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2)

12

* * *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 나는 다시 에이든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는 항상 나를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신뢰와 애정이 담긴 따뜻하고 다정한 눈길.

그런 그가 함께 있어서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오웬 에스트에게서 들은 진실을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황제가 오웬 에스트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로 오웬 에스트가 맞느냐?”

황제가 내 옆에 있던 오웬 에스트를 부르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황제 폐하. 제가 오웬 에스트입니다.”

“헤이츠 공녀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오웬 에스트가 자신의 목에 있는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 목걸이로 인해 저는 아델라 아가씨께서 시키신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웬 에스트가 목걸이의 연결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헤이츠 공녀님께서 이 목걸이를 무력화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 수 있었고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수도 동쪽의 저택에서 오웬 에스트를 만났을 때 한 가지 더 그에게 신신당부한 것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에이든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웬 에스트는 그 약속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다.

“모두 거짓입니다!”

그런데 그때 흥분과 분노로 가득 찬 바이언 공작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자가 헤이츠 가문과 짜고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저는 진실을 밝히려는 겁니다.”

“진실은 저 헤이츠 공녀가 우리 아델라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이언 공작님, 지금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저를 범인으로 모시는 겁니까? 마차 사건은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 바이언 공녀의 자작극이었단 말입니다.”

나는 아델라에게 시선을 주며 강하게 말했다.

아델라 또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눈빛에 불안과 초조함이 담겨 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리고 저희 가문에 저런 목걸이는 없습니다.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는 공작가의 힘을 제어하는 것뿐 사람을 조종하지 않습니다.”

바이언 공작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당장 또 다른 패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제 폐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바이언 공작이 옆에서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루덴 가문에 대한 것입니다.”

“루덴 가문?”

“저는 이 자리에서 오래전 반역죄로 멸문을 당한 루덴 가문과 얽혀 있는 진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진실이라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황제가 심기가 언짢은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그리고 루덴 가문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내 말에 바이언 공작과 나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술렁거리며 대회의장이 재차 소란스러워졌다.

“공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설마 루덴 가문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황제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렸으나 나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는 바이언 가문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폐하, 공녀는 지금 어떠한 증거도 없이 저희 가문을 욕보이기 위해계속해서 허무맹랑한 소리만 내뱉고 있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닙니다. 이 또한 증인이 있습니다, 폐하. 또 다른 증인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증인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루덴 공작가에서 일했던 집사와 그 당시 루덴 가문이 반역죄를 꾀했었다며 증인을 섰던 기사입니다.”

이틀 전의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집사의 행방을 알지 못해서 조금 초조하고 있던 찰나 아버지가 집무실로 나를 불렀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곧바로 향한 집무실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낯선 이들도 함께 있었다.

바로 내가 찾아 달라고 부탁한 루덴 가문의 집사와 당시 루덴 가문의 반역을 증언했던 기사였다.

그들의 모습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고 냄새까지 났다.

얼굴 표정은 두 사람이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고단하고 피곤해 보였다.

루덴 가문의 일을 의심하고 있던 아버지는 집사를 추적하면서 기사 또한 함께 찾았다.

그들은 수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의 영지를 소유한 어느 귀족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목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있다.’

두 사람의 목에는 철로 만든 목걸이가 있었다.

아버지 또한 그들이 차고 있던 목걸이를 보았는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 그들에게 내가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처음 그들은 내 말을 믿지 못했지만 내가 그들의 목걸이를 무력화시키자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 후 그들을 설득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루덴 공작 부인의 일을 설명한 후 다음 날 이른 아침 헤모아로 가서 그녀를 비밀리에 저택으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루덴 공작 부인과 집사, 기사를 만나게 했다.

목걸이가 사라진 지금, 그들의 충심을 막을 것은 어떤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공작 부인과 클레이튼까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집사와 기사는 지금까지 있었던 이들을 모두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심문일 당일에도 똑같이 증언을 할 것을 요구했고 지금 두 사람이, 아니 세 사람이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 두 사람 외에 또 한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싶습니다. 바로 아리엘 루덴 공작 부인입니다.”

“아리엘 루덴 공작 부인이라고?”

“맙소사, 공작 부인이 살아 있었단 말이야?”

“하긴 클레이튼 루덴도 저렇게 떡하니 살아서 돌아왔으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

나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면서 귀족들이 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하나같이 놀라긴 했지만 반응이 나쁘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미 클레이튼이 나타나 감옥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인지 내가 헛소리를 하는 거라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하긴 헛소리라고 생각한들 어차피 곧 드러날 일인데.’

나는 다시 황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황제 또한 내 말에 많이 놀랐는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엘 루덴 공작 부인이라고 했소?”

그런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잘 모르겠지만 반역 가문의 공작 부인을 부르는 것치고는 애틋하면서도 감정이 서려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과 두 사람이 반역죄로 몰려 멸문당한 루덴 가문의 누명을 벗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설사 공작 부인이 살아 돌아왔다고 한들 2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지금 루덴 가문과 헤이츠 가문이 짜고서 저희 가문을 모략에 빠트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이언 공작이 꽤나 다급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그때였다.

갑자기 아버지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황제를 불렀다.

“헤이츠 공작.”

황제의 시선이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루덴 공작이 반역죄로 끌려가 참수를 당하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모든 증거와 증인이 완벽했기에 루덴 공작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의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루덴 공작 부부는 마물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마물에 적대적인 이가 루덴 공작이었고 마물 토벌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마물들을 죽여 왔습니다. 그런 루덴 공작이 마물을 이용해서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에 마물을 토벌하러 서쪽 국경으로 토벌대를 파견한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저는 거기서 파푸스를 이끄는 대장 격인 놈과 대치했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죽기 전에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군요. ‘이건 약속과 틀리다. 바이언 공작을 만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모함입니다! 증거도 증인도 없이 감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바이언 공작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버지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바이언 공작을 향해 삿대질을 해도 모자랄 분이, 지금은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무척이나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맞습니다. 바이언 공작의 말대로 제가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습니다. 설사 정확하게 들었다고 하더라도 저에게는 루덴 가문의 배후에 바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파푸스 또한 그날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도륙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 적어도 루덴 가문이 더 이상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 또한 폐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있게 루덴 공작 부인과 두 사람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며 황제에게 간청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대회의장이 잠시 고요해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황제의 입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 뻔했다.

황제가 뭐라고 답할지 숨죽이며 기다리던 그때, 드디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좋소. 아리엘 루덴 공작 부인 그리고 루덴 가문의 집사와 기사였던 자들을 들라 하시오.”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이언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황제 폐하!”

하지만 나는 바이언 공작을 무시하곤 재빨리 고개를 들어 윌리엄에게 눈짓을 보냈다.

윌리엄이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리곤 대회의장을 나섰고 잠시 후 문이 열리자 대회의장 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루덴 공작 부인을 보며 어떤 이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기도 했고 어떤 이는 경악으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었다.

루덴 공작 부인과 두 사람이 황제의 앞에 섰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루덴 공작 부인이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예를 취하자 집사와 기사 또한 무릎을 꿇었다.

“……아리엘.”

아리엘?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았겠지만 황제 앞에 있던 나는 들을 수 있었다.

황제가 루덴 공작 부인을 아리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황제를 쳐다본 나는 그의 표정이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일그러진 것을 목격했다.

‘뭐지?’

황제의 표정은 하나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슬픔과 아픔, 고통이 담겨 있으면서도 찰나였지만 안도감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안도감이라니.

황제가 공작 부인을 왜 저렇게 보는 걸까.

아무리 봐도 잘못 본 건 아닌 듯해서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덴 공작 부인…… 일어나시오.”

황제는 공작 부인을 아리엘이라고 다시 부르지 않고 호칭을 정정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대로 있겠습니다.”

“……알겠소. 그럼 고개를 드시오.”

황제의 말에 루덴 공작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사이에 확실히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황제와 공작 부인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의 세월의 흔적을 더듬듯 두 사람은 상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공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며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이 깨졌다.

“황제 폐하, 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억울하게 멸문 당한 루덴 가문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입니다.”

루덴 공작 부인이 곁눈질로 나를 쳐다 보자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 오웬 에스트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와 비슷한 목걸이가 이 두 사람의 목에도 걸려 있는 것을 봐 주십시오.”

나는 루덴 가문에서 일했던 집사와 기사에게 목걸이를 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집사와 기사가 동시에 목걸이를 빼서 그들의 두 손에 목걸이를 올려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이 목걸이 또한 이 두 사람의 정신과 신체를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을 하고 있음에도 황제는 여전히 루덴 공작 부인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폐하?”

그를 조심스럽게 부르자 황제가 흠칫 놀라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니까 이 두 사람 또한 바이언가에서 조종을 했다는 뜻이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듯했다.

“네, 맞습니다.”

“두 사람에게 묻겠다. 그 목걸이를 누가 너희들에게 채웠느냐?”

“바이언 공작님입니다.”

집사가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바이언 공작님입니다. 제가 루덴 가문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한 것은 저의 정신이 이 목걸이에 의해 조종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파푸스에게 문을 열어 주겠다는 비밀 문서 따위 알지 못합니다.”

기사 또한 집사의 말에 동조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공작 부인을 향해 바닥에 머리를 박아 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만하게.”

공작 부인이 기사의 몸을 부여잡곤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경의 의지가 아니었지 않은가.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루덴 가문에 충성을 다한 대가로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네.”

“아닙니다, 마님. 흑흑.”

기사의 울음소리가 대회의장에 울려 펴졌다.

“저도 그렇습니다. 마님과 도련님께서 무사히 도망치신 후 저와 루덴 가문에서 일했던 사용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잡혀 감옥에 갇혔고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기사에 이어서 집사의 증언이 시작됐다.

그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기사와 마찬가지로 순간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았기에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2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바이언 공작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게 마님과 도련님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더니 제가 두 분을 잡아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싫다고 했더니 목걸이를 채웠고 저는 제 의지가 아닌 목걸이에 의해 조종을 받아 마님과 도련님을 속여서 잡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명한 마님께서는 그것을 알아차리시곤 도망치시다 두 분이 절벽에서 떨어지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내게 했던 말을 황제 앞에서도 똑같이 전했다.

“저도 정말 죄송합니다, 마님. 루덴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던 저인데 큰 죄를 지었습니다.”

집사 또한 공작 부인에게 사과를 했고 공작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야. 지난 일들에 대한 잘못은 모두 바이언 공작이 저지른 것이지.”

매섭고 단호한 목소리가 공작 부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황제 폐하, 이곳에 증인과 증거가 무려 셋이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이언 공작의 죄를 증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합니까? 루덴 가문이 정말로 반역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헤이츠 공녀가 바이언 공녀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모두 모함입니다, 폐하! 헤이츠 가문과 루덴 가문이 짜고서 제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입니다!”

공작 부인의 말에 위기감을 느낀 바이언 공작이 또 한 번 큰 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차갑다 못해 싸늘했다.

이제 이곳에서 바이언 공작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이언 공작, 지금까지 공을 믿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폐하, 저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제 충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폐하를 위해, 발테우스를 위해서 어떻게 했는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저들에게서 황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만약 제가 없다면 황실은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루덴 공작도 그렇습니다. 루덴 공작은 폐하의 의견에 계속 반기를 드는 자였습니다. 그런 자를 눈앞에서 치운 것이 바로 저였-.”

순간 대회의장이 고요해졌다.

바이언 공작이 말실수를 깨닫고 아차 하던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바이언 공작과 바이언 가문의 이들을 모두 포박하라.”

황제의 명령에 대회의장을 지키고 있던 기사 수십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이언 공작, 아델라, 그리고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아델라, 에이든!”

바이언 공작이 두 사람에게 소리쳤고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철이 흘러나왔다.

“누구든 나를 건드렸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바이언 공작이 기사들을 향해 포효하자 기사들이 움찔했다.

아델라가 바이언 공작의 곁으로 서둘러서 뛰어간 반면 에이든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바이언 공작, 이게 무슨 짓이오!”

황제의 노기 띤 음성이 들려왔다.

“저는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길을 터 주십시오. 그리하지 않는다면 제 앞길을 막는 그 누구도 살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바이언 공작이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잔뜩 경계하며 쳐다보다 그의 왼쪽 손에 쥔 검이 눈에 들어왔다.

모양이 꽤나 특이하고 엄청나게 거대했다.

‘저게 철의 검인가 보네.’

처음 본 것이었지만 워낙 눈에 띄어서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제국이 생겨났을 때부터 철의 가문인 바이언가에 대대로 내려온 검.

무척 날카롭고 견고하여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것은 물론, 검에 닿은 것은 모조리 철가루로 변해 공기 중에 흩날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그 검이 바이언 공작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저 검을 뽑아낸 것으로 보아 그가 정말로 자신의 앞에 놓인 그 누구라도 죽일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바이언 공작의 몸에 단검이 겨눠졌다.

“가만히 있으십시오.”

“기어이 네놈이!”

에이든이었다.

아까 그의 곁으로 다가간 에이든이 바이언 공작의 뒤로 접근해서 그의 목에 칼을 겨눈 것이었다.

황제뿐만 아니라 대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에이든이 바이언 공작에게 저러는 것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숨죽이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이 검이 공작님의 목에 박힐 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는 것이냐!”

“황제 폐하,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그리고 목걸이에 대한 모든 비밀까지 말입니다.”

“에이든!”

바이언 공작이 에이든을 저지하기 위해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 자리에 에이든 바이언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뭐라고?”

“에이든 바이언이 없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에 가만히 보고만 있던 귀족들이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에이든을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저는 에이든 바이언이 아닙니다. 에이든 바이언은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를 차지한 대역이었습니다.”

“대역?”

“예, 그렇습니다. 저 또한 바이언 공작에게 목걸이로 조종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에이든이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모두에게 보여 줬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어떻게 나에게!”

“……제 동생을 왜 죽였습니까?”

에이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바이언 공작에게 물었다.

“뭐?”

“제 동생도 데려와 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죽였습니까?”

“죽이지 않았다. 네 앞에 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이다.”

바이언 공작이 모든 것이 다 드러났음에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저를 서커스단에서 데려오고 난 후 서커스단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을 살아남은 자로부터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저는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에이든의 눈빛이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것이 보였다.

보이진 않지만 그가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그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울지 말라고, 아니 내 품 안에서 마음껏 울게 그를 다독여 주고 싶었다.

“이든…….”

하지만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의 이름을 짧게 부르며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느꼈는지 나를 보며 그가 짧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자네는 에이든 바이언이 아니라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폐하.”

“자네 또한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로 인해 바이언 공작에게 조종을 당했다는 것이고?”

“예, 그렇습니다.”

“바이언 공작, 공은 도대체…….”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모든 것을 폐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무슨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그것이 말입니다…….”

바이언 공작이 말을 늘어뜨리는 것이 수상했다.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사람처럼, 아니 시간을 끄는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재빠르게 그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에서 검은 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든!”

나는 에이든을 부르며 빠르게 그를 향해 달려갔다.

“안 돼! 피해요!”

하지만 내 외침은 순식간에 반지에서 솟아오르는 철의 가문 수호수의 포효에 먹혀 버렸다.

내 앞을 철로 만든 거대한 뿔을 가진 유니콘이 막아서며 순식간에 대회의장은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뭐, 뭐야!”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으아악!”

“다들 밖으로 나가시오!”

수호수를 보고 놀란 이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에이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이든!”

다행히 그 또한 바이언 공작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피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겼다.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에이든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를 붙잡고 상처 난 곳이 없는지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네.”

“다행이에요…….”

그가 괜찮다는 사실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에이든이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쳐다보자 나 또한 그가 쳐다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

“바이언 공작! 뭐 하는 짓이오!”

아수라장 한가운데 있는 이들의 눈이 모두 한곳으로 모였다.

바로 황제가 앉아 있는 상석이었다.

모두들 경악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이언 공작이 철의 검으로 황제의 목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

“황제 폐하!”

“바이언 공작, 후회할 짓 하지 마시오!”

아버지가 바이언 공작을 향해 소리쳤다.

“후회할 짓이라……. 모든 것이 다 어그러졌는데 이 이상 후회할 게 뭐가 있겠소?”

“공작!”

황제가 바이언 공작에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덜덜 떨렸고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무력함이 보이고 있었다.

“모두 움직이지 말고 멈추시오!”

사람들에게 물러나라고 말하는 바이언 공작의 표정은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결연해 보였다.

“황제 폐하, 저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델라, 얼른 이리로 오거라!”

바이언 공작의 부름에 구석에서 초조함과 불안함에 입술만 깨물고 있던 아델라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내 딸이 이곳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움직이지 마시오.”

“아버지!”

아버지가 말한 의미를 이해했는지 아델라의 눈가가 금세 붉어져서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바이언 공작을 불렀다.

바이언 공작은 아델라를 여기서 빼내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듯했다.

“가거라.”

“네?”

“너만은 잡히지 말고 여기서 나가야 한다.”

“아버지!”

“얼른!”

“아버지, 어떻게 혼자 가요. 저는 절대로 아버지 없이는 가지 않을 거예요. 함께 가요. 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곳엔 황제의 명에 의해 자리를 비운 케인을 제외하더라도 그를 붙잡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이들이 꽤 있었다.

거기다 루덴 가문이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감옥에 있는 클레이튼까지 합류한다면 바이언 공작은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

‘둘 다 잡히느니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건가.’

이미 그 계산까지 마친 그는 그렇기에 아델라만이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하려는 듯 보였다.

“아버지…… 흑……”

“아델라, 울지 말거라.”

대회의장에 있는 이들이 모두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와 에이든은 어떻게 황제를 바이언 공작의 손에서 구할지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앞에 떡하니 수호수가 버티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떡하죠?’

나는 눈빛으로 에이든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를 계속 지켜봤다.

“아델라, 어서 가거라.”

“아버지!”

“유르티오스 위에 올라 타거라.”

유르티오스는 철의 가문의 수호수인 유니콘의 이름이었다.

바이언 공작의 단호한 말에 아델라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유르티오스의 등에 올라탔다.

“누구도 움직이지 마시오. 누구 하나라도 움직였다가는 황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오.”

칼날에 닿는 그 무엇이라도 철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철의 검이 황제의 목을 겨누고 있기에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고 황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 또한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받거라.”

바이언 공작이 황제에게 칼을 겨눈 손이 아닌 반대 손으로 재빨리 아델라에게 반지를 건넸다.

아델라가 반지를 받고는 주먹 안에 꽉 쥐며 울먹이고 있었다.

잠시 후 곧바로 유르티오스가 아델라를 등에 태운 채 대회의장 안을 가로 질러 질주하며 밖으로 순식간에 뛰어 나갔다.

바이언 공작의 마지막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바이언 공작이 황제에게 해를 가할까 봐 그 누구도 아델라를 쫓아갈 수 없었다.

나 또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바이언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이언 공작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나를 차갑고 시린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원망과 미움, 고통, 슬픔이 한데 모여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또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언 공작과 나는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 아델라가 충분히 도망을 갔다고 생각했는지 바이언 공작이 입을 열었다.

“헤이츠 공작.”

바이언 공작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버지를 불렀다.

“나를 이겼다 생각하지 마시오. 언젠가 공에게도 나와, 아니 나보다 더 비참한 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바이언 공작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비틀렸다.

“저, 저자가!”

흥분과 분노로 가득 찬 아버지의 목소리가 대회의장을 울렸다.

“당신과 아버지는 달라요.”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바이언 공작에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니까요.”

“잘도 확신하는군.”

“당연하죠.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제가 있어요. 혹여 아버지께서 언젠가 옳지 못한 선택을 하려고 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아버지를 옳은 길로 이끌 거예요.”

“공녀의 선택은 뭐든지 옳은 거라고 생각하나? 그거야말로 오만 아닌가?”

“물론 저 또한 언젠가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옳지 못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제 곁에는 부모님도 계시고 또…….”

나는 옆에 있던 에이든에게 잠시 시선을 줬다 다시 바이언 공작을 쳐다봤다.

“이제 제 옆에는 이 사람 또한 있으니 당신과 같은 그런 추악하고 역겨운 인생은 살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이든?”

나는 에이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내게 따뜻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이든이라……. 그래, 네 이름이 이든이었지…….”

바이언 공작의 입에서 이든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이 거슬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제는 끝을 낼 시간이었다.

나는 바이언 공작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바이언 공작의 칼끝이 살짝 내려앉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버지와 동시에 바이언 공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와 아버지가 함께 바이언 공작을 공격하자 그가 뒤로 물러섰다.

“황제 폐하!”

그러자 황제가 바이언 공작에게서 풀려났다.

조금 떨어져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황태자가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황제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귀족들이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며 앞다투어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말은 더 이상 내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바이언 공작을 붙잡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바이언 공작이 손 안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어 쏟아냈고 우리는 방어하기 위해서 불을 일으켰다.

바이언 공작이 공격을 하면서도 점점 뒤로 밀려났다.

철은 불에 녹을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바이언 공작은 수호수를 이미 아델라와 함께 내보냈기 때문에 그에게 없었다.

이 싸움의 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저 만만치 않은 상대이기에 굴복시키기까지 조금 더 긴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때 바이언 공작이 아버지의 공격을 피하려다 손에서 검을 놓쳤다.

철의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가 그 검을 다시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어서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서 결국 철의 검은 다시 제 주인에게 가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대치하며 바이언 공작을 몰아넣는 중이었다.

갑자기 바이언 공작의 옆에 있는 에이든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든?”

그 순간 바이언 공작의 허리에 거대한 검이 스쳐 지나갔다.

“네, 네가 감히!”

바이언 공작이 에이든을 향해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이언 공작을 벤 에이든의 손에는 아까 공작이 놓친 철의 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이었다.

바이언 공작은 눈앞에서 금세 사라졌고 철가루만이 공중에 흩날렸다.

“이든!”

그가 사라지자 나는 서둘러서 에이든에게 뛰어갔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에이든이 잡고 있던 검을 놓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벨…….”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에이든이 나를 바라봤다.

“드디어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입가를 살짝 끌어 올렸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제국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바이언 가문이 무너졌다.

바이언 공작은 시체조차 남기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의 딸인 바이언 공녀 또한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존재를 숨기고 있던 루덴 가문이 명예를 되찾았다.

감옥에서 나온 클레이튼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인 루덴 공작 부인이었다.

“…….”

“…….”

두 사람은 잠시 어떠한 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했다.

“클레이튼…….”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작 부인이었다.

“어머니…….”

“클레이튼!”

“어머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았다.

그날 절벽에서 헤어진 후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

그들의 상황도 그랬지만 예전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품에 안았다면 이제는 아들의 품에 어머니가 안겨 있었다.

공작 부인은 몰라보게 장성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커도 너무 커진 아들의 얼굴에 간신히 손가락만 닿을 듯하자 클레이튼이 허리를 숙였다.

“클레이튼…….”

공작 부인이 다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

아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부를 뿐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다.

“가자, 집으로.”

집.

추적을 피해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 돌아갈 집이 생겼다.

20년 동안 주인 없이 버려졌던 저택으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마차로 걸어가니 클레이튼의 눈에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사람은 아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도련님.”

집사와 기사가 클레이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긴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자꾸나.”

“네, 어머니.”

“가자.”

“네, 마님, 도련님.”

그렇게 해서 그들은 바로 루덴 저택으로 향했다.

* * *

대회의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수습한 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에이든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이언 공작이 죽고 난 후 황제의 명으로 에이든이 황궁 안에 있는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다.

조사 후에 금방 풀릴 거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를 홀로 감옥에 놔둘 생각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에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기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괜찮겠죠?”

“무엇이 말이냐?”

“에이든…… 이요.”

아버지에게라도 확답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괜찮을 게다. 그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래도 마음의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내 곁에 있어야만 안정될 듯했다.

아델라는 현재 추적 중이었다.

하지만 수호수를 타고 도망쳤기에 그녀를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루덴 가문은 바로 복권이 되는 건가요?”

“그렇겠지. 루덴 공작 부인이 클레이튼을 데리러 감옥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그럼 이제 정말로…….”

클레이튼이 임시가 아니라 진짜 루덴 가문의 공작이 될 거라는 생각에 잠시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 정말로 내가 거두었던 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

아까 황제와 공작 부인 사이에 느껴졌던 이상한 감정 교류가 문득 생각났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을까 말까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폐하와 루덴 공작 부인이 꽤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어요.”

내 말에 아버지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에게 말을 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흠. 잘 아는 사이이긴 하지.”

“아, 그래요?”

“그래,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두 분이 꽤 절친한 사이였다고 알고 있다.”

“그렇군요.”

“더 궁금하면 네 어머니에게 물어 보거라.”

“네, 그럴게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궁금했을 뿐 두 사람의 관계는 내가 알아야 할 일들이 아니었다.

그 후 마차는 달리고 달려 저택에 도착했고 어머니의 안심 어린 미소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머니!”

“벨리타!”

나 또한 어머니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부모님과 나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남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어머니께 대회의실에서 있던 일들을 빠짐없이 말씀드렸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바이언 공녀는 찾고 있는 중인데 아마도 찾기 힘들 것 같소.”

“그렇겠죠. 수호수들 중에서도 유르티오스는 특히나 빠르니까요.”

“그렇소.”

“그러면…… 바이언 공자, 아니지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어머니께서 에이든에 대해 물으며 나를 쳐다봤다.

“에이든의 원래 이름은 이든이에요.”

나는 그의 진짜 이름을 부모님께 가르쳐 줬다.

“이든……. 그래,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바이언 가문이 사라졌고 그자는 애초부터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니었으니 별일이 없다면 평민으로 살아가겠지.”

평민…….

에이든, 아니 이든이 평민이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부모님을 쳐다보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입속에서 계속 맴돌 뿐 입이 쉬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평민이 귀족이 되는 방법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메리와 윌리엄의 결혼을 위해서 내가 메리에게 신분을 사 줄 생각을 했듯 하급 귀족의 작위는 돈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든의 경우도 그러면 되지만 우선은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했다.

“저는 이든과 함께하고 싶어요.”

“이든과?”

“네, 그는 이제 더 이상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평민이라서 안 된다고 하신다면 그에게 작위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다.”

갑자기 아버지가 내 말을 끊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는 황제 폐하와 많은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바이언 공작을 처단했다. 아마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든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감사해요, 아버지! 어머니!”

이제 이든만 무사히 나오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얼른 그가 보고 싶었다.

다음 날, 다행히 이든이 금방 풀려났다.

아버지에게서 그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재빨리 황궁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이든!”

“벨리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이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내 시야에는 다른 이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든만 보였다.

나는 그를 꽉 끌어안으며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보고 싶었어요.”

단 하루였지만 이제는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나를 더욱더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혹시나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꼼꼼히 살폈다.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죠?”

“무슨 일이 있었다면 지금 이곳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긴 해요.”

그의 말에 배시시 웃었다.

“가요. 부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머니 아버지를 보러 간다는 말에 이든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왜요?”

“제가 가도 됩니까? 저는…….”

“당연하죠!”

나는 빠르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의 입에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상처를 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 함께 가요.”

그러고선 그의 손을 잡아 끌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탄 나는 예전처럼 마주보고 앉는 것이 아닌 그의 옆에 딱 붙어서 갔다.

“황제 폐하를 뵀다고요?”

“네.”

“그렇군요. 무슨 얘기를 했어요?”

“여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바이언 가문에 들어가게 됐는지, 바이언 공작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공로를 인정해서 작위를 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정말요?”

역시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어제 일어났던 모든 일은 제 개인적인 복수심에 의한 것이지 대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분한 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이든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었다.

“아니요. 제가 보기엔 받아 마땅해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래서 나는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그를 격려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말을 막 하려던 사이 마차가 멈추었다.

“도착했네요. 우리 다음 이야기는 이따가 이어서 해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든과 함께 마차에서 내리자 부모님이 저택 앞에 서 계셨다.

“헤이츠 공작님, 그리고 헤이츠 공작 부인,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시오, 바이언……. 아니지,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버지가 문득 자연스럽게 이든에게 바이언 공자라고 부르려다 멈칫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이든이 그런 아버지에게 살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하겠소? 황제 폐하께서 작위를 내리신다고 들었으니 같은 귀족으로서 그럴 수 없지. 우선 들어오시오.”

생각보다 따뜻한 부모님의 환대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는 이든을 쳐다보며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들어가요.”

“네.”

부모님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가 상석에, 어머니가 오른쪽에 자리했고 이든과 나는 왼쪽에 나란히 앉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나는 테이블 아래로 몰래 이든의 손을 맞잡았다.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지자 그런 상황도 매우 즐거웠다.

나는 이든이 손을 놓지 못하게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포근하고 몽글몽글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얼굴 표정이 잔뜩 풀려 이든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헛기침이 들려왔다.

“크흠!”

왜 그런가 해서 아버지를 쳐다보니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아비한테도 그렇게 웃어 보거라.”

“네? 아…….”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곧바로 이해한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답은 잘하지.”

“여보, 그만하고 식사하세요.”

“크흠, 알겠소.”

그렇게 우리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대화는 대부분 부모님이 이든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식으로 흘러갔다.

대회의장에서 자세히 듣지 못했던 이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어떻게 바이언가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바이언가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등 듣는 나조차도 마음이 아픈 이야기들을 이든은 덤덤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그렇군. 참 힘들었겠소.”

“그러니까요. 그 모진 환경에서 잘 견뎌 내고 잘 자라 주었네요.”

부모님의 말에 마주 잡은 손을 통해서 이든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옆에서 글썽이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든…….”

내가 그를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는지 이든이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헤이츠 공녀가 그 지옥 같던 곳에서 저를 꺼내 주었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공녀. 공녀가 저를 위해 한 일들을 저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의 그 말이 어쩐지 더욱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여기서 계속 슬픔에 젖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 우리에게는 웃을 수 있는 날들만 남아 있으니 말이다.

“네, 잊지 말아요. 그리고 우리, 앞으로는 즐겁고 행복한 날들을 살아가요.”

함께.

그렇게 말하며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 속에 내가 있었고 아마도 그가 바라보는 내 눈 속에도 그가 있겠지.

우리는 지금 함께였고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크흠.”

또 우리만의 세계에 빠진 걸 눈치챈 아버지가 다시 헛기침으로 우리를 불러 들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나는 방긋 웃으며 아버지에게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그래서 앞으로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네? 아, 그게…….”

아버지의 말에 나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와 앞으로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당면 과제를 해치우는 데 급급해 우리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었다.

물론 그와 내가 앞으로 함께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었기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무척 중요했다.

이든을 스윽 쳐다보니 그 또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근데 왜 표정이…….’

이든의 표정이 왠지 어두웠다.

기뻐하는 표정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아무래도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야 할 듯싶었다.

“그 문제는 둘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 말씀드릴게요. 지금까지 그럴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었잖아요. 그렇죠?”

나는 일부러 이든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는 이든을 데리고 곧장 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모두를 내보낸 뒤 그와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이든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나는 우선 그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했다.

“저는…….”

그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끌었다.

그러자 거침없는 나와 달리 망설이는 듯한 이든의 모습에 순간 가슴이 콕콕 쑤셨다.

“나만 좋아하는 거였어요?”

“……네?”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울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기 위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가 황급히 변명했다.

“그러면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예요?

왜 금방이라도 나를 떠날 것 같이 구는 거예요?

차마 묻지 못한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저 저는…… 우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

‘아…….’

아까 그 자격 문제가 여기서도 언급되고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나는 막 떨어지려던 눈물을 싹 닦고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다음 이제까지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든에게 물었다.

“나를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 말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활짝 웃으며 그의 목을 감싸 안자 이든이 머뭇거리다 이내 내 허리를 안았다.

코가 닿을 듯 말 듯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나도 그래요. 나도 당신이 너무 좋아요.”

“벨…….”

“그런데 이런 우리가 떨어져서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

“이든은 저 없이 살 수 있어요? 아니, 제가 다른 남자랑 결혼해도 좋아요? 그런 거예요?”

“……아닙니다.”

대답과 동시에 내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나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더욱 세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뭘 망설이는 거예요? 부모님도 허락하셨잖아요.”

“하지만…… 하아…….”

말을 하다 말고 이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그가 현재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이 확연하게 보였다.

‘아! 그거다.’

그때 내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그 무언가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이든, 기억나요?”

“……네?”

“우리 예전에 헤모아에서 말 타기 시합 했던 거요.”

“기억납니다…….”

“그때 소원권을 나눠 가졌던 것도 기억나죠?”

“네.”

승마 대회를 앞두고 헤모아에서 말을 타다 이든과 말 타기 시합을 했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말을 타다 낙마를 하는 바람에 중간에 시합을 끝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결론을 낸 것이 시합은 내가 이긴 것으로 해서 내가 소원권을 가졌었다.

그리고 내가 다치지 않게 구해 준 이든에게도 똑같이 소원권을 주었고.

만약 내게 소원권이 있었다면 나는 그에게 지금 당장 소원권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소원권을 이미 써 버렸다.

예전에 표정이 좋지 않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였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든이 가진 소원권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내게 소원권을 써요.”

“네?”

“내게 소원권을 쓰라고요. 소원권은 상대방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줘야 해요. 나는 무슨 소원이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얼른요.

나는 이든을 재촉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났고 나는 그의 선택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나는 그가 제발 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해 주길 바라며 애써 초조함을 숨기며 그를 응시했다.

“벨.”

그가 내 이름을 조심히 불렀다.

“제 소원은…….”

긴장감에 몸 전체가 일순 굳어졌다.

그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제 소원은 당신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그가 진정으로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자 황홀한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아서 눈물이 울컥 샘솟았다.

“이든, 사랑해요.”

“저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면서 우리는 안고 있던 몸을 더욱더 꽉 끌어안았고 그 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서로의 체온을 공유했다.

그 이후 세상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여전히 아델라를 찾지 못한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든은 바이언 공작을 처단한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받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에이든 바이언이 아니라 레이터스 백작가의 이든 레이터스였다.

하지만 레이터스라는 성은 그저 나와 결혼하기 전에 명목상으로 붙어 있는 것이었다.

발테우스 제국은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남자의 성을 따르지는 않았다.

나처럼 후계가 단 한 명밖에 없는 가문을 배려해서 서로 합의가 된다면 여자의 성을 따르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우리가 결혼을 하면 이든은 헤이츠 가문의 성을 받고 헤이츠 공작저에서 함께 살 예정이었다.

이든의 일과 함께 클레이튼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공식적으로 루덴 가문이 완전히 복권된 것이다.

그로 인해 루덴 가문은 멸문당했을 때 빼앗겼던 영지와 재산을 모두 되돌려 받았고 실추된 가문의 명예 또한 다시 찾았다.

그와 더불어 클레이튼은 루덴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이제는 클레이튼이 정말로 임시 공작이 아니라 진짜 공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루덴 가문이 제자리로 돌아왔음을 축하하는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연회에 갈 준비를 마친 후 나는 부모님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가자.”

마차가 출발했다.

헤이츠 공작저에서 루덴 공작저까지는 마차로 약 30분 정도 걸렸다.

부모님과 나는 도착할 때까지 잠시 담소를 나눴다.

“레이터스 백작은?”

아버지가 이든의 소재를 물었다.

“잠시 들를 곳이 있다고 해서 일을 끝내고 곧바로 루덴 공작가로 온다고 했어요.”

“그래? 작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무척 바쁘긴 하겠구나.”

“네,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 약혼과 결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눴느냐?”

“네, 그런데 약혼식은 하지 않고 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

“약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네.”

나는 강한 의지를 담아서 대답했다.

“하긴 두 사람 다 성인이라 약혼을 하긴 좀 그렇겠네요.”

어머니가 내 말을 거들어 주었다.

“크흠. 그렇긴 하지.”

아버지 또한 별말 없이 내 말에 동의해 주었다.

“그럼 결혼식 날짜는 당신이 알아보겠소?”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후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루덴 공작저에 도착했다.

마차의 창문 사이로 본 루덴 공작 저는 마치 숲을 옮겨 놓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만큼 곳곳에 나무가 많아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했다.

연회가 열리는 건물 앞에 마차가 섰다.

그런데 마차에서 내리자 생각지도 않게 눈앞에 이든이 서 있었다.

“이든!”

“벨리타.”

일이 늦게 끝날 것 같다며 내게 연회 중간에야 도착할 거 같다고 했던 그였다.

그래서 예상치 못하게 더 빨리 그를 만나게 되자 반가운 마음에 그의 앞까지 빠르게 다가갔다.

“일찍 왔네요?”

“일이 일찍 끝났습니다. 오셨습니까, 헤이츠 공작님, 헤이츠 공작 부인.”

이든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때맞춰 왔군.”

“네,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서 왔습니다.”

“잘했소. 자, 그럼 들어가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앞장서고 나와 이든이 뒤따라갔다.

나는 서둘러서 이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을 잡고 가자는 뜻이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그가 살짝 움찔하더니 이내 곧 내 손을 따스하게 마주 잡아 주었다.

그를 향해 배시시 웃으며 우리는 연회장 안으로 걸어갔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부터 많은 귀족들이 와 있었다.

“어이구, 헤이츠 공작님 오셨습니까?”

입구 근처에 있던 한 중년의 남자가 아버지에게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블러스 자작, 오랜만이오.”

“예,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헤이츠 공작 부인, 헤이츠 공녀님께서도 오셨군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나와 어머니도 남자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이분이 바로 레이터스 백작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로버트 블러스라고 합니다.”

“이든 레이터스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블러스 자작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정말 바이언-.”

“크흠!”

바이언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버지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헛기침을 했다.

참 눈치도 예의도 없는 남자였다.

이렇게 좋은 날, 그것도 이곳에서 왜 바이언에 대해 말을 꺼내는 걸까.

그리고 자기가 이든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섣불리 말을 내뱉으려고 한 건지.

나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으며 블러스 자작이라는 자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도 대놓고 언짢은 티를 내자 분위기를 읽었는지 블러스 자작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제가 헛소리를……. 죄, 죄송합니다.”

“되었소. 인사 나눌 이들이 많으니 이만 가자.”

“네, 아버지.”

그렇게 뭐라 말을 하려던 블러스 자작을 놔두고 아버지를 따라서 다른 귀족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었다.

한창 귀족들과 돌아가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클레이튼과 루덴 대부인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헤이츠 공작님, 오셨습니까?”

“루덴 공작, 루덴 대부인.”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공녀님과 공작 부인께도 감사드립니다.”

감옥에서 본 후 클레이튼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본 그는 굉장히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귀족답게 연미복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정말 한 가문의 공작 그 자체였다.

“루덴 공작님, 루덴 대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헤이츠 공녀,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우리 가문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건 공녀 덕분입니다.”

루덴 대부인이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니에요. 저 또한 루덴 공작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그 이전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니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가요? 아, 클레이튼이 이전에 공녀의 호위 기사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정말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공녀는 정말 제 은인입니다. 언젠가 헤이츠 가문과 공녀가 루덴의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기꺼이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할게요.”

너무 과분한 감사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라 아버지를 쳐다봤다.

“허허. 제국의 공작 가문이 함께 잘 지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소.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헤이츠 공작님. 그러기 위해서는 두 사람을 맺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아쉽게도 공녀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분이 있으신 것 같네요.”

루덴 대부인의 시선이 이든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까부터 클레이튼의 뜨거운 시선 또한 나와 이든에게 닿아 있었다.

“그렇소. 두 사람이 곧 결혼식을 올릴 것이니 꼭 참석해 주길 바라오.”

“결혼하신다니 축하드립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다른 분들께도 인사를 드려야 해서 가 보겠습니다. 클레이튼.”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루덴 대부인이 클레이튼을 불렀다.

그런데 클레이튼이 어떠한 대답도 움직임도 없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보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아래에 시선을 주는 것이 보였다.

그러길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위로 올라오더니 클레이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뭐지?’

왜 저렇게 슬픈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나 의아하던 참에 나는 그때서야 내가 이든과 아직도 손을 맞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런데 왜……?

내가 이든과 손잡고 있는 것을 보고 왜……?

잠깐, 설마……?

왜 나를 저렇게 쳐다볼까 의문이 들어 마땅한 이유를 찾고 있는데 마침 당황스러운 이유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저런 눈으로 볼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었기에 나는 내가 생각한 것에 대해서 어떠한 티도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때마침 나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이든의 행동에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나를 보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든…….’

왜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든 또한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위축됐던 그였다.

클레이튼의 마음이 어떻든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활짝 웃어 주었다.

그러자 그제야 이든이 희미하게나마 내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공녀님.”

그때 나를 부르는 클레이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덴 공작님.”

나는 이든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클레이튼을 쳐다봤다.

아까의 흔들렸던 눈빛은 내가 착각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단단하고 강인한 얼굴을 한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제게 보여 주신 모든 선의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어머니의 말씀대로 공녀님과 헤이츠가에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 말을 끝으로 클레이튼이 말없이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고 클레이튼과 루덴 대부인이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연회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그리고 연회의 하이라이트인 댄스 타임이 시작되자 나는 이든과 함께 연회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이든과 함께 춤을 추면서 그를 보고 있자니 예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케인과 파혼한 뒤 여행을 떠나 그를 처음 봤던 순간부터 긴 여행이 끝난 뒤 다시 만났던 순간까지, 어느 하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우리 전야제 때 춤 췄던 거 기억나요?”

“네, 기억납니다.”

“그때 우리 무슨 얘기했더라……. 아! 승마 대회 얘기도 하고 여러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많은 일들 중에서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던 것은 그와 춤을 춘 후에 터졌던 불꽃놀이를 본 기억이었다.

“그때 불꽃놀이도 너무 예뻤어요. 그리고…….”

“그리고 제가 벨에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페오라트에 간 적이 없냐고 말입니다.”

그 당시 나는 이든을 만났던 일 자체를 지워 버리려고 했다.

이든이 바이언가의 사람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기에 절대 엮이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끌렸던 것을 애써 부인하며 더 이상의 호감을 가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었다.

그런 내게 이든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다가왔다.

내가 한 발짝 물러서면 그는 두 발짝 성큼 다가왔다.

“페오라트에서 저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멋진 사람을 만났어요.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불꽃놀이도 봤죠.”

내 말에 이든이 아주 멋진 미소를 지었다.

“딱 지금과 같은 미소도 보여 주었어요.”

“벨.”

“이든.”

페오라트에서 그리고 전야제에서 불렀던 그 이름이 이제는 정말로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저 또한 그곳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었던 꿈같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제 앞에 있습니다.”

꿈같은 사람이라니…….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울컥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보다는 행복해서 웃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눈물을 꾹 참으며 이든을 향해 활짝 웃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 후 좋은 기분만을 만끽했던 댄스 타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댄스 타임 내내 닫혀 있던 연회장의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 때문에 수도를 떠나서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케인이었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 그는 클레이튼과 인사를 나눈 뒤 곧장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공녀.”

그리고 환한 얼굴을 한 채 나를 불렀다.

하지만 곧 내 옆에 있던 이든을 보고는 미세하게 미간을 구겼다.

“맥시어스 공작, 오랜만이오.”

그때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아버지가 단숨에 다가와 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자리에서 케인이 항상 나를 괴롭혔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서둘러서 내게 온 것이라는 것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헤이츠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일은 잘 해결하고 온 것이오?”

“네, 폐하께서 명하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왔습니다.”

“그렇군. 잘됐소.”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은 황태자 전하께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바이언 공자, 아니지 레이터스 백작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맞습니까?”

케인이 이든을 보며 말했다.

이든의 새로운 성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그의 말대로 그가 없었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든 레이터스입니다.”

이든이 케인에게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레이터스 백작. 그런데…….”

케인이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추더니 나를 빤히 응시했다.

“헤이츠 공녀, 그것도 진정 사실입니까?”

케인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내게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가 내게 묻는 것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을 하며 그에게 도로 질문했다.

“공녀께서 레이터스 백작과…… 하아…….”

도저히 말하기가 힘든지 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었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공녀께서 레이터스 백작과 곧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나는 케인에게 보란 듯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어떻게…….”

내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꽤나 충격이었는지 케인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굳었다.

“황태자 전하께 다 들었다고 하셨으면서 제가 뭘 더 설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공녀……!”

케인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자 나는 그가 내게 닿지 못하게 뒤로 물러났다.

케인의 행동에 이든 또한 내 앞을 막아서며 케인을 저지하려고 했다.

나는 이든에게 괜찮다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케인의 앞으로 다가서며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맥시어스 공작님.”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

그게 바로 케인 맥시어스였다.

“제가 분명 여러 번 경고를 드린 것 같은데요. 제 몸에 함부로 손대시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 공녀…… 저는…….”

“공작님의 변명을 들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부디 앞으로는 더욱더 제게 행동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곧 레이터스 백작님과 결혼을 합니다. 그러니 행동 똑바로 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경고입니다.”

도대체 그와 왜 이런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금 그에게 행동을 주의시켰다.

“……죄송합니다, 공녀.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그러자 이번에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케인이 내게 미안한 눈빛을 보이며 사과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사과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잠시 동안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케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행히 그의 눈빛은 뭔가를 꾸미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끝이기를.

이제는 정말로 그가 나를 포기한 것이기를.

과거에 사로잡혀 계속해서 내게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얼굴을 돌려 이든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이든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그가 빠르게 내 앞을 막아섰다.

누군가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내게 검을 들이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검은 그자의 뜻대로 내게 닿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이든에게도 닿지 않았다.

얼마 전 대회의장에서 본 적 있는 철로 만들어진 그 검은 이든과 마찬가지로 내 앞을 막으려고 했던 케인의 손가락을 휙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 순간들이 아주 빠르게, 아니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느리게 만든 것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아아악! 안 돼!”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 소리가 들리며 연회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뭐, 뭐야?”

“아아! 안 돼요! 공작님!”

나를 공격하려던, 그리고 지금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델라였다.

아델라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검을 손에서 떨군 채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바이언 공녀?”

“정말 바이언 공녀인가?”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귀족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제히 한곳을 응시했다.

나 또한 내 앞에, 그리고 이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경악에 빠진 표정으로 바라봤다.

철의 검에 닿은 케인의 손이 점점 철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케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눈앞의 끔찍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든이 뭘 하려는 건지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든이 서둘러서 뛰어간 곳은 연회장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가 느닷없이 기사의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앗더니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이든이 내게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판단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검이 눈앞에서 휘둘러졌다.

점점 사라져 가던 케인의 팔이 떨어졌고 피가 연회장 바닥을 적셨다.

“으윽!”

“아아악!”

케인의 고통에 가득 찬 음성과 아델라의 비명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든……? 지금…… 뭘…….”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그가 한 행동이 곧바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피를 보자 멍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때서야 나는 이든이 뭘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케인의 팔을 타고 올라오는 철의 검의 힘을 팔을 잘라 버림으로써 끊어 버린 것이었다.

모두가 그저 사라져 가는 케인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순간에 너무나 현명한 행동이었다.

“의사, 의사를!”

나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며 의사를 데려오라고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아, 예! 알겠습니다!”

내 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서 연회장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바로 케인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나를 왜 보호해서……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 최대한 지혈하기 위해 노력했다.

“으윽.”

내가 잘린 팔을 누르자 케인이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가만히 계세요. 의사가 올 때까지 조금이라도 지혈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거예요.”

단호한 내 말에 케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그에게 어떤 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아델라가 나를 철의 검으로 공격하려고 했던 것은 다 이 남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는 하고 싶었다.

아델라가 휘두른 검이 철의 검이라는 것은 나도, 이든도, 그리고 케인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사람을 위해서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이언 공녀를 잡아라!”

멀리 있던 클레이튼이 가까이 다가오며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예!”

그리고 그의 명령에 몇몇의 기사들이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아델라를 포박했다.

“아, 안 돼!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공작님!”

아델라가 케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

“공작님! 저는! 저는 공작님께 그런 것이 아니에요. 저는 헤이츠 공녀를……!”

“바이언 공녀.”

케인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아델라를 불렀다.

“네, 공작님. 공작님, 제 마음은 아시죠? 제가 어떻게 공작님께 해를 끼치겠어요? 저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아델라가 계속해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다행, 다행이에요……! 공작님이 이대로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에이든이…… 에이든, 잘했어. 역시 우리 가문에서 허투루 있던 건 아니었구나.”

다행이라니,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팔이 잘린 케인을 보면서 고작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리고 이든을 에이든이라고 부르면서 아델라는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너무나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이제 에이든은 없어요. 이제 이 분은 에이든 바이언이 아니라 이든 레이터스예요.”

그래서 나는 에이든이 아니라 이든이라고 아델라에게 확실하게 상기시켜 줬다.

“이든 레이터스……?”

“네, 이든 레이터스 백작님입니다. 그리고 곧 저와 결혼해서 헤이츠 성을 받을 계획이고요.”

“뭐, 뭐라고?”

내 말에 아델라가 표정을 싹 굳히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가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어? 네가 어떻게! 어떻게!”

아델라가 이든을 향해 큰소리를 내며 악을 썼다.

“바이언 공작은 지난 시간 자신이 해 오던 악행에 대한 죗값을 받은 것입니다.”

“닥쳐! 아버지는…… 아버지는……그런 분이 아니야. 아버지는!”

“누님.”

아델라와 나의 대화에 이든이 아델라를 부르며 끼어 들았다.

“누님? 누가 네 누님이야? 나는 한 번도 네 누님인 적이 없었어. 네 말대로 너는 에이든이 아니야. 내 동생이 아니라고. 나는 한 번도 너를 동생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단 말이야!”

아델라의 윽박지름에도 이든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하려고 했던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누님께서도 부디 헤이츠 공녀에게 해 왔던 악행에 대한 죗값을 치르시길 바랍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그저 공작님이 나를 다시 봐주길 바랐단 말이야. 나는 그것만 바랐는데…… 흐흑. 나는…… 나는…….”

아델라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케인을 찾았다.

“바이언 공녀.”

그러자 케인이 아델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차가운 음성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공작님! 제 마음 아시죠? 저는 공작님만 있으면 돼요. 다른 사람은 다 필요 없어요. 그러니 우리 다시-.”

“바이언 공녀, 공녀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제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다시 공녀에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케인이 아델라를 쳐다보며 강한 의지가 담긴 표정으로 얘기했다.

“공작님……?”

케인의 강력한 거부에 아델라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공작님! 저는…… 저는!”

이어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케인은 그런 아델라를 이제는 더 이상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공녀. 고맙습니다, 레이터스 백작.”

이든이 자신의 팔을 왜 잘랐는지 그 또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렇게 케인은 나와 이든에게 각각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말을 한 뒤 뒤돌아 연회장의 문으로 향했다.

“공작님! 가지 마세요! 저를 버리고 가시면 어떻게 해요!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공작님!”

아델라가 악을 지르며 케인을 불렀지만 케인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공작님! 안 돼요! 제발 돌아오세요. 제발! 아아악!”

아델라의 마지막 절규가 연회장을 가득 울렸다.

그리고 케인이 연회장을 나감과 동시에 아델라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연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델라가 쓰러진 후 그녀는 곧장 특수 감옥으로 옮겨졌다.

그곳은 밖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네 공작 가문이 가진 힘으로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아델라를 잡으면 가둘 곳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만든 감옥이었다.

감옥에는 의사도 함께였다.

아델라가 그저 잠든 것이라는 말에 우리는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쉽사리 깨어나지 않았다.

아주 긴 잠을 자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회의에 다녀온 아버지에게서 케인이 변방에 있는 맥시어스 가문의 영지로 떠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누군가 등 떠민 것이 아니라 케인 자신의 의지라고 했다.

어쩐지 연회장에서의 그의 모습은 이전의 그와는 확실히 달랐다.

연회장에서의 일을 보고 난 뒤 뭔가를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케인이 떠나기 전날이었다.

“아가씨, 저기…….”

방에서 쉬고 있는데 메리가 우물쭈물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 맥시어스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찾아오셨어요.”

“맥시어스 공작님이?”

“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케인이 나를 찾아왔다는 말에 나는 그를 볼지 말지 잠시 고민을 했다.

때마침 부모님은 잠시 외출을 했기에 케인을 내쫓아 줄 아버지도 지금은 없었다.

‘어떡하지?’

아무리 그의 심경의 변화가 있다고 느꼈어도 전적이 있기에 그를 볼 마음이 쉽사리 들지는 않았다.

“아가씨? 어떻게 할까요……?”

“메리, 지금 당장 윌리엄 경에게 가서 레이터스 백작님을 이리로 모셔오라고 해.”

“레이터스 백작님을요?”

“응, 그리고 맥시어스 공작님께는 잠시 기다리라고 해 줘.”

“맥시어스 공작님을 만나시게요?”

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윌리엄 경에게 레이터스 백작님을 서둘러서 모셔 오라고 할게요.”

그리고 내 말의 뜻을 이해한 메리가 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케인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아서 이든을 부른 것이었다.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이든이 올 시간을 끈 뒤 나는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 안에는 케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그의 왼쪽 옷소매가 허전했다.

“맥시어스 공작님.”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최대한 그의 왼쪽 팔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를 불렀다.

내가 그를 부르자 케인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뒤를 돌아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헤이츠 공녀.”

“앉으세요.”

나는 그에게 다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며 나 또한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저를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그리고 바로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제가 내일 수도를 떠난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네, 들었어요.”

“들으셨군요…….”

케인의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 잠시 정적이 일었다.

나는 그저 그가 왜 나를 찾아온 건지 이유를 알고 싶을 뿐 그에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 나도 모르게 실수로 그의 왼쪽 팔에 시선을 줬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꼈는지 케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떠나기 전에 공녀에게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 것 같았다.

‘하아…….’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연회장에서 했던 말을 그에게 다시 꺼내려는데 그가 나보다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공녀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는 못했습니다.”

“공작님.”

나에 대한 마음이 여전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간절하게 호소하는 말투에 나는 살며시 미간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평생 이 마음을 놓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떠나는 것입니다. 공녀에게 더 이상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제 마음을 단속하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케인이 계속해서 말을 했다.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만큼 공녀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때 케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정리되면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마도 공녀께서는 헤이츠 가문의 주인이 되어 있으시겠죠.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때에는 공녀가 언젠가 제게 말했던 것처럼 사적인 감정이 아닌 한 가문의 가주로서 서로를 대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뜻이었다.

나는 잠시 내 앞에 놓인 그의 손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케인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요.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시길 바라요.”

악수를 하며 나는 처음으로 그를 향해 거짓 없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그를 보며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오지 마십시오. 여기서 배웅받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그 말을 끝으로 케인이 돌아서며 응접실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케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꽤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케인이 저택을 떠나고 잠시 후에 이든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요?”

“맥시어스 공작님은 어디 계십니까?”

메리와 윌리엄에게 이미 상황을 전해 들은 것인지 이든이 케인을 찾고 있었다.

“가셨어요.”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갑자기 제가 오라고 해서 놀랐죠?”

“아닙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이든에게 다가가 그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벨……. 정말 괜찮은 겁니까? 맥시어스 공작님이 설마…….”

뜬금없이 그에게 안긴 내게 이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다는 내 대답에 이든이 나를 꽉 안아 주자 커다란 안정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고 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분위기가 좋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든이 그랬잖아요.”

그리고 긴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대회의장에서 바이언 공작이 그렇게 된 뒤에 끝났다고요.”

“……네, 그랬습니다.”

“지금 제 기분이 그래요.”

“…….”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내가 한 말을 이해했는지 이든이 나를 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렇습니까?”

“네, 이제 정말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든과 함께요.”

“벨…….”

“나와 언제나 함께할 거죠?”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죽어서도 함께할 거라는 이든의 말에 순간 울컥해서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사랑해요.”

기쁨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이든이 걱정할까 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얼굴을 보지 못하게 더 깊게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저도 사랑합니다.”

그 후로 이든은 틈날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도 계속 말했다.

나는 그의 사랑한다는 말과 나를 향해 속삭이는 황홀한 말들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 * *

케인이 수도를 떠나고 한 달쯤 됐을 때, 아델라가 눈을 떴다.

정신을 잃기 전 연회장에서 케인을 향해 울부짖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차디찬 돌바닥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고개를 서서히 들며 눈을 감았다 떴다 반복하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세 면은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창살만이 가득한 곳.

바로 감옥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그리고 공작님은……!’

케인을 만나야 했다.

케인을 만나서 자신이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에게 설명을 해야만 했다.

마음이 초조해진 아델라는 서둘러서 감옥을 나가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몸에서 철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헛된 일이었다.

아무리 힘을 내도 아주 미세한 힘만 올라올 뿐이었다.

이 정도로는 감옥을 탈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힘을 억누르는 공간인가.’

아마도 헤이츠 가문이 힘을 써서 만들었겠지.

아버지에게 예전에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네 공작 가문의 힘은 서로의 힘에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철의 힘이 바람의 힘을 누르고 불의 힘이 철의 힘을 누르고 물의 힘이 불의 힘을 누르고 바람의 힘이 물의 힘을 누른다고 말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이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라는 감옥을 지키는 기사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소리쳤다.

“아아악!”

악을 쓰며 소리치자 기사 둘이 그녀가 갇혀 있는 감옥 근처로 다가왔다.

“어?”

긴 잠에서 깨어난 아델라를 보곤 기사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여긴 너무 답답하고 춥다고! 얼른 내보내 줘!”

“안 됩니다.”

다짜고짜 감옥에서 빼내 달라는 아델라의 절규에 기사들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공녀님께서는 차후 황제 폐하의 명이 있으실 때까지 여기에 계셔야 합니다.”

“너무 답답해! 여기서 하루라도 있기 싫어! 제발 꺼내 줘!”

“안 됩니다.”

기사는 아델라에게 계속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럼 맥시어스 공작님을 뵙고 싶다. 그러니 맥시어스 공작님을 보게 해 줘.”

“맥시어스 공작님은…….”

기사가 잠시 말을 해야 할까 말까 고민하며 망설였다.

“맥시어스 공작님을 뵈어야만 해! 그러니 얼른 그분을 만나게 해 달란 말이야!”

아델라가 계속해서 케인을 보게 해 달라고 재촉하자 기사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맥시어스 공작님을 뵐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케인을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아델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기사가 도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케인이 나를 보기 싫다는 뜻일까.

아니면 설마…….

연회장에서 철의 검으로 케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사라지게 만들 뻔했던 것이 기억나자 그녀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기사를 닦달했다.

“무슨 뜻이냐니까! 맥시어스 공작님께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그것이…….”

“얼른 대답해!”

“그게 맥시어스 공작님께서는 지금 수도에 안 계십니다.”

“수도에 안 계시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아델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사에게 물었다.

“맥시어스 공작님께서는 제국의 변방에 있는 영지로 떠나셨습니다.”

“떠났다고?”

“예.”

“언제?”

“그러니까, 한 달 정도 됐습니다.”

“한 달이라니…… 그럼 내가 한 달이나 깨어나지 못했다는 뜻이야?”

“예, 그렇습니다.”

“일 때문에 가신 건가?”

“그것이, 듣기로는 수도에 있는 저택을 정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수도의 저택을 정리했다고?”

“예. 아마도 꽤 오랫동안, 아니 어쩌면 평생 안 돌아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평생…… 안 돌아온다…….”

케인이 떠났다니…….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빠르게 돌아가던 아델라의 머릿속이 일순간 멈췄다.

도저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가 떠나다니, 그럼 나는…….

그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파 왔다.

“아아…….”

고통에 잠긴 신음 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왔다.

“으흑…….”

신음 소리 다음에는 절망에 젖은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흐흑. 공작님. 어떻게…….”

그가 나를 버리고 멀리 가 버렸다.

나는 이제 그를 보지 못한다.

이 감옥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그를 영영 볼 수가 없을 테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하자 모든 희망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델라는 온몸으로 슬픔을 내뿜으며 구석으로 가서 몸을 뉘였다.

기사들이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직 케인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거라는 상실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렇게 아델라는 몇 날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내내 울었다.

가끔가다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는 여전히 눈가가 젖은 채였다.

눈물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치지도 않고 계속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눈을 감고서도 뜨고서도 계속해서 울었다.

그리고 그러고 있기를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또 잠시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손가락에 껴 있는 반지가 흐릿하게 보였다.

‘반지…….’

반지를 보며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는데 갑자기 불현듯 뭔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축 처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 반지 안에 있는 철의 힘을 몽땅 다 끌어냈다.

반지의 힘을 모두 다 끌어내면 반지는 부서지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힘을 억누르고 있는 이 감옥에서 그녀가 생각한 바를 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의 힘을 끌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아델라는 그녀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간신히 손바닥에서 철의 검을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왼쪽 손에 껴져 있던 반지가 산산조각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철의 검이 손바닥에 쥐어지자 아델라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검을 그녀의 몸에 박았다.

“윽!”

고통은 잠시뿐이었다.

이 고통이 지나면 나는 자유가 될 테지.

그 생각을 하자 손아귀의 힘이 더욱더 강해져 검을 더 깊숙이 찔러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검이 박힌 곳에서부터 서서히 철가루가 되어 사라져 갔다.

케인, 기다려요.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그에게 버림받았을지언정 그녀는 그를 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 보고 싶은 사람이 가면 되는 거야.

이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델라는 슬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라져 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델라는 돌바닥에 조각난 반지만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케인이 떠나고 약 한 달 뒤 아델라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긴 잠에 빠졌던 그녀가 드디어 의식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아델라는 깨어나자마자 악을 쓰면서 케인을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케인은 더 이상 수도에 없었기에 그녀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는 없었다.

케인이 수도를 떠났다는 말에 아델라가 몇 날 며칠을 울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졌다.

그리고…….

약 일주일이 지난 오늘, 황궁을 다녀온 아버지에게서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델라가……

아델라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거였다.

사라졌다고 말을 하지만 정확하게는 죽었다는 말이 맞았다.

돌바닥에 깨어진 반지가 발견된 거로 보아 그 감옥에서 철의 힘을 불러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삶이 결국 죽음으로 끝나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델라가 내게 어떻게 했고, 이든에게 뭘 했던 나는 그녀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길 바랐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용서받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할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없으니까 말이다.

똑똑.

소파에 앉아서 아델라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만으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번에 씻겨 내려갔다.

나는 재빠르게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문 밖에는 역시나 이든이 서 있었다.

“이든!”

그를 향해 활짝 웃자 그 또한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들어와요. 얼른!”

그의 손을 붙잡고 방 안으로 그를 잡아 끌었다.

그가 몸에 힘을 풀고 내가 끄는 대로 끌려왔다.

나는 그를 소파에 앉히고는 그 옆에 붙어 앉았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어요?”

“네.”

“그렇구나. 그래서 나 만나러 온 거예요?”

“보고…… 싶으니까요.”

이든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따가 내가 가려고 했는데 이든이 먼저 왔네요?”

“그렇습니까? 그럼 벨이 온 거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여러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더없이 충분했다.

“그런데…….”

그러다 나는 오늘 들은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 이내 운을 띄웠다.

“아델라가…….”

“저도 들었습니다.”

“하아…… 어떻게, 왜…….”

그녀에 대한 것을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선뜻 입을 떼기가 힘들어서 나는 그저 긴 한숨만 쉬었다.

“맥시어스 공작님에 대한 그분의 마음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던 것 같습니다. 감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겠죠.”

이든이 그녀의 마음을 조심스레 추측하며 내게 말했다.

“그랬을까요? 그 감옥은 힘을 거의 쓸 수가 없는데 반지를 깨면서까지 힘을 뽑아냈다니 그만큼 절박했던 거겠죠?”

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가 죽음으로써 정말로 바이언 가문이 사라져 버렸네요. 바이언 가문의 핏줄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잠시 이든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고 있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델라와 케인은 내가 아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 이야기는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과연 그 소설을 읽은 게 맞는 걸까?

아니, 내가 그 소설 속에 들어온 건 맞는 걸까?

이제 와 그걸 생각해 봤자 어차피 결론이 나지 않는 주제였다.

나는 괜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든도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게 물었다.

“음, 아무것도요. 그나저나 우리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나는 일부러 대답을 피하며 몸을 살짝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차피 지금 내가 생각한 것들은 평생 그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과 별개로 우리의 결혼식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 이렇게 만나기 위해서 오며 가며 할 필요도 없고 매일매일 볼 수 있어요.”

다행히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가 별말 없이 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살짝 묻더니 더운 숨을 내뱉었다.

“긴장돼요?”

“네, 긴장됩니다.”

“긴장하지 말아요.”

나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며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줬다.

“제가 벨과 결혼을 하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도 믿기지 않아요. 우리가 부부가 된다는 것이요.”

“벨도 그럽니까? 하지만 벨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보입니다.”

“아니에요. 저도 떨리고 긴장돼요.”

“그렇습니까?”

내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려는지 이든이 얼굴을 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네.”

나는 그에게 확신을 주듯 고개를 세게 끄덕거렸다.

“당신이 내 남편이 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요.”

그리고 온 마음을 담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벨…… 당신은 정말…….”

내 말에 엄청나게 감동받았는지 이든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러면서 그 얼굴을 감추려는 듯 나를 꽉 껴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든과 나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결혼식은 수도에 있는 큰 대신전에서 행해졌고 공작가의 결혼인 만큼 대신관의 주도로 진행됐다.

결혼식이 시작하기에 앞서 대기실에서 메리가 마지막으로 드레스를 정돈해 주었다.

“아가씨, 떨리세요?”

“응. 조금 떨리네.”

“저도 너무 떨려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메리가 내게 말했다.

“내 결혼식에서도 이렇게 떨면 네 결혼식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장난치듯 메리에게 말을 건네자 일순 메리의 손짓이 멈췄다.

그리고 크게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제 결혼이라뇨. 저는 아직…….”

“잊었어? 내가 결혼을 하면 너도 하겠다는 약속.”

“……잊지 않았어요.”

“그래,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야. 그러니 내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네게도 드레스를 입혀 줄게.”

“아가씨…….”

메리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때 대신전에 있는 커다란 종이 울렸다.

“시작이네.”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맑고 청량한 종소리였다.

“아, 내 정신 좀 봐. 얼른 가서 백작님을 모셔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계셔요.”

“메리.”

“네?”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네? 무슨…….”

대기실 문 앞에는 이든이 벌써 와 있었다.

“아, 오셨네요!”

“왔어요?”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든이 성큼성큼 걸어서 내 앞에 다가오더니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가죠.”

“네, 가요.”

종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서 새로운 시작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결혼식이 끝난 후 곧바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의미 있는 곳이었다.

바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인 페오라트였다.

페오라트에 도착하니 신기하게도 때마침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축제예요!”

“축제군요.”

오랜만에 왔는데도 이 마을은 여전했다.

우리는 그때와 똑같이 휘황찬란한 상점거리를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런데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계속 익숙한 말들이 귀에 꽂혔다.

이곳에서 처음 알게 된 말이자 이든을 처음 본 순간 그와 나눴던 말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포르타 드비아!”

“포르타 드비아!”

똑같은 말을 내뱉는 서로가 재밌어서 저절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인생 최대의 행복한 날이네요.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웃으며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 시간이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날이 점점 저물고 밤이 되자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오색빛깔의 찬란한 불꽃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우리는 가장 좋은 명당자리에서 불꽃놀이를 감상했다.

“와, 너무 예뻐요!”

불꽃놀이는 언제 봐도 참 멋있고 아름다웠다.

박수까지 치며 불꽃놀이를 감상하고 있는데 예전에도 느꼈던 뜨거운 시선이 옆에서 느껴졌다.

이든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

내 물음에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든?”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목을 껴안아 그의 키스에 열렬히 응했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야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입술은 닿을락 말락하고 있었다.

숨을 색색 내뱉고 있는데 그가 나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해요.”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의 사랑한다는 말에 나 또한 그에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이 시작된 곳에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이곳에서 또 다른 처음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이란 무릇 처음이 정해져 있듯 끝도 정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지금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벨.”

“이든.”

불꽃놀이가 끝나자 다시 움직이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따뜻한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이 손을 놓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 남주와 여주가 헤어졌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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