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 *
에이든과 대화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따로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서 의심을 살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는 연회장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찾고 있던 부모님께 대충 바람을 쐬고 왔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연회가 끝난 후 부모님과 나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이제 말해 보거라.”
그리고 아버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아까부터 계속 내게서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정말 별일 아니었어요, 아버지.”
“그러니까 그 별일이 무엇이기에 두 사람이 함께 실종이 됐었다는 것이냐?”
아버지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 틈이 날 때마다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납득할 수 있으면서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어야 해.’
“듣기론 그날 아게르성에서 연회가 열렸다고 하던데, 맞느냐?”
“네, 맞아요.”
“연회가 열린 날 도대체 뭐 때문에 밖을 나간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그것도 에이든 바이언과 함께라니!”
바이언이라는 말에 아버지가 또 다시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진정해요. 벨리타가 말을 한다잖아요.”
“크흠, 알겠소.”
어머니가 간신히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연회에 바이언 공자가 오질 않아서 그가 쓰는 방으로 찾아갔는데 연회가 아닌 잠시 밖을 나갔다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냐고 물었더니 밖의 동태가 조금 걱정스러워 살펴보고 와야겠다고 했어요.”
“밖의 동태?”
“네, 마물들을 모두 몰아냈지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그곳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미심쩍은 부분이라니?”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가는 걸 지켜보다 아무래도 혼자 보내기엔 불안해서 뒤따라간 거예요.”
“그걸 왜 네가 뒤따라간 것이냐! 바이언가의 공자가 아니더냐!”
정확히 말하면 에이든은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니지만 아직 에이든에 대해서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좀 더 알맞은 때를 노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내놓았다.
“아버지, 북부는 전쟁터였어요. 그곳에 있는 이들은 마물 외에는 다 제 동료들이죠. 저는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따라간 것뿐이에요.”
“크흠!”
그러자 아버지가 민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저희가 간 곳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돌아오려는데 폭설이 내려서 발이 묶였어요. 그리고 섣불리 움직이느니 폭설이 그치길 기다린 거고요.”
거짓말이 익숙한 건 아니지만 반드시 부모님을 속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말이 술술 나왔다.
내가 여기서 부모님을 잘 속여 넘기면 모든 게 괜찮을 거였다.
에이든과 이미 입을 맞춘 뒤라서 클레이튼이 그날의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이미 클레이튼의 입단속을 시켰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이 일에 관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내 말이 진실인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당당한 시선으로 아버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맞댔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더 이상 말은 않겠다. 하지만 앞으로는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 아버지, 근데 혹시 바이언 공작이 루덴 공작에게 채웠다던 목걸이 말인데요.”
“목걸이?”
“네,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요. 그거로 루덴 공작의 힘을 억제했다고 아버지께서 그러셨잖아요.”
“그랬지.”
“그 목걸이가 힘을 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할 수 있나요? 예를 들면 사람의 정신이나 신체를 조종하는 거요.”
이미 에이든과 오웬 에스트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아버지가 목걸이에 대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람의 정신이나 신체를 조종한다고?”
“네, 그래서 그 목걸이를 이용해 공작이 루덴 가문에 누명을 씌웠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목걸이를 이용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그게…… 갑자기 든 생각이에요. 그 목걸이가 그냥 예사 목걸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처음 듣는 것 같이 반응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나는 당황함을 숨기며 빠르게 말을 받아쳤다.
“흐음, 확실히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런 목걸이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 그런가요.”
“당신은 들어 본 적 있소?”
“아니요. 저 또한 들어본 적 없어요.”
어머니의 표정을 살펴보니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목걸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번에 우리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그 목걸이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어떻게 아시게 된 거예요?”
“그건 내가 직접 안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바이언가와 우리 가문이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종종 가문간의 싸움이 크게 번지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네 이야기가 꽤 그럴 듯하구나.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고 하니 아무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알아보겠다.”
“의심스러운 부분이요?”
“어떤 하나의 일만 짚이는 게 아니라 철의 가문과 관련된 여러 일들이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아, 네. 알겠어요. 저도 따로 알아보도록 할게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네, 아버지.”
“특히 바이언가는…… 에이든 바이언과도 거리를 두거라.”
“네? 아, 네.”
에이든과 거리를 두라는 말에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부모님과 대화하는 사이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나는 부모님께 인사한 뒤 내 방으로 바로 올라왔다.
그리고 씻고 잘 준비를 마친 뒤 모두를 물린 다음, 침대에 누워 오늘 에이든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에이든…….’
그름 생각하면 이제는 두근거림도 두근거림이지만 심장이 찌릿했다.
‘제대로 한 번에 확실히 해야 해.’
절대 상대가 빠져나갈 틈을 줘서는 안 된다.
그래야 에이든이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나저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걸이에 대해 모르고 계셨다니…….
그렇다면 바이언 공작이 목걸이를 이용해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아닌가.
‘꼭 모든 걸 밝힐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나는 내일을 위해서 잠들었다.
다음 날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바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렇게 큰 수확은 없었다.
그런데 며칠 뒤였다.
황궁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귀족 회의에 다녀온 아버지가 잔뜩 화가 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벨리타!”
그러면서 내 이름을 계속 부르며 나를 찾으셔서 나는 서둘러서 홀로 내려갔다.
홀에는 어머니도 와 계셨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있었다.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
“할 말이 있으니 따라 오거라! 당신도 따라 오시오.”
“네, 아버지.”
“네, 여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조용히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아 어머니 또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나 보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맘이 급했는지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바이언 공작 그놈을 내가……!”
“여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바이언 공작이 또 당신의 심기를 어지럽힌 건가요?”
회의에서 바이언 공작과 또 다투신 듯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대로 그건 늘 있는 일이라 아버지는 회의를 갔다 오고 나면 바이언 공작을 향해 욕을 퍼붓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무슨 일이지?’
나는 잠자코 아버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바이언 공작이 마차 사건을 재조사해 달라고 청하더군.”
“마차 사건을요?”
“그렇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대놓고 너를 지목했다.”
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벨리타를 지목하다니요?”
“저를 지목했다고요? 마차에 불 폭탄을 설치한 것이 저라고 말이에요?”
“그렇다. 너를 심문하고 싶다더구나.”
“어떻게 그런……!”
어머니가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살짝 휘청였다.
“어머니!”
“괘, 괜찮아……. 나는 괜찮다, 벨리타.”
“심문이라면 어떤 형식으로요?”
“네가 그걸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너는 절대로 심문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다. 반드시 내가! 이 듀크 헤이츠가 목숨을 걸고서 지킬 것이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서 나를 지킨다는 말에 순간 울컥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니야. 지금은 이런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야.’
나는 감정을 가다듬고 정신을 똑바로 집중시켰다.
어떻게 보면 이건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바이언가를, 바이언 공작의 역겨운 짓거리들을 낱낱이 폭로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순간이었다.
“아버지께서 저를 지키고자 하시는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 또한 제가 하지 않은 것을 뒤집어 쓸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제가 왜 범인이라고 하는 거죠? 증거가 있다고 했나요?”
나는 침착하고 차분한 눈으로 부모님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런 내 태도에 길길이 흥분하던 아버지가 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특유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와 시선을 맞대었다.
“그런 것도 없으면서 막무가내로 너를 심문하게 해 달라고 했다. 조사단 저택도 네가 그런 거라고 하더구나. 어이가 없지. 너는 그때 수도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당장 그놈을 죽이고 싶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조사단의 저택에 불을 지른 것을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다니.
어쩜 이렇게 뻔뻔하고 파렴치한지 정말 갈수록 가관이었다.
“정말 너무하네요. 증거도 증인도 없이 벨리타를 범인이라고 몰다니요!”
어머니의 언성이 크게 높아졌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지금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진정하세요.”
나는 우선 그들을 진정시킨 뒤 말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심문받겠어요.”
“뭐?”
“벨리타!”
내가 심문을 받겠다는 말에 부모님의 표정이 놀라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가 왜 심문을 받겠다는 것이냐! 절대 안 된다.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그래, 벨리타. 절대로 그런 생각하지 말렴.”
“아니요, 제가 심문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바이언가에서는 저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압박할 거예요. 저는 결백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거예요.”
“어떻게 증명한단 말이냐?”
“제게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 저를 믿어 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는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다 말씀드릴게요.”
이 문제는 에이든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 지금 당장은 말씀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죄송한 마음을 담아 그들을 설득했다.
“알겠다. 너를 믿는다. 그리고 너의 뒤에는 항상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당연히 알고 있어요. 제게는 저를 지지하고 믿어 주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걸요.”
나는 그런 부모님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마차 사건의 심문 날짜는 일주일 뒤로 잡혔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내 문제는 이미 어떻게 할지 생각해 놨다.
그것보다 나는 바이언 공작을 끝까지 몰 수 있는 다른 증거들도 모으기 위해서 분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른 건 루덴 가문의 일이었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루덴 가문의 일은 뭔가가 수상했다.
딱 맞아떨어진 증인과 증거, 그리고 제국의 정점에 있는 한 공작가가 막을 수도 없이 순식간에 망해 버린 것은 너무나 이상했다.
‘우선 클레이튼을 만나 봐야겠어.’
그를 만나서 여러 가지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가 갇혀 있는 수도 끝에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다행히 클레이튼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감옥을 지키는 기사에게 금화 몇 닢을 쥐여 주니 순순히 감옥에 들어가게 해 주었다.
지하 감옥에 들어서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조심히 안으로 들어가 클레이튼을 찾았다.
그는 감옥의 가장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살 가까이로 다가왔다.
“공녀님!”
“공작님…….”
나는 클레이튼을 부르며 빠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상태를 살피었다.
이곳에서 고문을 받거나 밥을 못 먹는 건 아닌지 그의 상태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 사실에 나는 속으로 잠시나마 안심했다.
“공작님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이 불쾌한 곳까지 어찌 오셨습니까?”
“공작님을 뵈러 왔어요.”
“……저를요?”
“네, 몸은 어떠세요?”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어디 불편한 건 없으세요?”
“네, 있을 만합니다.”
“…….”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그를 곧장 빼내 줄 수도 없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갔다.
그런데 잠깐.
그와 가깝게 마주하는 순간 그의 목에 가늘고 긴 금속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에이든과 오웬 에스트가 하고 있던 그 목걸이와 비슷한 거였다.
“목걸이…….”
내가 목걸이를 언급하자 그가 곧바로 내게 목걸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감옥에 갇히자마자 바이언 공작에 의해 목걸이를 찼습니다. 이 목걸이는 제 힘을 무력화시키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지금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알아요.”
“알고 있습니까?”
“네,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잠시만요.”
“네?”
“이리 가까이.”
나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그리고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그의 목에 손을 댔다.
“공녀님?”
나는 대답 없이 빠르게 내 힘을 목걸이에 불어 넣었다.
잠시 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목걸이의 색이 뒤바뀌었다.
지하라 어두워서 티가 나지는 않아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었다.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됐어요. 아주 살짝 힘을 써 보시겠어요?”
“네?”
“제가 목걸이를 무력화시켰어요.”
“그게…… 가능한 겁니까?”
“한번 해 보세요.”
나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힘을 써 보라고 말했다.
클레이튼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바람이 살짝 일어났다.
“어?”
“됐네요.”
“어떻게 된 겁니까?”
“철의 힘을 불의 힘으로 눌렀습니다. 그래서 그 목걸이는 우리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아…….”
클레이튼이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의심을 사지 않게 목걸이는 계속 차고 계세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아마 이곳이 어두워서 목걸이만 계속 하고 있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거예요.”
그가 내 말에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만약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그곳을 나오셔야 하니까요.”
만에 하나 바이언 공작이 수틀려서 클레이튼에게 해를 가하려고 할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요, 아직은요.”
“아직이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바로 꺼내며 입을 열었다.
“사실 궁금한 게 있어서 공작님을 찾아왔어요.”
“궁금한 것이요?”
“네, 그런데…….”
그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 미안해서 차마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뭔가요? 개의치 말고 물어봐도 돼요.”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클레이튼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거기에 힘입어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게, 공작님께서 공작 부인과 쫓기던 그날 밤이요…….”
역시나 그에게 아픈 기억인지 순간 미소가 사라지고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계속하세요.”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목걸이도 무력화시켰고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도 될 것 같아 막 결심하며 입을 다물려던 그때 클레이튼이 내게 말했다.
“공녀님, 저는 괜찮습니다. 공녀님께서 제게 고통을 주시려고 꺼내시는 얘기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니 하려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여기서 그냥 가는 것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 클레이튼 말대로 내가 그를 아프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결심이 섰고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뒤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드릴게요.”
“네.”
“그날 공작님께서 집사가 공작 부인을 쫓아왔다고 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혹시 그 집사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않으셨나요?”
“이상한 점 말입니까?”
“네, 혹시 공작님처럼 목에 목걸이를 하고 있던가요?”
“목걸이…….”
클레이튼이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앞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
“너무 어두운 밤이었고 비까지 내린지라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런데 목걸이에 대해서는 왜 묻는 겁니까?”
“그게…….”
“혹시 저처럼 철의 힘이 담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집사는 힘이 없는데…….”
그가 내게 목걸이에 대해 할 질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그리고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그에게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목걸이에 힘이 깃들면 우리의 힘을 제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다고 해요. 그날 집사의 태도가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렇기에 공작 부인께서도 배신감을 느끼셨을 테고요. 그래서 혹시나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물어본 거예요.”
이미 에이든을 통해서 목걸이의 쓰임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얘기를 할 수도 없기에 나는 어디서 들어봤다는 의미로 대답했다.
“목걸이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고요?”
“네, 그런 게 있다고 저도 듣기만 했어요. 그래서 집사가 목걸이를 차고 있지는 않았나 궁금해서 공작님을 찾아온 거예요.”
“그렇…… 군요.”
“집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시겠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그를 찾아볼게요.”
“집사를 말입니까?”
“네, 혹시 제게 더 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저는 공작님이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오길 바라요. 그렇기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를 알아야 하고요.”
“……저를 위해서입니까?”
“물론이죠.”
나는 그를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저 대신 어디를 좀 다녀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네. 좋아요. 그런데 어딘가요?”
“그곳은…….”
클레이튼이 내게 갈 곳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려 애쓰며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가 떠날 준비를 했다.
클레이튼이 알려 준 곳은 수도에서 꼬박 한나절은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왔다 갔다 하려면 적어도 이틀은 소요되기 때문에 심문 날이 되기 전에 돌아오려면 얼른 출발해야만 했다.
그곳은 클레이튼과 공작 부인만 아는 장소였다.
매우 은밀한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호위 기사를 데려갈 수도 없었다.
나는 가문의 기사들 중 가장 믿을 만한 한 사람만을 데려가기로 했다.
바로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클레이튼이 리안이었던 시절, 여행을 하면서 그를 손수 가르쳤던 사람이었다.
리안이 성장함에 따라 나와 함께 리안을 뿌듯하고 대견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만은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아가씨, 준비 다 됐습니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며 어두웠던 세상이 슬슬 밝아지고 있었다.
그 광경이 왠지 모르게 새롭게 느껴져 저택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윌리엄이 말 두 필과 함께 다가왔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꽤나 험했다.
거기다 시간이 생명이었기에 마차보다는 말로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응, 바로 출발하자.”
“정말 호위 기사는 저만으로도 괜찮겠습니까?”
윌리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좀 먼 거리이긴 하지만 물건만 가져오는 거라서 별일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에도 윌리엄은 그다지 안심이 안 되는 건지 여전히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은 후 내 말인 포르타에 올라탔다.
“가자, 포르타.”
말을 타고 출발하자 내 뒤를 곧바로 윌리엄이 따랐다.
저택을 떠난 후 우리는 말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말을 쉬게 하기 위해서 중간에 잠시 쉰 것을 제외하고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날이 어스름해지자 클레이튼이 말한 산의 초입에 도착했다.
“아가씨, 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날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지금 산을 타기엔 너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음, 그랬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서 얼른 일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가야 해.”
윌리엄의 만류에도 나는 말을 타고 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더 이상 말로 갈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자 우리는 말을 나무에 묶고 걸어서 산을 올라갔다.
“이 부근이라고 한 것 같은데…….”
클레이튼이 설명해 줬던 대로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그가 말한 나무가 초입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손바닥에 불을 일으켜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때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나무 밑에 누군가 인위적으로 박아 넣은 말뚝이 보였다.
나는 말뚝에서부터 동쪽으로 열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다섯 걸음을 걸었다.
‘여긴 것 같은데.’
클레이튼이 가르쳐 준 그대로 했기에 이 자리가 그가 말한 곳이 맞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개를 내려 바닥을 쳐다봤다.
그리고 몸을 살짝 비켜선 뒤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아가씨! 제가 하겠습니다!”
내 행동에 윌리엄이 기겁을 하며 다가왔다.
“같이 하자. 그래야 빨리 내려가지.”
“알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땅을 파냈다.
그리고 꽤 깊게 땅을 파내자 뭔가가 걸렸다.
나무 상자였다.
“찾았다.”
나는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나무 상자를 빠르게 꺼냈다.
그리고 상자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다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주머니를 열어 안에 있는 것을 손바닥에 조심스럽게 쏟았다.
우리 가문의 것과는 다른 투명한 알이 박힌 반지였다.
“반지군요.”
“응, 루덴 가문의 것이지.”
‘어?’
반지가 있는 걸 확인만 한 뒤 다시 주머니 안에 반지를 넣으려는데 주머니 안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뭐지?’
“왜 그러십니까?”
“안에 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윌리엄에게 말함과 동시에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종이 같은 뭔가가 잡혔고 그걸 밖으로 꺼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접혀져 있던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손가락에 불을 살짝 일으켜 그게 뭔지 확인했다.
‘편지잖아?’
그것도 무려 루덴 공작 부인이 남긴 편지였다.
‘얼른 클레이튼에게 가야겠다.’
편지를 읽자마자 그에게 가서 이 편지를 전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얼른 가자.”
“예.”
주머니에 반지와 편지를 넣고 잘 챙긴 뒤 산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원래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 묵으려던 것을 변경하고 바로 수도로 향했다.
“경, 미안해. 하지만 공작님께 얼른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가씨께선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옆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윌리엄에게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길이 어두우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그렇게 우리는 밤새 말을 타고 달려 날이 밝을 즈음 수도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말을 갈아타고 클레이튼이 갇힌 감옥으로 향했다.
어제 새벽부터 움직여서 하루 넘게 잠을 자지 못해 무척이나 피곤했다.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이 편지를 그에게 일 분이라도 빨리 전해 줘야 했다.
나는 저번처럼 감옥을 지키던 기사에게 금화를 쥐여 준 뒤 지하로 들어갔다.
클레이튼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는 잠에서 깨어 바닥에 앉아 있었다.
“공작님!”
내가 클레이튼을 부르자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벌써 갔다 오신 겁니까?”
그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네, 알려주신 대로 갔더니 찾기 어렵지 않았어요.”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여기요.”
나는 지체 않고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제게 가져오라 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안에 공작님이 부탁하신 것 말고 다른 것도 있었어요.”
“네? 다른 거라면…….”
“열어 보세요.”
내 말에 그가 빠르게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것들을 확인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 봤다.
클레이튼은 반지와 접혀 있는 종이를 한꺼번에 꺼냈다.
그리고 반지는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곧바로 종이를 펼쳤다.
이곳은 지하 감옥이어서 꽤 깜깜했다.
그래서 나는 편지가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손바닥에 자그마한 불을 일으켰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고맙다는 뜻으로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후 클레이튼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편지를 붙잡은 그의 손이 덜덜 떨리더니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공작님…….”
“어머니…… 어머니께서…….”
그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내게도 읽어 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편지의 내용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에게서 편지를 받아 다시 한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클레이튼에게.
클레이튼.
네가 반드시 살아 있을 거라 믿기에 이 편지를 남기는 거란다.
만약 이 편지를 본다면 우리가 세 번째로 살았던 곳으로 오렴.
네가 올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한다, 클레이튼.]
편지의 내용은 짧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너무나 중요한 편지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클레이튼을 쳐다 봤다.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야겠습니다.”
“네?”
그런데 대뜸 나가야겠다며 그가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자, 잠시만요!”
나는 서둘러서 그를 저지했다.
“지금 여기서 나가시면 위험해져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클레이튼이 여기서 나간다면 분명 곧바로 수배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일이 복잡해질 것이고 그건 내게도 클레이튼에게도 절대 좋지 않았다.
“제가 갔다 올게요.”
“네?”
“제가 가서 공작 부인을 조심히 모셔올게요.”
그래서 나는 그 대신 내가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혹시나 발각된다면 헤이츠 가문 또한 위험에 처할 겁니다.”
“괜찮아요. 절대 들키지 않게 모셔올게요. 그리고 계셔야 할 곳이 필요하잖아요. 그건 제가 바로 알아볼 테니 공작님께서는 이곳에 계세요.”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아닌가요?”
클레이튼은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반지는 끼고 있지 말고 품 안에 몰래 가지고 계세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가 공작 부인을 모셔 와도 바로 뵐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안전한 곳에 모실 테니 너무 걱정하시 말고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게 꼭 알려 주셔야 합니다.”
“그럴게요.”
내 대답을 끝으로 클레이튼이 내게 세 번째 집이 어딘지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저번에 반지의 위치를 알려 줬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위치를 숙지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한번 안심시킨 다음 감옥에서 나왔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윌리엄과 함께 또 길을 나섰다.
“미안해, 경. 모든 일이 끝나면 경에게 긴 휴가를 주도록 할게.”
공작가에는 수많은 호위 기사가 있었지만 내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이는 윌리엄뿐이었다.
이번에도 클레이튼에 관한 일이라서 다른 사람을 데려갈 순 없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를 지키는 것이 제 일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틀 전과는 다르게 말이 아닌 마차를 끌고 가고 있었다.
루덴 공작 부인을 모셔 오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마차가 나았다.
보안을 위해서 마부 대신 윌리엄이 마차를 몰았다.
나는 마차 안에 앉는 대신 윌리엄의 옆자리를 차지한 뒤 그와 대화를 나눴다.
루덴 공작 부인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곳은 수도에서 5~6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도 저번에 갔던 산보다는 가까운 거리여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하지만 휴가는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왕 대화를 시작한 김에 나는 예전부터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털어 놓았다.
“메리와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
윌리엄의 얼굴에 당황과 수줍음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티를 냈으면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사과를 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까딱하면 윌리엄이 내 말을 오해할 것 같아 나는 빠르게 다시 말을 이었다.
“메리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야. 물론 윌리엄 경도 마찬가지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이 서로만 바라보고 아끼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아가씨…….”
“그래서 경에게 묻고 싶어. 메리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경의 생각을 말해 줬으면 좋겠어.”
“저는 메리 님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내 물음에 윌리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진실되고 올곧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이런 사람이라면 메리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경의 뜻이 그렇다니 다행이야. 하지만 경도 알겠지만 메리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주저하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리 님께서는 아가씨께서 혼인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아가씨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처음 메리에게 윌리엄과의 사이를 물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말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러길 원하지 않아.”
메리와 떨어지게 되는 건 슬펐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윌리엄과 함께 하루라도 빨리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언제 결혼할지 모르는데 연인을 계속 떨어뜨려 놓을 수는 없지.’
물론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겠지만 내 결혼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니 지금은 메리와 윌리엄이 먼저였다.
“메리에게 성을 붙여 줄게.”
“네?”
이곳에서는 귀족만이 성이 있고 평민은 성이 없었다.
메리는 평민이었기에 그녀에게 성을 주겠다는 것은 메리를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였다.
“신분을 사서 메리에게 주겠다는 뜻이야.”
“아가씨…….”
이제껏 메리가 원하지 않아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을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된 듯했다.
“경의 가문과 비슷한 가문을 메리에게 붙여 준다면 로인스 남작도 반대하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자.”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는 너희들에게 이미 충분히 받았어. 이제 내가 줄 차례일 뿐이야.”
“아가씨……. 저는 아가씨와 헤이츠 가문에 평생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메리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눈빛으로 윌리엄이 내게 말했다.
내가 그를 이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가 가진 눈빛 때문일 것이다.
선하고 정직한 눈빛.
아까 보았던 그의 단단한 마음이 내게로 다시 와 닿았다.
“고마워.”
나는 그 말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마차는 달리고 달려 클레이튼이 말해 준 곳 근처에 다다랐다.
“여기도 산이군요.”
“그러네.”
우리는 산 속으로 마차를 끌고 들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조금 더 들어가자 더 이상 마차를 끌고 갈 수 없는 지형이 나타났다.
“걸어가자.”
“네, 알겠습니다.”
더 깊숙이 들어가자 산 속에 있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외딴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저기인가 봅니다.”
“가자.”
조금 더 걸어가자 우리는 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기다려. 나 혼자 갔다 올게.”
“아가씨, 안 됩니다. 혼자서는 너무 위험합니다……!”
윌리엄이 고개까지 흔들며 나를 만류했다.
“괜찮을 거야. 위험하면 소리를 지를게. 그러니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끝으로 나는 문을 조심이 두드렸다.
똑똑-.
예상했지만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똑똑-.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지만 똑같았다.
나는 윌리엄을 쳐다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문고리를 조심히 돌렸다.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이 열리자 살짝 당황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은 뒤 내부를 둘러봤다.
나무로 된 집의 내부는 매우 조촐했다. 그리고 루덴 공작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없는 건가?’
그때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수프가 담겨 있는 그릇과 빵 쪼가리가 담긴 바구니,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서 숨었나 보네.’
공작 부인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공작 부인을 불렀다.
“루덴 공작 부인.”
역시나 답은 없었다.
“루덴 공작 부인, 저는 클레이튼 루덴 공작님께서 보내서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
공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계속 말을 내뱉던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왜냐하면 갑자기 뒤에서 낯선 체향이 느껴지며 차갑고 날이 잘 선 단검이 내 목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순 긴장감에 숨을 쉬던 것도 잊고 내 뒤에서 나를 위협하고 있는 사람의 동태를 살폈다.
“누구시죠?”
그때 뒤에서 가냘픈 듯하지만 날이 서고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리타 헤이츠입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뜸들이지 않고 바로 밝혔다.
그러자 그녀가 놀라 움찔한 것이 등 뒤로도 느껴졌다.
“헤이츠? 벨리타 헤이츠라면 헤이츠 가문의 공녀?”
“네, 맞습니다.”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그녀가 묻는 대로 답을 했다.
“헤이츠 공녀가 여긴 어떻게 온 거죠?”
“저는 클레이튼 루덴 공작님의 부탁을 받고서 왔습니다. 위험한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하긴 그녀로서는 무턱대고 나를 믿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클레이튼과 공작 부인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숨어 산 세월이 무려 20년이 넘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던 그녀였기에 공작 부인의 이런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래서 그럴 줄 알고 가져온 것이 있었다.
나는 가져온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잠시 품안으로 손을 넣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대항할 무기 같은 것을 꺼낼 거라고 오해한 것인지 공작 부인이 내 목에 더 가깝게 검을 들이댔다.
이제 조금만 움직였다가는 예리한 날에 그대로 목이 베일 수도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공작님을 대신하여 이곳에 왔다는 증표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재빨리 품안에서 반지를 꺼냈다.
하얀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는 바람의 가문의 반지였다.
감옥에서 클레이튼에게 반지를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하자, 그가 도로 내게 반지를 건넸다.
혹시 모르니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당장 편지를 쓸 수는 없기에 그의 어머니를 만나거든 내가 그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알려 주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검이 내 목에서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러자 클레이튼과 닮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나와 눈을 마주하며 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볼 뿐 한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고 공작 부인은 여전히 손에 쥔 단검을 내게 향한 채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그녀에게 반지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저를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헤이츠 공작가의 벨리타 헤이츠라고 합니다.”
공작 부인이 한 손만 뻗어서 내 손에서 반지를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내게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내게서 더 이상의 어떠한 위협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내게 뻗었던 검이 거둬졌다.
그리고 굳어졌던 표정이 풀어지며 아까보다 한층 무뎌진 목소리가 공작 부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루덴 공작가의 아리엘 루덴입니다.”
“저를 믿어 주시는 건가요?”
“이 반지는 우리 가문의 반지가 맞아요. 그리고 이 반지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은 저와 클레이튼뿐이죠. 이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클레이튼에게 있어 공녀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겠죠. 그렇기에 제가 있는 곳까지 알려 준 걸 테고요.”
루덴 공작 부인이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내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공작 부인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이쪽으로 앉아요. 앉아서 얘기하죠.”
“네.”
그녀가 나를 작은 소파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앉아 있어요. 차를 가져올게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내 말에 그녀는 그저 작게 미소를 짓고는 뒷모습을 보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공작 부인에게 해야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클레이튼에 대해 얘기하고 집사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어.’
잠시 후 테이블에 찻잔이 놓였다.
“마셔요. 공녀가 마시는 차와는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마실 만할 거예요.”
“아니에요. 무척 맛있어 보여요. 감사합니다, 부인.”
나는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어떤 찻잎을 우려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향긋한 향이 올라와 맛이 썩 괜찮았다.
“맛있네요. 향이 너무 좋아요.”
“이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으로 우려낸 차예요.”
“꽃이요?”
“네, 아나리아라고 평민들이 잘 마시는 차예요.”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목에 칼을 들이밀던 살벌했던 상황과는 다르게 우리 사이에는 일상적이고 편안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공작 부인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공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산을 내려갔다가 클레이튼의 소식을 들었어요. 감옥에 있다는 것도 들었죠. 제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네, 그럴게요.”
나는 공작 부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서커스단에서 리안이었던 클레이튼을 만났던 일부터 시작해서 북부에서 갑자기 변한 그의 모습까지 내가 알고 있는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그렇게 된 거군요.”
“네.”
루덴 공작 부인은 내 어머니 못지않게 꽤 차분한 사람이었다.
내가 말을 하는 내내 흥분은커녕 눈에 띄는 동요조차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듣고 있었다.
“살아 있을 거라 믿었기에 분명 못 돌아오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억을 잃어서 그렇게 고생을 했다니…….”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는 그녀도 울컥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제가 원래 물의 가문이었다는 건 아나요?”
“네, 알고 있어요.”
“저는 맥시어스 가문의 직계가 아니라 힘이 크진 않아요. 하지만 결혼하기 전 여러 가지 물약을 제조하는 법을 배웠죠. 루덴 공작님이 그렇게 가신 후 저는 클레이튼을 보호하고 때를 기다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누구도 아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아이의 성장을 억제하는 거였어요.”
나는 공작 부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러나 물약을 계속 먹지 못하면 성장을 억제하지 못할뿐더러 여태까지 억지로 눌러 왔던 것이 터져 버리죠.”
“아, 그래서 갑자기 그렇게 자란 거군요.”
“맞아요. 루덴 가문을 되찾을 때까지 저는 클레이튼에게 그 물약을 계속 먹일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공작 부인의 표정이 갑자기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배신당했던 그날의 일을 생각하는 거겠지.
이제 내가 말을 꺼낼 차례인 것 같아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루덴 공작가가 멸문한 것에 대해서 깊은 의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진실을 밝히고 클레이튼 루덴 공작님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길 바라요.”
“왜죠? 공녀가 의심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제국의 공작 가문이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요.”
“증거와 증인이 완벽했으니까요.”
“그게 더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무슨 뜻이죠?”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가요?”
“혹시 그날, 집사에게서 어떤 이상한 점을 느끼진 못하셨나요?”
“이상한 점이요?”
“네, 목에 목걸이를 하고 있지는 않았나요?”
“목걸이라…….”
공작 부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은 너무 어두웠고 비까지 세차게 내렸어요. 그래서 집사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 그런가요?”
역시 너무 예전의 일이기도 하고 집사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지를 신경 쓰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 잠시만요.”
“네?”
“목걸이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날 집사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어요.”
“이상했다고요?”
“네, 목 부근이 답답한지 자꾸 목을 매만졌어요.”
이거다.
나는 공작 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 집사 또한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정말 목 부근을 계속 만졌나요?”
“네, 산 아래서 만났을 때도 그랬고 절벽에서 마주쳤을 때도 계속 목을 만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왜 묻는 건가요?”
“그건…….”
나는 그녀에게 말을 해 줄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부모님께 말했던 것처럼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확신이 아닌 추측일 뿐이라는 단서를 달고 대답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조종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어요.”
“사람을 조종한다고요?”
“네, 그 목걸이가 우리의 힘을 억제한다는 건 아시죠? 거기다 저는 그 목걸이가 사람의 정신도 조종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지금 조사 중이에요.”
“그렇다면…….”
“확실하게 밝혀진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집사를 만나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집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시겠죠?”
“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럼 집사는 제가 찾아보도록 할게요.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을 한 장 그려 주시겠어요?”
“그럴게요.”
“그리고…… 이곳에 계시지 말고 저와 함께 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지금 당장 공작님을 만나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여기에 혼자 계시는 것보다 제가 마련한 곳에서 계신다면 공작님께서도 좀 더 안심을 하실 거예요.”
“하지만 만약 제 위치가 발각이 된다면 헤이츠 가문에 크게 누가 될 거예요. 그리고 헤이츠 공작님도…….”
“그건 걱정하시 마세요. 아버지께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루덴 가문의 일에 의구심을 가지고 계세요.”
“헤이츠 공작님께서요?”
“네, 그러니 함께 가요.”
공작 부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를 따라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결단을 내리기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대충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윌리엄은 마차 근처에 서 있었다.
공작 부인이 그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자 나는 빠르게 그녀에게 그에 대해 설명했다.
“제 호위 기사예요. 그리고 클레이튼 루덴 공작님의 스승이기도 하죠.”
“스승이요?”
“네, 공작님께서 우리 가문의 기사였던 때에 그분에게 검술을 가르쳐 줬어요. 믿을 만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윌리엄이 우리를 봤는지 근처로 다가왔다.
“아가씨.”
“끝났어. 수도로 돌아가자.”
“이분은…….”
“돌아가면 설명해 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얼른 가자.”
“네, 알겠습니다.”
그 길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달리고 달려 마차는 수도 근처에 다다랐다.
“윌리엄 경.”
“네, 아가씨.”
“헤모아로 가자.”
“헤모아요?”
“응, 그곳을 먼저 들리자.”
“알겠습니다.”
클레이튼에게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오겠다고 한 후 나는 그녀를 어디로 모셔야 하는지 고심했다.
만약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무슨 일이 나더라도 나와의 연관성을 추측할 수 없는 곳.
그런 장소가 꼭 필요했고 그때 떠오른 것이 헤모아의 고아원이었다.
그곳엔 아주 잠깐이지만 공작 부인이 모르는, 리안이던 클레이튼과 함께했던 아이들도 있었다.
“헤모아가 어딘가요?”
“수도 근처에 있는 마을인데 그곳에 고아원이 하나 있어요.”
“고아원이요?”
“네, 무척 따뜻하고 좋은 곳이에요. 리안, 아니 클레이튼 공작님께서 서커스단에 있었을 때 함께했던 아이들도 몇 있고요.”
“클레이튼을 아는 아이들이 있다고요?”
“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공작님이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니 그 부문만 유의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무엇보다 그곳은 저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곳이라 공작 부인께서 그곳에 있다는 걸 아무도 알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안심하고 계셔도 괜찮아요.”
“고마워요.”
나는 그녀의 감사 인사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금방 다시 올 테니 그곳에 계시면 돼요.”
공작 부인과 대화를 하는 사이 헤모아에 있는 고아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고아원 안으로 들어갔다.
고아원 운동장에는 역시나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어 놀고 있었다.
“언니!”
“누나!”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더니 내게 한달음에 달려왔다.
“잘 지냈니?”
“네! 그런데 오빠는 안 왔어요?”
“형이 안 보이네.”
나 혼자만 온 것을 알아차린 루시와 아이들이 클레이튼을 찾고 있었다.
“오늘 리안은 바빠서 못 왔어. 아마 한동안은 못 올지도 몰라. 그동안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있으면 올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알았지?”
“오빠 보고 싶은데…….”
클레이튼을 보지 못한다는 말에 루시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그런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서 루시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몇 밤 자야 와요?”
“응?”
파란 머리의 소년인 아드리안이 내게 정확한 기간을 물어보자 순간 당황해서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지 빠르게 생각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정확하게 말해 줄 수가 없어. 지금은 꽤 멀리 갔거든. 아마 너희들이 좀 더 커서 키가 이만큼 자라게 되면 올 거야.”
나는 내 이마에 손을 대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거기까지 자라려면 몇 밤을 자야 하는 거지?”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보였다.
“열 밤? 아니다. 천 밤?”
“그렇게 많이?
“우리가 얼른 크면 형도 빨리 오지 않을까?”
“그럼 나는 오늘부터 밥 엄청 많이 먹을 거야. 그래서 형 빨리 만날 거야!”
노아가 원을 크게 그리며 말했다.
“나도! 나도!”
아이들이 저마다 원을 누가 더 크게 그리나 서로 경쟁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원장님을 만나고 싶은데 어디 계신지 아니?”
“네! 알아요. 저를 따라오세요.”
“고마워.”
잠시 후 나는 원장을 만나 루덴 공작 부인이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당연히 그녀의 신분은 철저히 숨겼다.
그저 내게 너무 중요한 사람이니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비밀에 부쳐 달라는 말만 전했을 뿐이었다.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로 공작 부인과 인사를 나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헤이츠가로 사람을 보내세요. 금방 올게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집사를 찾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어쩌면…… 아니에요. 모든 것이 확실해진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클레이튼에게로 가실 건가요?”
“당연히 가야죠. 부인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말을 전해야 하니까요.”
“제가 건강히 잘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이것을…….”
공작 부인이 아까 내가 그녀에게 건넸던 반지를 내게 다시 건넸다.
“이것도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언제 썼는지 몰라도 편지를 내게 주었다.
“이 반지는 클레이튼의 것이니까요. 다시 그 애에게 돌려주세요. 편지는 예전에 혹시 몰라 써 둔 거예요. 클레이튼에게 전해 주세요.”
“네, 꼭 전해 드릴게요.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고아원을 떠난 마차는 몇 시간 뒤 수도에 도착했다.
‘너무 늦었네.’
공작 부인을 모시러 갔다 헤모아까지 갔다 오니, 어느새 날은 저물어 온 사방이 깜깜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네, 아가씨.”
클레이튼에게는 내일 가야 할 듯해서 우리는 바로 공작가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나는 외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방을 나서며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마침 아버지와 마주쳤다.
“벨리타.”
“아버지.”
“벌써 나가는 것이냐?”
“네, 갈 데가 있어서요.”
“심문일까지 이제 겨우 3일밖에 남지 않았다. 괜찮으냐?”
아버지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활짝 웃었다.
“아, 그런데요, 아버지.”
그러다 문득 아버지를 보니, 집사를 찾는 데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을 좀 찾고 싶은데요.”
“사람을?”
“네.”
이 제국에서 아버지만큼 사람을 잘 찾을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누구를 말이냐?”
“그 루덴 가문에서 아주 오랫동안 일을 했던 집사를 찾고 싶어요.”
“루덴 가문의 집사를?”
“네, 혹시 심문일 전까지 찾을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일이냐?”
“네, 무척 중요해요.”
“그럼 어떻게든 찾아야지.”
“아버지…….”
아버지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감동을 받아 살짝 울컥했다.
“감사해요, 아버지.”
“항상 몸 조심하거라.”
“네, 그럴게요.”
아버지와의 대화 후 나는 바로 클레이튼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을 지키는 기사들에게 내가 이곳에 들락날락한다는 소리를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 후 이번에는 그들의 눈이 돌아갈 정도로 꽤 큰돈을 주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클레이튼이 있는 곳으로 가자 기사들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철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네.”
“어머니, 어머니는 만나셨나요?”
그의 표정이 무척 다급해 보여서 나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네, 만났어요.”
“정말입니까?”
“네, 지금은 안전한 곳에 계세요.”
“어디에 계시죠?”
나는 잠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뒤 그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모아예요.”
“헤모아요? 그러면 혹시…….”
“네, 맞아요.”
“어머니께서는 건강하십니까? 어디 불편하시거나 다친 곳은 없으셨습니까?”
“네, 제가 보기엔 불편한 곳은 없으셨어요. 공작 부인께 여쭤봤을 때도 괜찮다고 하셨고요. 확인차 의사를 부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에도 띄면 안 되니까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계속 신경을 쓸 테니 너무 걱정하시 마세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리고 여기 편지요.”
“편지요?”
“네, 부인께서 공작님께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나도 그 편지를 읽어 보진 않았기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날 그 절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내용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지금 읽으세요.”
“지금 말입니까?”
“네, 보시고 난 뒤 제가 바로 태울 거예요.”
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를 태우는 것이 안타깝긴 했지만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불을 불러 일으켰다.
클레이튼이 고맙다는 의미로 내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가 편지를 다 읽는 동안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어머니께서…… 하아…….”
그러면서 가슴이 꽉 막히는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진정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곧 그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다 읽으셨나요?”
“네.”
나는 편지를 받아 바로 타오르는 불에 갖다 댔다.
곧바로 편지가 불에 타며 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날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어머니께서 강기슭에서 눈을 뜨셨다고 하셨습니다.”
“강기슭에서요?”
“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저를 몇날 며칠을 찾았는데 결국 못 찾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편지를 남기고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가신 건가요?”
“네, 제가 살아 있다면 반지를 찾으러 올 거라는 걸 아신 거죠. 그래서 편지를 남기고 숨어 살던 집에서 지금까지 홀로 사셨던 겁니다.”
“그렇군요.”
“제가 바보같이 기억을 잃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그가 자책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날의 자신을 계속 되새김질하며 후회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가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네? 뭔가요?”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그가 내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집사를 찾고 있어요.”
“집사를요?”
“네, 공작 부인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의심 가는 점이 있어서요”
“의심 가는 점이라면…….”
“그 점은 그를 찾아 확실해지면 공작님께 바로 알려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봐야겠어요.”
“……조심히 가세요.”
“네, 몸조심하시고요.”
“공녀님도요.”
그와 대화를 마친 후 감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벨리타 아가씨, 오셨습니까.”
“아버지는?”
저택 앞에서 나를 마중 나온 집사에게 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알겠어.”
나는 바로 아버지가 계신 집무실로 갔다.
똑똑-.
“아버지, 저예요.”
“들어와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께서 책상에 앉아 계셨다.
“무슨 일이냐?”
“집사가 어디 있는지는 아직 못 찾은 건가요?”
“그 일로 곧 너를 부르려고 했다. 이쪽으로 앉거라.”
“네.”
아버지가 소파의 상석에 앉고 나는 왼쪽 소파에 앉았다.
“그자를 왜 찾는지는 아직도 말해 줄 수 없는 것이냐?”
“말씀드리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제 생각에 아직 확신이 없어서요.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말로 아버지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요.”
나도 아버지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건 나를 믿고 있는 클레이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에이든의 일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언젠가 알려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더 나은 시기에, 적절한 때에 에이든에 관한 것을 모두에게 말할 생각이기에 일단 지금은 이런 식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음에도 아버지도 그렇고 클레이튼도 그렇고 나를 믿어 준다는 거였다.
그 마음에 나는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다.
“크흠, 알겠다. 집사의 행방을 조사해 봤는데 2년 전에 노예 시장에 팔려갔다고 하더구나.”
“노예 시장이요?”
“그렇다.”
2년 전이면 그날인가?
클레이튼과 공작 부인이 집사에게 배신을 당하고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인 듯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노예 시장에 팔려간 건가?
“지금 추적을 하고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게다.”
“아, 다행이네요. 항상 감사해요, 아버지.”
“새삼스럽게.”
“아니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제가 어떤 것도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믿어 주시는 거잖아요.”
“부모가 자식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느냐.”
“아버지…….”
“심문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준비를 철저히 해서 바이언가에 제대로 복수를 해 줘야 한다. 알겠느냐?”
“네, 알겠어요.”
아버지와의 대화 후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날이 서서히 지고 밤이 되자마자 잠에 들 준비를 하며 메리에게 말했다.
“나 오늘 너무 피곤하니까 아침까지 깨우지 마.”
“네, 아가씨.”
내가 침대에 눕자 메리와 사용인들이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저번에 몰래 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택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곧 주변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저번에 저택을 탈출했던 방법 그대로 저택을 몰래 나왔다.
이번에는 말을 타고 가야 했기에 마구간으로 향했다.
이를 위해 아까 포르타가 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마구간으로 갔고, 그곳에서 말을 돌보는 사용인 한 명에게 조용히 접근해서 오늘 밤 공작저 밖의 뒤쪽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말 한 마리를 묶어 놓으라고 명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사용인과 나 사이의 비밀이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저택에서 나온 후 사용인에게 말했던 저택 뒤쪽의 나무로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약속대로 말 한 마리가 나무에 묶여 있었다.
나는 빠르게 말에 오른 뒤 전속력으로 달렸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숨이 차서 헉헉대는 소리와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만이 가득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생각나 내가 달릴 수 있는 최고치로 목적지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한 시간을 달린 후에야 나는 수도 동쪽의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오래된 저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헉…….”
저택에 들어가기 앞서 나는 쉬지 않고 달려서 목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관리되지 않은 정원의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든!”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그에게 뛰어갔다.
“벨.”
그도 내 이름을 부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바로 그의 품에 덥석 안겼고 에이든도 나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서로 못 본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번 연회에서 본 뒤로 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그가 무척 그리웠다.
“잘 지냈어요?”
“네, 벨은요?”
“저도 잘 지냈어요. 그런데 엄청 바빴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죠.”
“네, 그래요.”
우리는 손을 맞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응접실에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맞잡은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연회에서 만났을 때 다음에 만날 날과 장소를 정해 놓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보지도 못할 뻔했어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할 얘기가 무척 많아요. 우선 제가 심문을 받게 됐다는 소식은 들었죠?”
“……네, 들었습니다.”
에이든의 미간이 격하게 구겨졌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찌그러지는 게 안타까워 나는 그의 미간에 손가락을 올려서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걱정 말아요.”
“하지만 바이언 공작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기에 저도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나는 에이든에게 클레이튼을 만난 이야기와 공작 부인을 찾으러 갔던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집사가 노예 시장에 팔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집사를 찾고 있는 중이에요.”
“집사도 바이언 공작에게 조종당한 거라니, 도대체 어디까지…….”
“그러니까요.”
“집사를 얼른 찾아야 할 텐데 심문일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까?”
“아버지께서 그러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제가 도울 건 없습니까?”
“없어요. 그저 이렇게 항상 제 곁에 있어 주면 돼요.”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이든이 한 거로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그를 보면 배시시 웃었다.
“벨 만약에, 만약에 제가 바이언가와 함께…….”
“싫어요. 안 들을래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나는 그의 입을 막았다.
에이든이 바이언가의 사람이 아닌 걸 아는 건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 바이언, 그리고 나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외에 모든 이들은 그가 에이든 바이언이라고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일이 뜻대로 잘돼서 바이언가가 무너지게 되면 에이든도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들어야 합니다.”
“아니요, 안 들을 거예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이든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 그런 끔찍한 생각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지금처럼 계속 함께할 거예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그의 확답을 들은 후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나를 안으며 그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에이든과 헤어진 후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심문일이 되었다.
나는 입궁하기 위해서 준비를 마친 뒤 홀로 나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먼저 나와 계셨다.
“어머니, 아버지.”
“벨리타.”
어머니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다녀올게요, 어머니.”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
“네.”
나는 어머니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기 위해서 입가를 끝까지 끌어올리며 활짝 웃었다.
“가자.”
“네, 아버지.”
우리는 마차에 올라타 황궁으로 향했다.
“오늘로서 우리 가문과 바이언 가문 둘 중 하나는 이 제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전에 반역으로 몰린 루덴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표정이 비장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네, 아버지.”
나 또한 나의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단단하고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와 오늘 어떻게 할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이번 사건의 심문은 특별히 황제가 친히 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기 위해서, 귀족들도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와 나는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 있던 이들의 눈이 모두 우리에게 향했다.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앞쪽에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 그리고 에이든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든과 눈인사를 한 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아델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매섭고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맞댔다.
여기서 내가 피한다면 우리 가문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더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델라와 어쩌면 의미 없는 눈싸움을 계속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지기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발테우스의 가장 빛나는 태양이자 고귀하신 크리스티안 윈스턴 발테우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모두들 일어나서 폐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귀족들이 모두 일어나 예를 갖추자 황제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태자도 황제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앉으시오.”
황제의 앉으라는 말에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헤이츠 공작가의 공녀인 벨리타 헤이츠는 앞으로 나오시오.”
그리고 곧바로 내 이름이 호명되면서 심문이 시작되었다.
내 이름이 불리자 순간 온몸에 낯선 긴장감이 돌았다.
어쩔 수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했지만 이런 자리는 처음이니까.
잠시 나는 옆에 있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아비지가 나를 보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아버지의 행동은 다른 어떤 말보다 내게 크게 다가왔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나를 보고 있던 에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방금 아버지에게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그도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내게는 아버지, 그리고 에이든이 있어.’
이 싸움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에이든, 그들은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의지를 다지기 위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긴장감이 싹 사라지고 조금 위축됐던 몸이 꼿꼿하게 세워졌다.
‘좋아, 해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 부어서 일말의 후회 따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대회의장의 중심으로 걸어가 섰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석에 앉은 황제가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벨리타 헤이츠 공녀.”
“예, 황제 폐하.”
“공녀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 알고 있소?”
“예, 몇 달 전 아델라 바이언 공녀가 탄 마차에서 불 폭탄이 터진 일 때문입니다.”
“그럼 그 사건의 범인으로 공녀가 유력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군.”
“예, 그렇습니다.”
내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대회의장 안이 술렁거렸다.
모든 말들이 다 귀에 꽂힌 건 아니지만 몇몇 말들을 정확하게 귀에 들어왔다.
‘내가 범인이라고 인정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리들 난리인지 모르겠네.’
별 의미 없는 말들뿐이었다.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속으로 긴 호흡을 내뱉은 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 저는 그 사건의 범인이 아닙니다.”
대회의장 안이 아까보다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황제 폐하, 벨리타 헤이츠 공녀는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바이언 공작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이언 공작! 닥치시오!”
그리고 지지 않고 바이언 공작에게 욕을 내뱉은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뭐, 뭐 닥쳐?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지껄이다니 이 무슨 망발이오!”
“그럼 내 딸을 거짓말쟁이에 범인으로 몰아가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소?”
“거짓말을 하니까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이고 증거가 차고 넘치니 범인이라고 하는 것이지!”
“저, 저……!”
아버지와 바이언 공작이 서로 언성을 높이며 험한 말이 오가자 다들 말리지도 못하고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조용히 하시오!
다행히 때마침 황제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아버지와 바이언 공작이 서로를 향한 삿대질을 멈추며 황제를 올려다봤다.
“오늘 공들을 이곳에 부른 것은 사건을 명명백백 밝히기 위함이지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라는 것이 아니었소.”
“송구합니다, 황제 폐하.”
“송구합니다, 황제 폐하.”
황제의 말에 아버지와 바이언 공작이 뜨끔한 표정을 지은 뒤 고개를 숙였다.
“바이언 공작.”
“예, 황제 폐하.”
“바이언 공작은 왜 헤이츠 공녀가 사건의 범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오?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폐하.”
바이언 공작이 대답을 하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초리가 매우 무섭고 싸늘했다.
마치 내게 너는 이제 끝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그래서 꽤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의 말을 잠시 들어 주기로 했다.
“지금부터 왜 헤이츠 공녀가 범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말씀 올리겠습니다. 불 폭탄이 터져 마차가 전복된 날, 그날은 아시다시피 승마 대회의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기억납니다.”
한 귀족이 바이언 공작의 말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이언 공작에게 이번 참에 잘 보여서 눈에 들려는 의도 같았다.
“저도 기억납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너도 나도 연이어 바이언 공작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썩은 동아줄을 잡으려고 하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폈다.
“승마 대회의 결승전에 제 아들인 에이든 바이언이 참가했다는 것 또한 다들 아실 겁니다.”
아들?
친아들도 아니면서 아들이라는 말이 잘도 그의 입에서 스스럼없이 나오는 걸 듣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날 제 딸 아델라 바이언은 동생인 에이든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외출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우리 가문의 사람들과 벨리타 헤이츠 공녀뿐이었습니다.”
“저런!”
“그랬구만.”
몇몇 귀족들이 계속해서 바이언 공작의 말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만으로 어찌 내 딸이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단 말이오! 저건 억지입니다!”
“그, 그렇기 합니다.”
“맞습니다. 그걸 증명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반면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귀족들이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가 그날 승마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에 간다는 것은 가문의 사람들과 벨리타 헤이츠 공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아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저는 경기장에 가던 도중에 불 폭탄이 터져 정신을 잃었고 나중에 깨어나 보니 조사단이 조사 중에 우리 가문의 기사 중 하나를 붙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게 누구였는지 네가 설명하거라.”
“네, 아버지. 그자는 오웬 에스트라는 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자가 우리 바이언 가문에 들어오기 전 헤이츠 가문의 기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자는 이번에 조사단의 저택이 불탔을 때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그럼 오웬 에스트라는 자도 죽임을 당한 건가?”
“그날 그 화재 사건이 사고가 아니었단 말인가?”
“이상하긴 하네. 마차 사고도 불 폭탄에 의해 일어나고 저택도 불에 휩싸이고 말이야.”
“그렇긴 하지.”
귀족들이 저마다 궁금증을 가지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크흠!”
그런 말들 속에서 아버지가 불편함과 언짢음을 표현하며 크게 헛기침을 했다.
“헤이츠 가문이 마물 토벌대가 돌아온 후 마차 사건을 다시 재조사할 것을 알고서 일을 꾸민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바이언 공작이 여러 귀족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의심 가는 점이 많긴 합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모든 정황이 헤이츠 가문을 향하고 있는데 이래도 아니라고 한다면 헤이츠가에서는 명확한 해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바이언 공작의 발언이 끝나자 황제의 시선이 그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왔다.
“황제 폐하, 정황만으로 우리 가문과 제 딸이 범인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나는 잠시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황제를 향해 말을 더 내뱉으려던 아버지가 일순 입을 다물고는 나를 응시했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우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황제를 올려다봤다.
“벨리타 헤이츠 공녀.”
“예, 황제 폐하.”
황제가 나를 부르자 대회의장 안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안에 있는 이들 모두 황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집중했다.
“바이언 공작이 주장하는 정황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소. 그러니 만약 공녀가 범인이 아니라면, 아니라는 해명을 내놓으시오.”
“알겠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었다.
하지만 조급하게 진행하여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잠시 내가 말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제 결백을 증명하기 전에 여기 있는 모든 분들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를 아십니까?”
“알고 있소.”
뜬금없이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에 대해 얘기를 하는 나를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에 대해서는 왜 묻는 것이오?”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는 네 공작가의 힘을 제어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소.”
“그런데 그 목걸이에 또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내 말에 대회의장이 아까보다 어수선하게 소란스러워졌다.
“또 다른 힘?”
“그게 뭐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귀족들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또 다른 힘이라니?”
그리고 황제 또한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황제가 나를 다그쳤다.
“그건…….”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먼저 에이든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나에게 잘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내며 미소를 살짝 머금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 나는 에이든의 옆에 있는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를 쳐다봤다.
아까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던 표정과 달리 그들이 동요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다시 예의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 얼굴을 일그러뜨리리라 결심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사람의 정신과 신체를 조종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조종하는 힘이라니?”
“그런 게 정말로 있다는 말인가?”
“믿을 수가 없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와중에 황제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조종하는 힘이라니, 그건 들어보지도 못했소.”
“저도 그것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 목걸이를 실제로 보았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폐하.”
“모함입니다!”
그때 바이언 공작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헤이츠 공녀가 이상한 헛소리로 저희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나는 곧바로 바이언 공작의 말에 반박하며 목소리에 잔뜩 힘을 준 채 말했다.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네, 마차에 불 폭탄을 설치해서 아델라 바이언 공녀를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이 제가 아니라는 증언을 해 줄 증인입니다.”
“증인?”
“네, 그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를 이용해 사람을 조종한 바이언가의 저열한 짓거리를 폭로할 증거이자 증인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이언 공작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폐하! 헤이츠 공녀의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런 목걸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증인 따위는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바이언 공작! 내 딸은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소. 거짓말이라면 지금 공작이 하는 거겠지. 그리고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증인을 보지도 않고 부정하는 것이오? 폐하, 제 딸아이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신다고 하셨으니 증인을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해 주십시오.”
나는 아주 잠깐 사이에 아버지와 눈빛을 교환했다.
아버지의 눈에는 나를 향한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황제 폐하, 아버지의 말씀대로 증인이 이곳에 들어오게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안 됩니다. 거짓 증인이 분명한데 괜히 시간 낭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의 주장에 황제가 잠시 고심하는 듯했다.
하지만 황제 또한 그 목걸이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했다.
“증인을 들라 하시오.”
역시 내 예상대로 황제에게서 허가의 말이 떨어졌다.
“황공합니다, 황제 폐하.”
나는 고개 숙여 황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잠시 후 대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윌리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웬 에스트도 함께였다.
오웬 에스트가 들어온 순간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아델라는 핏기가 가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었다.
오웬 에스트가 포박당한 채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자는 누구지?”
“이자는 오웬 에스트라고 마차 사건을 조사를 하기 위해 감옥에 가둬 놨던 자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자라니? 그자는 화제로 인해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왔다는 뜻이오?”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처음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네 공작가의 힘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아시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불은 철을 녹일 수 있고 철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것에 더하여 내가 조사한 것들을 덧붙여서 설명했다.
“조사단에서 마차 사건을 조사했을 때 오웬 에스트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를 잡아 심문하였습니다. 처음 오웬 에스트는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나는 차분히 말로 이어 나갔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압박하며 심문하던 순간 오웬 에스트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숨이 막히는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습니다. 그때 저는 그에게 다가갔고 제 손이 그의 목 부근에 닿자 거짓말처럼 그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목 부근을 부여잡고 쓰러졌다는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그리고 그가 철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오웬 에스트에게 고개를 들어 올리라는 시늉을 하며 목을 가리켰다.
“이게 그 철의 힘이 깃든 목걸이라는 말이오?”
“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이 목걸이가 그런 힘을 지니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더 조사를 하려고 했을 때쯤 마물 토벌대에 합류하여 조사를 중단했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공녀는 어떻게 오웬 에스트를 감옥에서 빼돌린 것이오? 분명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날 저택이 불탄 걸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다. 제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저택은 이미 화재에 휩싸여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 바이언 공작과 아델라를 슬쩍 흘겨보았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저들이 너무나 역겨웠다.
“북쪽에 있으면서도 저는 오웬 에스트에 대한 감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기사들을 몇몇 붙여 놨고 그 덕분에 저택에 불이 나자 그들이 오웬 에스트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거짓이었다.
오웬 에스트를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에이든이었다.
나도 기사들에게 감시를 붙여 놓기는 했지만 그들은 붙이 나자마자 오웬 에스트는 까맣게 잊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대신 에이든의 명령으로 그의 수하가 그곳에 침투하여 오웬 에스트를 구한 것이다.
나는 수도로 돌아온 날 조사단의 저택에 갔던 날의 기억을 조심스레 떠올렸다.
감옥에서 오웬 에스트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실망하고 있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혹시 몰라 잔뜩 경계를 하며 뒤를 돌았을 때 눈앞에는 예상치 못하게도 에이든이 서 있었다.
“에이든?”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여긴 어떻게…….”
“오웬 에스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벨리타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에이든도 들었어요? 오웬 에스트가 죽었다고 하네요. 저택에 불이 나서 차마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다는데 저는 왜 이 모든 일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벌인 일 같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에이든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 이곳을 지키던 많은 이들이 죽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지 정말…….”
나는 그들의 잔인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제 실수예요.”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네? 어디요?”
“가죠. 도착한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아, 네. 그래요.”
에이든이 나를 이상한 곳에 데려갈 거라는 걱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를 따라 나섰다.
말을 타고서 약 한 시간 정도를 달린 후 수도 동쪽에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나는 말에서 내리며 에이든에게 물었다.
“이리로.”
내가 묻는 말에 항상 대답을 잘 해 주던 에이든이었는데, 오늘 따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뒤따라갔다.
말을 타고 지나오면서도 느꼈지만 이 저택은 수도 외곽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정하고 찾아오지 않는다면 오기 힘들 정도로 외딴 곳에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 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간 뒤 한 방문 앞에 섰다.
그에게 뭐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왠지 아까처럼 대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 방문을 열게 되면 곧 이곳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될 것이기에 조금 참을성을 갖고서 기다렸다.
에이든이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방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한 남자가 방 안에 서 있었다.
방은 매우 어두웠다.
달빛만 아스라이 비쳐 간신히 실루엣만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 달빛이 방안에 가득 차자 방 안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남자는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오웬 에스트였다.
뜻밖의 사람이 눈앞에 보이자 할 말을 잃은 나는 입을 벌린 채 오웬 에스트를 한동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에이든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자는…….”
“네, 오웬 에스트입니다.”
“어떻게 저자가 여기에 있는 거죠?”
나는 다짜고짜 에이든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설명할 테니 이리로 앉아요.”
에이든이 나를 소파로 안내했고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경도 이리로 와서 앉지.”
“네, 알겠습니다.”
에이든의 명령에 오웬 에스트가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오웬 에스트를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남자는 오웬 에스트가 맞았다.
“언질도 없이 이곳으로 무작정 데리고 와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보다 이자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저는 그것이 궁금해요.”
“공자님께서 저를 살려 주셨습니다.”
내 말에 오웬 에스트가 대답했다.
“저 또한 조사단의 저택을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택에 불이 나자 제 수하가 감옥 안으로 가서 거의 의식이 없던 경을 데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불에 탄 시체가 있었다고 했어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 시체는 오웬 에스트 경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죠?”
“제 수하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 있던 기사들 중 하나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오웬 에스트 경이 죽었다고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해서 위장해 놓았죠.”
“아, 이제야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든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고마워요, 에이든.”
에이든이 내 말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오웬 에스트는 분명 화염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결백을 증명해 줄 증인이 사라지게 되고 일이 무척 어렵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에이든 덕분에 오웬 에스트는 이렇게 내 앞에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에이든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웬 에스트를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저, 저는…….”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오웬 에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전에 나는 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차 사고가 있던 그날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라고 말이다.”
“……네네, 기억합니다.”
“그럼 네게 다시 묻겠다. 사고가 있던 날 어떤 일이 있었지? 이제 네게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 그것이…….”
내가 이렇게 말을 했음에도 오웬 에스트는 뭔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밝히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걸이 얘기부터 해야겠네.’
오웬 에스트는 아직 자신이 하고 있는 목걸이의 힘이 무력화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목걸이에 대해 얘기하기로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하고 있는 그 목걸이…….”
“이, 이 목걸이는……!”
“그때 네가 내게 그랬지. 그냥 하고 다니는 목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목걸이가 뭔지 알고 있다.”
“네?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 목걸이가 너의 몸과 정신을 조종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 어떻게…….”
오웬 에스트가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며 에이든을 쳐다봤다.
“고, 공자님께서 말씀드리신 겁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네가 알 필요가 없다.”
나는 오웬 에스트의 궁금증을 차단하고 그의 시선을 다시 내게 집중시켰다.
“심문하던 도중 쓰러지고 난 다음에 목의 통증을 느낀 적이 있느냐?”
내 말에 오웬 에스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것인지 눈이 커졌다.
“그, 그러고 보니…….”
“내가 그 목걸이를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공녀님께서 정말로 이 목걸이의 힘을 무력화시키셨단 말입니까?”
“그렇다. 지금 당장 그 목걸이를 풀어 보거라.”
내 말에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오웬 에스트가 목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천천히 목걸이의 연결고리를 풀더니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이 보였다.
“정말…… 정말로 풀렸습니다.”
오웬 에스트가 목걸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이게 정말…… 어떻게…….”
자신을 가두던 족쇄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울컥했는지 오웬 에스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에이든과 나는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봤다.
“저는 그러니까…… 정말로 이제 저는 자유인 것입니까?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죽지 않는 것입니까?”
자유를 찾은 기쁨으로 인해 흥분한 것인지 그의 말이 속사포처럼 매우 빨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니지.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들을 공녀님과 공자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오웬 에스트는 마차 사고가 있었던 당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훈련을 하고 있는데 아델라 아가씨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아가씨의 호위를 몇 번 맡았을 뿐 아가씨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에이든과 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래서 아가씨를 찾아갔더니 다짜고짜 저에게 이 목걸이를 채우셨습니다. 그러곤 아가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고 저를 위협하셨습니다.”
아델라가 그에게 목걸이를 채웠던 이야기를 하던 오웬 에스트는 잠시 인상을 쓰더니 숨을 골랐다.
“그러곤 제게 승마 대회 결승전이 있는 날 마차에 폭탄을 설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폭탄을 설치하라고 했다고?”
“네, 다리 위에서 신호를 줄 것이니 그때 설치를 하라고 했습니다.”
마부를 심문했을 때 마부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델라가 갑자기 뭔가를 봤다며 소리를 질렀고, 그녀의 곁을 지키던 기사 중 셋이 그것이 뭔지 알아보러 아델라의 곁을 떠났었다.
그리고 오웬 에스트만이 아델라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뭔가 흉측한 것을 봤다며 소리를 지르셨고 저를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마차의 바퀴 부근에 폭탄을 설치한 겁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폭탄이 터진 거고?”
“네, 맞습니다. 그리고 폭탄이 터진 후 아가씨께서 정신을 잃으셨고 저는 약속대로 잠시 공작가를 떠났었습니다.”
“잠시 떠났다고?”
“네, 아델라 아가씨께서 곧 부를 것이니 잠시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아델라도 나처럼 오웬 에스트를 증인으로 세울 생각이었던 듯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하게 조사단에 잡힌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공녀님께서 아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잠시 에이든과 눈빛을 교환한 뒤 오웬 에스트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들을 나중에 증언해 줄 수 있겠나?”
“증언 말입니까?”
“그래, 알다시피 바이언 공녀와 바이언 공작은 나를 범인으로 몰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만 해.”
“하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이 목걸이에 대해서도 말을…….”
“물론 그래야 하지.”
그때 오웬 에스트가 눈을 옆으로 돌려 에이든을 쳐다봤다.
“그런데 공자님께서 왜…….”
오웬 에스트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건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다. 너는 나를 도와줄 것인지에 대해서만 대답을 하면 된다.”
“그거야 당연히 저를 살려 주신 분이니 마땅히 사람의 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우선은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으니 여기서 숨어 있거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웬 에스트가 주저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러지?”
“……혹시 제가 갇혀 있던 감옥에 불을 낸 것도 아델라 아가씨가 하신 겁니까? 저를 죽이기 위해서?”
“확실하진 않아. 다만 범인은 아마도 지금 당장 네가 없어지길 바라는 사람이겠지.”
“……그렇군요.”
절망스러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그러면서 꽤나 충격이었는지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오웬 에스트에게서 들을 내용은 다 들었다.
나는 에이든과 함께 오웬 에스트와 함께 있던 방을 나왔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진짜 죽은 줄만 알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그런데 오웬 에스트가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혹시나 바이언 공작이 알게 되면…….”
“괜찮습니다. 이곳은 예전에 제가 도움을 준 이의 소유라서 바이언 공작이 찾지 못할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다시 한번 고마워요, 에이든.”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