 위로 헛웃음이 쏟아졌다.
웃어? 괘씸함에 흘겨보려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혼나기 직전에 입술에 젖꼭지를 가득 머금었다.
아아‚ 완벽해. 이러니 혼낼 수가 없지.
가슴 끝에 젖은 점막이 감겨 오는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입술이 오물거릴 때마다 점막에 유륜까지 쭉쭉 빨려 들어갔다. 그게 뭐라고 발끝이 곱아들 정도로 좋았다.
“으응…….”
민감한 곳에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에‚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미 흉포할 정도로 일어선 그의 페니스는 배꼽 위로 닿을 것 같았다. 깔고 앉아 있자니 자꾸만 질구를 찔러 대서 앞쪽으로 세워 둔 참이었다. 음핵에 밀착한 살 기둥이 미끈미끈하게 위아래로 문질러졌다.
“주인한테 좆 세우는 개는 싫으십니까?”
또 요망하게 묻지. 버릇을 들이려면 아직 먼 모양이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네 시간뿐이었다.
“그러게. 건방지네.”
세라가 새침하게 답했다.
“냄새만 맡아도 서는데 어떡하죠.”
“좀 불손하긴 하지만.”
그녀가 알베르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요요하게 웃었다.
“잘 박으면 벌주진 않을게.”
동시에 엉덩이를 들어 올려 선단을 문지르자‚ 알베르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럼 맛있게 박아 드릴게요.”
그가 세라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퍽 찔러 올렸다.
“흐읏.”
묵직한 페니스가 음부를 습격하듯 관통하자 왈칵‚ 눈물이 맺혔다. 밤새 연이은 정사에 충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래에서 박는 건 또 사뭇 달랐다.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생경한 감각에 콧잔등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얌전히 흣‚ 굴랬잖아.”
“실수. 제가 좀 급해서요.”
혀를 빼꼼 내밀며 사과를 하나 싶더니‚ 또 한 번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흑‚ 너 일부러… 읏.”
“네. 이번 건 일부러.”
혼내야 하는데.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또 쿵‚ 쿵 못질하듯이 박아 댔다. 그 흉포한 삽입에 정신이 반쯤 나갈 것 같았다.
“으윽‚ 아‚ 아파. 흣.”
“아프면 그만할까요?”
잠시 멈춘 그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물었다. 약 올리는 건가. 그녀가 긍정도 부정도 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또 멋대로 삽입하기 시작했다.
“봐요. 역시 울 때 제일 예쁘다니까.”
아팠다. 아픈데‚ 그게 또 묘하게 중독성 있었다. 연신 접붙어 오는 음부가 불이 붙은 것같이 화끈거렸다.
아래가 퉁퉁 부어 쓰라린데 또 묘하게 간지러웠다. 그는 그럼 가려운 걸 긁어 주듯 타이밍 좋게 박아 올렸다.
악순환인데‚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면 이제 그만하라 다그쳐야 하는데. 느낌이 더럽게 좋았다.
괘씸한 놈. 더럽게 괘씸하게 잘하는 놈. 건방진 놈. 또 건방져서 꼴리는 놈.
미친놈. 아니 이쪽이 미친년인가.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아서 자꾸 기이한 감상만 떠올랐다.
마치 좋은 걸 다 안다고 하는 것처럼 배시시 웃는 알베르토를 보자 분해서 죽을 것 같았다. 잔뜩 열이 올라 발그레해진 세라의 뺨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가 혀끝으로 뺨 위를 지분대며 핥다가 이를 세워 콱 깨물었다.
“아악! 뭐‚ 뭐야!”
“귀여워서요.”
“물면 바로 나간다고 했지.”
“한 번만 봐주세요.”
놀라 파드득 떠는 모습을 보고 또 귀엽다며 웃는다.
…혹시 또라이일까.
그러고 보니 눈이 좀 풀린 게‚ 약간 맛이 가 있었다.
어쨌든 처음과는 느낌이 사뭇 달라졌다. 언제나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복종하던 그가 제법 대범한 짓을 한다.
예상치 못한 관계로 인해 뭔가 변화가 생긴 걸까?
그가 살짝 잇자국이 난 뺨에 입술을 지그시 비볐다.
“무는 개는 싫으십니까?”
“당연히 싫지.”
목선을 입술로 문대며 내려온 그가 또 한 번 어깨를 빠득 깨물었다.
“윽‚ 너 진짜 자꾸……!”
“어떡하죠. 아가씨만 보면 이가 근질거려서 말입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세라는 뻔뻔한 핑계를 대는 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뭐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가씨는 아래로 물고. 전 위로 물고.”
“흣‚ 흐으.”
“그래도 전 아가씨에 비해 살살 무는 건데요.”
그가 안쪽 깊이 반복해서 치대 오는 통에 내벽이 움찔움찔 수축했다.
온몸의 감각이 안쪽으로 쏠렸다. 틈 없이 맞물린 그의 페니스가 내벽의 주름을 핥듯이 휘저었다.
묵직한 귀두부터 흉흉하게 돋아난 살 기둥의 핏줄까지. 전부 다 점막을 파고드는 것처럼 감겨 왔다.
아‚ 좋아. 빠듯했던 고통 따위 이미 휘발된 지 오래였다. 까짓것. 날이 선 쾌감을 맞이하기 위해 기꺼이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가 그녀를 밀어 눕히더니 덮치듯이 올라탔다. 순식간에 그에게 뜯어 먹히는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이런‚ 또 올라타 버렸네.”
“읏‚ 아아‚ 흐읏.”
“혼내 주세요‚ 아가씨.”
건방지게 혼내 달라 청했다. 아니‚ 어쩌면 청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완벽했던 집사는 주인 위에 올라탄 순간부터 묘하게 지배적이었다.
그녀의 충실한 종이어서 여전히 시선은 온통 주인을 향하면서도‚ 또 그걸 교묘히 제 뜻대로 주무르는 것에 사용했다.
주도권을 잡으려 해도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근본도 없는 하극상에 아슬아슬하게 흥분되는 건 뭘까.
그게 뭐가 됐건 정상은 아니었다. 아마도 취향의 문제겠지. 이 또한 주인의 취향을 파악한 집사의 맞춤 서비스일까.
곱씹을수록 완벽하기 그지없네. 또 사고 회로가 또 그렇게 흐르는 걸 보니 구제 불능이었다.
“안 혼내면 더 버릇없어질 건데.”
세라는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면서도 밑에 깔려 아득하게 흔들렸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사특하게 웃고는 그녀의 발목을 그러쥔 채 양쪽으로 벌려 고정했다. 그리고 한층 더 격하게 삽입했다.
몸이 반으로 접히고‚ 그의 귀두가 자궁구를 짓뭉개며 찧어 댔다. 척‚ 척. 점액과 살갗이 엉겨 붙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골반이 쿵쿵 울리고 아랫배에 뜨거운 것이 쏟아졌다.
“아! 잠‚ 잠깐… 응‚ 읏‚ 아아!”
“어쩌죠‚ 이미 늦었는데.”
그는 제 주인을 무도하게 들쑤셔 대며 낮게 신음했다. 몰아치는 흥분에 미처 나무라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어 대는 모습에 더 심한 짓을 하고 싶었다.
뭉근한 불에 끓인 크림 같은 질 안에 제 것을 푹푹 처박았다 빼낼 때마다 새빨간 살점이 딸려 올라붙었다. 그는 그 모습 전부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녀를 눌러 눕히고 쉴 새 없이 깔아뭉개는 건 자신인데도‚ 꼭 뜯어 먹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주인에게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지. 왜 그리도 버릇없이 올라타 흔들 수밖에 없는지.
할 수만 있다면‚ 순수하게 당하는 줄로만 아는 요망한 아가씨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다.
그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라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그 눈이 다시 자신을 일방적인 포식자로 만들었다.
정말이지. 빌어먹게 야한 눈이었다.
“하아‚ 안 보내고 싶어요.”
“아! 하아‚ 읏‚ 으!”
“어쩌지. 다 죽여 버릴까.”
추삽질에 따라 그녀의 젖가슴이 요란스레 흔들렸다. 하얀 살덩이가 허공에서 튀며 젖꼭지로 둥그런 궤적을 그리는 모습이 절경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아서 그는 그녀의 다리를 팔에 걸고 몸을 깊숙이 묻었다. 각도를 바꿔 그녀가 느끼는 예민한 부분을 조준해 후벼 파듯 삽입했다.
밀어낼 땐 언제고‚ 그녀가 애원하듯 몸을 밀착시켰다. 야한 홍조를 머금은 온몸이 경련하듯 흔들렸다.
“흐으응! 아‚ 응!”
그가 질 내벽을 긁어내리며 성기를 길게 뽑고는‚ 질구에 걸쳤다가 다시 쳐올렸다.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그‚ 그만! 나‚ 나와‚ 하아‚ 아아!”
흰 목덜미를 짙게 흠빨며 콱 쪼듯이 쑤셔 넣자‚ 그녀의 몸이 뒤틀리며 왈칵‚ 맑은 액체가 쏟아졌다.
“읏‚ 응‚ 으응!”
질 근육이 제멋대로 수축하며 그의 페니스를 빨아 댔다. 한계까지 뜨거워진 내벽에서 쿵쿵‚ 맥이 뛰는 것 같았다. 살 기둥을 녹여 먹을 것 같은 위험한 감각이 그를 집어삼켰다.
“하아…….”
알베르토가 긴 숨을 내쉬며 그녀 안에 사정했다. 꿀렁거리며 백탁액을 내뿜는 동안‚ 더듬더듬 턱선을 타고 올라가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따뜻한 타액이 스며들어 오며 몸이 나른해졌다.
다 죽여 달라면 그럴 용의도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야속한 아가씨 안에 제 냄새를 잔뜩 묻히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
“아가씨.”
알베르토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세라는 정사 후 침구에 푹 파묻혀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강제 시작이고 뭐고‚ 남은 기운을 다 짜냈더니 진짜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시스템 창이 체력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뭐 그런 거였나. 쪽잠이라도 자서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간절했다. 나가자마자 실신할 순 없었으니까.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일어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눈이 떠지질 않았다. 한동안 빈둥대기만 하다가 연달아 격한 운동을 했기 때문일까.
구름 같은 이불의 감촉‚ 단단하게 감싸 오는 따뜻한 체온에 취한 것만 같았다.
[시스템: 경고! 강제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90분입니다.]
결국 시스템의 무자비한 알람을 듣고서야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지금 잘 때가 아닌데. 미쳤나 봐.’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세라는 침침한 눈을 억지로 비볐다.
“아가씨.”
맑아진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알베르토였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말끔히 갖춰 입은 상태였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안경까지. 제 앞에서 무너져 내렸던 그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일어나셨군요. 많이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그는 마치 처음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정중하고 상냥했다.
뭔가 이질감을 느낀 그녀는 제 상태도 살펴보았다. 평소처럼 네글리제를 갖춰 입고 이불까지 덮은 채였다.
땀과 체액으로 뒤엉켜 엉망이었던 몸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던 아까와는 달리‚ 느낌이 한결 가벼웠다.
침구에선 보송하고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고‚ 늘 그랬듯 은은한 향기가 났다.
마치 그와 난잡하게 뒤섞였던 일이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미안‚ 잠깐 눈만 붙인다는 걸 너무 오래 자 버렸나 봐.”
“얼른 식사부터 하셔야겠습니다.”
세라는 그의 사무적인 어조에 약간 얼떨떨했다.
설마 다 망측한 꿈이었던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느낌이 너무 생생했는데. 꿈일 수 있다고? 욕구 불만이 그렇게 심각한 수준인가?
별별 망상을 다 하며 잠시 멍하게 있는데‚ 촉‚ 따뜻한 숨이 짧게 겹쳤다 떨어졌다.
“일단 애피타이저부터요.”
그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라를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여전히 자신을 샅샅이 살피는 그 시선을 보고‚ 세라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새 씻긴 거야?”
“네. 안 쓰던 근육을 잔뜩 쓰셔서 끙끙 앓으실까 봐 마사지도 했습니다.”
“정말? 자느라 몰랐어.”
“그러게요. 누가 업어 가도 모르시겠던데요.”
누가 유능한 집사 아니랄까 봐. 꼼꼼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빠듯했을 텐데 식사까지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어깨 너머로 트레이에 받쳐 온 음식들이 보였다.
“그새 다 준비한 거야?”
“네. 아가씨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 제 소임인 것을요.”
그는 세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단정히 해 주었다.
“너도 좀 쉬지. 잠도 제대로 못 잤잖아.”
“먹잇값은 해야죠.”
먹잇값이라니. 발정 난 개새끼한테 먹이를 달라던 아까의 그가 떠올라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알베르토가 수프를 떠서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자‚ 아‚ 하십시오.”
“드레스 입으려면 굶어야 해.”
“순순히 나가고 싶으시면 드셔야 합니다.”
“배 나온 거 봤잖아.”
“가슴 커진 것밖에 못 봤는데요.”
“거짓말.”
“누구 말이 맞나 확인해 볼까요?”
“너 정말!”
짓궂게 묻는 통에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알베르토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농담입니다. 나가면 고생이니까‚ 일단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드십시오.”
뭐‚ 틀린 말은 아닐지도. 세라는 그의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지금 식사가 마음 편히 먹는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드레스 같은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을 저도 모르게 받아 삼켰다. 목구멍에 뜨끈한 액체가 퍼졌다.
첫날 먹었던 트러플 수프였다. 따끈한 게 들어가서일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조금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잘하셨습니다.”
그가 빈 그릇을 보여 주었다.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먹다 보니 어느새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운 모양이었다.
“이것까지만 먹을게.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편히 먹으려고 해도 아무래도 마음이 조급하다 보니 힘들었다.
“다 계산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드십시오.”
“그래도.”
“…아쉽지 않으시겠습니까.”
“뭐가?”
“그게‚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시는 티본스테이크라서요.”
꼴깍. 세라가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제법 솔직한 반응에 알베르토가 픽 웃으며 고기를 잘라 포크로 집어 주었다.
“고기를 드셔야 포만감이 오래갑니다.”
“…….”
“제 성의를 봐서라도 드셔 주십시오. 어서요.”
거절한 게 민망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진한 육즙이 팡 터져 입 안을 맴도는 게 천국이 따로 없었다.
‘조급해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싸우려면 힘이 있어야지.’
남김없이 다 먹어야겠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세라는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넘겼다.
***
식사를 마치고‚ 알베르토가 세라의 드레스를 꺼냈다. 여기서는 늘 간편한 실내복 차림이었으니‚ 정식으로 갖춰 입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입는 거지? 막막해할 새도 없이 그가 거침없이 네글리제를 끌어 올렸다.
“아‚ 알베르토!”
세라가 화들짝 놀라 몸을 가렸다. 그는 옅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돌려 거울 앞에 세웠다.
“치장해 드리려고 하는데 왜 이리 놀라시는지.”
알아‚ 아는데.
말끔한 슈트에 크라바트까지. 완벽히 갖춰 입은 그의 손길에 발가벗겨진 채로 거울 앞에 서자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
세라가 발개진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치십니다.”
그럴 때마다 긴 손가락이 여지없이 잇새에 낀 입술을 빼 주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 있는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더니‚ 드레스를 입히기 시작했다.
복잡한 드레스를 다루는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알베르토는 기이할 정도로 못 하는 일이 없었다.
귀족 영애의 치장은 하녀들이 하지 않던가? 이런 건 대체 언제 해 본 걸까. 보통은 집사가 하는 일이 아닌데도 그는 솜씨가 거의 프로 수준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사람이 어쩌다가 여기에 있는 걸까. 단순히 NPC라기엔 너무 만능이었다.
그는 본 게임이 시작하기까지 제법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도 그녀를 살뜰히 돌보고 있지만‚ 쉽게 속내를 읽기는 힘든 타입이었다.
물론 그동안 베풀어 준 호의는 고마웠다. 하나‚ 그와 별개로 알베르토 외에는 대면한 인물이 없는 상황이라 그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이란 자신을 인질로 가둔 자에게도 공감이나 연민을 가질 수 있는‚ 비이성적인 존재이지 않은가.
한 발짝 물러서서‚ 상황을 조금 객관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알베르토는 애초부터 신뢰할 만한 사람일까? 이곳에 온 이후로 종일 붙어 있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기본적인 태도가 호의적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는 세라를 돌보면서도 감시하고‚ 숭배하면서도 지배했다. 다칠까 봐 걱정하면서도 입술을 뜯는 등의 작은 행동조차 통제했다.
그 행동이 오로지 선의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면 선의를 가장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든. 다분히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랬다. 달콤한 안식처를 제공해 주다가도‚ 정신 차려 보니 벼랑으로 가는 준비를 돕고 있지 않나.
그럼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적의 행동은 무엇일까. 아니‚ 무언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현실에 자꾸만 무력감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저 완벽하고도 사려 깊은 집사를 오롯이 믿지 않는 것. 그뿐이었다.
“어떠십니까?”
알베르토가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손도 빠르지. 생각에 잠긴 사이‚ 드레스의 매무새를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거울 속의 세라는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아직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꼭 인형 같았다.
“…예쁘긴 한데.”
“네‚ 아가씨.”
그가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좀 너무 파이지 않았어?”
세라가 깊게 파진 네크라인을 매만지며 물었다. 드레스 자체는 야하진 않았지만‚ 쇄골은 물론 가슴골이 설핏 보일 정도로 파여 있었다.
“아가씨께서 정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베르토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쇄골을 타고 목선으로 올라왔다.
“예쁜 건 드러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응?”
그리고 아주 솜씨 좋게 그녀의 밤색 머리를 틀어 올렸다. 높다랗게 포니테일로 묶어 리본까지 매 주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보세요. 아가씨는 목선을 드러내는 게 더 아름다우십니다.”
그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꼭 사슴 같은 길고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자 그녀의 아름다움이 한층 더 빛을 발했으니까.
문제는 그 위에 맺혀 있는 울혈이었다. 살성이 약해서일까. 흰 피부 위에 누군가가 빨고 깨문 듯한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누구든 그게 키스 마크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그게‚ 자국 때문에…….”
“이거요?”
“응. 아니면 초커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것 때문이라면 그냥 두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왜?”
“곧 세르반테스 공작을 만나실 테니 말입니다.”
세르반테스 공작. 그러니까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으로‚ 그녀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지금 방을 나가면‚ 4층에서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남주가 펠릭스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아가씨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뭘 말이니?”
“아가씨는 세르반테스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섭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런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그녀는 솔직히 펠릭스가 두려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플레이 하면서 공략에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고‚ 다양한 사망 엔딩을 보게 한 장본인이었으니까.
근데 그건 지금 빙의한 입장에서 느끼는 심정이고. 알베르토가 묻는 건 ‘세라 에보트’의 생각일 터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세라는 잠시 답을 고민했다. 그녀는 일단 약혼녀의 입장에서 펠릭스의 만행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빈껍데기뿐인 약혼자였다. 세라는 그를 짝사랑했지만‚ 그는 그런 말랑한 감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냉혈한이었다.
결국 그와의 혼약도 이 별장처럼‚ 세라가 에보트 후작에게 몇 날 며칠 떼를 써 얻어 낸 것이었다.
에보트 후작은 하나뿐인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테지.
펠릭스의 마음에 든 건 그 ‘수단’이었을 것이고‚ 결코 세라는 아니었다. 이 관계에 목을 매는 건 오직 세라뿐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급기야는 ‘노멀 모드’의 여주‚ 엘레나 디아즈와 결혼해야겠으니 파혼해 달라던 개자식이 펠릭스였다.
세라도 딱히 잘한 건 없었지만‚ 그가 약혼자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세르반테스 공작은 날 우습게 보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답하자 상냥하던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럼 본때를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늘한 눈매에서 풍기는 묘한 살기에 세라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베르토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제가 낸 흔적들을 손끝으로 훑으며 거울을 통해 눈을 맞추었다.
“보여 주는 겁니다. 너 아니어도 누군가는 날 이렇게…….”
“…….”
“…탐내고 있다고요.”
더운 숨이 목덜미에 퍼졌다. 그의 긴 손가락이 꼭 거미 다리처럼 위험하다고 느낄 때쯤‚ 그가 귀밑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건 집사가 아니라‚ 공작과 같은 수컷으로서 드리는 조언 정도로 해 두죠.”
세라는 뜯어 먹히는 것 같은 느낌에 침을 억지로 삼켰다.
왜 이런 조언을 하는 거지? 정말 순수한 조언일까. 아니면 다른 수컷을 향한 영역 표시이자 선전 포고일까.
아니‚ 아니지. 남주 중에 감금한 범인이 있다면? 그 범인이 알베르토를 고용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게 만약 펠릭스라면. 알베르토는 왜 이런 이야길 하는 거지?
일일이 의심하자니‚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참고할게.”
세라는 복잡한 심경을 티 내지 않으려‚ 일부러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얌전히 기다릴 테니까.”
알베르토가 옅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잠깐 외출하는 주인을 배웅하는 것처럼 여상한 목소리였다.
***
<누가 그녀를 감금했나: 하드 모드 진행 방식>
세라 에보트.
게임을 시작하기에 앞서‚ 당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 당신은 ‘노멀 모드’의 범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엘레나 디아즈’가 아니라 당신이 이 저택에 감금됩니다.
- 저택에는 당신과 당신을 혐오하는 남자들.
1. 당신에게 파혼을 요구하는 약혼자‚ ‘펠릭스 세르반테스’. (4층)
2. 당신에게 절교를 선언한 소꿉친구‚ ‘에단 디아즈’. (3층)
3. 당신을 저열한 악마 취급하는 성직자‚ ‘세바스찬 클라인’. (2층)
이렇게 세 명이 함께 감금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당신이 아직 ‘엘레나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노멀 모드’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심은 금물.
그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을 미워합니다.
- 당신을 감금한 범인은 저택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해당 층 남주와의 ‘성관계’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 저택 곳곳에는 당신의 탈출을 돕는 ‘아이템’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 남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수집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범인은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감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말을 신뢰하지는 마세요.
- 모든 남주를 무너뜨리고‚ 1층에서 최종적으로 ‘당신을 감금한 범인’을 색출하면 탈출 성공입니다.
이후 ‘당신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엔딩’이 가능해집니다.
- 범인이 당신에게 보낸 편지를 첨부합니다.
[친애하는 세라.
넌 아마 내가 누군지 모를 거야. 난 처음부터 끝까지 내 정체를 숨길 셈이거든.
이곳은 네가 가장 아끼는 별장‚ ‘인형의 집’이야.
난 여기에 네가 가장 아끼는 인형들을 넣어 두었어.
넌 욕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여서‚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하잖아.
네가 아끼는 그 인형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다름 아닌 나일 거라 확신해.
그래서 기회를 주는 거야.
네 손으로 가장 아끼는 인형을 고를 기회.
이런 내가 이상하겠지만‚ 이건 내가 최고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네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야.
그럼 마음껏 즐겨.
그리고 최후에 선택하는 것이 부디 나이길 바랄게.]
그럼‚ 가장 불행한 당신의 행운을 빌며.
본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