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악몽
이건 악몽이다.
[시스템: ‘누가 그녀를 감금했나’-하드 모드-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지금부터 당신을 감금한 범인을 찾고‚ 저택에서 탈출하세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는 멍한 눈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아늑한 쓰레기통이 취향인 게 문제였을까. 암담해서 실성이라도 한 건지‚ 자꾸만 헛웃음이 났다.
친절한 시스템 창 덕분에 단번에 상황 파악이 끝났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들 어쩌겠는가. 눈을 비벼도‚ 볼을 꼬집어 보아도 시스템 창은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누가 그녀를 감금했나>라는 여성향 19금 게임에 빙의했다. 게임의 메인 키워드는 ‘역하렘’ 그리고 ‘감금’이었다.
게임의 시나리오는 단순했다. 햇살 같은 백작 영애‚ 엘레나 디아즈가 먼치킨 남주들과 어떤 저택에 갇힌다.
남주는 셋.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 펠릭스 세르반테스.
중앙 기사단장이자 소드 마스터인 에단 디아즈.
대신전의 최연소 대신관 세바스찬 클라인까지.
여성향 게임답게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했다.
여주 하나에 남주 셋. 거기에 이제 ‘감금’이라는 극한 상황을 곁들인. 자연스럽게 남주들은 그녀를 두고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집착을 한 몸에 받으며 남주들과 돌아가면서 관계를 갖고‚ 누가 감금했는지 범인을 색출하면 클리어.
난이도 또한 어렵지 않았다. 남주들은 감금 전부터 모두 엘레나와 친한 사이였으니까.
빙의 직전까지 그녀는 이 게임에 완전히 미쳐 있었다. 절륜한 남주들을 입맛대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으니까.
먼저‚ 펠릭스 세르반테스 공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만한 바람둥이의 전형’이었다. 섹시한 개새끼를 발아래 두었을 때의 쾌감은 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란남인 점은 좀 감점이지만 그래도 그 키워드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다양한 체위와 스킬. 그리고 조련하는 듯한 말투가 일품이었다.
기사단장 에단 디아즈는 어떤가. 왕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 두꺼운 옆 통. 체대 오빠를 연상시키는 이 육체파는 무려 동정이었다. 그래도 몸을 쓰는 직업이어서일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강력한 힘은 기본. 투덜대면서도 살뜰히 챙겨 주는 다정한 모습이 에단의 매력이었다.
마지막으로 대신관 세바스찬 클라인이야말로 배덕함의 끝판왕이다. 성직자를 파문시키는 것만큼 짜릿한 게 있을까? 어린 나이에 최고위 성직자가 된 그는 어딘지 처연하고 모성애를 자극하는 연하남이었다.
성직자이니만큼 당연히 때 묻지 않은 순수함(동정)을 간직한 천연기념물이었다. 그 소처럼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퐁퐁 날 때면 당장 젖이라도 물려서 달래고 싶었지.
어쨌든.
호감도에 따라 남주별 단일 엔딩은 물론‚ ‘다 같이 살아요.’ 엔딩도 가능했다.
여기까지가 ‘노멀 모드’의 이야기고.
“하아…….”
긴 한숨을 뱉은 그녀는 확인 버튼을 눌러 시스템 창을 끄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탐스러운 밤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꽃처럼 고아한 얼굴과 가녀린 몸. 눈앞의 여자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최악이네.”
아니‚ 최악보다 더 최악이다. 눈앞에 있는 자신이 ‘하드 모드’의 주인공. 세라 에보트였기 때문에.
그래. 그녀가 빙의한 건 ‘노멀 모드’가 아닌 ‘하드 모드’였다.
‘노멀 모드’의 모든 엔딩을 클리어 하자‚ ‘하드 모드’가 해금되었고 난이도는 그야말로 극악이었다.
한마디로 그 잘나고 맛있는 남주들이 ‘그림의 떡’이라는 이야기.
‘그래도 그렇지. 세라가 세라를 못 깨면 쓰나.’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그녀의 본래 이름은 ‘유세라’‚ 즉 게임 캐릭터와 같은 ‘세라’였다. 그게 더 오기를 자극했고 집착적으로 엔딩을 보려 애썼다.
원래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편인데‚ 며칠 밤을 ‘사망 엔딩’만 보니 열 받아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이 상태일 줄이야.
‘하드 모드’는 ‘노멀 모드’의 여주‚ 엘레나를 괴롭히는 악녀‚ 세라 에보트. 그러니까 세라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여주 하나에 남주 셋. 역하렘답게 기본 구도는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엘레나가 아니라 세라가 감금된다. 하필이면 자신을 혐오하는 남주들과 함께.
엘레나와는 반대로 세라는 감금 전부터 남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남주들에게 일방적인 경멸을 받았다.
“예쁘긴 더럽게 예쁘다.”
거울 속엔 태어나서 경멸이라고는 받아 본 적 없을 듯한 미인이 서 있었다.
티 없이 뽀얀 피부와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잘 빚은 도자기 인형 같기도 했다.
예뻐서 절로 웃음이 났다. 새하얀 눈밭 같은 얼굴에 사르르 눈웃음을 띄우자 봄바람이 부는 광경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어쨌든 외모만큼은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계속 보고 있으니 이 참담한 기분이 조금 누그러들 정도인데.
‘이 얼굴을 멸시하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거야?’
그녀‚ 그러니까 세라는 ‘노멀 모드’에서의 본인의 활약상을 떠올려 보았다.
‘파티에서 따돌려서 망신을 주고‚ 헤프다는 더러운 소문을 퍼뜨리고. 드레스를 가로채는 건 기본‚ 급기야는 따귀를 치고 머리채까지 잡았었나…….’
그래도 여기까진 약과였고‚ 진짜는 따로 있었다. ‘노멀 모드’에서 엘레나와 남주들을 감금한 장본인이 세라였으니까.
‘얌전하게 생겨서는. 완전 사이코네.’
세라는 ‘노멀 모드’에서 원 캐릭터가 벌인 패악질에 몸서리를 치며 혀를 쯧 찼다.
에보트 후작가의 금지옥엽으로 자라 돈이 썩어나던 세라 에보트는 외딴곳에 저택을 하나 구입한다.
거기에 자신의 숙적‚ 엘레나와 그녀의 추종자인 남주들까지 감금하고‚ 괴롭히다 죽이려 했다는 것이 ‘노멀 모드’의 내막이었다.
‘노멀 모드’의 엔딩에서‚ 남주들은 세라를 처단한다. 심성이 착한 엘레나가 그녀를 용서하자 했지만‚ 남주들의 뜻이 완고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었지.
완벽한 권선징악이었고 사이다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세라 에보트의 몸에 빙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람 앞일은 모른다고. 사이다가 아니라 지옥 불이 될 줄 알았다면‚ 그런 쓰레기 게임 따위 클리어 하건 말건 삭제해 버리는 거였는데.
어쨌든 남주들은 그 정도로 세라에게 분노했고‚ 그녀를 경멸했다.
[시스템: 경고! 당신을 감금한 범인이 ‘저택 안’에 있습니다.]
그럼 범인은 대체 누구야?
‘노멀 모드’에서 범인이었던 장본인‚ 그러니까 ‘세라 에보트’가 주인공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새로 추리해야만 했다.
[시스템: 저택 안에서 감금된 사람들을 만나고‚ 누가 범인인지 추리하십시오.
-위치 안내: 4층 펠릭스 세르반테스‚ 3층 에단 디아즈‚ 2층 세바스찬 클라인.]
결국 함께 감금된 남주 중에 범인이 있을 거란 이야기인데.
게다가 기억이 맞는다면‚ 여기는 ‘노멀 모드’를 진행했던 바로 그 저택. 세라가 돈지랄로 구매한 별장이었다.
‘노멀 모드’에서야 그걸 힌트 삼아 세라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었는데. ‘하드 모드’에서는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되었다.
[시스템: PLAY TIP! 아래층으로의 이동 조건은 각 층의 인물과의 ‘성관계’입니다.]
돌겠네.
문제는 이 게임이 역하렘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19금인 만큼‚ 호감도 상승을 위해 ‘살색의 향연’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쌍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인데 어떻게 넘어뜨리란 말이지?’
상대는 세라의 얼굴만 봐도 똥 씹은 표정을 하는 남자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물론 ‘하드 모드’가 시작되고 감금당한 건 엘레나가 아닌 세라였지만‚ 시나리오상 세라의 업보는 아주 만만치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미치겠다‚ 진짜.”
세라는 제 머리통을 움켜쥐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침구에 폭 처박혔다.
“…이거 느낌이 끝내주잖아?”
신기하게도 눕자마자 두통이 싸악 가시는 느낌이었다. 침구는 보송했고‚ 탄탄하면서도 푹신했다. 현대로 치면 거의 특급 호텔 침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게다가 향수라도 뿌린 걸까? 은은하게 풍기는 좋은 향기에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눈을 감고 숨만 몇 번 깊이 쉬면 잠들 것만 같았다.
[시스템: 아이템 ‘구름처럼 폭신한 최고급 침대’ – 잠을 주무시겠습니까? (소요 시간: 8시간) >예/아니오]
기분도 더러운데 잠이나 좀 자 둘까. 안 그래도 편안한 네글리제 차림이겠다. 나가면 골치 아픈 일들만 산더미일 텐데.
“…그래. 한숨 푹 자고 나면 악몽에서 깰지도 모르지…….”
세라는 망설임 없이 ‘예’를 선택했다.
‘빙의고 뭐고‚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게임을 폐인처럼 해서 꾼 개꿈. 일어나면 게임도 좀 작작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몽롱하게 의식이 흐려졌다.
***
…아가씨.
이제 일어나셔야 합니다.
아가씨.
귓가에 웬 남자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아가씨?’
잠에서 깬 세라가 부스스 눈을 떴다. 말끔한 미남자가 자신을 걱정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누‚ 누구세요?”
그녀가 화들짝 놀라 묻자‚ 남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공손히 몸을 숙였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알베르토라고 합니다.”
“알베르토요?”
“네. 오늘부터 이 저택에서 세라 아가씨를 돌봐 드릴 집사입니다.”
“…아‚ 네.”
일단 대답은 했지만 아직은 얼떨떨했다.
‘…하아‚ 개꿈 아니고 빙의 확실하네.’
자고 일어나면 이곳이 아니었으면 했는데. 일말의 희망이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게다가 웬 집사? 혹시 범인이 고용한 걸까?’
조금 어리둥절했다. ‘노멀 모드’는 물론 ‘하드 모드’를 클리어 하면서 수없이 사망했지만‚ 집사가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흔히 집사는 중년 남자 아니던가? 알베르토는 집사라기엔 굉장히 젊어 보였다.
깨끗한 슈트 차림에 안경을 낀 모습이 전형적인 집사의 차림새긴 했지만‚ 많아 봐야 제 또래로 보였다.
흠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이목구비였다. 은색 머리칼에 묘한 냉기가 도는 청회색 눈동자.
한낱 NPC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유려한 외모에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이전에 플레이 할 땐 잠 같은 거 별로 자 본 적 없어서 존재를 몰랐나?’
하긴‚ 게임으로 플레이 할 때는 이 방에 붙어 있을 일이 없었다. 얼른 남주를 만나 야한 장면을 보는 것이 게임을 하는 목적이었으니까.
지금은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함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계속 주무시기만 하셔서 걱정했습니다.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라 조금 미안해졌다.
“그냥 좀 피곤했나 봐요.”
“아프신 게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터뜨리며 옅게 웃었다.
“우선 식사부터 하셔야겠습니다.”
“시‚ 식사 말인가요?”
“네. 오래 주무셔서 시장하실 겁니다. 아가씨가 좋아하실 만한 것들로 차려 두었습니다.”
“아니‚ 저…….”
고마운 호의였지만 그걸 흔쾌히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개죽음당하게 생겼는데‚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겠니.’
미안하지만 입맛이 없어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꼬르륵-
배에서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
알베르토와 눈이 마주치자 세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역시 시장하신가 봅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난 만찬이 눈앞에 차려져 있었다.
전채 요리와 샐러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와 디저트까지.
이걸 다 방까지 가져와서 차려 두었단 말이야? 감금당한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황송한 대접이었다.
감금한 사람을 이렇게 극진히 모실 이유가 있나? 아무리 봐도 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독 같은 건 안 들었겠죠?”
“네?”
이런. 당황해서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속셈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대로 답해 주지도 않을 텐데.
세라는 조금 무례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죄‚ 죄송해요. 제가 방금까지 무서운 꿈을 꿔서. 조금 예민해졌나 봐요.”
무서운 꿈은커녕 아주 제대로 숙면했지만‚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했다. 세라는 일부러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가련한 목소리를 냈다.
“고귀한 아가씨께서 저에게 왜 존대하십니까. 편하게 알베르토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러자 그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긴장해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는데. 귀족 영애가 사용인에게 존대하는 것도 꼴이 우습겠지.
“알겠어‚ 알베르토.”
세라는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럼 아가씨가 걱정하시니 먼저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가 보란 듯이 숟가락을 들고 음식을 차례로 맛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세라를 보고 생긋 웃으며 새 숟가락을 그녀에게 주었다.
“자‚ 제가 확인했으니 괜찮으시겠지요?”
“고마워.”
“아닙니다. 악몽을 꾸셨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먼저 따끈한 수프부터 드셔 보시겠습니까?”
“수프?”
“네. 트러플 수프입니다. 따뜻한 게 들어가면 좀 진정될 겁니다.”
세라는 조심스럽게 수프를 한술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이거 기가 막히게 맛있잖아?’
수프도‚ 빵도‚ 스테이크도. 모두 혀가 녹을 것처럼 훌륭했다. 꽤 허기졌던 세라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오물오물. 마치 겨울잠을 준비하는 토끼처럼 잘 먹는 세라를 보고 알베르토가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